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349화 (349/410)

제88장 경사은비(京師隱秘) (1)

정당에 들어온 후, 방송서는 비무에 관해선 한 마디도 더하지 않았다.

“석가장에서 관부의 소식을 좀 모아봤다. 경사에서 형대를 거쳐 안양에 이르는 길을 중심으로.”

지자견지요, 인자견인이라. 스스로 했던 말처럼 관전의 소득은 각자에게 달린 것.

가원외를 데리고 석가장을 다녀온 이야기로 바로 넘어갔다.

“제대로 알려진 게 없더구나. 동창이든 금의위든 대개 밖에서는 권위를 과시한답시고 곳곳의 관아에 얼굴을 내미는 습관이 있던데. 중요한 지시가 내려왔거나 특별한 보고가 올라온 것도 없었다.”

방온화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인다.

“예상했던 대로군요.”

“음, 상덕공주, 아니, 황제를 시해하려던 함정이었으니 철저하게 기밀을 유지했겠지. 그래도 지나치게 조용하다는 느낌이었다.”

동창의 제독태감이 황제를 시해하러 나왔으나 대상은 뜻밖에 상덕공주였고, 그 상덕공주도 놓친 상태다. 뒤가 구린 자가 아무 대응도 하지 않았을 리 없고.

녹림 산채를 친다고 여기저기에 광고한 안양 쪽 사정도 은허에서의 일로 역시 실패. 이 또한 동창과 이십사아문이 여럿 동원된 큰 사건이라 가벼이 덮기 어려울 텐데.

더구나 금의위 대영반 서문창이 중간에 개입하지 않았나.

소식이 없더라도 소문은 있어야 한다.

방온화가 관자놀이를 살짝 문질렀다.

“역시 의도를 파악하기 어렵네요. 당장 이번 시해 사건에서도 기존의 현신장이 전혀 등장하지 않은 게…….”

밀각육학사 중 황 학사. 낙양 용문석굴에서 일을 벌였던 그는 끝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장안에서부터 몰려다녔던 현신장 셋도.

그리고 감로보병. 장안의 지하무덤에서 낙양을 거쳐 이번에는 육신지궁으로. 이제 또 누구의 손에 전해질지.

방송서가 수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이런 무질서가 하나의 특징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조직의 규모나 구조가 생각보다 훨씬 방만하고, 이를 지휘하는 머리가 한두 개가 아닌 모양이다. 뭐, 네가 그동안 열심히 연구했으니 알아서 하겠다만.”

히죽 웃는 얼굴.

과거의 난세를 직접 겪었으면서도 전혀 염려하는 표정이 아니다. 벽세와 지부를 상대로 그 음모와 비밀을 파헤쳤던 전자방을 닮고자 노력했던 방온화를 턱 믿는 모습.

방온화가 고소를 머금고 고개를 돌렸다.

“예전엔 사기꾼과 깡패가 서로 머리를 굴려댄 덕분에 얻을 단서가 많았었죠. 지금은 상대가 황권을 등에 업은 높으신 분들이라. 자, 계획을 아주 조금 바꾸었다.”

앞에 앉은 사람은 해원기, 묵소유, 오소민 셋.

지난밤과는 달리 인원이 줄었다. 바뀐 계획에 해당하는 이는 셋뿐. 구태여 왁자지껄 떠들 필요는 없으니까.

아버지 방송서의 은근한 압박에 살짝 핑계를 대면서 시선이 묵소유를 향한다.

“소유가 가야 할 곳을 알았으니까. 천외가 벌인 일은 천외가 책임져야 하는 법. 황산 쪽에 정록이를 먼저 보내기로 했다. 록이와 수인이, 전임과 현임 대탐자 둘이면 좀 도움이 되겠지.”

“아.”

묵소유가 짧은 탄성을 냈지만,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신주영웅회를 통해 유출된 무공, 특히 천지보록의 소재. 과거의 잔재를 치우는 일은 천외육가에게 남은 책무다.

해중천을 이은 묵소유가 나섰다면, 대관원의 후대인 정록과 방수인도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노릇.

“물론 먼저 청하현까지는 같이 움직일 거야. 마침 낙양을 떠난 분들이 양곡현 부근으로 이동하는 중이라 잠시 함께 시간을 가질 수 있겠지. 그리고는 바로 제녕(濟寧)을 거쳐 회북(淮北)으로 들어가면 된다.”

하북의 남단인 청하, 산동의 끝부분인 양곡과 맞닿았고. 제녕을 거쳐 회북, 다시 황산에 이르는 경로는 가장 빠른 길이다.

“다만, 특별한 일이 없는 경우에.”

방온화가 마지막에 단서를 달며 묵소유에게 미소를 지었고,

이번에는 해원기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오소민에게 들었던 얘기지만, 청하현으로 향하는 데에 다른 배경이 있음을 깨달았다. 단지 상덕공주를 피신시키려고 방향을 그쪽으로 돌린 게 아니다.

낙양에서 헤어진 이들, 개방의 수뇌와 약왕당주 단목정 등이 산동으로 오고 있기 때문.

팔대탐자 중의 도장묘를 먼저 보내 연락을 취한 것도 만날 시간과 장소를 조율하기 위함이다.

단목정이 무림첩을 보냈다면, 낙양의 개방과 용문세가, 그리고 소림사가 주축이 되었을 터. 당연히 인연 있는 이들이 호응했을 것이다.

회합에 적당한 장소는 동창의 눈을 벗어난 곳이 적합하고, 그간의 정보를 서로 교환하며 상대의 의도를 정확히 짚어낼 필요가 있다.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라도.

전에 방온화가 전문간선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흥륭상단의 정보망을 덧붙여야 한다고 했었듯이.

그래서 청하현을 거쳐 산동으로 들어가는 거구나.

묵소유를 통해 새로이 알게 된 황산 남궁세가에 관해서도 정록과 방수인을 먼저 보내어 시차를 줄이려고 한다.

방온화가 고개를 틀어 해원기를 보았다.

“뭐, 원기 쪽이 줄어든 셈이지만, 오 장로가 믿음직하니까 괜찮겠지.”

“아, 네.”

오소민이 얼떨결에 대답하다 코를 찡긋거렸다.

본래 세 사람이 가려고 했던 경사를 이제 오소민과 둘이 가게 되었기에, 해원기를 잘 부탁한다는 의미겠지만,

조금 묘한 기분이다.

아마 해원기를 잘 알기 때문일 게다.

이전에 오소민이 자기 사정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고 해원기 스스로 인정한 적이 있었다.

출신, 어렸을 때, 환정곡에서 지낸 삶. 그리고 사부를 비롯한 가족들의 얘기까지.

시시콜콜한 부분도 숨기지 않고 털어놓는 바람에 오소민이 한바탕 울음을 터뜨렸잖았나.

게다가 오소민은 멸족당한 충신 방효유 집안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후대. 어렸을 때 익힌 학문이 웬만한 무림인이 평생을 들여도 이루지 못할 수준이고, 타고난 총명함과 뛰어난 기민함을 갖추었다.

경사의 현도관. 연왕의 모사였던 도연에게서 당대의 묘능에게 전해진 비결을 기록했던 강 사부와 그 강 사부를 지키는 조원록이란 무사.

이들에게 어떤 일이 생겼는지 확인하려는 게 표면적인 목적이지만,

방온화를 비롯해 해원기와 가까운 이들이 동행은커녕 이유를 묻는 것조차 삼가는 데는 분명히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해원기를 가장 잘 아는 친구, 머리가 똑똑하고 상황을 잘 처리할 수 있는 친구.

오소민이라면 믿을 수 있다는 것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그만인데,

배회촌에서 우겨가며 기어이 해원기를 따라나섰을 때도 괜찮았는데.

이번에는 뭔지 모르게 어색한 기분이다.

한 방에 묵소유랑 둘만 있어서 더 그런지.

옷도 갈아입고 행장도 꾸려야 한다.

배회촌을 떠날 때의 차림은 이미 격전 속에서 다 헤졌고,

아무리 관부 쪽이 조용하다고 해도 알려진 용모를 뻔뻔하게 드러낼 수는 없는 일.

방으로 돌아가 서둘러 궁리하려는 참에 묵소유가 바로 따라 들어왔다.

“묵 소저, 아, 유매는 먼저 출발하지?”

아직 호칭이 입에 익지 않았다.

묵소유가 고개를 끄덕이며 침상에 걸터앉았다.

“네. 그런데 경사에 가려면 역용을 해야겠죠. 소숙모는 소민 언니에게 맡기면 된다고 하시던데.”

묵소유도 마찬가지. 굳이 이름을 붙여 ‘소민 언니’란다.

“응, 전에 화호초, 정록이한테 역용술을 좀 배웠거든. 정록이는 원래 고화문 주장선 선배를 이었던 터라. 아, 알지? 예전에 강호사괴(江湖四怪)로 불렸던…….”

말이 어수선하다.

“네. 어렸을 때 종(鍾) 노백(老伯)을 뵈었던 기억이 나요. 정 오라버니나 수인이나 아직 제대로 얘기를 나누지 못해서.”

강호사괴에서 유일하게 남은 철금선생 종지음은 종 노백이라 부를 만큼 가까우면서, 막상 자기 또래와는 미처 사귈 시간이 없었다.

오소민이 비로소 마음을 가라앉히며 픽, 웃었다.

“훗, 오라버니라. 유매한테 그렇게 불리면 정록이는 좋아 죽을걸. 그래도 엉뚱한 구석이 있으니까 봐주면 안 돼.”

묵소유도 마주 웃고. 가만히 오소민을 보더니,

“전에는 그냥 전립에 피풍을 두르기만 했다면서요. 이번엔 어떻게?”

용모를 바꾸는 데 관심이 있나.

오소민이 얼굴을 긁었다.

“글쎄, 개방 장로답게 거지꼴을 해볼까? 아니면 방탕한 화화공자(花花公子)가 나을까?”

전에 용문세가의 오보혜를 호송하느라 놀러 나온 부잣집 도련님 역할을 했던 때를 떠올리며 반쯤 농을 섞는데.

묵소유가 고개를 저었다.

“개방 신비의 유룡개, 동창은 이미 그간의 행적을 다 조사했을걸요. 또 경사에 거지는 오히려 시선을 끌 대상이 될지도. 그냥 본모습이 어떨까요.”

“어?”

뜻밖의 얘기에 오소민이 허를 찔린 것처럼 눈을 깜빡였다.

신비의 유룡개니 뭐니, 간밤에 해원기에게 지난 일을 다 들었나 보다. 하지만, 이치에 맞는 말. 동창이 해원기와 오소민의 용모파기를 소홀히 했을 리 없고, 거지꼴로 경사에 들어가는 건 말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 본모습이라.

묵소유가 침상에서 일어나 구석에서 작은 보퉁이 하나를 꺼내온다.

“제 행리에 여분의 옷 한 벌이 있거든요. 그냥 수수한 옷이고, 꾸밀 장식품 하나 없지만…….”

“가만, 나보고 여장을 하라는 거야?”

오소민의 목소리가 커지는데,

묵소유는 서슴없이 보퉁이를 풀기 시작했다.

말한 대로 품이 넓은 백의에 푸른 허리띠, 묵소유가 입은 것과 똑같은 수수한 옷이고, 밑단은 넉넉한 치마다.

묵소유가 백의와 허리띠를 침상에 펴면서 웃는 낯을 보였다.

“여자잖아요.”

여장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는 건 거짓말이다.

순행장로랍시고 총단을 벗어나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게 되자, 호기심으로 여장을 구해본 적은 있었고,

여자들이 어떻게 꾸미는지 궁금해서 기루의 기녀들을 유심히 관찰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건 다 혼자였을 때.

방(方)이라는 성을 버렸듯이 여자도 버렸으니까. 여장도 역용의 하나라고 여겼었다.

그런데 지금은 역용이 아니라 여자니까 여장을 한다.

총명한 오소민이지만 할 말이 없었다.

그다음부터는 그저 오소민이 시키는 대로. 옷매무시를 고쳐주고, 머리를 만져주는 동안 허깨비처럼 따르기만 했다.

“오빠가 처음에 절세미남이라고 생각했었대요. 예전에 강호삼준(江湖三俊)이라고 용모가 뛰어난 세 분을 가리키는 말이 있었다는데…….”

묵소유가 즐거운 듯 떠드는 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것 같다.

모를 리 있나. 당세에는 삼정(三鼎)으로 존경을 받는 천극 탁관영, 신기자 전자방, 괴협 도신주의 세 분을.

“소민 언니를 보곤 도 대협을 떠올렸다나. 이렇게 본모습을 회복하니까 진짜 예쁘네요. 둘째 엄마가 보셨어도 깜짝 놀랄 정도로. 아, 이러면 도리어 더 시선을 끌려나, 호호호.”

거울이 없으니 어떨지 알 수가 없어서,

웃음을 터뜨리는 묵소유를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해원기를 ‘바부탱이’라고 놀리다가 진짜 바보가 되는 벌을 받는 걸까.

오소민의 심사는 아랑곳없이 요리조리 살펴보는 묵소유.

“저도 꾸밀 줄을 몰라서 그냥 제가 하던 식으로만. 그래도 타고난 미모가 있으니까, 괜찮죠?”

배회촌을 떠날 때 전립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미모’라고 으스댔던 게 또 요런 식으로 돌아올 줄이야.

“아, 응.”

괜찮은지 어떤지. 일단은 나오는 대로 답하는데.

묵소유가 갑자기 심각하게 턱을 고이더니.

“이러면 또 오빠가 문제네. 전혀 어울리지 않는단 말이죠. 타고난 맹한 얼굴을 갈아붙일 수는 없고, 에, 그 지저분한 머리라도 어떻게. 안 되겠다, 얼른 가서 손을 봐야겠어요.”

벌떡 일어선다.

“소민 언니, 같이 갈래요?”

오소민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러고 밖에 나가라는 말이잖아.

“아, 아니. 난 따로 정리 좀 하고서.”

급하게 핑계를 찾자 묵소유가 고개를 끄덕이곤 훌쩍 방문을 향했다.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려는데, 묵소유가 문득 방문 앞에 멈추어 선다.

“고마워요.”

오소민에게 옷을 빌려주고 머리까지 만져주었으면서 갑자기 이 무슨 뜬금없는 감사일까.

그러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서 오소민이 의문을 표하지도 못하고 시선만 돌렸다.

등을 보인 채 묵소유의 차분한 음성이 이어졌다.

“우리 오빠, 착한 사람이에요. 순하고 마음이 여려서 남에게는 싫은 표정도 짓지 못하죠. 사람을 사귀는 것도 서툴고, 그저 혼자서 모든 걸 끌어안으려는.”

어깨가 살짝 떨려 보이는 건 오소민의 착각일지도.

“아빠는 오빠에게 검(劍)만을 주려 했는데, 오빠는 아빠의 고(孤)까지 받았어요. 시키지도 않았건만. 그런 바보 오빠 곁에 소민 언니 같은 사람이…….”

덜컥.

문이 열리고 묵소유의 신형이 바람처럼 사라졌고,

마지막 말은 방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전해졌다.

“계속 있어 줘서.”

그래서 고맙다는 말을 했구나.

오소민이 자신도 모르게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어색한 심정에 희한한 표정이 되었다는 걸 스스로 깨달았지만, 그보다 양쪽 볼이 괜스레 화끈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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