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장 녹림장관(綠林壯觀) (4)
정당 지붕 가운데에 떡하니 자리를 잡고 앉은 방송서. 그 옆으로 방온화와 오소민이 올라섰고, 곧이어 정록과 방수인을 비롯한 녹림장관의 고수들이 사합원의 지붕을 빙 둘러 메꾸었다.
각자 출발 준비를 하던 중이었는지 복색도 가지가지, 장돌뱅이로 꾸미느라 등짐을 짊어진 이도 있었고,
심지어 마당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지붕 귀퉁이에는 상덕공주까지 올라왔다. 물론 하일웅과 일월표객이 철저하게 보호하는 형태로.
한쪽은 제자, 한쪽은 친딸. 백년제일검사를 잇는 두 사람이 검을 겨룬다.
그야말로 희귀한 구경거리.
해원기가 영 겸연쩍었지만, 이 비무는 자신이 먼저 정한 일이다.
더구나 여동생은 이런 상황이 신기하고 즐거운 듯, 냉큼 마당 가운데로 나서니.
마음을 가다듬고 천천히 그 앞으로 나아갔다.
일 장 남짓의 거리.
묵소유가 정해신검이 꽂힌 허리를 툭 친다.
“오빠, 진검으로 할 수는 없잖아?”
해원기가 이 당돌한 말에 고소를 지었다.
해중천의 보물인 정해신침, 고죽의 지보인 이제검. 가히 신검(神劍)이라 할 만한 병기끼리 부딪쳐보는 것도 재미있겠으나, 어느 한 자루가 상하는 건 둘째 치고.
남매간에 진검대결이라니. 세상에 이런 살풍경이 어디 있겠나.
덕분에 거북했던 지붕 위의 시선을 잊고 정신을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그저 네 성취를 보려는 것일 뿐. 먼저 손을 좀 풀자꾸나. 삼오검(三五劍)부터 시작해서.”
왼손은 뒷짐, 꼿꼿이 세운 오른손을 내밀며 비스듬히 선다.
“응, 그게 좋아.”
여전히 응석받이 같은 대답.
그러나 묵소유 역시 왼손은 뒷짐, 꼿꼿한 오른손을 내미는 똑같은 자세.
오누이의 눈이 마주치면서 웃음기는 바로 사라졌고,
지붕 위 곳곳에서 짧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파앗.
해원기와 묵소유의 오른손에서 동시에 새파란 검기가 일어났으니.
대부분이 전해지는 얘기로 들어본 적은 있어도 실제로 보기는 처음이다.
흔히 검기성강과 이기어검으로 대표되는 검의 최고 경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절정의 검공(劍功).
바로 검형수.
정당 지붕을 자기 집 안방인 양 걸터앉은 방송서가 팔짱을 끼면서 입맛을 다셨다.
“츱, 검형수 대 검형수라. 정말 진기한 광경이구먼. 눈도 깜박이지 말고 잘 봐둬라.”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단단히 당부까지 덧붙이는데.
그렇게 말하는 방송서 자신도 눈을 부릅뜬 채.
해원기와 묵소유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선공은 묵소유였을까. 서서히 내미는 오른손에 맺힌 두 자가량의 검기가 꿈틀꿈틀 뻗자 해원기가 밀려나듯 손을 빼면서 거꾸로 무겁게 내리누르고,
묵소유의 검형수가 눌리는 듯하다가 바람에 흩날리듯 바뀌면 해원기의 오른손은 흐드러진 단풍처럼 퍼진다.
“항산 복룡검식을 절세오검의 붕악으로 누르고, 붕악을 추풍으로 대응하니 화산 단홍검이 막아선다라.”
이 또한 누구라고 정해서 일러주는 게 아니다.
눈은 두 사람의 검형수를 쫓고, 입은 그 검법을 읊을 뿐.
묵소유가 오악검법을 쓰면 해원기는 절세오검으로, 묵소유가 절세오검으로 맞받아치면 해원기는 오악검법으로.
아직 검형수끼리 단 한 차례도 마주치지 않아서, 주거니 받거니 춤이라도 추는 것 같지만,
“섬전에는 기수검봉, 탈백에는 일주포원, 허, 사우반고에 같은 사우반고는 처음 보네.”
방송서의 말이 갈수록 빨라진다.
오악검법인지 절세오검인지 흑백연주오절검인지 밝힐 여유가 없다.
느릿하게 시작했던 비검이 차츰 속도를 높이더니 두 자가량 했던 검기가 어느새 석 자 가까이 늘어났고.
해원기와 묵소유 사이의 거리도 삼 장으로 벌어져 온통 검기로 뒤덮여간다.
오소민이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삼오검이란 게 정오검, 마오검, 평오검이구나.”
화산에서 해원기가 희지원에게 검에 관해 가르칠 때 들었던 기억. 하나하나가 다 상승의 검학인데.
지금 해원기와 묵소유는 검기를 일으킨 맨손으로 십오 종이나 되는 검법을 마음대로 펼친다.
절세검왕이야 그 외호답다고 하겠으나,
능파신녀 또한 헛되이 붙은 이름이 아니구나.
혼잣말을 마치기 전에 오소민이 눈을 크게 떠야 했다.
묵소유의 신법이 돌연 영교하게 바뀌면서 삼 장 공간을 뒤덮은 검기가 화살처럼 쏘아나가고, 은은히 자줏빛을 띠기까지.
그에 반해 해원기의 검형수는 모든 변화를 거두어 한 줄기 선을 긋는다.
두 사람의 검형수가 한 점에서 마주치며,
퍽.
진흙더미에 바위를 내던진 듯한 소리. 공간을 뒤덮었던 검기는 씻은 듯 사라지고,
해원기가 얼른 손을 거두며 빙긋 웃었다.
“비천경혼음마검에 천주검(天誅劍)과 자전검(紫電劍)을 섞었구나. 잘했다.”
마도 절세오검의 정수. 과거에 종횡강호십팔마검으로 불렸던 공손무원과 교악의 검을 함께 쓰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다.
담긴 오의를 정확히 깨달아 뜻대로 운용할 수 있는 경지.
어린 나이에 환정곡을 떠나 해중천으로 가서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대견스러워 칭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묵소유가 오른손을 가슴 앞에 세우고선 코를 찡긋거렸다.
“수미전단검의 조사검결을 하나로 이은 건가. 그러면 십대검상과 별 차이 없는, 흥, 나도 이제부터 제대로 한다아.”
불퉁한 표정으로 을러대는 말도 귀엽게 보이지만,
해원기가 거두었던 손을 다시 내밀었다.
지이이잉.
묵소유의 검형수가 가늘게 떠는 것 같더니 장내에 은은히 퍼지는 소리. 위로는 붉은 기운이 서리고 아래에는 푸른 파도가 넘실댄다. 그 가운데 한 떨기 백련처럼 선 묵소유는 정녕 능파신녀.
바로 대삼림에서 반룡십삼령을 추살했던 그 무공. 천수관음인으로 단봉무후도강과 해룡검강을 동시에 시전하려는 것이다.
정해신침을 검으로 만든 정해신검이 아니라서 선명하게 구현되진 않았으나.
마당만이 아니라 사합원 전체가 휘말려 들 거 같은 엄청난 기세.
방송서가 급히 팔짱을 푸는데,
해원기가 성큼 한 걸음 내디디며 손을 바꾸어 들었고.
사아아.
반룡령의 영주들을 진저리치게 했던 가공할 기세가 순식간에 잦아든다.
오른손의 검형수를 왼손으로 옮기면서 수미전단검의 여력을 다시 결계로 구축했다. 관전하는 이들을 고려한 행동이지만,
이미 자연스럽게 신령검역을 이루는 해원기다.
묵소유는 자신이 시전한 기세가 확 줄어들자 심사가 뒤틀렸다.
‘진짜 십대검상이잖아.’
적멸검이라고 오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칫.”
혀를 차면서 표표히 떠오르는 신형. 단봉무후도강의 붉은 기운이 환한 빛을 머금고, 해룡검강의 파도에 흰 포말이 구슬처럼 이어진다.
이 변화에는 해원기도 놀란 표정.
왼손이 둥근 원을 그리고 오른손이 또 하나의 원을 고리처럼 엮었다.
검왕오형의 발검제형이라면 원을 꿰뚫어 무찔러야 하거늘.
왼손에 맺혔던 검기마저 사라져서 진짜 맨손.
길이가 석 자를 넘어 공간을 전부 집어삼키려는 묵소유의 검형수 속을 거침없이 헤집는다.
솨아아아아.
어디서 불어오는 바람인가.
일진경풍(一陣驚風)이 마당 전체를 휩쓸면서 흙먼지가 자욱하게 치솟는 바람에 지붕 위에서 관전하던 이들이 깜짝 놀랐으나.
치솟던 흙먼지가 곧장 가라앉고,
그 가운데 묵소유의 손을 잡고 한숨을 내쉬는 해원기의 모습이 드러나자,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눈만 껌뻑거려야 했다.
“후, 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 논검(論劍)을 할 걸 그랬다…….”
논검은 말로 검법을 서로 겨루는 방식.
자책인지 후회인지 모를 어감인데, 묵소유가 뭐라고 말을 받기 전에 방송서의 큰 웃음이 먼저 장내를 울렸다.
“핫하하하하, 대단하다, 대단해! 해시신루(海市蜃樓)라는 말이 있다만, 이건 해천만화(海天萬化)라고 해야겠구나. 해중천은 마침내 활짝 열렸으니 부럽기 그지없도다.”
해시신루는 바다에서 보이는 신기루. 그걸 바다와 하늘이 서로 닿아 무궁무진하게 바뀐다는 해천만화로 바꾸어서. 대관원의 당대 주인이 영탄조로 부럽다고까지.
묵소유를 어마어마하게 칭찬하는 거다.
막 해원기에게 불평을 늘어놓으려던 묵소유의 삐죽 나온 입이 당장 쑥 들어갔고,
“역시 노관주께선 다 알아보시는군요.”
기쁜 얼굴로 방송서에게 손을 흔들어 보인다.
“그럼, 그럼. 용봉정상(龍鳳呈祥)에서 해룡에는 영귀(靈龜)를 두고 단봉에는 광무(光武)를 붙여 용비봉무(龍飛鳳舞)로 나아갔잖으냐. 오늘 본 노조도 안계(眼界)를 크게 넓혔단다. 기특한지고. 안 그러냐, 원기야.”
들어도 얼핏 이해가 가지 않는 표현이지만, 거듭되는 감탄.
이쯤 되면 둔한 해원기도 눈치를 채게 마련이다.
묵소유의 손을 토닥이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맞습니다. 제가 근래에 깨달은 것이 부족했다면, 양손을 다 쓰고도 혼이 날 뻔했습니다. 제 패배나 다름없어서, 오빠로서 부끄럽군요.”
“하하하하. 좋다, 좋아. 오빠 노릇도 쉽지 않지. 자, 구경은 끝났으니. 어흠.”
호방하게 웃고, 지붕에서 일어나 옷자락을 털고.
다들 제자리로 돌아갈 때라는 뜻인데.
정당 지붕을 제외하곤 다들 뭉그적거리며 선뜻 자리를 뜨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삼오검의 공방까지는 방송서의 해설(?)도 붙어서 어떻게든 눈이 쫓아갔지만, 막판에는 제대로 보지도 못했으니까.
해시신루가 해천만화로, 용봉정상이 용비봉무로 나아갔다는 아리송한 표현으론 도대체 어떻게 결말이 난 건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궁금하기 짝이 없다.
방수인도 그런 축이라 엄마와 할아버지의 눈치만 보는데,
방송서가 웃음을 그치면서 짧은 말을 덧붙인다.
“지자견지(智者見智), 인자견인(仁者見仁).”
지혜로운 자가 보면 지혜라 여기고, 어진 이가 보면 어질다고 여긴다.
사람은 자기 수준에 따라 아는 법.
해원기와 묵소유의 비무에서 어떤 이득을 얻는가는 오로지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달렸다.
더구나,
마지막에 해원기가 엮은 두 개의 원. 묵소유의 용비봉무를 어떻게 화해(化解)했는지 방송서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으니.
녹림장관의 고수들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적용되는 경구(警句)다.
묵소유가 컸다는 걸 쉬 인정하지 못했구나.
헤어지던 때의 예닐곱 살배기 어린애가 여전히 마음속에 새겨져 있어서.
그저 얼마나 늘었는지 시험해보고 부족한 점을 가르쳐줄 셈이었다.
그러나 그 어린애는 이미 방년의 소녀가 되었고, 인색이귀를 종복으로 거두어 남쪽 해안에서 이곳까지 강호를 헤쳐 왔다.
녹림노조 방송서를 비롯한 녹림장관 사람들이 죄다 지켜보는 상황에서 어린애 취급이 달가울 리 없다.
소숙모 방온화도 있고, 아직 어색한 동생 방수인도 있고. 오빠의 친구라는 오소민과 정록도 지켜보고, 아빠와 인연이 있는 분들과 황실의 공주도 보고 있다.
특히 십 년 만에 만난 오빠. 절세검왕이라 불리는 오빠에게 자랑하고 싶다.
이제는 다 컸다고.
고검협의 외동딸, 해중천의 후계자, 능파신녀라는 아름다운 외호도 붙었으며 그 나이 또래다운 호승심(好勝心)도 남 못지않으니.
해원기는 미처 묵소유의 심정을 살피지 못했었다.
방송서가 넌지시 깨우쳐준 덕에 간신히 마무리를 지었달까.
오빠 노릇은 쉽지 않고, 사람은 자기 수준에 따라 아는 법이란다.
묵소유에게 다정한 표정을 지으면서 정당으로 걸음을 옮기지만, 해원기의 눈 깊은 곳에는 씁쓸한 반성이 스쳐 지나간다.
‘고구마 대장’은 아직 멀었구나.
자신이 발검제형을 홍몽무변으로, 또 양의상전을 유야무야로 써서 용비봉무를 풀어냈다는 건 까맣게 잊었다.
검왕오형과 천손검법이 딱히 구분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