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8장 경사은비(京師隱秘) (3)
화섭자로 작은 등잔에 불을 붙이면서 오소민이 새삼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엄청난 크기의 지하 공간.
이 정도면 현도관뿐 아니라 현도관에 붙은 저택 아래까지 전부 이 기묘한 지하 공간일 것이다.
‘더구나 이 정교하게 다듬은 석축과 석벽.’
기둥을 세우고 벽을 쌓아서 견고하기 이를 데 없는 구조다. 고대 제왕의 능묘라고 해도 이처럼 튼튼하게 만들지는 않았을 터. 대체 언제 만들어졌는지 추측도 할 수 없는데, 오래된 것치고는 흔한 이끼 하나 없다.
그리고 공간을 나누어 단단히 봉인한 수십 개의 석실. 숨겨진 보물 창고라도 되나.
특별히 건드린 게 없는데도 들어올 때의 구멍이 소리도 없이 다시 닫힌 것도 범상치 않은 일. 흔히 볼 수 없는 기관건축이다.
사방으로 퍼진 통로 가운데, 역시 돌로 만든 탁자와 의자가 놓였고.
겨우 정신을 차린 초췌한 중년인이 비로소 해원기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소, 소공자(少公子), 아, 이, 이렇게 장성해서, 참으로, 참으로…….”
재회의 감격을 견디지 못할 정도로 피폐해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듯.
오소민이 얼른 해원기의 허리춤을 잡아당겼다.
“기력이 너무 떨어지셨어. 뭐라도, 그래, 백초환 있어? 일단 안정을 취하시도록.”
뜻밖의 해후에 어쩔 줄 모르던 해원기가 그제야 상황을 인지하고 급히 허리의 요대자를 뒤졌다.
풀어헤친 머리칼, 양쪽 볼이 움푹 꺼진 창백한 얼굴에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몸.
상당한 시간을 굶주림에 시달린 모습이다.
현도관의 지하비고(地下秘庫)에 얼마나 오래 있었던 걸까.
해원기가 과거에 머물렀을 때는 있는지도 몰랐던 지하비고다. 나중에야 사부에게 얼핏 현도관이 무엇을 생업으로 삼았는지 들었으나. 이런 신기한 지하 기관이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고.
강유행에게 백초환을 먹이고 전신을 주무르면서 한숨이 나올 것 같았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오소민이 마음속으로 다지면서 등불을 해원기 쪽으로 밀었다.
기이한 지하 공간. 봉인한 수십 개 석실에 대한 궁금증은 나중이다. 해원기가 손뼉을 치며 희한한 소리를 내자 바로 알아들었으니 이 지하에는 외부의 소식을 듣는 장치가 있다는 뜻. 또 강유행이 ‘은공’이라고 한 건 해원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 여겼다는 의미다. 아마도 해원기의 사부.
그러고 보니 강유행 또한 해원기의 사부다.
글공부를 가르쳤다고 들었기에 꽤 나이 먹은 분인 줄 알았는데,
사십은 되었을까. 초췌한 얼굴임에도 세 가닥 수염이 단정하고 주름살도 별로 없다.
굳이 맥을 짚지 않아도 전혀 무공을 익히지 않은 보통 사람이 분명하고.
학식은 갖추었겠으나 어떻게 봐도 유약한 선비에 불과하다.
얼핏 청정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자 강유행이 눈을 잠시 감았다가 뜨며 자세를 바로 한다.
“후우, 단박에 편해지는군요. 소공자도 그새 신기한 힘을. 음, 궁색한 처지라 예의를 잊었구려. 현도관의 강유행이요.”
손을 모으며 인사하는 것도 영락없는 골샌님.
오소민이 할 수 없이 포권으로 자신을 소개해야 했다.
“개방의 순행장로를 맡은 유룡개 오소민이라 합니다. 해 형의 벗이지요.”
강유행이 조금 놀란 표정.
해원기와 같이 왔으니 평범한 아낙이 아니라는 것쯤은 짐작했지만, 빼어난 용모를 지닌 여인이 개방의 장로라.
잠시 오소민을 보다가 혼자 고개를 끄덕인다.
“개방이 협의지사들의 모임이란 얘기를 들었소. 이렇게 소공자의 벗을 만나니 기쁘기 그지없소만.”
나름 신분을 확인해서 마음이 놓였나. 시선이 해원기에게 돌아가며,
“소공자를 이렇게 만날 줄은, 소공자에게 연락이 닿을 줄은 예상치 못했다오. 후우.”
긴 한숨이 덧붙자 옆에서 기운을 불어 넣어주던 해원기의 눈썹이 꿈틀했다.
연락이 닿았다.
강유행은 이런 상황을 이미 외부에 알렸다는 말이잖나.
현도관을 이어받은 지 근 이십 년.
대량강문에서 전해지는 뛰어난 감식안과 강유행 자신의 성실함으로 현도관의 영업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아니, 문제가 없는 걸 넘어서 몇 배나 흥성했을 정도.
대대로 이어지는 가보나 구하기 어려운 귀한 보배의 가치를 감정하고, 혹시 모를 도난에 대비해 정교한 모조품을 제작해주며, 동시에 진품을 남모르게 보관해주는 현도관의 독특한 사업은 그 일의 특성상 권문세가나 귀족부호들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
대단히 비밀스러운 사업, 당연히 알음알음 인맥이 넓어지기 마련이라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몇 배씩 흥성할 리가.
더구나 사업이 번창하는 게 반드시 좋은 일은 아니다.
남이 알아서는 안 되는 기밀을 좋든 싫든 접하게 되고,
심지어 가보와 보배에 얽힌 좋지 않은 사연까지 감수해야만 한다.
세상에 알려지면 안 되는 업종.
강유행이 씁쓰레한 미소를 머금었다.
“처음 현도관을 이어받을 때도 노야께서 규모를 키우지 말라고 하셨었소. 보물이란 본래 사람을 허망한 욕심으로 이끄는 요사스러운 물건.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아는 내가 현도관을 이어받기에 어울리지만, 비밀이란 아는 이가 적을수록 지키기 쉬운 법. 규모가 커지면 반드시 어딘가에 새는 구멍이 생긴다고. 그러나.”
말을 멈춘 얼굴에 등불 그림자가 짙어진다.
“세상의 변화가 생각보다 훨씬 빨라서 그 가르침을 제대로 지키질 못했구려. 십여 년 전부터 일이 조금씩 늘더니 마침내 감당하기 어려운 처지를 면키 어렵게 되어서. 후우, 단골들이 전부 동창의 지시를 받았던 것이었소.”
“동창!”
“예. 모조품의 제작과 진품의 보관보다 감식의 일이 왜 늘어나나 했더니. 그게 다 동창이 각지에서 수탈한 보물이었을 줄은. 오랜 단골인 왕공귀족을 앞에 내세운 걸 보면 황실에는 아뢰지 않을 물건들이었겠지요. 그렇지 않았다면 황궁을 직접 들먹였을 테니까.”
착복했다는 의미가 담겼다.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얘기. 동창이 권세를 독점하고 각지에서 이권을 탐하면서 온갖 비리를 저질렀을 터. 흥륭상단을 통째로 삼키려 했던 일도 직접 겪었지 않았나.
그런데 오소민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저, 말씀 중에, 황궁에서도 감정을 의뢰한 적이 있었습니까?”
현도관이 어떤 곳인지 대강 이해했다.
경사뿐 아니라 금릉, 낙양, 장안 같은 곳에는 모두 고동(古董)과 기보를 감정하고 취급하는 점포가 있다. 황궁이 있는 경사는 당연히 더 비밀스러운 곳이 필요하겠지만, 황궁이 직접 거래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황궁이 괜히 황궁인가. 천하에서 제일가는 보고(寶庫)를 간직한 장소. 뛰어난 지혜와 훌륭한 안목을 갖춘 당대의 석학들이 수두룩한 곳이다.
강유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있었지요. 내가 현도관을 물려받고 몇 개월 되지 않아서.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진땀이 나지만. 허허.”
새로운 일이 아직 손에 익지 않았을 때 황궁의 감정을 맡아야 했으니. 헛웃음이 절로 나오지만,
오소민은 더욱 집중한 모습.
“혹시 어떤 물건이었는지, 누가 왔었는지 알 수 있을까요?”
강유행이 조금 미심쩍은 표정으로 해원기를 본다.
자신이 본래 해주려던 얘기에서 조금 벗어난 화제. 개방의 순행장로라는 이 여인은 왜 과거의 일을 캐묻나.
세상에 알려지지 않아야 할 비밀이고, 황궁이라고 밝혔거늘.
해원기는 오소민이 묻는 이유를 바로 깨달았다.
“사부, 말씀해주십시오. 저희가 이번에 사부를 찾아오게 된 배경과 깊은 관계가 있을 듯싶습니다.”
해원기의 말이라면.
강유행이 기억을 더듬어 답하는데,
“그러지요. 과거에 몇 번 거래했던 왕(王) 대인이라고. 종인부(宗人府)의 경력(經歷) 직위랍니다. 그가 상보감의 내관 한 명과 같이 와서 진귀한 돌을, 금오혈석(金烏血石)의 하나라고 여겨지는 걸 가져왔었소.”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오소민이 자신도 모르게 탄식했고,
“허! 과연.”
해원기 역시 심각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이렇게 연결될 줄이야.
강유행이 자신의 손목을 흔들지 않았다면 이 지하의 침묵은 좀 더 오래갔을지도.
“소공자, 이제 괜찮소이다.”
“아, 이제 약효가 도는 모양이군요. 그래도 기갈(飢渴)로 속이 허해지셨으니 음식을 충분히 섭취해야 합니다.”
백초환을 복용시킨 후에도 계속 신왕공의 청정지력을 전했던 해원기가 비로소 쥐고 있던 강유행의 손목을 놓았다.
“그새 의술도 터득했소? 아,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
말을 끌면서 오소민을 보는 강유행. 화제에서 벗어난 과거의 일이 해원기와 오소민에게 중요하다는 걸 의식했다.
오소민이 미간을 모은 채 문득 입을 연다.
“종인부는 왕족을 관리하는 기관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명예직에 불과해. 그래도 정오품 경력직을 대동했다면 하찮은 말단 내시 따위가 아니지. 그러면서 상보감 소속인 걸 밝혔다라, 마치 황실 종친의 물건인 것처럼 위장한 거야. 흥, 황실 종친? 영락이 즉위하면서 죄다 쳐 죽여서 얼마 남지도 않았을. 아, 이거 죄송합니다.”
혼잣말을 중얼거린 걸 비로소 깨닫고 미안해하지만,
강유행이 눈을 몇 번이나 껌뻑거렸다.
체력을 회복하고 다시 살피니 참으로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여인이요, 개방의 순행장로면 거지들 우두머리급의 무림인일 텐데.
종인부가 뭐 하는 곳인지, 경력의 품계가 뭔지. 어떻게 아는 걸까.
희한하지만, 지금은 얘기가 우선.
“어, 음. 그때부터 황궁, 특히 동창의 눈에 띄었을 가능성을 미리 염두에 두어야 했던 것을. 그들이 각지에서 벌이는 악행을 드러내지 않는 데 이 현도관은 좋은 거래처였을 테니까요. 진작 강호의 상황을 파악했더라면. 쯧.”
강유행이 중단했던 화제로 돌아가면서 혀를 찼다.
스스로 쓸데없이 이야기가 길어지는 걸 느꼈다. 굶주림에 지쳐 절박한 상황에서 뜻밖에 해원기를 만나 그런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면서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노야는 떠난 후에도 저희를 위해 홍작(紅芍) 소저가 한 번씩 살피도록 조처해주셨는데, 해가 갈수록 횟수가 줄더니 삼 년이 지나자 찾아오지 않더군요. 아마 노야는 삼 년이면 자리를 잡을 것이라 여기신 듯. 그 뒤로는 저와 조 아저씨 둘이서 지냈고. 조 아저씨가 외부와의 연락을 맡았지요. 뭐 외부라고 해봤자 개세무존 도 어르신과 관계된 속가의 고수분들과 북쪽의 손유상 대협 정도지만. 그러다가 추분(秋分)이 지나고서 조 아저씨가 돌연 행방불명이 되었소.”
“행방불명이요?”
“예. 처음에는 속가 고수분들과 같이 있는 줄. 전에도 그런 적이 적잖았으나 길어야 사나흘이었는데. 닷새가 지나자 걱정이 되어 찾아 나섰지요. 하지만.”
강유행의 안색이 어두워진다.
뭐가 궁금한지 입술을 달싹이던 해원기가 억지로 참으면서 귀를 기울이다가,
“조 아저씨를 찾을 수 없는 건 둘째 치고, 속가의 고수분들까지. 심지어 그런 사람을 본 적도 없다고들 해서, 흐으음.”
염려와 근심이 가득한 강유행의 깊은 신음에 불쑥 끼어들었다.
“저, 노태군께서는…….”
강유행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수염을 가볍게 문질렀다.
“어험, 할머님은 그해에, 홍작 소저가 찾아오지 않게 된 그해에 돌아가셨지요. 그래서 홍작 소저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것도 있었고.”
“흐윽.”
뭐에 찔린 듯 숨을 삼키는 해원기.
참담한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진다.
강유행의 할머님. 의젓하고 자애롭던 분이었고, 친손자인 강유행을 끔찍하게 아끼시면서 그 제자인 어린 해원기도 마치 친손자처럼 대해주셨었다.
짧지만 애틋했던 과거의 인연. 그 한 조각이 또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졌고.
그동안 모든 연락을 끊었던 자신에 대한 죄책감이 쓴 물처럼 치밀어오른다.
강유행이 수염을 문지르던 손으로 해원기의 어깨를 짚었다.
“원래 연세가 많으셨으니. 그래도 여기로 온 후에는 언제나 마음이 놓이고 편했다고 하셨소. 은공과 맺어진 인연을 소중히 여기라는 말씀을 남기셨지요. 제가 소공자를 가르친 것 또한 귀하디귀한 인연이라고. 그래서 지금 이렇게 저를 구하러 왔잖소이까? 허허.”
마지막의 웃음은 해원기의 마음을 이해하는 위로.
오소민이 안쓰럽게 해원기를 바라보다가 그 웃음에 따라서 미소를 지었다.
그저 잠깐 글공부를 배웠다고 했으나.
사부는 역시 사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