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장 명조운류(命潮運流) (4)
도대체 모르는 게 없다.
노야가 강유행에게 현도관을 넘긴 이후부터의 얘기.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는 가운데 귀를 의심케 하는 내용이 거듭되지만, 믿지 않을 수도 없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다니.
동창을 장난감으로 삼아 현재의 모습으로 키웠다고,
아홉 도적의 겁표 사건부터 이어진 일련의 과정이 전부 해원기를 이곳으로 유인하기 위한 안배였다고.
동창만이 아니다.
천하를 전부 장난감으로 삼은 것과 다름없다. 심지어 지금 해원기와 함께 온 오소민 자신조차도.
마치 세상 전부를 장난감 바구니 속에 넣은 것처럼 뭐든지 다 보이고 뭐든지 다 안다.
딱 하나,
구양금오라는 이름을 몰랐던 것만 빼곤.
이제껏 동창의 배후를 찾아 그 의도를 밝히려고 애썼던 게 허탈할 지경이다.
경수사의 주지가 도연의 계획을 이어받아 강호를 재편하려는 국사면 어떻고,
동창과 이십사아문의 태감 중 하나가 동창성조랍시고 황권을 집어삼키려는 태상이면 또 어떤가.
어차피 눈앞에 앉은 녹명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장난감에 불과하거늘.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이란 녹명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구양금오.”
오소민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고, 해원기가 눈을 가늘게 떴다.
녹명은 재미있게 살아본다는 핑계로 동창을 키웠다지만, 그녀 자신은 동창의 태감도 경수사의 주지도 아니다.
황궁 안에 있어야 할 자들이 강호를 어지럽힐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힘을 갖추었기 때문. 특히 권력과 금력이 잘 통하지 않는 무림에선 무엇보다 무력이 필요하다.
왜 국사와 태상을 내세웠나.
지금 녹명이 이렇게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 건,
그녀의 진짜 목적을 위해서다.
가늘어진 눈 사이로 흐르는 신광, 해원기의 입술이 살짝 비틀렸다.
“어지간히 노야 흉내를 내는군.”
후우우우우.
흙먼지가 제멋대로 일면서 말라붙은 연못이 우는 소릴 내고, 아무것도 올려지지 않은 앙증맞은 탁자가 뭐에 눌린 것처럼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단번에 공간을 뒤덮는 가공할 기세.
그러나 녹명은 도리어 상체를 젖히며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노야 흉내라. 그렇네요. 워낙 보고 배운 게 그거라서. 명운(命運)조차 뒤집을 수 있잖아요. 호호호호.”
칭찬받은 아이처럼 기뻐하지만,
그 웃음에 공간을 뒤덮던 해원기의 기세가 스르르 사라져간다.
뒤로 조금 넘어간 고깔, 이마가 훤히 드러난 것 외에는 옷자락조차 흩날리지 않았다.
해원기의 기세를 아무렇지 않게 풀어내는 실력.
오소민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오소민을 힐끗 본 해원기가 천천히 팔짱을 꼈다.
“재미있나? 나도 조금씩 흥미가 생기는데. 장난감보다 더 중요한 걸 손에 넣었기에 이렇게 직접 나타나 잘난 체를 하겠지?”
웃음이 잦아들고,
“흠, 역시 조금 더 설명해야 이해하겠군요. 현도(玄道)의 자부(紫府)가 사라졌듯이 고죽(孤竹)의 천손(天孫) 역시 이어지지 않았으니까. 뭐, 소공자에게 과거의 난세를 다시 떠들 필요는 없겠지요.”
고깔을 고쳐 쓰는 녹명의 언행에선 여유가 넘친다.
잘난 체. 참았던 잘난 체가 뚜렷하게 드러나면서,
“벽세를 만들어 신주를 뒤집고, 신주를 움직여 지부를 상대하며, 사마가 서로 물고 뜯을 때, 신주를 구원하는 천손의 출현. 백 년이 넘게 걸리는 귀찮은 짓을 되풀이할 만큼 어리석지 않고, 또 이미 실패한 걸 답습하는 바보도 아니니. 계획은 좀 더 간결하게, 목표는 좀 더 명확하도록 했어요. 무엇보다…….”
일부러 말을 끌어 주의를 집중시키고,
“제가 만든 즐거운 장난감 세상이 계속되려면 꼭 필요한 게.”
손에 든 단주를 과장된 몸짓으로 들어 올린다.
“강한 힘이죠. 절대적인, 유일무이한 신력(神力) 말이에요.”
귀를 기울이던 오소민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입맛을 다실 정도로.
“절대적인? 유일무이한? 쩝.”
아름다운 용모에 승복까지 걸쳐서 나름 신비한 분위기까지 느껴지던 녹명이 이렇게나 허망한 소리를 지껄일 줄은 예상치 못했다.
자신이 만든 즐거운 장난감 세상이라니.
제정신인가.
해원기도 굳은 표정으로 눈살을 살짝 찌푸렸으나, 그 시선은 녹명이 치켜든 단주에 머물렀다.
어린아이 주먹만 한 크기의 알이 아홉 개.
본래 단주의 개수는 정해진 게 없다.
흔히 열 개나 열두 개. 목에 건 백팔염주를 보조할 뿐이니까 크기에 맞춰 개수를 정할 뿐이다.
녹명의 단주도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면 아홉 개인 줄 몰랐을 터.
그 이유를 모를 수 없다.
“그래서 십일병출(十日竝出), 예사구일(羿射九日)의 신화에 집착했나?”
한숨이 나올 듯한 심정인데, 녹명은 환한 표정을 짓는다.
“집착이라뇨. 소공자도 어렸을 때 배웠잖아요. 신화가 단순한 환상이 아니란 걸. 사일신화가 그저 영웅이 세상을 구하는 얘기가 아니라 또 하나의 개벽(開闢)에 관한 묘사임을 잘 알면서. 대우(大禹)의 치수(治水)나 구정(九鼎) 따위보다 훨씬 가치 있는. 흐흥.”
묘한 코웃음을 덧붙이면서 단주를 흔들고,
해원기를 향해 깜빡거리는 눈은 차림새와 어울리지 않게 요사스럽다.
“능히 천손강림(天孫降臨)과 비견할 수 있죠.”
해원기의 반응을 보려는 의도인지.
요사스러운 눈이 빠르게 얼굴을 살피지만, 해원기는 눈썹 하나 꿈틀하지 않았다.
“구양금오를 발견했을 때 기뻤겠군.”
“당연하죠.”
“그런데 육악지력만 담겨서 실망했나?”
“실망이라뇨. 오히려 구양금오가 진짜라는 증거라…….”
“그러나 못 찾았지.”
“흐음.”
녹명의 환한 표정이 처음으로 비틀린다.
잠깐의 침묵은 오소민의 비웃음으로 바로 깨졌다.
“흥, 간명한 계획에 명확한 목표라더니. 손을 대기 어려울 만큼 어지러워진 거 아닐까, 장난감 세상? 그래, 그 신력 하나 얻자고 현도관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저버려? 심지어 강 사부는 황궁이든 강호든 세상에는 드러나고 싶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잖아.”
즐거운 장난감 세상을 위해서는 신의도 도덕도 없느냐는 질타가 더해졌으나,
녹명은 비틀린 표정을 감추느라 못 들은 척.
“역시 소공자를 기다린 보람이 있네요. 심보 판에 휘말려 동분서주하더니 알아낸 게 꽤 되나 보죠? 맞아요, 육악지력을 해석한 후에는, 으으음.”
그래도 짧은 신음이 덧붙고.
두 손이 안타까운 듯 단주를 어루만진다.
해원기의 시선은 여전히 그 단주를 향한 채.
“해석이라. 과연 보경을 이용했군. 그런데도 신력을 얻을 수 없었다는 건.”
“어?”
오소민이 비로소 뭔가를 깨닫고 자신도 깜빡이는 눈을 단주로 돌렸다.
보경실에서 해원기가 해주었던 이야기가 떠오르면서 그 연결 고리를 찾았기에.
자부십이경 중의 마지막 거울은 기상제역의 공능을 지녀서 천하의 어떤 신비도 읽어낸다고 했다.
구양금오에 육악이 봉인된 걸 알아내고 끄집어냈겠지.
그렇지만 녹명이 원하는 건 진짜 신력. 바로 하늘에 뜬 아홉 개의 태양을 떨어뜨리고 육악을 봉인했던 그 절대적인 힘.
육악지력은 얻어냈으면서 왜 사일(射日)의 신력은 못 얻었을까.
녹명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보경이 사라졌기 때문이죠. 설마 보경까지 안품(贋品)을 만들어놓았을 줄은. 하여간 노야는 사람 같지 않다니까.”
안품은 모조품. 현도관은 본디 진품을 간직하고 대신할 안품을 제작해주는 곳이잖나.
가벼운 한숨으로 꾸몄지만, 그 한숨에 이를 가는 듯한 원망이 숨겨져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예상했던 답. 해원기가 오소민에게 고개를 돌렸다.
“노야는 기막힌 분이거든. 그렇기에 그런 분이 안품이라도 보경을 남겨놓았다는 게 영 믿기지 않았지.”
기막힌 지혜를 지녀 미래까지 예지한다고 했잖나. 분란의 소지가 될 걸 몰랐을 리 없거늘.
오소민이 코를 찡긋거렸다.
‘영 믿기지 않았지.’ 과거형으로 말한 해원기.
이제는 믿는다는 뜻인가.
오소민의 영민한 머리가 번개 치듯 돌아간다.
‘바부탱이’라고 놀리고, ‘고구마 대장’이라고 욕했었다.
항상 굼뜨고 답답했으니까.
그러나 그건 해원기가 가진 순후한 성격과 선량한 심성의 표현일 뿐. 언제나 그 안에는 오소민을 능가하는 탁월한 지혜가 숨어있었다.
천부의 재지와 초인적인 끈기가 없으면서 어찌 박대정심을 지향하겠는가.
평소와 달리 총명함을 겉으로 드러낸 건 오소민이 빨리 이해하도록 도우려는 마음.
오소민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 어마어마한 양반이니 당연히, 보경이 문제가 될 거라는 걸. 그렇지만, 안품을 남겨두어서, 맞아. 안품이 있다면 진품도 있다는 뜻이라. 단지 그 소재가 어딘지는, 강 사부에게 알려주었다간 자칫…… 그래, 그래서 열쇠를 딴 데 맡기고, 또 그 열쇠를 지하비고의 기관으로 바꾸어두셨구나! 허 참!”
생각을 정리하면서 말이 빨라지다가 기어이 탄성을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강유행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 녹명에게 열쇠를 구한다. 그 열쇠는 본래 보경실을 여는 용도였지만, 강유행이 사용하면서 지하비고는 철옹성으로 변했고.
안품이란 걸 알게 되면 녹명은 당연히 진품을 찾을 터. 보경을 얻은 후에 쓸모없다고 여겼던 열쇠가 다시 필요해졌다. 강유행의 손을 빌려서.
하지만, 강유행이 기다리는 구원의 손길은 그녀가 아니다. 자부가 사라지고 천손도 끊겼으니 현도관에 찾아올 사람은 해원기.
진품을 되찾을 단서요, 강유행은 그 단서를 부를 열쇠니.
해원기가 올 때까지는 현도관을 그대로 둬야만 한다. 자칫 진품을 훼손할 우려가 있기에.
현도관의 전 주인 노야는 이렇게 강유행의 안전을 확보했구나.
이제 알겠다.
녹명이 뭘 노리고 여기서 불쑥 등장했는지.
오소민을 없는 사람 취급하던 녹명의 눈동자가 또르르 구른다.
“듣던 것보다 훨씬 똑똑한 아가씨네. 둔한 소공자가 그동안 큰 도움을 받았겠어. 그럼 내가 왜 소공자를 환영하는지, 그것도 알까?”
어렵지 않은 문제.
해원기와 눈을 맞춘 오소민이 피식 웃었다.
“훗, 어지간히 몸이 달아서. 아, 출가한 여승에겐 심한 말이 되나? 조금 전에 떠들던 절대적인, 유일무이한 신력에 대한 자부심이 무너질까 봐 노심초사했겠지. 자부심뿐 아니라 손수 만드신 장난감 세상까지 전부 무너질 판이라서. 에, 겁이 덜컥? 응?”
기회를 놓쳐서야 쓰나.
화제에서 밀려났던 전세를 단번에 역전한다.
녹명의 안색이 홱 바뀌어 눈썹 끝이 파르르 떨고. 그 모습을 보는 오소민은 통쾌하기 그지없었다.
또륵, 또르륵.
단주가 거칠게 돌아가다 멈추었다.
“똑똑하다니까 금세 건방을 떠는. 노심초사? 겁이 난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기껏 그렇게 경박한 생각 밖에는 하지 못했나. 뭐가 겁이 나서? 누가 감히 무너뜨릴 수 있기에?”
냉정함을 가장한 차가운 목소리.
그러나 확실히 조금 전까지 보였던 여유는 어디에도 남지 않았고,
오소민을 노려보던 시선이 화살처럼 해원기에게 꽂힌다.
“소공자가 익힌 무공이 아무리 대단해도, 절세검왕이니 뭐니 허풍을 떨어도 전혀 관심이 가지 않는걸. 백화가 노야와 함께 사라진 이상, 삼색지보는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고. 귀왕(鬼王)과 천살(天殺)이 다 소멸했으니 천손지무(天孫之武)도 극치에 이를 수 없지. 아니, 설사 천손지무가 완전해도 사일신력(射日神力)에 비할 수 있을까? 게다가 사일신력만이 아니거든. 후후후.”
‘소공자’라는 호칭은 그대로지만.
말투가 바뀌었다.
오소민이 비웃는 바람에 자존심이 크게 상했던지. 해원기를 아래로 깔아뭉개는 말에는 도발이 가득하다.
흩어진 신주의 무공, 벽세의 사황령과 지부의 오대마도. 황궁비고에 숨겨진 실전 절학도 있고, 육악지력도 획득했다. 이것만으로도 차고 넘치는 수준인데.
게다가 사일신력을 이미 얻은 듯하니.
해원기가 팔짱을 꼈던 한쪽 손을 들어 턱을 문질렀다.
“자신 있느냐?”
평소의 무덤덤한 목소리지만, 녹명이 두통이라도 난 것처럼 미간을 찡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