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장 녹림장관(綠林壯觀) (3)
부스럭.
마당 쪽에서 조심스러운 인기척이 들리자 방온화와 오소민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해원기만은 이미 누군지 아는 듯 피식 웃는다.
“하, 한참 눈치만 보더니.”
오소민이 자신이 나온 방문 밖에 인색이귀가 얌전하게 손을 모으고 선 모습을 발견하곤 역시 미소를 머금었다.
얼핏 봐도 주인이 일어나길 기다리는 종복 같은 자세들.
해원기가 고개를 저으며 설명을 보탰다.
“동해삼사가 만든 봉래도 출신이라 전에 중원을 떠나 다시는 오지 않겠다는 않는다는 약조를 받고 놔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동해론 돌아갈 수가 없어져서 남해로 방향을 틀었다더군요. 워낙 눈치가 빠른 자들이라 반룡령도 오래 머물 곳이 아니라 생각했다나요. 허나 반룡령이 그냥 놔줄 리가 없어서…….”
말이 자꾸 길어진다.
오소민이 얼른 끼어들었다.
“해적질해 먹던 버릇이 어디 가나요. 남해 쪽에서 숨을 곳을 찾다가 딱 걸려서 반룡령과 삼보해관에게 목이 달아날 위험한 지경에 처했는데, 그때 공교롭게도 묵 소저 눈에 띄어서. 흠, 구명지은(救命之恩)을 입은 거라고 들러붙을 셈이었다가, 그 후로 줄줄이 달려드는 고수들을 묵 소저가 전부 퇴치하는 걸 보고. 또 묵 소저가 누군질 알고 나서는 아예 노복으로 모시기로 했다는군요. 뭐, 제해신물(制海神物) 앞에선 당연하다는 핑계를 대면서.”
“정해신침(定海神針)일세. 본래 해중천의 기보였는데 옛날에 동해삼사가 훔쳐갔던 걸 사부님께서 되찾아주셨거든.”
역시 해원기는 긴 얘기보다 중간중간 주석이나 덧붙이는 역할이 어울린다.
오소민이 해원기를 힐끔 보고 말을 맺었다.
“진심인 것 같긴 한데. 묵 소저는 사명을 마치면 공과(功過)를 따져서 처분을 결정하겠다고 하더라고. 아주 명석하고 깔끔한 아가씨야, 맹한 자네보다 백배 낫더구먼.”
은근히 바부탱이라고 놀리는 말이지만,
해원기는 도리어 환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 올린다.
“이의 없네. 소유는 어렸을 때부터 남달랐지.”
자기가 칭찬받은 것처럼 기뻐해서.
말을 마친 오소민이 흘겨보다가 맥없이 입맛을 다셨다.
묵소유 얘기만 나오면 뭐든지 옳다는 투라, 아끼는 티를 고스란히 드러내니. 얄밉기도 하지만, 이렇게 지극정성이면 어쩔 도리가 없다.
방온화가 입을 가리고 웃는다.
“호호, 예전에 들은 적이 있구나. 잠잘 때와 수련할 때를 빼놓으면 원기는 언제나 소유를 안고 다녀서 대 언니와 이 언니가 참 편했다고. 보모를 구한 셈이라나. 호호호.”
“보모요? 하, 어쩐지, 해 형이 보모라, 크큭.”
오소민이 해원기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키득거렸다.
아예 안아 키웠다는 거잖나. 세상에 저 허름한 행색으로 아기를 어르는 장면이라니.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묵 소저, 일어나셨습니까!”
“편히 쉬셨습니까, 묵…….”
“아, 창피하니까 하지 말랬잖아. 이런 눈치 없는 작자들이.”
눈치 빠른 거로는 남에게 지지 않는 인색이귀가 대번에 눈치 없는 작자로 전락하고,
“늦잠을 자버렸네. 두 사람, 식사는 했어?”
그래도 알뜰하게 챙겨주는 마음에 감동했을까.
“네. 남들 눈에 띄지 않게 벌써.”
“해 대협이 새벽에 따로 챙겨주셨습니다!”
씩씩하게 답하는 목소리가 또 눈치 없이 커진다.
흥미진진한 대화를 끌고 묵소유가 정당으로 들어왔다.
“죄송해요, 늦었습니다. 숙모, 오빠.”
가볍게 예를 취하고 바로 해원기 옆에 앉더니,
“깨우지 그랬어요. 오, 장, 로님.”
존칭까지 붙여서 또박또박 부르는 바람에 오소민이 움찔했다.
“아니, 너무 곤하게 잠들었고. 어제 밤늦게까지 무리했으니까 푹 쉬는 게 좋겠다 싶어서. 아, 배고프죠?”
어째 변명하는 투가 되어서 얼른 화제를 바꾸는데.
그러나 오소민보다 빠른 해원기. 어느새 만두 하나를 손으로 잘게 찢어 젓가락과 함께 앞에 놓아주고,
볶은 채소 몇 가지도 알뜰하게 골라 담는다.
“내가 아직도 앤가? 후훗.”
입을 삐죽거리면서도 배시시 웃는 묵소유.
해원기가 새삼스럽게 묵소유의 얼굴을 보다가 뭔가를 생각하는 표정.
“남은 건 나중에 지져줄게. 막 일어났으니까 천천히 먹어라.”
시선이 바쁘게 탁자 위를 거쳐 정당 밖으로 돌아가자,
묵소유가 그러는 해원기의 팔을 잡으며 흘겨보는데.
조금 전의 오소민과 달리 곱게도 흘긴다.
“그만 하세요, 절세주왕(絶世廚王) 나으리. 남사스럽게.”
희한한 이름이 나와서 방온화가 얼른 상체를 내밀었고,
“절세주왕? 그건 또 뭐야?”
궁금하기는 오소민도 마찬가지. 탁자에 바짝 다가들자 묵소유가 해원기의 팔을 탁탁 두드렸다.
“아시지 않아요? 오빠가 박대정심(博大精深)의 방편이라고 요리에 몰두했었거든요. 엄마와 둘째 엄마 전부 주방에서 내쫓고, 풋. 그래서 절세검왕이 아니라 절세주왕이 될 거냐고. 뭐, 요리에다가 군림오행채(君臨五行菜)니 신령자재죽(神靈自在粥)이니 하는 이름을 붙여서 다들 웃느라. 맛은 괜찮았던가. 아빠가 검법은 관두고 칼질만 늘릴 셈이냐? 했던. 헤헤.”
말하다 보니 안 할 소리까지 나오는 것 같아서 얼른 귀여운 웃음으로 얼버무리지만,
해원기는 아예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여기서 이렇게 예전의 유치한 모습이 폭로될 줄이야.
와하하하하.
정당이 울리는 폭소가 터졌다. 해원기가 황망히 소리를 차단할 정도로.
해원기의 소년 시절은 어땠을까.
몇 번 만난 적이 있고, 또 서신을 주고받았던 방온화는 그나마 기억할 만한 장면이 남았지만.
오소민은 자못 흥미가 나는지 앞으로의 계획을 다시 일러주면서 틈틈이 해원기의 과거를 묻곤 한다.
웃고 놀리고. 함께 하는 식사가 즐거운데.
묵소유가 젓가락을 놓고서 해원기를 보았다.
“오 장로, 정 탐자. 오빠는 친구가 두 분이야?”
경사로 갈 사람들. 오랜만에 만난 해원기가 자신과 헤어진다는 계획에도 아무 반응 없이 엉뚱한 걸 물어서,
설명하던 오소민이 오히려 놀랐다.
“어, 괜찮아요? 해 형은 경사, 묵 소저는 노관주와 함께 청하로 나뉘는데?”
묵소유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
“왜요? 괜찮지 않을 게 뭐, 아 참, 그냥 이름 부르세요. 오 장로는 오빠 친구면서.”
“어, 그게, 묵 소저가 여전히 오 장로라고 하니까…….”
“언니라고 하면 되죠? 소민 언니.”
“그, 그럼. 그래도 이름을 막 부르긴, 에, 유매(柔妹), 유매라고 하죠, 아니, 할까?”
오소민이 이렇게 말까지 더듬을 만큼 당황하는 건 처음.
흐뭇하게 보던 해원기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래, 나중에 정 형에게도 제대로 오빠라고 하면 되겠구나, 또 한 사람 있단다. 악 형이라고.”
오소민에게 방긋 웃던 묵소유가 고개를 돌리면서 살짝 코를 울린다.
“흐응, 셋이나 된다고 자랑하는 거야? 그간 뭐하느라 셋밖에, 에휴, 됐어. 있다가 노조 돌아오시면 숙모랑 함께 의논하려고 했는데. 난 아무래도 황산(黃山) 쪽으로 가봐야 할 것 같아.”
“황산은 왜?”
“사명과 가장 깊숙이 관련된 곳이 아무래도 새로 생긴 남궁세가인 듯해.”
“음?”
해원기만이 아니라 오소민과 방온화도 표정이 바뀌었다.
유출된 천외의 비결, 그리고 천지보록의 행방. 묵소유의 사명을 이렇게 이해하고 있었는데, 남궁세가가 관련되었다는 건 예상치 못한 부분.
“인색이귀를 구한 건 우연이었지만, 그들 덕분에 단서를 빨리 찾아낼 수 있었어요. 계속 추살하러 오는 자들이 삼보해관, 호화방, 정수회 등 전혀 별개의 조직에서 나왔죠. 그들의 연결점이 반룡령이고, 그 위에 동창이 있다는 걸 인색이귀가 바로 일러주었는데. 고수라고 할 만한 자들의 무공, 특히 검법에 유출된 비결이나 천지보록 상의 무공 흔적이 있었거든요.”
방송서가 돌아오면 다시 얘기할 부분이지만, 방온화가 묵소유의 설명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
“그게 남궁세가와 어떻게 연관되지?”
“반룡령이란 게 원래는 동창이 뒤를 봐주는 남북십삼도의 악패(惡覇)나 흑도의 방파 들이라더군요. 이들에게 동창의 지시를 전달하는 역할이 북쪽에선 하북팽가, 남쪽에선 남궁세가. 인색이귀가 전에 오빠를 만났을 때는 하북팽가만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남궁세가까지 알게 된 거죠. 그런데 다른 점이 있다고.”
“다른 점?”
방온화와 오소민이 번갈아 묻지만, 묵소유는 나이답지 않게 침착하게 말을 이어간다.
“네. 하북팽가가 주로 조정이나 재물 쪽 일을 맡는 데 비해, 남궁세가는 오직 무림에만 초점을 둔 곳이라는.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반룡령을 비롯한 동창 세력들에게 무공을 전수한 곳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어요. 그 증거를 찾으려고 반룡령의 수뇌들을 쫓다가, 음, 반룡십삼령의 종적을 발견한 거고요.”
간밤에 대삼림에서 만나게 된 배경이다.
방온화가 낮게 침음했다.
“으음, 강북에 비해서 강남 무림은 회복이 더딘 편이었지. 과거에 이름을 떨쳤던 점창(點蒼)이나 형산(衡山) 등의 구주정문은 진작에 멸문되었고, 그 뒤를 이은 기둥이었던 적성세가(摘星世家)나 수정궁(水晶宮), 표국 등이 전부 사라졌으니까. 자연스럽게 새로운 기풍이 조성되길 바랐건만. 남궁세가는 분명히 폐문절손(廢門絶孫) 되었다고 여겼거늘. 게다가 황산이라, 흐으음.”
무거운 신음이 또 한 번.
새로운 정보를 얻었으나, 그 내용보다 장소가 더 마음에 걸린다.
묵소유가 잠시 방온화를 보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난 너무 어렸을 때 들어서. 오빠, 남궁세가의 마지막 후손은 수정궁, 결국은 벽세에 놀아났다고 했었나? 본래 그 집안이 황산에 있었어?”
해원기도 심각하게 미간을 좁히다가 바로 표정을 바꾸고서.
“그래. 수정궁의 대선주란 지위에 있었던, 남궁기륭(南宮起隆)이란 이름이었지. 남궁세가는 일대검호(一代劍豪)를 몇 명이나 배출한 명문이라 달리 남궁검문(南宮劍門)이라고까지 불렸고, 대대로 황산 연화봉(蓮花峯)에 살았단다. 사부님이 천마를 천도봉(天都峯)에서 징치하셨을 때는 이미 잊힐 정도였다던데. 지금의 신생 남궁세가는 단지 이름만 빌렸을 수 있겠다.”
말재주가 없는 줄 알았더니만, 자상하게도 일러준다.
그러나 이번에는 타박하는 말도, 흘겨보는 눈길도 없었다.
황산의 결전.
사정을 아는 이라면 참으로 숙연할 수밖에 없는 역사기에.
정당 안에 침묵이 감도는데,
해원기가 묵소유를 물끄러미 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소유야, 네 검을 좀 보자꾸나.”
묵소유보다 오소민이 먼저 눈을 크게 떴다.
“응? 검?”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
묵소유의 허리에는 커다란 바늘 같은 형태의 정해신검이 매달려있으니, 그냥 꺼내보라고 하면 될 걸 왜 일어서나.
묵소유는 단박에 해원기의 뜻을 알아들었는지 얼굴을 활짝 펴며 따라 일어서고,
“드디어 내 소원 중 하나를 이루네. 좋아!”
힘찬 대답과 신이 난 표정.
정해신검을 보자는 말이 아니라 검의 조예를 재보겠다는 의미다.
이 별서의 마당은 넓이가 십 장쯤 되는 정사각형.
정당 밖으로 나서던 해원기가 마주 보이는 정문에 바짝 붙어선 인색이귀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거기까지 검이 미치진 않을 거요.”
이익이 없으면 터럭 하나도 뽑아주지 않는다는 일모불발이 황송한 표정으로,
“해 대협과 신녀께서 검을 다루시는데 저희 따위가 어찌.”
말을 마치기도 전에 한 푼이라도 악착같이 따진다는 근근계교가 허리를 굽실거린다.
“그저 이렇게 모시고 보는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약삭빠른 자들이 벌써 정당 안의 대화를 들은 모양. 절세검왕과 능파신녀의 검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이득 아닌가. 어떻게든 마당에 눌어붙으려고 있는 아양, 없는 아첨을 다 하는 거다.
‘하긴, 중기귀생력(重己貴生力)을 익혔지.’
동해삼사로부터 비롯된 기괴한 호신지력을 익힌 자들이 검기의 여파를 겁낼 리 있나. 속내가 빤히 보이지만, 해원기가 더는 상관하지 않고 마당 중앙으로 나아갔다.
뒤따라 묵소유가 거리를 두고 해원기 앞에 서는데,
돌연 두 사람이 정당 지붕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쉬이익.
돌풍과 함께 내려앉는 동강.
그리고 곧이어 지붕 가운데에 이르는 짙푸른 인영.
“하하하, 하마터면 좋은 구경을 놓칠 뻔했잖으냐. 동강이 나보다 낫구나.”
방송서가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걸터앉다가 좌우를 둘러보며 목청을 높였다.
“이럴 게 아니라 수인이와 팔대탐자, 아, 몇 안 남았구먼. 에라, 망나니 너희도 올라와라. 두고두고 자랑할 거리를 보여주지. 핫하하.”
저녁때나 되어야 돌아온다더니.
먼지가 뽀얗게 일어나는 걸 개의치 않고 흥에 겨운 웃음이 이어지자,
별서의 사방에서 녹림장관의 인물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날아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