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360화 (360/410)

제90장 사륙변려(四六騈儷) (4)

흉악하다.

후토승을 지녔던 자가 현무의 옆, 빙천주를 지녔던 자는 청룡의 옆, 제화륜을 지녔던 자가 백호의 옆, 구표선을 지녔던 자는 주작의 옆.

사보상의 넷이 본래부터 짝이었던 것처럼 육신의 넷과 어울리면서,

흉흉한 기운이 포악하게 퍼지기 시작했고,

이 흉악함이 무슨 기사회생의 명약이라도 되는 양 큰 충격을 받았던 등사와 기린까지 도로 활기를 띤다.

담벼락에 처박혔던 사보상이 회복한 이유가 공경반환과 기미육합에 힘입은 것이라고 억지로 이해할 수는 있지만,

등사와 기린을 일으켜 세운 이 흉악한 기운은 어디서 생겨났을까.

짝지은 이치도 어울리지 않는다.

‘사보상은 지수화풍, 사신의 방위와 맞지 않는데.’

현무는 북수(北水)요, 청룡은 동목(東木)이며, 백호는 서금(西金)이고, 주작은 남화(南火)다.

물에 땅이, 나무에 얼음이, 쇠에 불이, 불에는 바람이 붙은 격.

사대(四大)와 오행(五行)이 본래 딱 맞아떨어지진 않으나, 이건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또 등사와 기린은 왜 빼놓았나.

오소민이 순간적으로 의아하게 느꼈을 때,

해원기가 단호한 기합을 내질렀다.

“질(叱)!”

이전에도 그랬지만, 강호에서 드물게 쓰는 기합. 상서롭지 못한 걸 보고 불쾌함에 저절로 내뱉게 되는 꾸짖음이다.

위이이잉.

굉음을 끌며 눈부신 빛이 뻗었다. 한 줄로 늘어선 열 명을 단번에 쓸어버릴 듯한 군림검의 금광섬삭.

그러나 땅과 현무가 네 개의 팔을 풍차처럼 돌리자 금광이 줄어들며 속도까지 느려지고,

얼음과 청룡이 등을 맞대고 위치를 바꾸자 흉악한 기운이 파도치듯 넘실거린다.

놀라운 일.

오행어검대법에서 가장 예리한 금광섬삭이 힘을 잃다니.

해원기가 한쪽 눈썹을 세우며 오른손의 검결지를 더욱 깊게 내질렀다.

기기긱.

쇠와 돌이 갈리는 음향. 법식을 바꾸지 않고 금광섬삭을 그대로 유지하는데.

불과 백호, 바람과 주작이 거의 동시에 손을 뻗었다.

팟.

빛이 꺼지고 예기도 스러지고.

파앙!

가벼운 폭음 속에 고검이 평범한 모습으로 튕겨 나간다.

군림검이 깨졌다.

“어?”

현도관 안에서 눈에 잔뜩 힘을 주던 오소민이 엄한 탄성을 토할 정도로 놀랐다.

해원기의 어검대법이 이렇게 맥없이 무너질 줄이야.

경악한 시선이 공중으로 날려간 고검을 찾는다.

해원기도 당황했는지.

고검이 튕겨 나가자 다급히 좌우로 껑충대면서 양손을 어지럽게 흔들었다.

종횡으로 그은 선이 복잡하게 엉키면서,

슈슈슈슉.

투명한 검강이 분수처럼 치솟는다.

날아간 고검 대신에 유리검의 검상으로 펼친 재단경위. 급한 김에 검왕수로 만회할 셈인가.

수세에 몰린 티가 나고,

상대가 그 틈을 놓칠 리 없다.

해원기의 좌우로 등사와 기린이 무서운 기세로 덮쳐들었다.

공중으로 치솟은 등사는 전신을 활짝 펴서 해원기를 통째로 껴안을 듯,

바닥을 치달리는 기린은 온몸을 잔뜩 웅크려 그대로 들이박으려는 듯.

스으으으.

드드드드.

재단경위가 제멋대로 흩날리고 가닥가닥 끊기며 해원기가 비틀 중심을 잃는다.

삽시간에 닥쳐든 기린의 척력(斥力)에 밀려 통째로 껴안으려는 등사의 흡력(吸力)에 말려든 모습.

그러나,

비틀거리던 해원기의 두 발이 순간 엇갈리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신형 속에서 두 손이 상하로 나뉘어 뻗었다.

그리 빠르지도 않고 별반 당황하지도 않은 손속.

위에서 덮쳐드는 등사와 아래에서 들이받는 기린을 슬쩍 가리킨 손끝이 그대로 전면을 휩쓸자,

등사와 기린이 해원기의 앞뒤로 교차해 오히려 나머지 네 쌍에게 날아갔다.

“응?”

경악으로 뒤집힌 탄성이 또 오소민에게서 나온 건,

그녀의 시선이 뒤쫓던 고검이 유성처럼 장중에 내려꽂히기 때문.

쩡!

쇳덩이가 깨지는 소리에 귀가 먹먹해지지만, 소리보다 충격파가 더욱 거세다.

해원기가 회전을 멈추어 고검 앞에 서자,

등사와 기린, 짝지은 여덟이 동시에 뭐에 찔린 것처럼 펄쩍 뛰어 나자빠졌다.

“끅.”

“컥.”

등장한 이래로 숨소리조차 내지 않던 자들이었으나, 예상치 못했던 반격에 큰 타격을 받았는지.

목멘 신음이 연달아 울린다.

고수의 싸움은 전신관주(全神貫注), 온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천하에 다시 없는 신공을 지녔다고 해도 일순간 방심하면 하찮은 하수에게도 꼼짝없이 당하는 법이다.

하물며 지금 차례로 등장한 복면인들은 사보상이니 육신사니. 신기한 내력에다 희한한 재주를 부리는 판이 아닌가.

관전하는 주제에 쓸데없이 놀란 소리나 흘려대다니.

오소민이 급하게 입을 틀어막던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으려다가, 얼른 관자놀이를 짚었다.

군림검이 깨지고, 해원기가 수세에 몰린 듯 보였던 것은.

‘전부 계책이었단 말이지. 하여간 저 여우 방망이가…… 그런데 저건!’

해원기가 싸우는 순간에만은 ‘고구마 대장’에서 ‘여우 방망이’로 변하는 걸 진즉에 알았지만, 이번에는 그녀도 깜빡 속아 넘어갔다.

그러나 그걸 따질 새 없이 나가떨어진 열 명을 훑어보는 그녀의 시선이 날카롭게 반짝였다.

땅과 짝지은 현무에 의해 군림검의 금광이 스러졌다.

얼음과 짝지은 청룡에 의해 군림검의 예기가 무뎌졌다.

그리곤 불과 백호, 바람과 주작에 의해 고검이 날아가 버렸다.

‘광상(光狀)의 어검대법을, 검광을 약화시키고 검기를 깎아내렸어. 마치 깊은 늪에 빠뜨리고, 물과 불로 괴롭히듯이. 이어서 되살아나려는 기운을 짓이기고 갉아먹었지. 어검이 깨져 평범한 검으로 날아가도록. 사신수(四神獸)가 아냐, 더구나 등사의 흡력은 바로.’

뭐든지 빨아들이는 깊은 늪. 그중 가장 무서운 건 깃털 하나도 뜨지 못한다는 약수(弱水)다.

약수지괴는 알유, 수화지괴는 구영.

되살아나려는 기운을 짓이기는 착치의 이빨과 만물을 좀먹어 날려버리는 대풍의 독과 바람.

등사의 흡력은 바로 거대한 코끼리도 한입에 삼킨다는 수사의 능력이잖나.

기린이 봉희(封豨)란 걸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다.

오소민이 목소리를 낮춘 채로 단호하게 외쳤다.

“육악지력으로 변했어!”

싸움에 임해 정신을 집중해야 할 해원기에게 알려주지 않을 수 없었다.

해원기에겐 처음부터 방해가 되지 않았다.

싸우면서도 계속 오소민에게 신경을 쓰고 있었으니까.

걸핏하면 싸우고, 싸우면 반드시 남을 해치는 세상. 본디 순후한 성품에 살생을 꺼리는 해원기는 그래서 강호무림이 싫었다.

과연 일단 무림에 발을 들이자 원치 않는 싸움이 그치지 않았다.

어째서 이렇게 서로 싸워야만 하는가.

그러나 이제는 그 답을 안다.

‘지키기 위해서.’

무림인이 된 지 어언 일 년. 억울하게 죽은 대첨산 화전민의 원흉을 찾으려는 게 동기였으나, 커다란 음모를 파헤쳐가면서 마침내 자신에게 지워진 책임을 깨달았다.

배움은 곧 쓰임이요, 무도는 바로 인도다.

세상을 지킨다는 거창한 일은 아직 실감하지 못하지만,

인연으로 맺어진 이를 어찌 버릴 수 있겠는가.

하물며 마음을 허락한 오소민을 등 뒤에 두고서야.

오소민의 낮은 외침에 즉각 입을 열었다.

“육신을 육악으로 바꾼 기인(起因), 사보상도 사흉상(四凶相)으로 바뀌었네.”

침강의 후토승이 현무를 알유로, 동결의 빙천주가 청룡을 구영으로, 오유의 제화륜이 백호를 착치로, 역전의 구표선이 주작을 대풍으로.

육신이 육악으로 변하기만 한 게 아니다.

나가떨어진 열 명 중에 먼저 몸을 일으키는 넷.

현무를 알유로 바꾼 땅의 복면인은 뿔이라도 돋은 것처럼 정수리가 뾰족해졌고,

청룡을 구영으로 바꾼 물의 복면인은 술에 취한 것처럼 전신을 흔들거리며,

백호를 착치로 바꾼 불의 복면인은 전신을 덮은 포대가 터질 듯 부풀어 올랐고,

주작을 대풍으로 바꾼 바람의 복면인은 물고기처럼 몸을 흐느적거린다.

오소민이 당장 말뜻을 알아듣는다.

“동두철액(銅頭鐵額)의 삼묘(三苗), 유탕망반(遊蕩忘反)의 환두(驩兜), 촉절천주(觸折天柱)의 공공(共工), 초치홍화(招致洪禍)의 곤(鯤)이라고? 그렇다면.”

구리 머리에 쇠 이마로 전쟁을 즐겼다는 삼묘, 오직 놀기만 좋아해 되돌릴 줄 몰랐다는 환두, 하늘을 받치는 기둥을 들이받아 꺾었다는 공공, 홍수 같은 대재해를 일으켰다는 곤.

방효유의 후손이니만큼 사흉에 대해서도 남들보다 더 정확히 아는데.

말을 맺지 못한 것은 사흉이 사흉으로만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은 사흉상. 보(寶)를 흉(凶)으로, 신(神)을 악(惡)으로 바꾸는 대단한 재주지만, 자랑하려는 걸까?”

오소민의 뒷말을 기다리지 않고 해원기가 말을 받았고,

오소민이 이를 악물면서 관자놀이를 마구 문질렀다.

사보상이 사흉상으로 바뀌어도 지면에 꽂힌 검을 뽑지 않은 해원기.

아까도 그랬지만, 지금도 적극적으로 승세를 타서 적을 쓰러뜨리려 하지 않는다.

살생을 저어해서만이 아니다.

의문의 답을 찾는 건 오소민 자신이 해야 할 일.

녹명이 드러냈던 두 가지 허점. 그중에 무지를 메꾸려고 사보상과 육신사라는 열 명을 차례로 내보냈다고 여겼다.

절세검왕의 진정한 실력을 재기 위해서.

그러나 이곳에 나타난 육신사는 제독태감이 거느렸던 육신사가 아니고, 사보상이란 자들도 처음 등장한 고수들.

육악지력을 지닌 현신장이란 자들도, 밀각의 수보를 비롯한 육학사도, 비전의 원좌와 주국경 같은 무장들도, 심지어 이십사아문의 태감이나 은허에 출현했던 괴이한 인물들까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고수가 구름처럼 많은 동창이다. 추측건대 그 수가 능히 강호무림 전부와 맞먹을 만큼. 대내무림이란 용어가 헛소리가 아니라는 건 이미 절감하는 판이라.

소모할 인력은 얼마든지 있잖은가.

해원기의 실력을 재겠다고 자신의 숨긴 패를 내보이는 건 어리석은 짓.

자랑하려고 이런 짓을 벌일 리 없다.

무지의 허점을 메꾸려는 것만이 아닐 터.

오소민이 관자놀이가 벌게질 정도로 문지르며 생각에 몰두하는데.

“자랑할 만하죠? 호호호.”

불쑥 전해지는 여자 목소리.

오소민이 손을 멈추고 눈썹을 잔뜩 치켜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귀에 익은 음성. 절반쯤 내려앉은 맞은편 담벼락 위에 희미한 그림자가 맺히기 시작한다.

지부의 심왕에게서 유래한 기괴한 신법, 이른바 미심환영(迷心幻影)이다.

해원기가 지면에 꽂힌 고검의 손잡이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흐음, 그러고 보니 항상 뜻밖의 장소에서 마주치는군. 대체 부인은 어디 속하는지 모르겠소.”

모습이 흐릿하지만, 조화부인이 분명하다.

“호호, 그게 뭐 그리 중요한가요. 그보다 절세검왕의 평가부터 들려주시면 어떨까요?”

여전히 종잡을 수 없는 여자. 가볍게 말머리를 휘어잡는다.

해원기가 일어선 사흉상과 아직 나자빠진 채의 육악을 훑어보았다.

“사보상을 사흉상으로, 육신을 육악으로 바꾸는 재주 말이요? 뭐라고 해야 하나, 길상흉악(吉祥凶惡)은 극과 극의 변화라서.”

“사륙변려(四六騈儷)의 무채상변(武采相變)이랍니다. 그럴듯하죠?”

굳이 해원기의 답을 기다린 게 아닌 듯, 대뜸 명칭을 대며 잘난 척. 정말 자랑하려고 나선 것 같다.

해원기가 미간을 조금 찡그렸다.

사륙변려는 문장의 체재 중 하나. 네 글자와 여섯 글자의 구문으로 짝을 만들어 아름다운 글을 만들기에 문채(文采)가 뛰어나다.

사보상과 육신사를 내보냈다고 사륙변려, 문채 대신에 무채라는 단어까지 끼워 맞췄으니.

놀리는 것과 진배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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