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8장 경사은비(京師隱秘) (2)
겨울이 깊어져선지 술시(戌時)가 되기도 전에 날이 캄캄하다.
관도로 올라서는 샛길, 등롱을 높이든 예닐곱 명이 두 무리로 나뉘었고.
등짐을 지고 상인 차림을 한 다섯 명이 공손히 예를 표했다. 그중 머리에 커다란 수건을 둘러쓴 사내는 아예 허리까지 굽실.
“그럼 배웅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예를 받는 쪽은 두 사람.
머리칼을 단정히 뒤로 넘겨 훤하게 드러난 이마, 굵은 눈썹에 단정한 이목구비가 준수하다기보다는 청수해 보이는 흑의 경장의 청년과 수수한 백의에 푸른 띠를 둘렀어도 누구나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아름다운 아가씨.
청년이 정중하게 포권으로 답례하는데,
“네. 이렇게 배웅까지 해주셔서, 음, 부디 조심해서 돌아가십시오.”
어정쩡한 길이 때문에 뒤통수에 깡총하게 묶인 머리 모양이 어색한 듯 목을 갸웃거렸다.
아름다운 아가씨가 그러는 청년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툭 치곤,
“낭랑과 노관주께 인사 전해주세요. 되도록 빨리 뵙겠습니다.”
의젓하게 상인 차림새의 다섯 명을 둘러보자,
커다란 수건을 둘러쓴 사내가 허리를 펴고 히죽 웃고,
“알겠습니다. 오 장로, 검왕 해 대협!”
말이 끝나기도 전에 와르르 목소리를 높여 제각각 떠드는 나머지 인원.
“갑니다, 검왕야(劍王爺)! 하하.”
“피잇, 검왕야가 뭐야, 그냥 왕야면 되지.”
“그냥은 좀, 적어도 대(大)자를 붙여야. 흐흐”
“으잉? 총표파자 아니었남?”
차림새와 달리 시정잡배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킬킬대며 몸을 날리는 통에,
포권을 풀지도 못한 청년이 기묘한 표정이 되었다.
아름다운 아가씨도 웃음이 터지려는 걸 겨우 참는 듯.
별서에서 반 시진도 안 걸리는 거리를 함께 했지만, 그 짧은 시간에도 녹림 팔대탐자의 한 사람인 비행상(非行商)과 녹건호한들은 해원기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한 모양이다.
외호가 절세검왕이니 왕야라고 불러야 한다는 둥 참으로 엉뚱한 소리를 곧잘 해대서,
역용이랍시고 되레 본 모습을 말끔하게 드러낸 해원기를 난감하게 했다.
과연 녹림장관의 호걸들.
금세 멀어지는 등롱 불빛을 보다가 흑의 청년과 백의 미녀가 천천히 관도에 발을 내디뎠다.
해원기와 오소민.
이제부터는 두 사람만이 경사로 향한다.
경공으로 꼬박 두 시진 가까이.
해시(亥時)가 끝날 무렵에 오른쪽으로 멀리 경사가 보였다.
물주머니를 내린 오소민이 시원하게 목을 풀며 입가를 닦았다.
“크으, 확실히 가죽으로 만든 물주머니가 넉넉하군. 부리나케 달린 보람이 있다니까.”
캄캄한 밤에 백의를 걸친 미녀. 그러나 하는 행동은 딱 사내라.
해원기가 몇 번 눈을 껌뻑였다. 아직 낯설다.
“자넨 역용을 배웠다면서 그게 뭔가. 입이 거친 소단도 그렇게는…….”
처음 하는 소리가 아니라서 오소민이 바로 코웃음을 친다.
“흥, 그러면서 ‘자네’? 이렇게 예쁜 아가씨를 그런 식으로 부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먼저 그 호칭부터 바꾸시라고요, 원(元) 무사.”
“아 참, 방 낭자지.”
해원기가 얼른 호칭을 바꾸며 머리를 긁었다.
해원기는 ‘원 무사’, 오소민은 ‘방 낭자’. 만일을 위해 그렇게 호칭도 정해놓고 자꾸 까먹는다.
오소민이 살짝 눈을 흘기곤 물주머니를 넘기는데,
“그러고 보니 소단은 잘 있으려나? 보고 싶네.”
새초롬한 표정. 해원기가 또 눈을 껌뻑거린다.
남장을 했을 때야 단지 잘생겼다는 느낌뿐이었으나, 지금은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다.
머리칼을 길게 풀고 옷차림을 바꾼 것만으로 이렇게 달라 보이다니.
‘이렇게 예쁜 아가씨’라는 오소민의 자랑이 장난이란 걸 알면서도 반박할 생각이 들지 않는다.
두 시진 동안 서너 번 쉬었다가도 곧장 출발한 이유 중의 하나는 괜히 어색하기만 해서였다.
빠르게 몸을 날리는 동안에는 못난 꼴을 보이지 않으니까.
오소민의 시선이 돌아오자 해원기가 고개를 조금 돌렸다.
“소단도, 악 형도 잘 있겠지. 단목 형님이나 여러 고인(高人)들과 지내면서 배우는 것도 많을 걸세. 이번 일을 마치고 돌아가면.”
오소민이 해원기의 어색한 행동을 모를 리 없다.
조금 더 놀려볼까 하다가 짓궂은 웃음을 거두며 해원기를 따라 동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자, 그 현도관이란 곳이 경사 서쪽, 고관대작의 저택이 즐비한 곳이랬지? 앞으로 반 시진은 더 기를 써야, 흠, 자정이나 돼야 근처에 이르겠네. 문제는 자네나 나나 지리를 모른다는 것. 한밤중에 어디 물어볼 데도 없고.”
해원기는 어렸을 때 남에게 의탁해서 잠시 거쳤을 뿐. 오소민도 지금의 경사는 들러본 적이 없다.
오면서 한편으론 주변을 경계하고, 한편으론 현도관을 찾아가는 방도를 논의했었다.
방송서가 말한 대로 관부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듯. 주로 관도를 이용해 계속 경공을 펼친 덕분에 예상보다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으나.
이제 경사를 눈앞에 두고 더욱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한다.
해원기가 받아든 물주머니를 그대로 허리춤에 묶었다.
“지리는 모르지만, 선명하게 기억하는 게 있어. 고루거각이 늘어선 가운데 주저앉은 것처럼 보이는 낡은 도관. 높은 곳에서 살피면 찾기가 어렵진 않겠지. 서산(西山) 쪽으로 넘어가면 가깝다고 들었네.”
그렇게 달리고도 목이 마르지 않나.
오소민이 해원기의 옆얼굴을 힐끔 보았다.
“현도관 옆에 붙은 건물에서 공부했다면서.”
낡고 작은 도관, 그리고 그 도관에 담장을 맞댄 옆집은 작은 뜰까지 갖춘 우아한 누각이었다.
“음.”
해원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룡재(潛龍齋)라는 이름이었지.’
현도관의 옛 주인이 깊은 뜻을 담아 그렇게 이름을 붙였었지만, 이것까지는 굳이 밝히고 싶지 않았다.
그 어르신이 기대했던 잠룡은 이미 의미가 없으니.
개방의 뿌리는 팔선(八仙).
흔히 용사혼잡(龍蛇混雜)이라고 할 정도로 온갖 인물이 모이는 거지들의 방파인지라 뿌리조차 그 공부가 방잡(庬雜)해서,
아무리 천부의 재질을 타고난 이라도 한 몸에 팔선의 학예를 다 담을 수는 없다.
총명한 오소민도 예외는 아니었고, 더구나 남자가 아니면 익힐 수 없는 무공도 있었다.
그래도 수박 겉핥기식으로나마 두루 가르침을 받았으며, 특히 경공에는 나름 힘을 기울인 편.
게다가 경공 하나만은 팔선을 뛰어넘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취개 단삼육이 은근히 요결을 일러준 덕에,
해원기와 두 시진이나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고, 지금도 이른바 부광약영(浮光掠影)이라는 놀라운 솜씨를 보이지만,
바로 곁에 있는데도 실체라기보다는 자신의 그림자처럼 여겨지는 해원기다.
‘쳇, 아예 유령 같아서 봐도 모르겠잖아.’
부광약영은 사람의 눈이 따라가지 못할 속도, 반면에 해원기의 부신수영은 기척 자체가 사라져서 기분이 나빠질 정도.
서산 쪽을 넘어 높다란 건물 지붕을 징검다리 삼아 공중을 건너뛰는데,
아무리 밤에도 대낮처럼 사물을 보는 고수지만 현도관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고관대작이라는 자들이 이렇게 많았나. 고루거각이란 게 이렇게 숲처럼 늘어선 건가.
자정에 가까운 깊은 밤. 아득하게 넓은 지역에 곳곳이 불을 밝혀 불야성이란 말이 무색하다.
어둠과 불빛이 얽혀서 시야가 오히려 어지럽고, 불이 밝혀졌으면 사람이 있다는 말이니.
경공을 펼치면서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다.
높은 누각 꼭대기에 잠시 발을 붙인 오소민이 주위를 살피는데,
[방 낭자, 저쪽인 것 같네.]
귀를 울리는 전음에 하마터면 발을 헛디딜 뻔했다.
전음에서 ‘방 낭자’라고 부르는 건 또 뭐냐.
어처구니없는 실소를 흘리면서 희미한 그림자 같은 해원기의 뒤를 따라 다시 몸을 날렸다.
좁아터진 골목.
지면에 내려서고서야 골목이란 걸 알았지, 위쪽에서 봐서는 구분할 수가 없었다.
거대한 저택들의 큰 건물, 높은 누각, 담장 대신에 쌓은 가산이나 나무들이 얼기설기 교차해서 그 가운데의 조그마한 어둠 따위 눈에 뜨이지도 않는다.
그 어둠이 달랑 세 칸짜리 도관이란 걸 누가 알겠나. 차라리 저택에 속한 조그만 사당이라고 여기기 쉽고, 당연히 따로 들어가는 골목이 있다는 것도 상상하기 어렵다.
나무 그늘에 뒤덮인 골목, 폭도 겨우 한 사람이 다닐 넓이라. 골목보다는 담장 사이에 생긴 좁은 틈이랄까.
[여기야?]
굳게 닫힌 월동문을 앞에 두고 오소민의 묻는 말에 해원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장 현도관 안으로 내려서지 않은 건,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바로 이어진 오소민의 질문처럼 아무런 기척이 없기 때문.
오소민이 왼손을 들어 옆을 가리켰다.
커다란 나무들이 줄지어 섰고, 그 나무보다 높은 지붕이 한참 이어진다. 아담한 뜰과 소박한 건물은 있을 곳이 없는 빡빡한 공간.
설마 저곳이 해원기가 글공부를 했다는 곳일까.
해원기가 머리를 가로로 저으면서 미간을 좁혔다.
열 살 때 잠깐 머물렀던 그 시절과는 많이 달라졌다. 현도관에 아무 기척이 없는 것도 그렇지만, 잠룡재는 아예 없어진 듯.
오소민이 가리켰던 왼손을 내리고 가까이서 궁금한 얼굴을 들이대는데도 심각한 표정이 풀리지 않는다.
경사로 와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첫 번째 동기는 낙양에서 태백종사라는 자가 보였던 홍운백일품이란 속가 절학.
그리고 방온화를 통해 알게 된 경수사 주지의 오랜 모략. 그 황궁의 기밀을 기록한 이가 글선생이었던 강유행.
오는 내내 염려했었다.
정말로 강유행이 비록의 일로 곤란한 처지에 빠지고, 홍운백일품을 익힌 조원록이 동창의 손에 떨어졌을지.
선뜻 현도관 안으로 들어갈 맘이 들지 않는데,
“어디 몸을 숨길 데가 따로 있는 거 아냐?”
오소민이 전음 대신에 조그맣게 속삭이는 소리에 눈썹이 꿈틀했다.
현도관뿐 아니라 주변에 전혀 인기척이 없으니 굳이 전음을 쓸 이유가 없지만, 그것보다 ‘몸을 숨긴다’라는 내용에 언뜻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기에.
현도관은 본래 경사에 사는 고관대작과 왕공귀인들의 귀중한 소장품을 감정하고 보관해주던 곳.
그러려면 보관할 장소가 있어야 한다.
더구나 현도관의 옛 주인은 그저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다.
‘혹시.’
해원기가 오소민에게 눈짓을 보내곤 바로 현도관 안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는 급히 뒤따르던 오소민을 깜짝 놀라게 하는 기이한 행동.
짝, 짝, 짝.
“명기(名器)요, 보기(寶器)요, 진기(珍器)로다.”
손뼉 세 번에 섞이는 낮은 음성.
이게 무슨 짓인가.
오소민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전음으로 ‘방 낭자’라고 부른 것보다 훨씬 황당했지만, 진짜 놀라운 것은 그다음.
기긱.
두 사람이 디딘 바닥 어디선가 희미한 소음이 울리더니,
현도관 안에서 작은 말소리가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혹시, 으, 은공(恩公)…이십니까?”
은인을 높여 부르는 호칭.
해원기가 득달같이 현도관 안으로 뛰어들었고, 오소민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크게 외쳤다.
“사부! 저, 해원깁니다!”
십팔 년이 지났어도 고문을 자상하게 가르쳐주던 그 음성을 잊을 리 없다.
짧은 시간 글을 배웠어도 사부는 언제나 사부.
그제야 정신을 차린 오소민이 빠르게 몸을 날렸고,
컴컴한 현도관의 가장 안쪽 바닥이 천천히 밀려 큼직한 구멍 하나가 생기는 걸 목격했다.
도관이니까 원래 현무대제(玄武大帝)의 조상 같은 게 있었을 자리.
해원기는 이미 그 구멍 앞에 엎드려 상체를 숙였고, 두 팔로 구멍에서 올라오는 사람을 머리부터 얼싸안는다.
풀어헤친 머리칼 때문에 초췌한 얼굴이 잘 보이진 않지만, 자신을 얼싸안는 해원기를 확인하느라 두 팔을 허우적거리는 인물.
해원기의 글 선생, 강 사부라는 걸 오소민은 직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