제91장 변화막측(變化莫測) (1)
은허에서 혼절해서 하화까지 뺏겼던 오소민이다.
“아니, 저 요녀(妖女)가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벌컥 화가 나서 가만히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조화부인은 미리 짐작했던 듯 바로 웃음을 터뜨린다.
“호호호, 이제는 완연한 아가씨인데 어찌 그리 험하게 입을 놀릴꼬. 그래서야 비렁뱅이 본색을 어찌 면하려고?”
개방의 순행장로인 오소민이 단아한 여장으로 차림새를 바꾼 걸 안다. 현도관 안으로 들어가기 전부터, 아니, 경사에 왔을 때부터 지켜봤을 수 있다.
철컥.
해원기가 손을 뒤집자 고검이 저절로 등 뒤로 돌아가고,
그 소리에 오소민의 말도, 조화부인의 웃음도 멈추었다.
시선을 천천히 공중으로 돌리며 자세까지 옆으로 비스듬히 바꾸고서,
“사륙변려의 무채상변이라. 낭인무부(浪人武夫)에겐 너무 어려운 말이요. 그나저나 우리가 이렇게 서로 도란도란 대화할 사이였던가?”
사흉상으로 변한 사보상이 모두 일어난 건 눈에도 두지 않는 투.
검을 거둔 건 싸움이 끝났다는 의미인가.
조화부인의 흐릿한 그림자가 조금 흔들린다.
“어머, 그간 마주친 인연이 보통은 넘잖아요. 반가운 정이 들 법도 한.”
“인연이라기보다는 악연이 어울리지.”
“악연이라니, 너무 섭섭한데요.”
“부인에게 섭섭함을 느낄 이들은 그쪽에도 많을 거요.”
흐릿한 그림자를 외면한 채 툭툭 받아넘기는 말.
아예 싸울 생각을 접은 것처럼 팔짱을 끼면서 공중만 응시한다.
조화부인의 음성에 콧소리가 더해졌다.
“호, 그쪽이라면. 뭔가 아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그렇게 여유를 부리는 건 무채상변을 이겼다는 자신감일까? 아직은…… 흐응.”
일부러 말을 줄여 관심을 끌 셈.
그러나 해원기는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평소의 덤덤한 표정으로 어두운 밤하늘을 구경이라도 하듯.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연다.
“사륙변려라고 했으니 이제 말처럼 치달릴 거요? 그다지 이기려고 온 것 같지는 않던데.”
변려(騈儷)가 말(馬)이 짝을 지었다는 단어니 치달린다고 한 건데.
그런 풀이보다 뒷말이 의미심장하다.
이기려고 온 것 같지 않다.
정녕 오소민이 의심했듯이 무지의 허점을 메꾸려고 그저 해원기의 실력이나 확인할 용도인가.
움찔하던 조화부인의 그림자가 크게 웃음을 터뜨린다.
“호호호호!”
귀를 쟁쟁 울리는 폭소는,
현도관뿐 아니라 주위를 둘러싼 저택들까지 울리다가 시작할 때처럼 불쑥 그치고,
대신에 어디선가 뿌연 연기가 빠르게 밀려들기 시작했다.
스으으으으.
얼마나 빠른지 지면을 뒤덮는 소음과 함께 단숨에 현도관 전체를 집어삼킬 듯.
삽시간에 사륙변려의 무채상변이라던 열 명의 복면인과 담장 위 조화부인의 그림자까지 보이지 않는다.
해원기의 눈썹이 날카롭게 일어서며 왼손이 크게 원을 그렸다.
이따위 하찮은 연기 따위, 선풍결을 실은 발검제형으로 단숨에 날릴 셈.
그러나.
“흐흥, 치고받는 싸움만이 능사는 아니지.”
연기 속에 슬며시 섞이는 조화부인의 비웃음에.
해원기가 내지르려던 오른손을 돌연 뒤집어 가볍게 떨친다. 마치 이런 비웃음을 기다렸다는 듯이.
그러면서 두 발이 교묘하게 엇갈려 연달아 일곱 걸음을 걸으니.
웅.
미약한 소음과 함께 밀려들던 연기가 뭐에 걸린 것처럼 가라앉고,
걸음을 멈춘 해원기가 가만히 정면을 응시했다.
시야를 온통 가렸던 뿌연 연기가 흩어지는 가운데 텅 빈 작은 뜰이 서서히 드러난다.
외형이 변했던 사흉상과 나자빠진 육악의 복면인도, 담장 위에 어렸던 조화부인의 흐릿한 그림자도 어디로 사라졌는지.
하지만, 이 또한 예상했던 모양.
해원기가 평소의 무덤덤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현도관 안의 오소민이 복잡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삐꺽.
오래간만에 움직여서인지 현도관의 낡은 문이 귀에 거슬리는 소릴 내며 닫혔다.
현도관은 본래 도관(道觀). 안에는 탁자와 의자 외에 신감(神龕)이 벽면에 늘어서 있다.
문을 닫은 해원기가 오소민을 보자, 오소민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해원기도 오소민을 따라 시선을 보내는 곳.
신상도 없는 신감 한쪽 구석에서 한 사람이 몸을 일으킨다.
머리에는 복건(福巾)을 눌러쓰고 잔뜩 굽은 허리 때문에 흰 수염이 밑으로 길게 늘어진 노인. 부잣집에서 오래 굴러먹은 하인배의 차림새인데.
그 모습에 해원기가 고소를 머금었다.
“오랜만입니다. 그 역용은 언제 봐도 놀랍군요.”
포권을 취하자 흰 수염의 노인이 해원기와 오소민을 번갈아 보며 히죽 웃는다.
“그렇네. 한여름에 헤어져서 한겨울에 만났으니. 해 소제, 오 장로.”
아는 체와 함께 굽은 허리를 쭉 펴고,
그러면서 복건을 쓴 노인이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바뀐다. 바로 앞에서 보면서도 믿기 어려운 변신.
오소민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대충 손을 올렸다.
“여전히 신기한 귀신놀음이네요. 제갈 소저.”
그다지 반가운 기색이 아니지만, 환상처럼 모습을 바꾼 여인은 별반 신경 쓰지 않는 듯.
짧은 한숨을 내쉰다.
“후, 신기하긴. 해 소제가 아니었으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거야.”
무슨 얘긴지.
힘겨운 듯 이마를 훔치는 여인은 바로 제갈봉이었다.
장안의 황가약포에서 헤어질 때가 대서(大暑) 즈음이었으니까 정말 오랜만이다.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괴사와 거친 싸움이 이어지면서 미처 찾을 겨를이 없었지만, 또 이런 특별한 상황에서 등장한 제갈봉.
“어떻게 된 거예요?”
의자에 앉기도 전에 묻는 오소민의 목소리에 많은 뜻이 담겼다.
반년 가까이 어디서 무얼 했는가. 또 여기는 어떻게 알고 나타났는가.
뭉뚱그린 질문에 제갈봉이 쓴웃음을 짓는다.
“귀신놀음은 내가 아니라 해 소제에게 어울리는 표현일걸. 장안에서 헤어진 후로는 당최 뒤를 따르기도 벅찼거든. 반룡령, 동창, 대내무림…… 다 뒤통수를 맞았잖아. 경사에 이상한 기미가 보여서 미리 와 있지 않았다면.”
하긴.
장안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낙양까지 달렸었다. 그 이후로는 또 격변의 연속이었고.
오소민이 해원기를 힐끗 보곤 다시 물었다.
“이상한 기미요?”
“응, 밀각의 행동이 여기저기서 바빠지는 것만으로도 복잡한데, 이십사아문이 와르르 몰려나오더란 말이지. 게다가 소문만 전해지던 대내제일고수(大內第一高手)가 경사를 떠났다는 소식도. 동창의 배후가 나섰다는 직감이 들었어.”
“동창의 배후?”
“이전부터 의심했던 부분이야. 과연 제독태감이 모든 일의 주재자일까? 재물과 권력, 세속적인 욕망을 위해 강호를 휘젓는 걸까? 그렇다고 하기에는 엉뚱한 짓을 계속 벌이잖아. 현신장, 음형사, 신화나 전설의 흔적을 집요하게 뒤지는 것까지. 누군가 뒤에 있는 게 틀림없지.”
“골치 아프군요. 당세의 최고 권력자인 제독태감의 뒤에 또 누가 있다니. 설마 황제?”
“그럴 리가. 그 어리바리한 작자가 가능하겠어? 차라리 황태후나 상덕공주라면 말이 될 수도. 아니야, 황태후도 공주도 아니었어.”
“어? 그걸 어떻게…….”
“흥! 내시, 궁녀. 황궁에서 온갖 일은 다 해봤다고. 이십사아문이 무슨 일을 하는지 직접 다 겪어본 사람은 나밖에 없을걸?”
“아아, 그간 황궁에 있었던 거군요. 역시 그 신기한 역용으로…….”
“시키는 대로 온종일 뛰어다니는 꼬마 내시, 아침부터 저녁까지 채소만 다듬다가 한동안 화장실만 청소했었고, 산더미 같은 빨래에 시달리다 마구간을 치기도 했어. 얼마 전까지는 허리가 휘게 땔나무를 지느라. 에휴, 지난 몇 달 동안 내가 누군지 헷갈릴 정도였다니까.”
황궁에서 오만 허드렛일을 했던 게 자신도 한심한지 탄식이 덧붙는다.
오소민의 말처럼 신기한 역용으로 갖가지 인물로 변신했을 터.
제갈봉은 이십사아문의 곳곳에 스며들어 정보를 얻었다. 때로는 내시로, 때로는 궁녀로, 또 때로는 원정(園丁)이나 침모(針母) 따위의 하찮은 신분으로.
대단한 모험이었을 것이고, 오소민은 순수하게 감탄하며 대화를 이어간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해원기가 입을 열었다.
“배후가 누굽니까?”
오소민의 의도를 알지만, 중요한 문제의 답을 놓칠 순 없다.
제갈봉이 정색하고 해원기를 보았다.
“음, 어려운 질문이네. 처음엔 이십사아문의 태감 중 하나일 거로 추측했었지. 제독태감을 허수아비로 부리려면 그만큼 가까운 데서 동창을 속속들이 아는 자여야 하니까. 심지어 과거에 겁표를 당한 상보감도 포함되지. 그 겁표 사건 자체도 모종의 음모일 가능성이 있거든. 그런데…….”
말을 멈추면서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방금까지 시시콜콜한 부분까지 대화를 나누던 오소민이 놀란 표정을 짓든 말든 제갈봉의 시선은 해원기에게 고정된 채.
“계속 걸리는 곳이 있었어. 황궁 안은 아니면서 황궁과 가까운 곳. 실제 거리를 가리키는 게 아니야.”
동창이든 이십사아문이든 근본은 황궁 안이다. 그런데 배후가 황궁이 아니라 황궁과 가까운 곳이라.
제갈봉이 손가락 두 개를 꼽는다.
“두 군데. 하나는 영락제 때부터 황사(皇寺)인 경수사, 그리고 또 하나가 바로 여기, 현도관이지.”
오소민이 눈을 깜빡이며 바로 끼어들었다.
“경수사야 본래 황사니까. 여기 현도관은 뭐로 황궁과 가까운 거죠?”
실제 거리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고 했다. 현도관이 비록 고관대작의 보물을 감정해서 진품을 보관하고 안품을 제작하는 곳이긴 해도 경수사만큼 가까운 관계는 아니잖나.
“오 장로, 혹시 생각해 본 적 있어? 동창이 당세에 이렇게나 횡행할 수 있는 이유. 황제의 총애에 힘입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거야 다 알지만, 그 권력으로만 강호를 마음대로 휘저을 수 있을까? 아무리 별 볼일 없는 반룡령이라도 소위 무림인인데, 그저 재물과 권력에 팔렸을까?”
뜬금없는 반문. 오소민이 잠깐 생각하다가 답을 냈고,
“무공이군요.”
제갈봉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대내무림이라고 자부할 만큼 대단한 무공들. 이 현도관은 바로 이십여 년 전부터 황궁무고에 비장한 무수한 무공비급을 해석해 낸 곳이야.”
“에헤!”
오소민이 희한한 탄성을 낼 정도로 놀라고,
덤덤하던 해원기의 얼굴도 조금 흔들렸다.
생각지도 못했던 얘기. 현도관이 대내무림을 만든 바탕이었다니. 강유행은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았거늘.
제갈봉이 해원기와 오소민을 번갈아 보며 어깨를 으쓱 올렸다.
“놀랄 사람은 나라고. 경수사와 현도관을 은밀하게 주목하는 판에 두 사람이 갑자기 현도관으로 왔잖아. 이젠 내가 물어야겠어, 어떻게 이곳으로 온 거야?”
당연히 궁금할 수밖에.
몇 달을 황궁에서 시달리며 비로소 주목한 곳에 해원기와 오소민이 대뜸 등장한 이유.
해원기가 머리를 조금 저었다.
“자세히 말하긴 어렵습니다만, 낙양에서 약왕당 단목 당주의 가르침을 받았고, 현신장으로 보이는 자들의 흔적을 따라온 셈이지요.”
과거를 밝힐 필요는 없다.
간단한 대답에 제갈봉이 바로 수긍한다.
“그렇군. 제세성수는 지혜가 과인하다고 했으니까. 확실히 조금 전에도 희한한 작자들이었지. 해 소제가 틈을 만들어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거야.”
작은 뜰에서 벌어진 싸움을 진작부터 보고 있었던 듯.
해원기가 또 머리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먼저 장야독연(長夜毒煙)에 야료가 있다고, 주변에 설치된 은문진(隱門陣)의 위치를 귀띔해 주었잖습니까. 마침 칠절둔형보(七絶遁形步)가 효과를 내서.”
처음에 제갈봉의 엄두도 내지 못했다는 말은 바로 이걸 가리킨다.
싸움이 끝났다는 듯이 고검을 거두고 조화부인을 외면했을 때, 제갈봉의 전음을 들었고. 그에 맞추어서 칠절둔형보라는 보법을 사용했던 것.
기척도 없이 연달아 나타났던 사보상과 육신사, 그리고 조화부인. 조화부인의 미심환영이야 워낙 기괴한 신법이지만, 열 명의 복면인이 기척 없이 나타났던 건 전부 해원기조차 감지할 수 없었던 은문진 때문이었다.
결계로 장야독연을 막고, 은문진을 비튼 덕에 제갈봉이 현도관 안으로 스며들 수 있었다.
해원기의 말이 끝나기 전에 제갈봉이 의아한 시선을 이리저리 보낸다.
“그런데 이 현도관의 주인은 어디 있어?”
세 사람 외에는 아무도 없는 실내. 오소민이 상체를 내밀며 인상을 썼다.
“누군지 알아요?”
그리고 제갈봉의 대답에 오소민과 해원기의 표정이 굳어졌다.
“정확히는 몰라. 단지 미모가 뛰어난 여인이라는 것밖에.”
묘하게 어긋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