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358화 (358/410)

제90장 사륙변려(四六騈儷) (2)

“절세검왕이란 외호는 누가 지었어?”

전음으로 말하던 오소민이 불쑥 소리를 내는 바람에 해원기가 조금 멈칫하다가 답했다.

“예전에, 내 검왕수를 본 탁 소숙이. 당시 그 자리에 있던 분들이 소문을 내는 통에…….”

“그래, 기억나. 단 사형이랑 멍청이 중, 못된 도사가 함께 그 소문을. 흐으음.”

취개치승노도의 풍진삼우.

검왕수를 처음 보였을 때, 그 성회(盛會)에 참관인으로 참석했었다.

소문의 출처를 기억해 낸 오소민이 뭔가를 생각하다가 머리를 들었다.

“이번에도 허점이 보이네. 녹명이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진 않았는데, 막상 따져보니 어정쩡한 구석이 있어. 뻔뻔스레 얼굴을 보일 만큼 자신이 넘쳤으니까 굳이 거짓을 섞을 이유도 없고.”

해원기가 미간을 좁혔다.

자신과 녹명이 대화하는 동안 오소민은 평소와 달리 함부로 끼어들지 않고서,

대화의 내용을 이해하고 녹명을 관찰하는 데 집중했었다.

과거의 일에는 상세히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고, 또 그럴 여유도 충분치 않았기에 오소민으로선 대화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겠으나.

그래도 당면한 상황을 분석해 두 가지를 찾아냈다.

첫 번째는 강유행의 안전을 잠시 확보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해원기에게 문제의 해결을 맡기는 것이다.

모두 ‘노야’가 미리 계획했다는 가정 아래에.

신선이라고 해도 될 엄청난 지혜와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을 지녔다고 했으니.

그런데 각각 허점이 있다.

하나는 시차, 또 하나는 무지.

어떻게 해원기가 찾아올 즈음에 맞추어 강유행을 곤경에 빠뜨렸으며, 어째서 해원기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게 되었나.

설마 이 허점까지 예지에 포함되었을까.

오소민이 말을 잇는데,

“모르는 게 없다는 듯이 떠들어댔잖아. 심지어 ‘노야’ 흉내를 낸다고 자네가 평가할 정도로, 응?”

해원기가 갑자기 건량을 치우면서 일어선다.

“왜……?”

“누가 찾아왔군.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현도관 뒤에 펼쳐진 안배가 진법이든 결계든, 암중에 끊어놓아 당분간 발동할 수 없게 해놓았다.

녹명에게 일종의 경고를 보낸 셈이고, 녹명 또한 다음에 다시 얘기를 나누자는 핑계로 일단 물러섰으니. 어느 정도 시간을 벌었다고 여겼건만.

아직 강 사부가 깨어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덤벼들려는 것인지.

해원기의 뒤에 선 오소민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아무런 기척을 느끼지 못했으니, 현도관 뜰로 들어서는 인물 역시 상당한 고수라는 뜻.

경사에 와서는 번번이 이런 상황이라 어쩐지 스스로 바보가 된 듯하다.

그래도,

‘딴생각하면 안 돼. 무공이 떨어지는 만큼 다른 거로 도울 생각을 해야지.’

마음을 다잡고 눈에 힘을 주었다.

일 년 중에 밤이 제일 긴 시절. 녹명을 찾아갈 때 밝혀졌던 등롱은 모두 사라져서 현도관의 작은 뜰은 캄캄하기만 한데,

그 뜰에서 솟아나듯 일어선 네 개의 인영.

머리 꼭대기에서 발끝까지 시커먼 포대를 뒤집어쓴 자들이라 용모를 파악할 수 없고,

그저 가슴에 조그맣게 수놓은 문양만이 각기 달랐다.

해원기가 넷을 차례로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기묘하군.”

왼쪽부터 횡선 하나, 그다음은 물결무늬, 그다음은 불꽃무늬, 오른쪽 끝은 빗금. 지나치게 단순해서 주의하지 않으면 차이를 구분하기도 어렵다.

오소민은 그 문양을 확인하면서 동시에 해원기가 기묘하다고 한 이유를 깨달았다.

눈앞에 멀쩡하게 보이면서도 여전히 모호한 기척. 해원기가 알아채지 않았다면 끝까지 이들의 출현을 몰랐을 수 있다.

‘엄청난 고수? 아예 사람 같지도 않은.’

제대로 살펴볼 틈도 주지 않고 넷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왼쪽의 둘은 한 걸음 옆으로, 오른쪽 둘은 한 걸음 앞으로.

말 한마디 없이 똑같은 동작, 그러면서 작은 뜰 전체가 뭔가에 뒤덮이는 듯한 느낌.

‘진법? 겨우 한 걸음씩 옮기고서?’

박자를 맞춘 간단한 동작 하나로 진세를 구성할 수는 없다.

생각을 굴리기 전에 해원기가 먼저 반응한다.

왼발을 살짝 내밀며 비스듬히 선 자세.

[현도관 입구까지 물러나게.]

오소민에게 전음을 보내면서 두 눈에 신광이 어렸다.

녹명과 만나고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불쑥 나타난 넷. 용모도 알 수 없고 입도 벙긋하지 않으면서 다짜고짜 손을 쓰려는 모습.

다음에 보자는 녹명의 말을 지나치게 믿었을까.

어떻든 방심할 수 없다.

신왕공이 자연스레 일어선다.

넓이가 십여 장쯤 되는 작은 뜰이라 앞에 선 둘과 해원기 사이의 거리는 오륙 장 정도.

불꽃무늬가 먼저 두 손을 들자 후끈한 느낌이 전해지고.

가슴팍에 새긴 문양처럼 화기(火氣)를 익혔나. 와락 젖혀지는 손바닥에 보이는 붉은 빛.

단번에 뜨거운 장력이 해원기의 전신을 덮친다.

일체의 변식이 없는 공격에 해원기가 즉각 왼손을 밀어냈다.

우웅.

공간을 통째로 밀어내는 대우신장. 불꽃무늬만이 아니라 넷을 전부 흔들 셈인데.

돌연 대우신장이 특유의 효과를 잃고 평범하게 뻗어 나간다.

퍼펑.

정면으로 부딪치는 힘. 뜻밖의 일에 해원기의 상체가 흔들렸다.

밀어내기는커녕 공간을 격절(隔絶)하지도 못해서 손끝으로 파고드는 불길에 소매 끝이 눌어붙는다.

지독한 화기. 해원기가 왼손을 떨쳐 그 화기를 털어내는 순간,

빗금의 복면인이 전신을 크게 떨었다.

포대 자루 같은 복장이 흔들리는 데 맞추어 불꽃무늬가 다시 쌍장을 뒤집고.

또 한 번 아무 소리 없이 화기가 덮쳐들었다.

왜 대우신장이 효과를 잃었는지 따질 새가 없다.

해원기가 내밀었던 왼발로 힘주어 지면을 밟으면서 대우신장을 검왕수로 바꾸었다.

팍.

상대가 합공하는 기미가 보이니 지유진으로 중심을 흔들려는 의도지만,

늪을 밟은 듯한 느낌에 해원기의 미간이 깊게 파이면서 오른손을 급하게 내질러야 했다.

제대로 형태도 갖추지 못한 발검제형.

퍼엉.

폭음과 함께 공중에 새파란 불길이 치솟는 가운데 해원기가 힘겹게 한 걸음 밀려나는 광경.

현도관의 입구로 물러났던 오소민이 깜짝 놀랐다.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수세에 몰리는 해원기. 웬일인지 움직임이 무겁고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

당혹스럽기는 당사자가 더하다.

해원기가 자세를 조금 낮추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대우신장과 마찬가지로 지유진의 경력도 물에 빠진 것처럼 사라져버렸다.

더구나 상대는 해원기가 흔히 대우신장과 지유진을 쓴다는 걸 훤히 아는 듯. 틈을 정확히 찔러왔다.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반응한다.

대우신장과 지유진이 효과를 잃으면서 두 차례 손해를 보자마자,

수정지기가 바탕을 다지고, 풍뢰지결이 번쩍 깨어나서.

현도관의 뜰을 뒤덮은 느낌의 정체, 왜 움직임이 무거운지 그 까닭을 찾는다.

지독한 화기를 익힌 불꽃무늬. 단지 쌍장을 쳐내는 단순한 수법이지만, 빗금무늬가 전신을 떨자 화력이 두 배나 강해졌다.

그리고 처음부터 싸움에서 빠진 나머지 둘. 넷이 한 걸음씩 움직였을 때부터 마치 진법이나 결계가 펼쳐진 것 같았었다.

해원기의 신광 어린 시선이 네 명의 가슴팍을 빠르게 훑고,

“지수화풍(地水火風)이었군.”

나직한 혼잣말을 귀담아들은 오소민.

“사대(四大)의, 상(相)이라고?”

단박에 답을 찾았다.

횡선 하나가 지, 물결무늬가 수, 불꽃무늬가 화, 빗금무늬가 풍. 지나치게 간단해서 오히려 알아채는 게 늦었다.

세상을 구성하는 네 가지 요소. 하지만, 존재 자체로는 이처럼 해원기를 몰아붙일 수 없다.

오소민이 굳이 상(相)이라는 글자 하나를 덧붙인 이유.

사대가 각기 하나의 특별한 공능을 구현하기 때문이다.

불꽃무늬가 지독한 화기를 품은 장력을 펼치는데도 맞부닥치기 전에는 작은 불꽃 하나 보이지 않았고,

빗금무늬가 전신을 떨어 풍세를 더했는데도 바람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옆으로 비켜섰던 횡선과 물결무늬도 그저 관전만 한 게 아니다.

해원기와 오소민의 목소리가 신호라는 되는 양,

말 한마디 없던 넷이 동시에 움직였다.

횡선은 바짝 엎드려 땅을 누르는 자세, 물결무늬는 두 팔을 활짝 벌려 흔들고, 불꽃무늬의 쌍장은 어지럽게 돌아가며, 빗금무늬는 미친 듯이 전신을 흔든다.

고오오오오.

작은 뜰이 무지막지한 기운에 휩싸여 당장이라도 두려빠질 듯.

그러나 답을 찾은 해원기가 멍하니 지켜볼 리 있나.

양손의 검왕수가 이미 오행제림과 오귀전륜을 이루었고, 검왕오형이 역상정위로 공간 전체를 아울렀다.

츠츠츠츠츠.

역상정위의 오의는 격물궁리다. 가슴 앞에서부터 넓게 퍼져 나아가는 검왕수가 기음을 토하며 사대의 상을 낱낱이 파헤쳐,

지유진을 밑으로 가라앉혔던 지는 뒤집고, 운신을 속박했던 수는 쪼개며, 대우신장을 평범하게 바꾸었던 화는 날리고, 한 걸음 물러나게 만들었던 풍은 흩트려야 한다.

퍼퍼퍼펑!

연이은 폭음과 함께 복면인 넷이 비틀거렸으나,

얼굴도 보이지 않고 목소리조차 내지 않는 자들.

불꽃무늬와 빗금무늬가 좌우로 좍 벌어지는 사이로 횡선과 물결무늬가 끼어들면서 되레 앞으로 다가든다.

더구나,

바짝 엎드렸던 횡선의 손에는 둘둘 말린 밧줄이, 활짝 벌렸던 팔을 오므린 물결무늬의 얼굴 앞에는 새하얀 구슬 하나가.

왼쪽으로 도는 불꽃무늬의 어지럽게 돌리는 손에는 불길이 바퀴처럼 엉기고,

오른쪽을 맡은 빗금무늬의 포대 자루는 거대한 부채처럼 펼쳐졌다.

본래 사방이 고루거각으로 막힌 현도관이다.

좁은 뜰은 깊은 분지나 다름없고, 격돌한 힘의 여파는 공간을 가득 채우게 된다.

오행제림과 오귀전륜으로 이루어지는 검기핍인은 이미 신령검역에 가까우니, 역상정위에 파해 된 넷은 꼼짝없이 그 영향을 받아야 하거늘.

오히려 기세를 올리며 달려든다. 그것도 사대의 상을 선명하게 구현하면서.

땅은 밧줄, 물은 얼음, 불은 바퀴, 바람은 부채.

어이없는 모습이지만, 역상정위를 펼친 해원기의 양손은 거침없이 엇갈리고 갈마들었다.

좌르르 풀리는 밧줄에 지면이 폭죽처럼 터지든, 얼음 같은 구슬이 거센 냉기를 뿌리든, 불 바퀴가 그 냉기에 엄청난 연기를 뿜어대든, 커다란 부채가 종잡을 수 없는 광풍을 토하든.

파파파팟.

검왕오형의 다섯 번째, 유야무야로 나아가고.

입술 사이로 내뱉듯 한 마디가 따라붙었다.

“사보상(四寶相)!”

복면인 넷이 사대의 상이란 걸 간파했을 때부터 혹시 했던 예상.

차앙!

고검이 절로 뽑혀 나와 공간을 횡단한다.

쾅!

현도관의 작은 뜰이 화산처럼 터져버렸다.

오소민이 자욱한 흙먼지 속을 보느라 머리를 조금 내밀었다.

입구의 반대쪽, 작은 뜰 끝의 담벼락에 처박힌 복면인 넷. 횡선은 널어놓은 빨래처럼 상체가 담을 넘었고, 물결무늬는 만세라도 부르듯 대자로 누웠으며, 불꽃무늬는 거꾸로 물구나무를 선 채, 빗금무늬는 등을 보이고 엎어졌다.

흉한 꼬락서니지만, 비명도 핏자국도 없다.

작은 뜰이 통째로 뒤집힌 충격인데도 사지가 멀쩡하다. 밧줄은 가닥가닥 끊겼고, 얼음 구슬은 박살이 났으며, 불과 바람은 포대 자루가 갈기갈기 찢기긴 했어도.

고검을 옆으로 눕힌 해원기의 목소리가 울린다.

“침강(沈降)의 후토승(后土繩), 동결(凍結)의 빙천주(氷天珠), 오유(烏有)의 제화륜(制火輪), 역전(逆轉)의 구표선(颶飆扇). 전부 진품이 아니지만. 흠.”

일부러 오소민에게 들려주는 말.

오소민이 내밀었던 머리를 당기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사보상’ 하나하나에 대한 설명이고, 진품이 아니라고 했다. 가라앉히는 힘을 지닌 밧줄, 얼어붙게 하는 힘을 지닌 구슬, 있던 걸 없애는 힘을 지닌 불 바퀴, 거꾸로 되돌리는 힘을 지닌 부채.

이름이야 어떻든 보패(寶貝)라 불려야 할 물건. 오소민의 하화와 비슷하지만, 각각 사대의 상을 구현한 엄청난 기보잖나.

이런 진귀한 보패가 한꺼번에 등장하고, 또 전부가 진품이 아니라니.

하필 이곳은 진품을 보관하고 안품을 건네주는 현도관. 조금 전에도 그런 얘기를 나누었었다. 안품이 있으면 진품도 있을 거라고.

공교로우면서 어쩐지 불길해서 오소민이 선뜻 현도관을 벗어나지 못했고,

해원기 또한 그래서 검을 거두지 않는 걸까.

그런데,

지수화풍의 복면인 넷이 처박힌 담벼락 위, 거창한 누각에서 거미처럼 슬금슬금 내려오는 그림자들.

이번에는 여섯 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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