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장 명조운류(命潮運流) (3)
신세의 비밀이라고들 하지만, 오소민 자신은 별반 마음에 두질 않았었다.
일세의 충신 방효유, 보위를 찬탈한 영락제에게 끝까지 저항해 십족구멸의 참형을 당한 사실은.
잊고 싶은, 잊어야 할 기억일 뿐.
개방의 순행장로가 되어 강호를 살아가는 그녀에게는 이미 아무 의미도 남아있지 않다.
개방의 사형들과 풍진삼우처럼 과거의 사연을 아는 이들이 비밀을 지키느라 신경 써주는 것도 괜한 걱정이라고 여겼다.
드러내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굳이 가까운 이들에게 숨겨야 할 필요도 없어서.
해원기에게도 다 털어놓지 않았나.
그러나 지금 녹명이라는 여승의 말을 듣자 돌연 가슴이 쿵쾅거리고 머리가 어찔했다.
충격.
어떻게 아는 건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은 쉬 열리지 않고, 커진 두 눈만이 무섭게 노려보는데.
녹명의 시선은 여전히 해원기를 향한 채.
“이거, 괜한 소리였을까? 소공자는 워낙 맹해서 몰랐을 수도. 하긴, 그러니까 이렇게나 늦게 도착했겠지요.”
해원기는 오히려 몸을 옆으로 돌렸고,
“도착이라.”
녹명의 말을 되뇌며 가만히 오소민의 손을 잡는다.
“괜찮나? 들어보니 우리를 꽤 오래 기다렸던 모양인데, 나는 워낙 맹해서 그런 줄도 몰랐군.”
또 녹명이 한 표현을 고스란히 따라 하자,
꼼짝 않던 오소민의 눈과 입이 비로소 풀린다.
해원기를 향한 눈에 초점이 맺히고,
“어, 괜찮. 흐음, 해 형보고 맹하다니…….”
말과 함께 돌아오는 안색. 마음에 받은 충격을 풀어주려고 해원기가 일부러 손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굳이 ‘맹하다’는 소릴 거듭한 건.
오소민이 평소의 모습을 회복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릴 적에도 그랬어? 남들 앞에서 잘 모르는 척, 어리석은 척. 하긴, 그러니까 이렇게 뻔뻔히 나타났겠지. 흐흥.”
이럴 때일수록 해원기의 도움이 되어야 한다.
녹명의 말투를 고스란히 흉내 내곤 끝에 코웃음까지 덧붙이자,
해원기의 입매가 보일 듯 말 듯 올라갔다.
“그때는 뭐가 뭔지 몰랐거든. 더구나 머물렀던 시간도 짧아서.”
오소민이 괜찮구나.
가볍게 대답하며 다시 몸을 돌렸고.
녹명의 눈이 살짝 흔들린 걸 알아챘다.
노야를 모시던 세 미녀. 해원기가 글공부로 머물렀을 때는 이십 대였으니 지금은 마흔이 넘었을 터.
그러나 고깔 아래 보이는 녹명의 얼굴은 세월이 비껴간 듯 주름 하나 없다.
녹명이 풍성한 소매를 떨쳐 안을 가리켰다.
“오랜만의 재회인데 이건 너무 살풍경하군요. 안으로 드셔서 얘기를 나누지요. 추억도 되새길 겸.”
그녀의 뒤에는 하얀 돌을 깐 오솔길. 나무와 연못으로 꾸며진 작은 후원으로 이어진다.
길을 안내했던 중년인은 언제 사라졌는지. 길을 밝히고 문 위에 걸렸던 등롱도 전부 없어졌지만,
해원기는 눈길 한번 보내지 않았다.
녹명을 앞세우고 오솔길을 차분하게 걸어 한쪽이 탁 트인 마루에 들어설 때까지.
아담한 연못과 그 주위에 꾸민 꽃밭으로 바로 내려갈 수 있도록 아예 난간을 치운 긴 마루. 풍경에 어울리게 앙증맞은 탁자와 낮은 의자 몇 개가 놓였다.
그러나 지금은 한겨울.
바짝 마른 연못엔 아무것도 없고, 주변의 꽃밭도 바짝 말라 흙먼지만.
안으로 청한 것치곤 앙증맞은 탁자 위에 흔한 찻잔도 보이지 않는다.
이 화려하고 큰 누각에 아무도 살지 않았다는 증거.
자리를 나누어 앉자마자 오소민이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오래 기다렸다더니. 그러고 보니 황궁에 거처를 마련했다고 들었는데, 이쪽에 배치한 졸개들도 다른 데서 먹고 잤나 보네요?”
녹명의 소재도 알고, 여기에 안내한 중년인과 등롱도 하찮은 졸개 취급.
녹명이 단주를 슬쩍 돌리면서 미소를 보냈다.
“역시 개방의 장로랄까. 흠, 방 낭자는 처음부터 소공자와 함께 많은 일을 겪었으니. 그래도 지금은 오랜 회포를 푸는 자리이니만큼, 잠시 예의를 갖춰주었으면 좋겠군요.”
함부로 끼어들지 말라는 의미.
오소민이 냉큼 반박하려고 했으나 해원기가 먼저 말을 받았다.
“내가 올 줄 알았다, 예상보다 늦게 왔다. 그런 식으로 말했었지. 무슨 뜻인지 알려주겠나?”
평소보다 훨씬 낮은 음성.
녹명의 눈매가 살짝 올라가면서 미소가 짙어지고,
“호호, 그걸 일일이 알려드려야 할까요? 소공자도 이제는 알았을 텐데.”
놀리듯 웃음을 섞지만,
그건 해원기의 나직한 음성에 놀란 반응이었다.
이런 저음은 해원기가 아니라 해원기의 사부를 연상케 하니까.
그래서 해원기가 다시 묻기 전에 스스로 말을 이어간다.
“처음부터 소공자가 경사로 오리라 예상했거늘. 상보감에서 유출된 보물, 그걸 노리는 정체불명의 아홉 도적. 당장 현도관이 떠오르지 않았을까? 더구나 그 보물을 손에 넣은 후에는 물어볼 데라곤. 왜 엉뚱한 곳만 돌아다녔는지. 쯧쯧.”
처음부터.
오소민이 미간에 주름을 잡았으나, 해원기는 덤덤한 표정 그대로.
“엉뚱한 곳이라.”
“그렇죠. 흥륭과 용문세가를 도울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야 어쩔 수 없다손 쳐도, 낙양을 거쳐 약왕당으로 간 건 너무했어요. 그 이후에도 소림사, 또 서쪽으로 확 빠졌다가 겨우 다시 낙양. 별 볼 일 없는 심보(尋寶) 판에는 빼놓지 않고 끼어들더군요. 그까짓 것들이 뭐 중요하다고.”
“심보 판?”
심보는 보물을 찾는다는 뜻. 그걸 판이라고 하찮게 표현한 녹명이 짧은 한숨을 내쉰다.
“후, 소공자가 그런 곳에 한눈을 팔 줄은 정말 몰랐어요. 기껏해야 전설의 보패이수(寶貝異獸)나 찾는 짓에 불과한데. 할 수 없이 홍운백일품을 내보이고, 황제의 미행(微行)이란 구차한 계획까지…….”
한심스럽다는 표정까지 지으면서,
“역시 당대에는 제대로 지혜를 갖춘 이가 부족해요. 소요원과 소호리로서는 천문노인과 신기수사를 대신할 수 없다는 걸 새삼 깨달았지요. 하아.”
마지막에 덧붙이는 안타까운 탄식.
소요원은 단목정, 소호리는 방온화의 어렸을 적 별명.
그런 것도 아는가.
해원기의 눈이 깊이 가라앉았다.
낙양에서 불쑥 등장한 태백종사. 홍운백일품을 익혔기에 조원록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고.
방온화에게 들은 비록의 내용은 그 출처로 현도관의 강 사부를 연상하게 했었다.
그게 엉뚱하게 ‘심보 판’을 헤매는 해원기를 경사로 끌어들일 수단이었다니.
“결국, 내가 현도관으로 구양금오에 관해 물으러 오길 기대했다는 말이로군.”
해원기의 나직한 음성에 녹명의 고깔이 조금 젖혀졌다.
“호오, 금오혈석이 아니라 구양금오란 이름이었군요.”
고깔 아래에서 반짝 빛나는 두 눈.
오소민이 민감하게 그 의미를 알아채곤 짧게 코웃음을 쳤다.
“흥, 이름도 몰랐구먼.”
그러나 그 비웃음은 해원기와 녹명의 귀에 들리지 않는 듯.
해원기가 곧바로 물었다.
“누구의 뜻이지?”
생뚱맞은 질문이지만,
녹명도, 오소민도 무엇을 묻는지 바로 알아들었다.
또륵, 또륵.
단주가 돌아가고 녹명의 눈에도 기이한 빛이 맺힌다.
“설마 노야라고 생각하진 않았겠지요? 노야는 이미 세상을 벗어나신 분, 아무 관계도 없으시답니다. 잠깐 옛날얘기를 해볼까요. 소공자가 떠난 후의.”
기이한 눈빛은 어떤 감정인가.
녹명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해원기가 고개를 끄덕였고, 녹명은 돌리던 단주를 가슴팍에 대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노야가 스스로 벌을 주어 모든 걸 버리기로 결정하셨을 때, 그 결정에는 우리 셋도 포함되어 있었지요. 혹시 소공자는 들었나요? 우리 이전, 또 그 이전. 속칭 사가삼미가 몇 번이나 바뀌었는지. 우리 셋을 키운 이가 바로 전대의 사가삼미였고, 우리도 본래는 다음 대의 셋을 철이 들 때까지 기른 후에 사라져야 했지만. 흐흠, 운명이란 기묘해서. 마지막에 노야는 우리 셋에게 결정권을 주었죠.”
오소민의 표정이 이상해진다.
홍, 녹, 백의 세 미녀. 다음 대가 철이 들 때까지 기르고 사라졌다니. 대체 몇 대나 이어졌으며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해원기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을 걸 예상했던지 녹명의 말은 계속된다.
“소공자도 알다시피 노야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재보는 건 바보짓. 아마 노야는 우리 셋이 전부 다른 결정을 내릴 줄도 미리 알았을 거예요. 순진해 빠진 백화는 끝까지 노야를 모시겠다고, 줏대 없는 홍작은 망설일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렇지만 나는 세상에 남기를 원했어요. 사람답게 살아볼 기회잖아요. 아니나 다를까, 결정을 내리자마자 노야는 조건을 내걸더군요. 강 사부에게 넘겨준 현도관을 보살피라는.”
오소민이 고깔을 쓴 여승 차림의 녹명을 새삼스럽게 보았다.
세 미녀 중에 처음 만난 녹명. 이름이 다른 만큼 성격도 다 다른 듯. ‘순진해 빠진’ 백화, ‘줏대 없는’ 홍작이라면, 이 녹명은 ‘옹고집쟁이’, 혹은 ‘제멋대로’가 어울린다.
“어쩌면 백화가 제일 편한 길을 택했을 수도 있죠. 죽을 때까지 노야만 떠받들면 그만이니까. 굳이 괜한 족쇄를 찰 필요 없이. 홍작도 나름 영특하게 군 셈이에요. 틈틈이 현도관에 와보겠다는 엉성한 약속으로 슬쩍 발을 뺐거든요. 그 바람에 현도관을 벗어나려던 나는 거꾸로 강 사부를 구명할 책임을 떠맡았다죠. 호호호호.”
기뻐서 웃는 게 아니다.
바짝 마른 연못을 보면서 메마른 표정으로 입에서만 나오는 웃음.
또륵.
단주를 돌리면서 웃음이 뚝 그치고.
“몇 년이 지났을 때 깨달았답니다. 간단하게 생각했던 게 실수라고, 아니, 실수가 아니라 기회란 걸. 세상살이란 게 그렇잖아요, 스스로 재미를 찾으면 되니까. 기왕 맡은 열쇠를 족쇄로 여기지 말고, 그걸로 정말 재미있는 세상을 찾아보자. 그리 마음먹었습니다.”
현도관의 지하비고를 여는 열쇠. 본래 대황실이었다가 보경실로 바뀐 석실의 열쇠.
그 열쇠로 정말 재미있는 세상을 찾아본다니.
묵묵히 듣던 해원기가 비로소 입을 연다.
“황궁에서 장난감을 찾았나?”
장난감이란 단어에 녹명의 시선이 홱 돌아왔다.
“맞아요. 장난감. 소공자는 모르겠지만, 사람 사는 세상 중에 가장 흥미진진한 곳은 바로 황궁이거든요. 강호니 무림이니, 괜히 복잡하기만 하고 야생마처럼 길들일 수도 없는 곳보다야 황궁이 역시. 흐흥, 마침 숙부가 조카를 죽이고 황권을 뺏은 기막힌 변고도 일어났었고. 막상 들어가 보니 그야말로 별천지였어요. 벽세와 지부가 한 덩어리로 뒤섞인 것 같달까. 호호호.”
이번엔 흥겨워서 웃는 웃음이다.
조카를 죽이고 황권을 뺏은 숙부는 성조(成祖) 영락제. 그 뒤를 이은 인종(仁宗)과 선종(宣宗)은 나름 명군이란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벽세와 지부가 한 덩어리로 뒤섞인 것 같다고.
녹명이 찾은 장난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동창을 키웠다?”
“불쌍하잖아요. 사내도 계집도 아니라고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 평생 울타리 안에 갇혀서 남의 시중이나 드는. 자기 처지가 어떤지 좀 깨우쳐주었을 뿐이에요.”
내시들을 깨우쳐주었다지만,
그건 녹명 자신의 얘기다.
해원기가 무거운 표정으로 잠시 눈을 감았다.
잠룡재에서 글공부하던 시절. 홍작, 녹명, 백화는 참으로 극진하게 해원기를 보살펴주었었고,
나중에 사부에게 사가삼미에 관한 얘기를 듣긴 했으나 따로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사부와 탁 소숙도 전혀 다른 사가삼미를 보았었고,
홍녹백으로 붙인 이름이 무림삼보의 의미를 담았으며,
천손을 무의 극경으로 인도하기 위한 자부선생의 안배였다고 해도.
노야와 함께 전부 잊힐 과거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노야는 홍작과 녹명을 남겨두었고. 지금 눈앞의 녹명은 마치 교도인처럼 군다. 도구로 취급당했던 자신의 한을 동창의 내시들에게 모조리 투영해서.
얼핏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으나. 다시 눈을 뜬 해원기의 얼굴은 바위처럼 딱딱했다.
“내시들에게 헛된 욕망과 삿된 지식을 가르친 건 바로 너, 녹명이구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지만,
녹명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똑같이 음성을 낮춘다.
“그렇게 되나요. 뭐, 그래 봤자 장난감에 지나지 않아서.”
“여승 차림. 경수사에 있었나? 국사와 태상은 다 허수아비였군.”
동창의 배후, 새로운 왕조를 세운답시고 날뛰던 자들, 그리고 신화와 전설의 힘을 차지해 강호를 재편하려는 흑막.
국사라는 경수사의 묘능과 태상으로 의심되는 상보감의 태감을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 모든 일을 획책한 자가 바로 녹명이잖나.
그런데.
녹명이 기이한 미소를 머금으며 머리를 젓는다.
“꼭 그렇지는 않죠. 소공자는 가장 중요한 걸 잊었군요.”
가장 중요한 것. 해원기와 오소민이 동시에 인상을 찡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