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장 명조운류(命潮運流) (1)
“이건 책에서만 보았던 은호(銀狐)의 호구(狐裘), 또 이건 백호(白虎)의 가죽. 정말 별의별 것이 다 있네.”
찾아낸 거로 강유행을 덮으면서 오소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강유행의 수혈을 짚어 일단 재웠으나, 그대로 벽에 기대어 있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탁자 위를 치워 침상으로 삼은 후에 이 지하비고를 뒤져 침구가 될만한 것들을 찾아봤는데.
보이는 것이 죄다 기막힌 물건들뿐이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이 정도면 황궁비고에 버금가는 거 아냐?”
가까운 몇 군데 석실을 둘러본 것만으로도 놀랄 지경.
금은보화, 서화나 도자기 같은 것도 있긴 했으나 태반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것들이라. 그냥 구경만 했는데도 저절로 들뜬 심정이 되나 보다.
물론 무거워진 해원기의 심정을 생각해서 일부러 과장하긴 했어도.
중원에서는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은호나 백호다. 가치를 얼마나 매겨야 할지 모를 귀중품.
강유행의 손발을 주물러 기운을 풀어주던 해원기가 고소를 지으며 일어났다.
“나도 모르지만. 황궁비고에 들어가야 할 게 여기 있는 경우도 적지 않을걸.”
황궁비고에 들어가야 할 것.
은호나 백호도 일반적으론 공물로 들어오고, 귀중품일수록 황제에게 진상된다.
이 현도관은 진품을 보관하고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의 모조품을 제작해 건네는 곳이라고 했으니.
횡령이나 착복.
오소민이 금방 말뜻을 알아듣고는 짧게 코웃음을 쳤다.
“흥, 왕공귀족? 권문세가? 알고 싶지도 않아. 자, 이제부터 어떻게 하지? 강 사부를 마냥 여기에 두기는…….”
“지금은 여기가 가장 안전할 거야.”
오소민이 이불이 된 백호 가죽을 매만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해원기나 오소민 모두 낯선 경사. 아는 곳도, 믿을만한 이도 당장은 찾을 길이 없다.
그런데 이어지는 해원기의 말에,
“태사야(太師爺), 노야가 허튼 예언을 했을 리 없으니까.”
오소민의 시선이 바로 돌아갔다.
“태사야?”
“음. 예전엔 태사야라고 불렀지. 이 현도관을 만든 천교진인(天巧眞人) 사(謝) 노야를. 그야말로 통천달지(通天達地)의 지혜를 지니셨거든. 우선 대황실로 가보세.”
현도관 전 주인의 성이 사 씨요, 외호가 천교진인이며, 엄청난 지혜를 지녀 미래를 예지한다는 것.
전부 처음 듣는다.
채근한다고 쉬 답을 대는 해원기가 아니란 걸 잘 아는 오소민은 기다렸고, 이렇게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귀한 보물의 진품을 보관해주고 대신 정교한 모조품을 만들어 건넨다. 자연히 내밀한 사정을 속속들이 알게 되지. 세상의 분란은 전부 사람의 헛된 욕심에서 일어나니까. 그렇게 이 현도관에 가만히 앉아있어도 천하를 훤히 꿰뚫어 볼 수 있다네. 무서운 분.”
덤덤한 해원기의 목소리지만, 오소민은 뒷머리가 선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강유행에게 현도관을 넘기면서 강호와의 거래를 끊으라고 했다니, 그전까지는 황궁과 강호를 전부 살폈다는 뜻.
개방의 순행장로인 오소민이 정보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를 리 없고.
“게다가 세상에 전해지지 않는 고대 선지식(先智識)의 유일한 계승자. 선천이니 후천이니, 역(易)과 상수(象數)뿐 아니라 점복(占卜) 같은 것까지 세상에 처음으로 전한 분의 후손이라서.”
이어지는 말에는 어깨가 움찔한다.
이른바 신화와 전설. 역사의 시원(始原)에서부터 존재한 지혜라니.
아득한 신대(神代)의 모든 비밀을 안다는 말이잖나.
현재의 천하를 훤히 꿰뚫는 사람이 아득한 신대의 비밀까지. 그렇다면.
“과거와 현재를 통해 미래를 통찰한다고 하지. 노야는 통찰이 아니라 예지라고 해야 옳아. 강 사부가 어떤 일을 당할지도, 내가 강 사부를 구하러 현도관에 올 것도 미리 알았을 거야.”
“에?”
진짜 신선이냐.
“표현이 좀 심했을까. 뭐 적어도 강 사부를 지킬 방안은 준비해 놓았으니까. 이 지하비고, 그리고 녹명에게 열쇠를 맡겨서.”
놀라운 얘기가 계속되는데, 오소민의 총기는 이런 순간에도 빛난다.
“가만. 이 지하비고의 기관은 해제되어서 굳이 열쇠가 필요하지 않다고, 그런데 녹명 소저에게 맡겨둔 열쇠에다가, 해 형의 사부님과 탁 대협만이 아는 암호… 혹시 그 열쇠가 중요한 열쇠?”
이상한 말이라도 그렇게 되물어야 했다.
“응. 예전에 노야에게 이 지하비고에 관해 따로 들은 게 있고, 열쇠라는 얘기에 잠깐이나마 기관을 살펴보았거든. 그 열쇠, 아무나 쓸 수 있는 게 아니야. 노야가 분명히 특별한 법인(法印)을 새겨서 강 사부만이 운용하도록 했겠지. 특히…….”
“그렇군! 강 사부가 열쇠를 사용해 지하비고로 들어온 후로는 다른 이가 함부로 기관을 열지 못하고. 특별한 암호를 대지 않는 이상 강 사부가 밖으로 나올 일은 없을, 그리고 설사 그 특별한 암호를 안다고 해도 감히 시도할 엄두가 나지 않는. 열쇠에 또 하나의 중요한 비밀이 담겨있구나.”
생각을 급하게 정리하느라 말이 뚝뚝 끊기지만,
해원기가 고개를 돌리며 눈가에 주름을 잡는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그래서 지금 대황실로 가는 거지. 본래 그 열쇠에 맞는 자물쇠가 있었던.”
과연 오소민이다. 말재주 없는 해원기의 어설픈 설명에도 금방 의도를 깨닫는다.
강유행의 얘기를 통해 알게 된 사실.
그 열쇠는 녹명이 쥐고 있다.
과거에 교도인을 모셨던 세 미녀. 홍작, 녹명, 백화라 불렸고, 현도관을 강유행에게 물려주고 떠나면서 이 세 미녀도 함께 사라졌을 줄 알았다.
물론 교도인이 이 세 미녀에게 일정 기간 강유행을 돕도록 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랬다면 교도인이 굳이 이렇게 번잡한 안배를 한 이유가 무엇인가.
삼 년간 가끔 찾아와 살펴본 홍작, 아예 황궁에 거처를 마련한 녹명, 그리고 종적을 감춘 백화.
새로 현도관을 맡은 강유행이 기반을 다지도록 도운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것 같다.
어쩔 수 없는 큰 화가 닥치면 녹명에게 열쇠를 받아 찾아오는 이가 있을 때까지 지하비고에 숨어라.
그 열쇠는 원래 대황실의 자물쇠를 여는 용도고, 찾아올 이는 사부나 탁 소숙처럼 암호를 아는 이들.
아니, 암호는 중요하지 않다. 해원기와 같이 잠룡재에 머물렀던 추혼도 손유상도, 사부의 동료인 철금선생 종지음도 아니까.
암호는 단지 강유행이 자신을 찾아온 이가 누군지 확인하는 수단에 불과할 뿐.
남은 건 열쇠.
왜 녹명에게 맡겼을까. 왜 녹명은 열쇠를 넘겨주고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을까.
강유행만이 쓸 수 있도록 법인이 새겨져서, 또 열쇠만 넘겨주면 자신의 책무는 다한 셈이라서.
그렇게 여기기에는 수상한 점이 많았다.
열쇠는 자물쇠를 여는 용도.
교도인이 열쇠에 숨긴 비밀은 자물쇠에 있을 터.
강유행의 피신과 조원록의 실종. 그 답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해원기가 발을 멈추자 오소민이 얼굴을 들이댄다.
“그 노야라는 분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야? 지난 과거를 다 알고, 현재를 꿰뚫어 보며, 미래를 예지한다니. 그야말로 신선이나 다름없는, 흐음, 그래도 이렇게 복잡한 수수께끼를 내는 거 보면 어지간히 괴팍한 성격이거나. 아니면 미래를 알기는 해도 바꿀 수는 없다는. 속칭 천기는 섣불리 누설할 수 없다는 그건가?”
스스로 똑똑하다는 걸 아는 오소민이라 지혜로운 이라면 더 관심이 간다.
용문세가의 지낭이라는 오보혜, 과거에 천하제일지로 불렸던 천문노인의 제자인 단목정, 난세를 구했던 신기자 전자방을 잇는 방온화.
당대의 지자(智者)들을 만나보았지만, ‘천교진인 사 노야’라는 양반은 아예 사람이 아닌 것 같다.
해원기의 얘기를 들을수록 궁금증이 더 커졌나.
해원기가 바로 앞을 가로막은 석문을 보면서 픽, 웃었다.
“괴팍한 건 맞는데, 천기라. 훗.”
왜 웃을까.
그러나 석문을 더듬으며 이어지는 말에 오소민이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떨었다.
“천기를 마음대로 뒤집었던, 씻지 못할 죄를 지은 분이라네.”
말도 되지 않을 소리.
어찌 사람이 천기를 마음대로 뒤집을 수 있단 말인가. 신선이라도 불가능할 것을.
그그긍.
엄청나게 두꺼운 석문이 스르르 옆으로 밀려난다.
오소민이 놀란 마음을 추스르다가 그 두께에 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침구를 찾으려고 열었던 석문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데. 해원기가 어디를 건드렸는지 부드럽게 열린다.
“천근, 아니, 만근은 될 것 같은.”
“이 안에 희귀한 오금정(五金精)을 채워서 깨지지도 않는다고 들었네. 밖에서야 열쇠로 기관을 움직여 쉽게 열어도, 안에서는 오로지 힘으로만 열 수 있다지. 그렇지만…….”
어디에도 자물쇠는 없고.
해원기와 오소민이 들어간 곳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강유행의 말대로 빈방.
오소민이 한 바퀴 둘러보면서 머리를 갸웃거렸다.
“모양이 다르네. 사각형이 아니라 원형이고, 천장도 둥그런 듯. 그리고 벽을 따라 파놓은 원형 무늬가, 열두 개?”
해원기의 눈이 신광을 뿜기 시작한다.
오소민이 살펴보기 전에 이미 동시안이 벽면에 새겨진 열두 개의 원형 무늬를 찾아냈고,
“대황실은 본래 일종의 연공관(練功關)이었어. 만근 거석을 물샐 틈 없이 쌓아 만든 밀폐 공간, 이 안은 성모봉(聖母峰)의 꼭대기처럼 희박한 공기에 엄청난 압력이 작용해서 절정고수라도 견디기 어려운 곳인데. 강 사부 말씀처럼 평범한 빈방이 되었군. 하지만.”
“하지만?”
“강 사부만 몰랐을 뿐. 평범한 석실은 아니야.”
“응?”
오소민이 뭘 놓쳤나 싶어 다시 시선을 돌리기 전에 해원기의 말이 먼저 이어진다.
“과연 이게 열쇠였어.”
또 저 혼자 아는 소리. 샐쭉한 오소민의 눈꼬리가 올라가지만, 해원기가 손을 들어 가리키자 어쩔 수 없이 그 손끝을 따라가야 했다.
“저 열두 개의 무늬는 거울을 끼워두었던 자리. 노야가 이곳의 이름을 보경실로 바꾼 건 여기에 십이경(十二鏡)이 있다고 여기라는 거야. 특히 맨 마지막에 있어야 할 거울은 다른 열한 개의 거울을 이끌어 정녕 통천달지할 능력을 발휘하지만, 단독으로도 한 가지 신기한 힘을 지녔다고. 사부님이 자세히 설명해주셨었지.”
해원기의 손끝을 따라 열두 번째의 무늬에 초점을 맞추던 오소민이 고개를 돌렸다.
현도관의 전 주인인 천교진인 사 노야를 거론하다가 갑자기 튀어나온 해원기의 사부님.
“한 가지 신기한 힘이라.”
“거울은 한때 성색식통령(聲色識通靈)이라 불렸고, 그 이유는 기상제역(寄象鞮驛)의 힘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저 사방의 언어를 소통하는 힘이 아니란다. 세상의 어떤 신비도 읽어내는 힘. 제대로 쓸 줄 알았다면 삼색지보(三色之寶)의 존재도, 사술마공(邪術魔功)의 원형도 미리 밝혔을 것이라고.”
사부님이 해준 말을 고스란히 되새긴다.
성색식통령은 뭐고, 기상제역은 또 뭐며, 삼색지보에 사술마공의 원형이라니. 생경한 단어가 거듭되는 바람에 오소민조차 눈을 깜빡여야 했지만,
그보다 단 하나의 구절에 눈썹이 불끈 일어선다.
“세상의 어떤 신비도 읽어내는 힘이라고? 그럼.”
동창이 세속의 권력에 몰두하는 걸 넘어서 황권만이 아니라 강호까지 집어삼킬 야욕을 머금은 계기.
언제나 오소민의 뇌리를 맴돌던, 지금까지 누구도 풀지 못했던 문제.
구양금오다.
비로소 해원기가 열쇠라고 한 의미를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