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354화 (354/410)

제89장 명조운류(命潮運流) (2)

삼색지보가 ‘무림삼보(武林三寶)’의 별칭이란 게 겨우 기억났다.

변화의 극에 이른다는 홍환(紅環), 법식을 바르게 한다는 녹판(綠板), 진정한 존재를 의미한다는 백합(白盒).

그중 하나만 얻어도 능히 천지를 뒤집는 힘을 얻을 수 있다던가.

백여 년이 넘게 강호에 유전된 전설이지만,

십팔 년 전, 오랜 난세를 끝낸 싸움 가운데 그 정체가 밝혀졌다고 들었다.

신주영웅회에서 유불도속(儒佛道俗)의 무공을 융합해 새로운 신공을 창안하게 했던 것이 홍환. 신화에 나오는 마수(魔獸)를 봉인하면서 본래 하늘로부터 내려받은 신통한 힘이 기괴하게 변했다는 녹판, 그리고 신마지력(神魔之力)을 넘어 극경에 도달해야 이룰 수 있다는 백합.

‘뭐 천지보록이 홍환으로 창조한 무공을 실은 비급이라거나, 무지기같은 이수(異獸)가 나오고 사황령이 생겼다는 얘기까지는 그래도 믿을 수 있었지만.’

예전에 여덟 사부에게 수시로 들었던 과거의 이야기다.

신기하기 이를 데 없어서 듣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으나, 어린 나이에도 마지막 백합은 과장이 지나치게 심하다고 여겼었던.

결국, 삼보란 실재(實在)하지 않는 것이잖나.

그런 삼색지보의 존재와 온갖 기상천외한 사술마공의 원형까지 환하게 밝혀낼 수 있다니.

해원기의, 아니, 고검협이 제자에게 해준 말이 아니었다면 헛소리라고 치부했을 것이나,

구양금오를 떠올리자 더욱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의 어떤 신비도 읽어내는 힘.

구양금오에서 육악지력을 끌어낸 것이 바로.

기상제역의 거울 하나가 그런 힘을 지녔다.

오소민이 멍하니 기억을 되새기다가 눈을 깜빡였다.

“여기 있던 거울들은 언제 누가 가져간 거지? 그보다 노야라는 분은 어째서 굳이 보경실이라고 이름까지 바꿔서.”

천교진인 사 노야는 웬만한 지자가 이름도 내밀지 못할 지혜로운 분.

심지어 천기를 뒤집어쓰고 미래를 훤히 내다본다는 양반이 이런 허술한 짓을 왜 했을까.

십이경의 소재를 일부러 알리려 했다고. 해원기가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너무 많았고, 또 하나같이 충격적인 내용이라 얼이 좀 빠지긴 했지만,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하자 오소민의 명석한 두뇌가 빠르게 맥락을 찾아간다.

의문의 답이 곧바로 나왔다.

“그래, 강 사부. 강 사부의 안전을 담보한 건 지하비고의 기관이 아니라 바로 이곳. 유일하게 자물쇠가 채워졌다던 이 보경실이었어. 현도관의 주인이 열쇠를 가지고 지하비고에 들어야만… 흠, 보경실이 잠겨있지 않았고, 이미 비었다는 건 강 사부만 알았을까?”

추리가 성립하려면 전제가 맞아야 한다.

노야를 모시던 세 여인. 해원기가 어려서 글공부할 때부터 아는 사이인데 강 사부가 아는 걸 설마 몰랐을까.

오소민의 두 눈이 반짝반짝.

“강 사부에게만 몰래 알려주었을 수도. 혹은 빈 걸 알았으나 여전히 필요한 게 남아서… 열쇠를 강 사부가 아닌 녹명에게 남겨둔 이유. 강 사부가 직접 열쇠로 지하비고를 열고 들어가야만 발동하도록 설계된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겠구나. 허, 강 사부 자신은 열쇠를 구하러 녹명을 찾아가지만, 실상 녹명에겐 강 사부가 비밀을 풀어줄 열쇠. 하! 이렇게 기막힌.”

시선이 해원기의 얼굴로 향하면서 탄성이 터졌다.

이건 지극히 교묘한 책략.

도대체 천교진인 사 노야라는 자는 어떤 인물이기에.

근거가 부족했지만.

오소민은 자신의 추리가 틀리지 않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열두 개의 거울을 보관했던 보경실은 본래 대단히 특별하게 지어진 대황실.

상자에 넣어서 단단히 자물쇠를 채운 게 아니다. 대황실 자체가 거울을 보관한 상자 역할이고, 거울은 벽면에 일정하게 박아두었다.

특별한 상자에 특별한 배치.

누구든 기이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

왜 하필 대황실을 상자로 삼았나, 왜 열두 개의 거울을 벽면에 박아두었나.

필시 이유가 있다.

그리고선 강유행에게 지하비고를 물려주면서 또 열쇠는 녹명에게 맡겨두었으니.

이 또한 의외의 결정.

자유로이 지하비고를 출입하도록 기관을 변경했다면서, 대황실을 보경실로 바꿀 때 자물쇠도 없앴다면서.

열쇠는 무슨 용도요, 왜 새 주인이 아닌 녹명에게 맡겼는가.

천기를 뒤엎고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을 지닌 노야다.

빈방이 된 보경실에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비밀이 남겨져 있다.

그 비밀을 풀려면 강유행이 필요하다.

머릿속에 폭죽이 연달아 터지는 것처럼 맞물리는 추리.

해원기가 반짝거리는 오소민의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야는 본래 남을 기막히게 하는 분이셨지. 그분이 아무 대책 없이 강 사부에게 현도관을 물려주셨을 리 없네. 물론 어째서 이렇게나 복잡한 계책이 필요했는지는 아직.”

홍작, 녹명, 백화. 이른바 사가삼미(謝家三美)라 불렸던 세 여인은 노야의 충직한 시비였다.

노야가 현도관을 떠나면서 세 여인에게 무슨 변화가 생긴 걸까.

강유행에게 막 얘기를 듣기 시작했을 때는 전혀 이상하지 않았었다.

노야가 현도관을 물려주고 떠난다. 세 여인도 당연히 노야를 모시고 떠난다.

그러나 강유행을 돌보지 않을 수는 없다. 현도관의 사업이란 게 그리 만만치 않으니.

한 명을 수시로 보내 살피고,

한 명은 만일을 대비한 붙박이로 머무르게 한다.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보일 안배였다.

노야을 모시는 일은 백화가 혼자 도맡았나 보다. 첫 삼 년을 잘 버티는지 살펴서 노야에게 알리는 건 홍작이 했겠구나. 그래도 워낙 비밀스러운 사업이니만큼 불의의 사태에 구원을 청할 최후의 보루는 녹명이 맡았겠지.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열쇠와 보경실로 얘기가 이어지자 모든 게 의심스러워졌다.

“왜, 어째서, 무엇 때문에. 아무나 이런 의문을 떠올리진 못하지. 노야를 알고, 강 사부를 알고, 노야를 모셨던 세 여인을 알고, 이 현도관이 어떤 곳인지, 지하비고의 대황실이 어떤 장소인지 아는 사람만이.”

오소민이 좌르르 말을 받다가 결국 코웃음을 덧붙여야 했다.

“흥! 노야라는 분, 해 형 말대로 참 괴팍한 양반일세.”

해원기의 눈이 번쩍 신광을 발했다.

오소민이 말한 모든 조건에 어울리는 사람.

미래를 훤히 내다보는 양반이 강유행을 구하러 올 사람이 누군지 몰랐을까.

천교진인은 해원기를 기다렸다.

그그긍.

지하비고로 통하는 바닥 석판이 완전히 닫혔다.

해원기가 굳은 얼굴로 돌아서자 오소민이 짧게 혀를 찼다.

“여기가 가장 안전할 거라며. 안에서야 이렇게 열고 나올 수 있어도, 일단 닫히고 나면 다시 강 사부가 열어줄 때까진 누구도 들어갈 수 없다고 했잖아. 세 시진은 푹 주무실 거야. 그런데 황궁이라고만 해서야. 쩝.”

강 사부를 혼자 놔두고라도 움직여야 했다.

모든 의문의 핵심은 녹명. 직접 만나서 들어야 한다.

다만, 녹명의 소재를 구체적으로 묻는 걸 깜빡했다. 황궁에 거처를 만들었다니.

강유행을 다시 깨워 물어야 했는데, 해원기는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 녹명이 어디 있는지 아는 듯해서 오소민도 그저 따를 수밖에 없었고.

지상으로 나온 후에야 슬쩍 묻는 건데.

해원기는 말없이 밖으로 나간다.

여전히 심각한 표정이라 오소민이 괜스레 자꾸 입을 열게 되다가,

“그나저나 강 사부는 해 형의 사부님이나 탁 대협이 오는 거로 여겼지, 해 형이 올 거라곤 생각도 못 했을 거야. 흐흥, ‘지은 복연이 아직 남아서 죽음을 면한다’라. 노야라는 분, 괴팍한 걸 넘어서 고약하다는 인상까지 드는걸. 해 형에게 글을 가르친 인연이 바로 ‘지은 복연’이잖아. 진즉 해 형이라고 알려준 것과 마찬가지…….”

말끝이 흐려지면서 해원기를 따라 멈추어 섰다.

퇴락한 현도관의 작은 뜰.

가운데 우뚝 선 해원기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려서.

“녹명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시오.”

“?”

이게 뭐 하는 건가.

혼잣말처럼 작은 음성이요, 뜰에는 오소민 밖에 없거늘.

그러나 의아하게 여길 새도 없이 오소민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파파파파팍.

현도관을 사방으로 에워싼 고루거각들. 높다란 처마 끝에서 일제히 등롱이 켜지면서 주위가 삽시간에 환해지고,

현도관의 닫힌 쪽문을 열고 조용히 들어서는 한 사람.

“삼가 명을 받습니다.”

머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깊숙이 꺾고 모아 쥔 두 손을 높이 쳐드는 바람에 용모를 알 순 없지만,

지극한 예를 취하는 중년인은 언제부터 있었는지. 전혀 기척이 없었다.

해원기가 불러줄 때까지 기다렸던가.

예를 마치고서도 상체를 한껏 숙인 자세로 뒤로 물러나고,

해원기는 서슴없이 그 뒤를 따른다.

높다란 담장 사이의 좁은 골목. 경공으로 공중에서 보았을 때보다 직접 걸으니 더욱 좁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등이 굽은 것처럼 잔뜩 수그린 채 앞장선 중년인. 언행 하나하나에 해원기를 공경하는 티가 나지만.

처음 보는 인물이다.

현도관에 들어와서 정중하기 이를 데 없는 예를 표한 후에는 입 한번 벙긋하지 않고,

해원기 역시 이름조차 묻지 않았다.

한 사람이 겨우 다닐 폭이라 중년인 다음에 해원기, 해원기 뒤에 오소민. 한 줄로 골목을 걷기 시작하자 주위를 밝혔던 등롱이 흔들거리며 따라붙는다.

현도관의 뜰을 비추다가 좁은 골목의 좌우로. 마치 해원기를 옹위하듯이.

그것도 채 일 각이 되지 않아 하나씩 꺼지고,

중년인이 몸을 돌려 미끄러지듯 물러나며 작은 문을 가리키자 단 두 개의 등롱 만이 문가에 걸렸다.

여전히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으니 어떻게 한 건지. 등롱이 의지를 지닌 생물 같다.

“드시지요.”

해원기도 신기했던지 중년인의 청에도 잠깐 등롱을 쳐다보다가 시선을 오소민에게 돌렸다.

“공교롭게도 여기였구려. 방 낭자.”

현도관을 발견했을 때, 오소민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던 곳. 현도관 옆에 커다란 나무가 줄지어 섰고 그 나무보다 높은 지붕이 보였던 건물이다.

해원기가 글공부했던 장소인 줄 알았던.

굳이 ‘방 낭자’라고 부른 건 오소민의 신분을 숨기려는 것이겠지.

오소민이 고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으려는데,

“호호호, 맞아요. 소공자가 머물렀던 잠룡재. 언젠가 돌아오실 걸 기대하고 다시 지었지요. 참으로 오래 걸렸네요.”

작은 문을 넘어 전해지는 맑은 음성.

정수리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뜨는 청량한 목소리다.

해원기가 미간을 좁히면서 안으로 들어서고,

오소민이 뒤를 따르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운데가 뾰족하게 일어선 삼각형의 하얀 첨정모(尖頂帽). 이른바 고깔이라고 하는 큰 모자를 쓰고 목에는 백팔염주를 둘렀으며, 회색 승복 위에 붉은 가사를 걸친 늘씬한 몸매의 여인이.

웃음을 멈추고 손에 쥔 커다란 단주(短珠)를 들어 합장한다.

“빈니(貧尼) 녹명이 소공자의 귀가를 환영합니다.”

여승이다.

오소민이 힐끔 해원기를 보았다.

기척을 느끼진 못했으나 현도관을 지켜보는 눈이 있었을 것이다. 강유행이 지하비고로 피신했을 때부터, 아니, 그전부터였을 지도.

해원기와 오소민이 지하비고에 들어간 걸 알고서도 다시 나올 때까지 기다렸고,

해원기가 녹명을 찾으리라는 것도 예상했다.

해원기 또한 짐작했던 듯하지만, 현도관의 바로 옆인 과거 잠룡재의 자리일 줄은, 그리고 녹명이 여승이 되었을 줄은 몰랐을 터.

너무나 의외였을까.

언제나 고리타분하게 예의를 차리던 해원기가 녹명의 인사에 답례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

잔뜩 찡그린 표정에 손바닥으로 턱을 문지르기만.

그런 반응이 즐거운지 녹명이 고개를 들며 미소를 지었다.

“많이 놀라셨나 보네요. 그럼 먼저 방 낭자, 아니, 개방 순행장로인 유룡개와 인사를 나눌까요?”

고깔에 가린 이마, 길게 뻗은 진한 눈썹과 흑백이 분명한 두 눈. 곧게 뻗은 콧날 아래에는 단정하게 맞물리는 입술.

한번 보면 잊지 못할 또렷한 인상의 미모가 드러났다.

오소민이 자신의 신분이 밝혀진 걸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

그러나,

“과연. 다 알고 있군.”

불쑥 나온 해원기의 말에 오소민을 향하려던 녹명의 시선이 도로 돌아가고,

합장을 풀면서 단주를 가볍게 흔든다.

“설마요. 십족구멸을 당한 방효유가 유일하게 남긴 혈육이 이렇게 예쁜 아가씨인 건 이제야 알았는걸요.”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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