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0장 사륙변려(四六騈儷) (1)
지직, 우지직.
바닥에 작은 금이 가더니 삽시간에 기둥과 벽으로 퍼져 나간다.
세 사람이 앉은 곳은 난간을 치운 넓은 마루. 정원으로 바로 나갈 수 있게 조금 더 앞으로 낸 소위 월대(月臺)라는 구조다.
받침대가 길쭉한 섬돌이요, 그 위에 두꺼운 목재를 덮어 튼튼하기 이를 데 없건만.
그 위에 누가 태산이라도 옮겨놓았나.
어마어마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다.
‘자신 있느냐?’
해원기의 담담한 물음에 벌어진 현상. 그 여파에 휩쓸린 녹명이 의자에 앉은 채로 마루 끝까지 주르르 밀려났으나.
어떻게 된 일인지 해원기 옆의 오소민은 멀쩡한 채. 아무런 충격도 받지 않아서 되레 궁금한 표정을 짓는다.
촤르륵.
삼 장이 넘게 밀려난 녹명. 가슴 앞에 올린 단주가 맹렬히 돌고 나서야 흩날리던 가사 자락이 가라앉았다.
“아유, 슬쩍 건드렸다고 바로 화를 내다니. 소공자는 역시 젊군요. 조금 더 얘기를 나누었으면 했는데 어쭙잖은 계집애도 자꾸 끼어들어서. 쯧쯧.”
조금 전 구양금오를 거론했을 때도 해원기의 기세를 힘들이지 않고 풀어내더니,
지금 또한 아무렇지 않다는 듯 아쉽게 혀를 찬다.
그러나 다시 반 존대로 돌아온 말투와 일그러진 미간. 억지로 평정을 가장한 뚜렷한 증거다.
해원기가 팔짱을 풀고 오소민의 손목을 잡았다.
“건물에 기관을 숨겼고, 정원에 진법을 베풀었으며, 마루 구석엔 은문(隱門)을 두었다라. 환영 준비가 너무 과해서 불편하구나. 그리고 무엇보다.”
그대로 일어서서 돌아서다가,
“집을 오래 비워서 말이다. 정리도 좀 하고 강 사부를 잘 모신 후에는 여유가 생기겠지. 남은 얘기는 그때 다시 하자. 열쇠는 내가 잘 챙길 테니 괜한 사람 괴롭히지 말고.”
녹명을 보지도 않고 덧붙이는 말.
녹명이 고깔 아래 일그러진 미간을 꿈틀하더니 얼른 표정을 고쳤다.
“그럴 리가요. 소공자가 온 이상 어차피 강 사부에겐 아무 볼 일이 없는걸요.”
그녀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해원기는 벌써 오소민을 끌고 마루에서 내려섰고, 하얀 돌을 깐 오솔길을 서슴지 않고 걷는다.
당연히 아무도 막지 않으리란 걸 자신하듯이.
멀어지는 해원기와 오소민의 뒷모습을 녹명의 두 눈이 뚫어지라 바라본다.
길 안내를 맡았던 중년인도, 훤하게 길을 밝혔던 등롱도 전부 사라졌다.
되돌아가는 길은 그저 캄캄한 좁은 골목.
꼼짝없이 끌려가는 처지가 되었지만, 해원기가 아무 말 없이 성큼성큼 걷기만 해서 오소민도 그저 눈치만 볼 수밖에.
현도관에 들어서고 나서야 얼른 해원기를 붙잡아 세웠다.
“잠깐, 그 손 좀 놓고.”
“아, 미안하네.”
그제야 깨달은 듯. 손목을 놓으며 사과하는 해원기. 바위처럼 굳은 얼굴을 보자 오소민이 일부러 입을 삐죽거렸다.
“에고, 왁살스럽기는. 가냘픈 아가씨 손목을 어째 몽둥이 쥐듯, 이러다 흉이라도 지면 어떻게 해. 나 참.”
가냘픈 적은 한 번도 없었으면서. 그래도 지금은 수수한 백의에 푸른 띠를 두른 미녀의 모습이어선지 손목을 주무르는 모습이 안쓰럽게 보인다.
“어, 그게, 나도 모르게. 많이 아픈가?”
해원기가 그제야 평소처럼 당황하고, 오소민이 살짝 눈을 흘기면서 손을 내렸다.
“난 괜찮아. 해 형은?”
오소민이 왜 아가씨 시늉을 했는지 모를 수 없다. 해원기가 현도관 뒤쪽을 보면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 이제 괜찮네. 설마 했던 게 딱 들어맞고, 또 너무 어이가 없어서.”
현도관에서 강 사부를 만나 그간의 사연을 들은 후에,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 녹명. 그리고 그녀가 뻔뻔스럽게 늘어놓던 이야기들.
순간순간 치솟던 갖가지 감정을 애써 억눌렀고, 그걸 다시 한 마디로 표현할 길이 없다.
그런 해원기를 가만히 보던 오소민이 시선을 주위로 돌렸다.
“지금은 어떨까? 여전히 보이지 않는 이목이 있나? 해 형이 마지막에 기를 확 죽여 놓은 것 같던데.”
무공은 좀 떨어져도, 명석한 두뇌와 빠른 눈치론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해원기가 태산 같은 압력을 가한 이유도 바로 짐작했었다.
해원기의 고개가 돌아온다.
“음, 기관이 뭔지, 또 진법이 술법과 연결되는지도 확신하긴 어려웠네만, 다시 발동하기는 쉽지 않을 거야. 중추(中樞), 진안(陣眼), 추뉴(樞紐)는 찾지 못해도 출입소식(出入消息)의 마디를 끊어놓았으니까. 물론 그것만 준비했을 리 없지.”
“중추? 진안과 추뉴?”
“음, 각각의 핵심을 기관은 중추, 진법은 진안, 결계의 술법은 추뉴라고 하네. 진법과 술법을 결합해 은문진(隱門陣)을 만들거나 둔법(遁法)을 쓰는 건 아예 계역(界域)의 영기(靈基)를 차단해야 하고.”
“그래서 은문을 언급했었군. 그 녹명이란 가짜 여승, 속으론 상당히 놀랐겠는걸. 혼자 잘난 척하다가 선수를 당한 셈이잖아. 흐흥.”
“그래도 끝까지 속을 내보이진 않았어. 내 기세를 풀어낸 능력도 뭔지 알아볼 수 없었고.”
“호오, 해 형이 알아볼 수 없는 능력이라.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건가. 하긴, 동창을 장난감으로 삼아 키운 장본인이니. 해 형 앞에 떡하니 등장한 건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인데. 흐음.”
무공이나 기예를 화제로 삼아야 대화가 진행된다.
해원기의 굳었던 마음이 조금 풀렸다고 느낀 오소민이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세한 얘기는 지하로 돌아가서 하세. 어떻든 강 사부에 대한 위험은 조금 줄었다고 할 수 있겠지. 고생했어.”
해원기가 오소민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확신하기 이르지만. 어쩐지 노야의 의도 대로 놀아난 느낌이더군. 녹명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강유행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열쇠’라는 단어까지 꺼냈다는 걸,
오소민은 알아주는구나.
“흥, 없는 머리 쓰느라 뒤통수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던데 뭘. 아, 녹명은 고깔을 뒤집어써서 티가 안 났을까. 큭.”
말해놓고 나니 우스운지.
오소민이 입을 가리곤 현도관 안으로 향한다.
여기까지는 설사 녹명이 들었다고 해도 상관없는 내용. 기척도 없는 이목이 여전히 현도관 주위에 있을 수 있다.
강유행이 깨어나 안에서 다시 열어줄 때까지 지하비고는 열리지 않는다.
“그대로지?”
“음, 아무도 손을 댄 흔적은 없네.”
“우리가 예상보다 빨리 돌아왔으니까. 목적지가 설마 바로 뒷집일 줄은 몰랐잖아. 강 사부가 깨어나려면 한두 시진은 더 걸릴걸. 그나저나 경사까지 와서 건량을 먹을 줄은 몰랐네.”
현도관의 한쪽 벽에 기대어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는 툴툴거리는 오소민.
가냘픈 아가씨 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자세에 해원기가 머리를 저으며 옆에 앉았다.
경사로 출발할 때 녹림장관이 챙겨준 건량과 물.
이제는 양도 얼마 남지 않았다.
며칠씩 식사하지 않아도 아무 문제가 없는 둘이지만,
“강 사부가 머무실 곳부터 찾아야겠군. 안전을 담보하면서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언제까지 강유행을 지하비고에 놔둘 수는 없는 노릇.
오소민이 건량을 해원기에게 건네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소가 어디든 안전이 우선이야. 그러려면 강 사부가 완전히 국외자라는 걸 드러내야지. 흠, 녹명은 보경, 그 기상제역의 거울을 원하잖아.”
“음. 안품이 사라졌으니까. 구양금오를 완전히 해석할 수 있는 진품이 있을 거라고.”
“거기 약간의 허점이 있는 듯해. 열쇠는 본래 보경실의 자물쇠를 여는 용도, 그렇지만 강 사부는 지하비고의 기관을 완벽히 가동하는 데 썼어. 그리고는 구해줄 이, 즉 자네를 기다렸거든. 녹명이 열쇠를 강 사부에게 넘겨준 후에 가만있었을 리 없잖아. 자신이 알던 기관과는 달라서 감히 지하비고로 들어올 엄두가 안 났을걸. 노야라는 분, 이 모든 걸 예상했던 거야.”
천기를 뒤집고 미래를 예지하는 사람이잖나.
오소민이 손가락을 하나씩 꼽기 시작한다.
“첫 번째로 강 사부가 잠시 안전을 확보하게 했지. 조원록이란 호위무사가 행방불명되면서 강 사부는 완전히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었고. 끝내 녹명을 찾아가 열쇠를 받아 최후의 연락을 부탁한다. 흥, 그러면서 무슨 진작에 겁표 사건으로 해 형을 경사로 불렀다고, 요건 순 거짓말이지만.”
머리를 갸웃.
“이상한 부분이 있어. 언제부터 해 형이 진품을 찾는 관건이라고 생각했을까? 출도한 지 채 일 년도 되지 않거늘. 차라리 해 형이 무림에 나온 걸 아는 즉시 강 사부를 곤경에 빠뜨리고 그 소식을 곧장 해 형 귀에 들어가도록 하는 게…… 조금 어색하지?”
해원기가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묘한 구석이 있다.
속가의 절학을 갈취하려고 조원록을 납치하고, 황궁이 은밀히 획책한 무림 재편의 비록을 유출한 죄로 강유행을 붙잡아갔다면 간단히 이해할 수 있겠으나.
구양금오와 기상제역의 보경이 엮이면서 대단히 복잡해지자마자 녹명이 등장했다.
그것도 한 해가 저물 무렵인 동지가 지나고 나서.
겁표 사건은 입춘 때였으니 한참 전이다.
“강 사부가 깨어나면 다시 물어보자고. 보경실의 비밀을 강 사부만 알았을 수 있으니까. 그러고 나서는 바로 진품이 우리에게 있다는 티를 내야 해.”
그래야 더는 강유행에게 신경을 쓰지 않을 터.
“아울러 조 무사의 행방도 알아내자고. 두 사람의 안전이 거래의 선결 조건이란 식으로.”
“좋군. 하지만, 결국 속임수라서.”
“선결 조건이잖아. 두 사람과 보경을 교환하자는 게 아니야. 진품의 소재를 밝혀주면 되지. 뭐, 본래 진품이 없었다는 것도 중요한 정보잖아.”
해원기가 마뜩찮은 눈매로 오소민을 보다가 짧게 혀를 찼다.
“쯧, 맞는 말이긴 한데. 혹시 진품이 있다면 건네주어서라도 두 사람을 안전히 지켜야 해.”
오소민이 눈을 부릅떴다가 입맛을 다시며 표정을 고쳤다.
어리석을 정도로 답답하지만, 이게 ‘고구마 대장’의 본성인 걸 잘 알기에.
“어이, 그러다가 정말로 사일신력을 얻게 되면…….”
“아무 문제없어. 사람의 길을 저버리고서 얻는 신력이라면.”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 해원기의 대답.
말이 막힌 오소민이 콧등에 주름을 잡다가 피식 웃어버렸다.
“허, 그래. 뭔지도 모르면서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죠, 검왕 나으리.”
녹림호한들이 우스개를 섞어 불렀던 ‘검왕야(劍王爺)’라는 단어를 끄집어내 놀리려다가,
돌연 손을 번쩍 든다.
“이게 두 번째일지도. 녹명은 사일신력을 얻기 위해서 어떤 짓이라도 하겠지. 아까 엄청 잘난 척을 했잖아, 설사 자네가 완전해도 상대가 되지 않을 거라고. 가진 게 아주 많다는 투로. 그런데.”
손가락 두 개를 꼽고서 의미심장하게 해원기를 보는 시선.
그 시선을 마주 대한 해원기의 귀에 전음이 들린다.
[그녀가 마지막에 분석이랍시고 떠든 게 맞나?]
분석이라. 녹명이 언급했던 두 가지를 가리킨다. 백화가 사라져서 삼색지보를 완성할 수 없고, 천살과 귀왕이 소멸해 천손지무가 극경에 다다를 수 없다는.
삼색지보와 천손지무가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지만, 해원기를 낮추어 보던 근거였다.
해원기가 가만히 오소민을 보다가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녹명은 사부님이 마침내 어떤 경지에 이르렀는지 모르는 것 같더군.]
오소민의 눈이 반짝 빛난다.
뭐든지 아는 듯했던 녹명의 빈틈.
오소민 역시 어떤 경지인지 알 도리가 없으나, 황산 천결대(天決臺)의 결전에 관해서는 여덟 사부에게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었다.
삼색지보는 다 잊혔고, 천손지무는 생소하지만.
그 결전을 목격한 이들은 고검협의 검을 특별한 단어로 묘사했었다.
문득 떠오른 기억. 오소민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해 해원기를 보던 시선이 밑으로 떨어졌다.
자신도 모르게 바닥에 쓴 글자.
검왕지왕(劍王之王).
단 한 자루 검이 천하의 모든 검을 구현하고, 천하의 모든 병기를 불러내며, 천하의 모든 무공을 이룬다.
그래서 검 중의 왕, 왕 중의 왕이라 부른다고.
허무맹랑한 얘기라 어린 마음에도 믿지 않았지만,
지금 바로 옆에 앉은 해원기가 바로 그 고검협의 전인, 절세검왕이다.
녹명은 절세검왕을 허풍이라고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