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8장 경사은비(京師隱秘) (4)
울적한 화제는 빨리 바꾸는 게 낫다.
오소민이 미소를 지우고 물었다.
“동창의 위협 때문에 이곳으로 피신하셨나요? 언제부터 계셨던 거죠?”
강유행이 이제까지 한 얘기는 과거의 일이다.
해원기가 열 살 때쯤 글공부를 했다고 했으니까 대략 십팔 년의 세월이 흘렀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다.
본래는 강유행, 강유행의 할머니, 그리고 조원록이라는 호위무사 셋이 살았고. 이 현도관의 원래 주인인 ‘노야’라는 분이 홍작이라는 아가씨를 가끔 보내 살펴보았단다.
그 기간이 삼 년.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무렵에는 홍작이라는 아가씨도 왕래를 끊었다.
그러면 남은 기간은 십오 년. 강유행과 조원록 둘이 현도관을 꾸려온 시간은 공교롭게도 동창이 차츰 발호했던 시기와 맞물린다.
동창이 현도관을 이용했다. 동창은 처음부터 현도관을 주목하고 있었다.
금년에 들어서야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달은 강유행. 그러나 조원록이 실종되었다. 십오 년을 의지했던 사람이.
강유행도 해원기의 어깨에서 손을 내리며 오소민에게 고개를 돌렸다.
“맞소. 조 아저씨가 행방불명 된 일에 수상한 점이 많아서 그간 쌓은 인맥을 최대한 동원했었지요. 그런데……·.”
예전부터 거래한 단골들과 십오 년 동안 알음알음 넓혀간 규모. 현도관이 경사에 구축한 인맥은 절대 하찮은 게 아닐 터.
말을 끌던 강유행의 표정이 굳어진다.
“얼마 되지 않아서 그 인맥조차 끊기기 시작했소이다. 왕공귀족은 병이 들어 두문불출이거나 아예 멀리 여행을 갔고, 권문세가는 죄를 지어 일가가 도륙이 나거나 하룻밤 새에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거나. 그게 협박이란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손발이 다 묶인 셈이라. 흐으음.”
다시 물어보나 마나.
왕공귀족과 권문세가를 이렇게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곳은 동창뿐이다.
강유행이 의지하는 조원록을 먼저 없애고, 다음에는 강유행을 완전히 고립무원의 처지로 만든다.
본래 비밀스러운 장사를 하던 현도관이다. 숨도 쉬지 못하게 눌러놓고 고분고분하게 말을 듣도록 길들일 셈이었을까.
오소민이 문득 손을 들었다.
“잠깐만요. 이전에 혹시 무슨 비록, 그러니까 경수사의 주지였던 도연이 무림을 제 입맛대로 재편하려 했다는 비밀스러운 기록을 넘겨주신 적이 있지 않나요? 그 누구더라, 요동 쪽 표국의.”
“호아도 계운산, 계 숙부.”
해원기가 오소민의 기억을 보충해주었다. 배회촌에서 방온화로부터 들었던 내용.
강유행이 어, 하는 얼굴로 해원기와 오소민을 번갈아 본다.
“그걸 어찌……, 설마 벌써 계 국주를 만났던 거요? 동창이 강호를 어지럽힌다는 우려에 만일을 위해 정리한 걸 계 국주에게 맡겼었고. 가능하다면 은공께 전달되길 바랐소만. 그게 춘분이 지났을 때니까 벌써 반년이 넘었구려.”
뜻밖의 대답. 이번에는 오소민이 눈을 깜빡거렸다.
“아까, 강 사부께서 해 형과 연락이, 아니, 해 형의 사부님과 연락이 닿을 줄 알았. 이상하군요. 이 지하에 얼마나 계셨지요?”
도연에게서 당대의 경수사 주지인 묘능에게 전해졌다고 여겨지는 책략.
황궁에서도 극비였을 그 내용을 정리해서 넘겨준 사람은 과연 강유행이었다.
그러나 그건 봄에 있었던 일. 그 비록을 계운산에 넘겨주고, 계운산이 또 흥륭상단에게, 흥륭에서 마침내 방온화의 손에 들어갔지만.
그 비록을 구원 요청의 신호로 보는 건 억지. 시간도 맞지 않는다.
하지만, 강유행이 기력을 막 되찾고서는 해원기와 연락이 닿을 줄은 예상치 못했다고 했었다. 연락은 했다는 의미.
해원기든 해원기의 사부든 구원하러 올 거라는 기대가 있었기에 이 지하비고에서 피골이 상접할 때까지 버텼을 텐데.
즉, 계운산에게 건네준 황궁의 비록은 전혀 별개의 일이다.
이상함을 느낀 오소민의 질문이 조금 급해졌고, 해원기의 미간에도 주름이 잡힌다.
비록 배회촌에서 비록의 입수 경로를 듣고 현도관이 염려되어 찾아오긴 했으나, 실제로 강유행에게서 직접 소식을 들은 적은 없잖나.
“상강(霜降)이 되기 전에 최후의 연락을 부탁하고 들어왔으니까, 얼추 한 달이 지났군요. 그런데 어떻게 계 국주를 만났소? 일 년에 딱 한 차례, 봄이 되어야 경사에 들르는 표행이거늘. 그간 소공자와는 계속 연락을 했나 보오.”
해원기의 미간 주름이 더 깊어졌다.
이 또한 전혀 모를 얘기.
구양금오의 겁표사건으로 무림에 발을 들인 해원기다.
동창에 겁박 당하던 흥륭이 해원기의 무림출도를 정식으로 목격하게 되었고, 그래서 흥륭의 옛 인연인 황룡칠절이 백방으로 해원기를 도울 방도를 찾으면서.
계운산을 통해 구한 황궁의 비록을 해원기의 소숙모인 방온화에게 전달했을 것이라고.
그렇게 추정했었다.
강유행이라면 해원기가 동창과 대적한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어떻게든 황궁의 비밀스러운 사정을 알려주려 했을 테니까.
그런데 여기 현도관에서 해원기를 만나기 전까지 강유행은 해원기의 소식을 전혀 몰랐었다.
해원기가 오소민을 잠깐 보고 강유행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닙니다. 계 숙부의 이름도 얼마 전에야 우연히 들은걸요. 사부가 그, 도연이 세운 책략, 황궁의 비록을 계 숙부에게 건네신 목적이.”
“음? 그건, 어떻게 말해야 할지. 에, 실은 노야와의 약속을 어긴 셈이지요. 노야께선 나에게 현도관을 물려주실 때, 강호 쪽으론 거래하지 말라고 하셨소. 그저 경사에서 기존의 형태를 유지하라고. 노야께서 지니셨던 강호 쪽 소식망도 전부 정리하셨으니까. 하지만, 아까 말했듯이 거래가 확대되면서 황궁의 기밀이 들릴 때도 있었고, 그 기밀이 또 강호와 관련이 있는 듯해서. 후우, 은공과 은공의 아우 분이 모든 걸 바쳐 지켜낸 곳이잖소. 만분지일이라도 은혜를 갚을 수만 있다면.”
은공과 은공의 아우 분.
바로 해원기의 사부인 묵세휘와 소숙인 탁관영이다.
강호니 무림이니 잘 알지는 못해도 무림인인 두 사람에게 보탬이 되고 싶었다. 물론 원한다고 만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지만.
다행히 이어진 인연 한 가닥이 남았으니. 바로 잠룡재에서 함께 지냈던 추혼도 손유상. 묵세휘의 벗인 손유상의 소개로 그의 의제 계운산과 안면을 텄고, 계운산이 마침 요동의 유명한 표국 주인이라 일 년에 한 번씩 공물(貢物)을 경사까지 운송하면서 연락을 취할 수 있었다.
“유일하게 강호와 연결되는 계 국주에게 맡기면 어떻게든 은공께 전해지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었고, 허, 그런데 소공자는 누구에게서 그 비록을?”
“그건 탁 소숙…….”
“조금 꼬이긴 했지만, 강 사부께서 생각하신 대로 전해졌답니다. 큰 도움이 되었지요. 말씀을 듣다 보니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고초를 겪으셨는데, 계 국주를 제외하고 달리 연락할 곳이 없었습니까? 조 아저씨란 분의 행방을 찾아줄. 혹시 속가의 다른 고수나 회하방이란 이름을 아시는지?”
배회촌에서의 얘기를 하려면 말이 길어진다.
오소민이 얼른 나서서 다시 물었고, 강유행이 바로 머리를 흔들었다.
“조 아저씨가 만났던 몇 사람 빼곤 아는 이가 없지요. 회하방도 금시초문이외다.”
오소민이 이미 예상했던 대답이라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궁에 은신했었다는 백가장 도자명으로부터 속가의 한 가닥 맥이 이어졌다고 했다. 백가장 도자명의 후예라는 이진원의 소재는 묘연하고, 얼마 전에 마주쳤던 서문창의 정체는 아직 불분명하다.
조원록이 알던 속가의 고수들이 누군지는 몰라도 이들과 관련이 있을 터. 그러나 현재는 조원록과 마찬가지로 흔적도 찾을 수 없게 사라져버렸다.
또한, 상덕공주에게 일월표객을 소개했던 회하방 쪽도 강유행은 모른다.
‘유일하게 강호와 연결되는 계 국주’라고 했듯이.
그렇다면.
오소민이 잠깐 숨을 돌리는 시늉을 하곤 두 손을 모아 쥐었다.
“저, 처음에 해 형의 암호를 들으시곤 해 형의 사부님인 줄 아셨던 것 같던데. 그리고 조금 전에 상강이 되기 전에 최후의 연락을 부탁하셨다고. 외람되지만, 강 사부께서 이곳으로 피신한 과정을 자세히 알려주시겠습니까?”
강유행이 겪은 일은 해원기와 오소민이 예상했던 것과는 조금씩 어긋나고 있다.
의문이 겹치면서 자꾸 캐묻게 되어서 남들이 보았다면 문초라고 오해할 수도.
그래서 오소민은 일부러 분위기를 늦추어 부드럽게 질문을 정리했다.
기묘한 느낌.
사실이 조금씩 어긋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분명히 있는데, 그 핵심을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
뭐지?
이름을 숨겨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살아가는 강유행과 조원록.
강호와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던 이들이 왜 갑작스레 이런 희한한 일에 휘말렸을까.
황궁의 비록을 유출한 죄라면 동창이 평소 하던 대로 다짜고짜 강유행을 잡아다 벌을 줬을 것이다.
조원록이 익힌 속가 절학이 탐났다면 동창이 이제 와서 조원록을 잡아 가두었을 리 없다. 태백종사라는 자가 추분부터 홍운백일품을 익혔을 리 없잖나.
뭘 놓친 거지?
오소민이 완곡하게 묻자 강유행도 수염을 쓰다듬으며 여유를 되찾았다.
“흠, 소공자의 벗이니 숨기지 않고 말하겠소. 본래 노야 곁에는 수발드는 세 분이 있었는데, 백화(白花) 소저는 아득히 먼 곳으로 떠났고, 홍작 소저는 아까 말한 것처럼 가끔 살피러 왔었으며, 마지막 녹명(綠茗) 소저는 황궁에 거처를 마련했다오. 왜 세 분 소저가 뿔뿔이 흩어졌는지는, 현도관을 이어받은 내가 걱정되어서인지 다른 이유인지는 모르겠고. 그저 노야께선 떠나시기 전에 한 가지를 일러주셨지요.”
현도관의 전 주인인 ‘노야’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 못하는 오소민으로선 상당히 신기한 얘기지만,
강유행의 말이 이어지면서 해원기의 눈은 깊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어찌할 수 없는 큰 화가 닥쳐도 지은 복연(福緣)이 아직 남아서 죽음을 면할 것이라고. 그때는 반드시 녹명 소저에게 맡겨둔 열쇠로 지하비고를 열어 누군가 찾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목숨을 구한다고 하셨소이다. 은공과 은공의 아우만이 아는 암호도 함께 가르쳐주셨고요. 말씀드렸다시피 조 아저씨가 행방불명된 후에 이어진 일련의 사태,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큰 화라고 여길 수밖에 없었고. 최후의 연락이라고 할 만한 곳은 녹명 소저뿐이었으니.”
오소민의 시선이 저절로 해원기를 향한다.
백화, 홍작, 녹명. 기루에 가면 흔히 들을 수 있는 이름인데.
강유행의 말에서는 마치 선녀를 묘사하는 듯하다. 그러면 그 주인인 ‘노야’는 신선쯤 되려나.
기막힌 예언처럼 복연이 어떻고, 목숨이 어떻고.
요컨대 녹명이란 아가씨에게 열쇠를 받아 지하비고에 숨어있으면 암호를 아는 묵세휘나 탁관영이 찾아올 것이라는 얘기다.
강유행으로서는 당연히 ‘은공’이 찾아올 것이라고 믿었기에 한 달 넘게 버틸 수 있었으리라.
왜 강유행이 처음에 ‘은공’으로 착각했는지 그 이유는 알았지만.
실제로 녹명이란 아가씨가 연락을 취한 것은 아니잖나.
허무함마저 느껴지는 대답이라 오소민이 눈살을 찌푸리려는데.
“노야가 녹명에게 열쇠를 맡겨두었습니까?”
해원기가 묘한 부분을 짚는다.
전 주인 ‘노야’을 수발드는 세 여인. 강유행을 보살피려고 홍작이 삼 년 동안 왕래했었다고 했으니, 녹명에게 열쇠를 맡겨두는 것도 그다지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예. 처음 들었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소이다. 이 지하비고의 기관을 자유롭게 개폐하는 방법을 다 가르쳐주셨거늘. 열쇠가 필요하지 않거든요. 왜 녹명 소저에게 열쇠를 맡겨두셨는지, 왜 열쇠로 지하비고를 열라고 하셨는지. 흠, 워낙 신령한 분이셨으니. 하아!”
강유행의 탄식 섞인 대답에 오소민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이건 또 뭔가.
게다가 바로 이어지는 해원기의 말.
“제가 예전에 얼핏 듣기로는 이 지하비고에 자물쇠를 채운 방이 하나 있다고.”
“맞소. 용케 대황실(大荒室)을 기억하는군요. 소공자가 떠난 후에는 보경실(寶鏡室)로 이름을 바꾸셨다가, 지금은 아무것도 없는 빈방이지요.”
“보경실이라. 그럼 지금은 그냥 평범한 방입니까?”
“음? 평범한 방이라니, 뭔가 특별한 곳이었소?”
마지막에 강유행이 되레 의아한 반문을 던지면서 대화가 뚝 끊긴다.
입을 꾹 다물고서 머리를 천천히 젓는 해원기.
잠시 탁자를 내려다보다가 얼굴을 들었다.
“얘기가 너무 길었습니다. 이제 막 기력을 회복한 사부에겐 휴식과 안정이 필요한데. 죄송합니다. 잠깐 눈을 붙이시지요.”
미안하다고 하는 얼굴이 딱딱히 굳어서,
눈치 빠른 오소민이 급히 수선을 떨어야 했다.
“아, 이런. 처음 뵙는 분에게 이런 무례를. 아유, 사죄드립니다. 이제 해 형과 제가 왔으니 마음 놓으시고. 자, 이쪽으로. 저희는 주위를 좀 살피도록 하지요.”
벌떡 일어나 손을 흔들고, 고개를 조아리고.
그러면서 은밀한 지풍 한 줄기가 슬쩍 수혈을 건드린다.
강유행으로선 불현듯 하품이 나고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게 이상할 법도 하지만, 백초환이란 약도 먹은 데다가 장시간 대화에 지쳐가는 판이라.
쏟아지는 졸음이 당연하다고 느꼈다.
해원기가 조심스럽게 강유행을 안아 벽에 편히 기대도록 하면서 오소민을 보았다.
수선을 떨던 오소민도 가만히 그 시선을 받다가,
“알아냈군.”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작은 목소리.
해원기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음.”
“얘기해 줄 수 있어?”
“음.”
“녹명이라는 아가씨가 핵심인가?”
“그런 것 같아.”
“어쩔 건데?”
“만나 봐야겠지. 십팔 년 만에.”
영특한 오소민이라 내용을 다 알지 못하면서도 해원기가 핵심을 찾아냈다는 걸 알았지만,
‘십팔 년 만에’라는 말에 묘한 표정이 되었다.
해원기가 어려서 글공부할 때 알던 사이라는 거잖아.
절령제이십이(節令第二十二) 동지(冬至)
사시팔절(四時八節)이라는 말이 있다. 사시는 춘하추동이요, 팔절은 입춘, 춘분, 입하, 하지, 입추, 추분, 입동, 동지이니 바로 한해의 변화를 개괄하는 말이다.
동지는 일남지(日南至)라는 별명이 있는데, 말 그대로 해가 남쪽의 가장 끝에 이르러서 낮이 가장 짧은 날이다.
지(至)는 하지(夏至)와 마찬가지로 극(極)의 뜻이고, 하지가 여름의 가장 더운 날이 아니듯, 동지 역시 겨울의 가장 추운 날은 아니다. 실제로 동지 때에는 아직 지면에 쌓인 열이 남아있기에 진짜 추위는 동지를 지나고 난 뒤다.
그러나 해가 남쪽 끝까지 도달했음은 이제 다시 북쪽으로 올라온다는 의미. 가장 짧았던 낮도 이때부터 차츰 길어지기 시작해서,
소위 일양(一陽)이 부생(復生)하는 법.
그런 까닭에 동지삼후(冬至三候)의 첫 번째는 구인결(蚯蚓結)이라, 지렁이는 여전히 온몸을 돌돌 말아도, 두 번째는 미각해(麋角解), 음기가 물러가는 기미에 사슴뿔은 풀어지고, 세 번째 수천동(水泉動)에서는 두꺼운 얼음 아래 샘은 벌써 흐를 준비를 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