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0장 사륙변려(四六騈儷) (3)
오소민이 자신의 가슴팍을 살짝 눌렀다.
여덟 사부에겐 각기 독특한 보패가 있었는데, 자신이 내려 받은 건 오직 하나. 하선고의 하화다.
보패란 의미를 형상에 담아 신통한 힘을 부여한 것. 진흙에서 피어나는 연꽃은 수신양성(修身養性)의 징표이니 절대로 속진(俗塵)에 물들지 않는다.
공력을 높이거나 매서운 기운을 뿜진 않지만, 사술이나 마공에서 심신을 지키는 데는 탁월한 공효가 있고.
이는 또한 남녀노소(男女老少) 부귀빈천(富貴貧賤)을 상징하는 팔선의 여덟 보패 중에서 여인(女人)의 청순결백(淸純潔白)을 의미한다.
아무 데서나 간단히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그런데 이른바 지수화풍의 사대를 대표하는 보패라면서 하나씩 규정된 공능이 상당히 괴이하다.
땅이 그저 가라앉히기만, 물이 그저 얼어붙기만, 불이 그저 없애기만, 바람이 그저 되돌리기만 하나.
게다가 후토승, 빙천주, 제화륜, 구표선이란 이름과는 달리 제대로 모양을 갖춘 건 밧줄 하나뿐.
이걸 안품이라고 한 해원기는 진품을 아는 걸까.
해원기가 ‘사보상’이라고 설명을 붙여준 이유가 있을 텐데.
더 따져볼 새가 없다.
오소민이 인상을 쓰면서 새로이 등장하는 자들을 노려보았다.
역시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았고,
어째서 차례로 나타나는지.
워낙 조용한 움직임이라 얼핏 쓰러진 넷을 구하러 오는 줄 알았다.
그러나 여섯 그림자는 지수화풍의 넷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바닥에 내려와,
기묘하게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킨다.
체격과 몸매가 제각각이지만, 전신에 뒤집어쓴 검은 포대와 숨소리조차 내지 않는 모습은 지수화풍의 넷과 마찬가지.
가슴에 조그맣게 무늬를 박아 넣은 것도 똑같다.
그 무늬를 살피기 전에,
“어? 저것들은.”
오소민의 놀란 음성이 귓가에 전해지고, 해원기도 눈에 익은 병기들 때문에 미간을 좁혔다.
여섯 복면인이 손에 든 병기.
왼쪽부터 차례로 남사기(藍蛇旗), 오형조, 파초선, 백은추, 구절편, 녹각장(鹿角杖).
얼마 전, 제독태감이 이끌고 왔던 육신사라는 자들의 병기가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여섯 복면인의 가슴팍 무늬가 등사, 청룡, 주작, 백호, 현무, 기린이란 걸 따질 필요도 없다.
공산 백운동 위에서의 싸움에선 상당히 곤욕을 치렀었다.
육신사라는 자들 외에 밀각의 수보와 비전의 원좌가 가세했고, 나중에 팔대지옥까지 펼쳐져서 막대한 힘을 쏟아야만 했었다.
그래도 결국에는 해원기로 하여금 도리어 천형검을 깨닫게 해주어서,
일거에 쓰러뜨렸던 자들.
지금은 영사태화의 일기연환을 도울 수보와 원좌도, 방어를 맡을 지옥도의 초석도, 십전염왕진을 숨긴 팔대지옥의 진법도 없거늘.
이들은 뭘 믿고 또 나서는가. 아니, 이들이 과연 공산 백운동에 나왔던 그 육신사와 같을까.
해원기가 염두를 굴리는 동안,
육신사로 여겨지는 복면인 여섯은 꼼짝도 하지 않고 기다리기만.
다짜고짜 손을 쓰던 지수화풍의 넷과는 다르다.
옆으로 눕혔던 고검을 거두자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한다.
등사가 남사기를 높이 쳐들고, 기린이 녹각장을 바닥으로 내리고.
그러면서 등사와 기린 옆의 청룡과 주작, 그 옆의 백호와 현무가 뒤이어 자세를 취하니.
좌우 끝에서부터 가운데로 이어지는 흐름.
해원기가 그 흐름이 끝나기 전에 왼손을 가슴에 세우며 고검을 당겼다.
이미 겪어봤던 상대. 수보와 원좌가 없으니 영사태화의 일기연환으로 회복할 방도가 없을 터.
적멸검으로 선수를 점할 셈이다.
공간이 결계의 정적에 갇히고, 담담한 선향이 피어오르는데.
느릿하던 여섯의 움직임이 돌연 빨라졌다.
주작이 앞으로 불쑥 나오고, 현무가 뒤로 확 빠지면서, 청룡과 백호가 등사와 기린 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마치 뾰족한 능형(菱形)의 양쪽에 손잡이가 달린 모양.
웅.
어디선가 나직한 음향이 울리는 듯. 막 적멸검을 떨치려던 해원기의 눈썹이 꿈틀했다.
기이한 느낌.
적멸검을 순간적으로 수미전단검의 조사검결로 뒤집었다.
종횡으로 긋는 초조면벽(初祖面壁)과 이조입설(二祖立雪).
무거운 검기가 상대를 꿇리고, 꿇지 않으면 베어질 기세를 품었는데.
채앵.
맑은 쇳소리 하나.
고검이 그대로 튕겨 나오는 통에 해원기가 제자리에서 급히 맴돌아야 했다.
‘음?’
서둘러 수미전단검으로 뒤집긴 했어도 적멸검의 기세가 남았건만.
고검이 평범한 쇳조각처럼 튕겨 나왔고, 뭐에 부딪혔는지도 분명치 않다.
뾰족하게 앞으로 나온 주작의 파초선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파초선만이 아니라 나머지 다섯의 병기 또한.
검이 기세를 잃고 상대에겐 닿지도 않은 상태로 튕겨 나오다니.
받은 충격을 하나로 이어 흘려보냈던 이전의 일기연환이 아니다.
이 여섯은 병기만 같을 뿐, 이전의 육신사와는 전혀 다르다.
적멸검을 순간적으로 수미전단검으로 뒤집게 한 기이한 느낌.
그게 심중덕에 자리 한 운혜덕택이란 걸 새삼 자각할 새도 없이,
제자리에서 맴돌던 해원기가 고검을 어지럽게 휘둘렀다.
솨솨솨솨.
단숨에 백여 개로 불어나는 검영(劍影)이 현도관의 뜰을 가득 메워 복면인 여섯에게 몰려든다.
상상지의 풍뢰지결이 기이한 느낌의 근원을 찾으려고,
삼조몽난(三祖蒙難)에 이은 사조광제(四祖廣濟).
어쩐 일인지 수미전단검만으로 상대한다.
다다다다당.
넓게 퍼진 검영이 몰려들면서 비파를 튕긴 듯한 음향이 연신 울리고,
그 가운데 빠르게 다가든 해원기가 고검을 은밀하게 찔러 넣자,
두웅.
이번엔 북을 친 듯 웅장한 울림.
그러나 해원기가 오조전법(五祖傳法)을 끝내자마자 육조심동(六祖心動)으로 넘어가지 않고 뒤로 훌쩍 물러나서. 작은 뜰을 뒤덮었던 검영이 씻긴 듯 사라진다.
연속적인 공격과 홀연한 후퇴. 더구나 언제 집어넣었는지 고검은 등 뒤로 돌아갔고,
하지만,
오른손은 검병을 잡은 채 왼손을 앞으로 쭉 뻗어 마치 활을 잡아당긴 것처럼 팽팽한 긴장감이 치솟았다.
가슴팍에 육신의 무늬를 박아 넣은 여섯은 여전히 양쪽 손잡이가 달린 능형. 미동도 하지 않았고, 시선조차 돌리지 않아서 수미전단검의 공격이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한 모양인데.
다만, 등사의 남사기가 뱅글뱅글 돌아가고 기린의 녹각장이 지면을 휘저으며. 나머지 사신의 병기가 은은히 빛을 머금었다.
해원기의 입술이 비틀렸다.
“공경반환(空勁返還), 기미육합(氣彌六合).”
초식을 외우거나 기합을 넣은 게 아니다. 오소민에게 들려주는 말.
두 개의 단어를 말하자마자 해원기의 신형이 폭발하듯 튀어나가고,
도로 검집에 넣었던 고검이 눈에 보이지도 않게 공간을 쪼갰다.
사악.
뭐가 뭔지도 모르는 새에 오소민의 눈앞에 다시 해원기의 등이 다가오자, 그제야 뒤늦게 터지는 폭음.
퍼퍼퍼퍼퍼펑.
게다가 그 폭음이 해원기 주위에서부터 현도관의 지붕과 양쪽 벽에서까지 울려대니.
해원기의 말을 되새기며 상황을 살피던 오소민이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현도관으로 기척도 없이 스며든 자들이 있었던가.
그러나 오소민은 시선을 돌리지 않고 초점을 정면에 맞추었다.
육신사처럼 보이는 여섯의 능형이 절반으로 갈라져 세 명씩 두 덩어리가 되었고,
갈가리 찢긴 남사기와 절반이 뚝 부러진 녹각장. 비틀거리는 등사를 청룡과 주작이 부축하고, 주저앉은 기린을 백호와 현무가 일으켜 세우느라 바쁘다.
당한 건 둘. 나머지 넷은 멀쩡한데도 반격할 태세를 갖추지 않고.
해원기 역시 그러리란 걸 예상한 것처럼 검을 내리고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오소민이 해원기의 등에 바짝 붙었다.
“뭐지? 무슨 수작인지 알아챈 거야?”
이렇게 물을 것조차 아는지.
“뭔가 뒤섞이긴 했는데, 시험을 보는 듯한. 검증받는 것 같군.”
해원기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나직하게 답한다.
잔뜩 찡그린 오소민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개방팔선의 무공이 천하제일은 아니지만, 다양하고 방잡한 면으로는 가히 독보적이랄 수 있다.
뭐니 뭐니 해도 남녀노소, 부귀빈천이란 인세의 팔면(八面)을 두루 갖추었으니까.
그런 연유로 오소민의 무학에 대한 이해는 실력을 훨씬 넘어선다. 그런 그녀도 생전 처음 듣는 공경반환과 기미육합.
그래도 타고난 총명함과 그간의 경험이 어떻게든 그 의미를 궁구해냈다.
경력(勁力)은 힘줄기, 기운이 힘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검기, 검경, 검강이 크게 보면 다 경력인데. 그 경력을 공(空)으로 삼아 거꾸로 되돌리는 게 공경반환일 터.
그럼 힘으로 작용하던 기운은 힘을 잃고 주위로 퍼져 나갈 것이요, 본래 있던 자리를 찾는 것처럼 육합을 채우게 되니. 이게 바로 기미육합.
여섯 복면인은 나타난 후에 공격한 적이 없고, 손잡이 달린 능형을 구성한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해원기의 검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아서 은근히 당혹스러워했는데.
갑자기 무엇인지 알아냈고,
일격으로 격파한 후엔 물러나 바라보기만.
상대도 이상하고 해원기도 이상하지만, 해원기의 대답으로 이 상황의 실마리가 잡혔다.
“시험, 검증. 해 형의 검을?”
“음. 공경반환은 방어의 지극한 요결이지만, 일정한 경지에 이르면 굳이 익힐 필요가 없지. 그리고 내 검기를 뒤집어 주위에 심어놓은 기미육합. 그건 본래 육신정위(六神定位)라는 한 가지 초식의 모방일세. 사부님이 창안하신.”
고검협이 창안한 검초의 모방이라.
오소민의 말이 빨라졌다.
“수미전단검법만 쓴 이유가.”
“불가의 검은 검기의 발출이 가장 적으니까.”
“저 능형을 둘로 쪼갠 건.”
“검강을 검신 내부에 구현하는 검중강(劍中罡).”
“검역을 펴지 않은 것도.”
“괜히 상대를 도와 귀찮아질 필요는 없잖은가.”
경쾌하게 오가는 대화. 오소민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공산 백운동에 나타났던 육신사와는 전혀 다른 여섯. 처음의 사보상이란 넷이 희한한 공세를 거듭했던 것과 반대로 오로지 방어만 했지만,
해원기의 능력을 분명히 알고 있다.
오소민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두 번째 허점을 메꾸려는 걸까.”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정체 모를 자들이 등장하기 전, 현도관 안에서 둘이 나누었던 얘기.
시차와 무지라는 두 가지 허점을 찾아냈었다.
그 중의 무지.
‘삼색지보는 완성할 수 없고, 천손지무는 극경에 다다를 수 없다.’라고 했던가.
녹명은 뭐든지 다 아는 투로 잘난 체를 했었는데. 이제 해원기가 어떤 경지에 이르렀는지 확인하려는 건가.
지나치게 뻔히 보이는 속내라 오히려 의심스러운데.
“뒤로 더 물러나게.”
말보다 먼저 부드러운 힘이 오소민을 현도관 안으로 밀어냈다.
해원기의 전신에서 퍼지는 가공할 기운, 내렸던 검극이 고개를 쳐든다.
안으로 밀려나면서도 오소민이 두 눈을 크게 떴다. 해원기가 왜 돌연 이렇게 기세를 뿜어내나.
그녀의 눈에 들어온 광경은,
양쪽으로 벌어져 늘어서는 육신의 여섯, 그리고 그 가운데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사보상의 넷.
담벼락에 처박혔던 넷이 언제 회복되었는지도 알 수 없지만,
이 열 명이 풍기는 분위기가 전혀 딴판이다.
기척조차 내지 않았던 자들이 짐승이 이빨을 드러낸 것처럼 흉악한 기운을 마구 뿌려대니.
사보상의 보(寶)와 육신사의 신(神)은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