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346화 (346/410)

제87장 녹림장관(綠林壯觀) (2)

날이 훤하게 밝아올 무렵에야 눈을 붙였고,

하나둘 기지개를 켤 때는 미시(未時)가 끝날 즈음.

오소민이 방문을 열고 나오다가 마당에 선 해원기를 발견했다.

“어, 뭐해? 잠 좀 잤어?”

날씨는 확실히 추워졌지만, 햇볕이 가득 내리쬔 늦은 오후의 마당은 오히려 따스하다. 보온에 탁월한 사합원의 특성이랄까.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해원기가 고개를 돌린다.

“어, 소유는?”

대뜸 묻는 말. 인사가 이건가. 은근히 심통이 날 것 같은데, 오소민이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많이 피곤했는지 곤하게 자네. 해 형이 오래 붙잡고 있었잖나.”

간밤에 정당의 얘기가 길어지면서, 해원기가 먼저 쉬겠다는 양해를 구하고 묵소유를 데리고 나갔었다.

십 년 만의 해후.

형매지간(兄妹之間)에 그간의 사연을 나눌 시간이 필요하다는 건 누구나 이해할 부분이고, 무엇보다 둘 다 격한 싸움을 계속 해왔으니.

그러나 논의를 끝내고 오소민이 방으로 들어설 때까지 해원기는 잠든 묵소유 곁을 지키고 있었다.

얘기보다는 여동생의 휴식이 먼저였던가.

이미 오소민이 남장여인이란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 오소민이 오지 않았다면 그렇게 앉아서 밤을 새울 생각이었나 보다.

슬쩍 타박을 주자 해원기가 버릇처럼 머리를 긁는다.

“그랬었나. 훌쩍 큰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이것저것 궁금해서 그만.”

그다지 오래 얘기를 나눈 것 같지도 않으면서.

오빠라기보다 어쩐지 아버지 같은 느낌이라 오소민이 조금 어이가 없었다.

“잠은 잤어?”

다시 캐묻는 말에 해원기가 비로소 멋쩍은 표정.

“뭐, 충분히 회복했네.”

“흥, 또 운기조식으로 끝냈군. 어쩐지 귀가 계속 간지럽더니만. 무슨 사내들이 그렇게 수다를 떨어?”

그 표정이 같잖아서 오소민이 코웃음을 쳤다.

묵소유 옆에 누울 자리를 마련하고 나서도 한동안 밖에서 떠드는 소리가 났었다. 정록과 방수인이 해원기에게 이 사람 저 사람 소개하는 소리.

굳이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뭘 하는지 훤했다. 녹림노조와 여의낭랑이 녹림장관의 정예를 전부 끌고 나왔으니. 팔대탐자와 녹건호한들을 빠짐없이 절세검왕에게 인사를 시켰겠지.

“아주 녹림의 총표파자(總瓢把子)라고 해도 되겠던걸.”

표파자란 강호의 은어, 특히 녹림에서 우두머리를 지칭할 때 쓰는 흑화(黑話)다.

방송서가 감상에 젖어 꺼낸 과거의 일화가 정확히 뭔지는 몰라도, 어째 녹림장관의 사람들은 죄다 해원기를 한집안으로 여기는 듯.

은근히 질투가 날 정도다.

해원기가 긁던 머리를 만지면서 피식 웃는다.

“이렇게 지저분한 바가지가 어디 있다고. 음, 배가 고프구먼. 뭐 좀 먹으면서 내가 빠뜨린 게 없는지 가르쳐주게나.”

표파(瓢把)란 본래 꼭지가 달린 바가지란 의미.

말재주는 없으면서 능청맞게 화제를 돌리는 해원기라, 오소민이 한바탕 쏘아 불일까 하다가 그냥 흘겨보면서 정당으로 향했다.

잠도 못 잔 사람이잖나.

방온화가 제시한 두 가지 방안.

첫 번째 진가난분은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기 어렵다는 말.

동창의 영수(領袖)인 제독태감이 직접 나섰으니 그대로 물러설 리 없다. 더구나 강호의 일개 문파가 아닌 동창, 관부를 동원해서라도 사방에 인원을 배치해 상덕공주를 쫓을 것이니.

상덕공주와 절세검왕을 비롯한 일행의 소재를 파악하려 기를 쓸 터.

상덕공주의 안전을 확보하고, 해원기가 무난히 경사로 들어가려면 동창의 눈을 속여야 한다.

두 번째 이허위실은 텅 빈 것을 꽉 찬 것처럼 여기게 한다는 뜻.

본래 황제를 노리던 매복이었다고 했고, 그 사실이 상덕공주에게 드러난 것도 큰 문제지만.

동창이 벌이는 일련의 괴이한 행동들.

구양금오의 겁표 사건부터 최근의 육신지궁까지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지, 소위 구대문파랍시고 무림을 재편하려는 시도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또 제독태감 외에 태상이니 국사니 하는 이름 중에 진짜 배후가 누구인지.

여전히 모호한 상황에서 방대한 적의 세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힘을 모으지 못한 현재. 국면을 바꾸는 데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린다.

진가난분과 연결해서 동창을 혼란하게 할 필요가 있다.

“……즉, 상덕공주와 절세검왕의 일행이 갑자기 여기저기에 나타나야 하는 거지. 아울러 이들이 전부 강호 세력과 연결되려는 행적을 보여야 하고. 이를 위해 녹림장관의 팔대탐자와 녹건호한이 전부 투입될 거야.”

“음, 이건 너무.”

해원기가 먹던 만두를 내려놓으며 침중한 표정을 짓지만, 오소민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간다.

“어제 팔대탐자 중의 일곱 분만 있었지? 유일한 여자인 도장묘(跳牆猫)는 낙양으로 단목 당주와 연락을 취하러 갔다고 하시더군. 단목 당주도 이미 구주정문에게 무림첩(武林帖)을 보냈다니. 확실히 시간이 좀 더 필요해. 그리고.”

해원기를 들여다보듯 내민 얼굴.

“혹시 자네만을 위한 일이라고 착각하진 않았지? 자칫하다간 무림과 조정이 크게 어긋날 위험이 있다고. 대놓고 한곳에 몰려들었다간 엉뚱하게 역적으로 몰리기에 십상이잖아. 이번에 상덕공주를 만난 건 생각지 못했던 요행이라. 자네의 소숙모께선 정말 머리가 아프실 거야.”

방온화가 굳이 상덕공주를 따로 만난 이유.

동창은 강호에 속하지 않는다.

우물물과 강물이 서로 침범하지 않는다는 오랜 묵계가 이미 무너진 세상. 온갖 궤계를 꾸며댔던 벽세나 포악한 힘으로 천하를 삼키려던 지부보다 어떤 면에선 더 어려운 상대다.

그래서 일부러 동창을 조정으로 바꿔 표현했다.

이미 ‘위초산채’랍시고 산적 토벌이란 명목으로 녹림을 노리지 않았었나.

그저 해원기가 연관되었다고 녹림장관이 전력을 투입한 건 아니라는 뜻.

해원기가 머쓱하게 입가를 문질렀다.

“죄송할 뿐이지만, 그래도 마음 든든한 건 어쩔 수 없군.”

오소민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안다.

괜히 녹림장관에 큰 피해를 주는 게 아닐까 하는 염려는 들어도, 확실히 방송서가 녹림장관의정예를 이끌고 왔기에 이렇게 편히 쉴 수 있었다.

특히 묵소유가 단잠을 자는 게 무엇보다 기쁘다.

“자네와 나, 그리고 화호초는 평범한 장돌뱅이로 변장해 내일 새벽에 경사로 출발하네. 팔대탐자와 녹건호한의 절반은 이미 각각 정해진 대로 인원을 맞추어 움직였어. 예닐곱 명이 한 조가 되어 의도적으로 종적을 드러내지. 하북 석가장, 산동 제남, 산서 태원, 하남 낙양 등등. 중간의 주요한 관아도 포함되고. 그러면서 이름난 표국, 방회, 문파랑 연결되는 흔적도 남기는 거야. 동창에 당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잖아? 흐흥.”

오소민이 잔뜩 기대하는 표정으로 웃음을 덧붙인다.

계획의 큰 틀은 방온화가 세웠으나, 상세한 설명을 맡길 정도로 오소민의 재지를 믿기에.

세부적인 부분도 충분히 상의를 거친 듯.

“음, 그러면.”

난성의 이 별서는 어차피 오래 머물 곳이 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해원기가 누굴 신경 쓰는지 뻔히 아는 오소민이 바로 말을 받았다.

“노관주와 낭랑은 상덕공주를 데리고 청하(淸河) 쪽으로 서서히 이동할 예정이야. 여기에 묵 소저도 함께하기로 했지. 묵 소저의 사명은 알지?”

“그렇게 되었군.”

묵소유는 본래 정풍선자의 명으로 방송서를 만나려고 해중천을 떠났다. 미리 들었던 것처럼 과거에 신주영웅회를 통해 유출된 무공을 확인하기 위함이고, 여기엔 천지보록의 행방도 관련된다.

신주영웅회에 참가했던 천외육가 중의 셋. 적성문은 천문노인의 제자인 단목정이 있어도 이미 완전히 멸문한 것과 다름없으니, 남은 건 녹림장관으로 바뀐 대관원과 유일하게 전통을 이어가는 해중천이다.

천외삼가가 신주영웅회에 참가한 이유는 무림의 정기를 북돋으려는 충심이었기에, 무학의 발전을 위해 자파의 비결을 서슴없이 공개했었고. 이제 와서 소유권을 주장할 생각 따위는 없다.

다만, 보편적인 공유가 아니라 몇몇에 의한 독점. 그리고 악용될 우려. 특히 천지보록 같은 무공비급은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무림에 풍파를 일으킬 소지가 있다.

난세가 끝나고 근 이십 년이 지나서 이제 안정을 되찾을 때.

천극 탁관영과 동료들이 지부와 벽세의 잔재를 억눌러 안정의 토대를 만들어주었다면, 천외의 후대는 새로운 세상을 위한 뒤 청소가 어울릴 터.

공교롭게도 묵소유는 뭍에 오르자마자 그 단서를 찾았고, 사명은 아직 완수하지 못했다.

천외는 천외의 일을 해야 한다. 이는 설사 천손이라도 간섭할 수 없으며, 해원기는 처음부터 천손이 아니었다.

사부는 고죽의 묵(墨)이란 성을 일부러 내리지 않으셨지.

다 큰 여동생.

녹림노조 방송서와 여의낭랑 방온화가 묵소유와 함께해준다니 더 바랄 게 없다.

이렇게 걸리는 문제가 하나씩 풀려가니 확실히 마음이 편하다.

삐꺽.

곁방 문이 열리며 방온화가 보이자 해원기와 오소민이 일어났다.

“일월표객도 쉬도록 내가 공주마마랑 있었지. 지난 얘기는 오 장로에게 들었다만, 원기 네가 이리 멀쩡한 게 되레 이상한 거야. 후후.”

묘한 웃음.

오소민이 얼른 동감을 표한다.

“그렇죠? 쇠로 만든 줄 알았다니까요. 쾌체 일 할 때 어지간히 환영받았을 거예요.”

“나도 예전에 그랬거든. 수인이 아빠와 그 형님 되시는 분, 사람이 아니라고 여겼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지. 같이 다니면 아주 피곤해져서, 오 장로와 록이가 안쓰럽구먼.”

철한(鐵漢)이나 신인(神人)이라는 표현은 원래 칭찬이지만,

어째 해원기에게는 놀리는 뜻으로 쓰인다.

어떻든 사부와 탁 소숙에 비견되는 것만으로도 기쁘지만.

“아, 수인이는 어디 갔습니까?”

“대탐자 노릇 좀 하라고 둘러보게 했어. 동강 찾아본다고 지붕에만 올라가려고 해서. 저러다가 자기도 뭐 하나 길러보겠다고 설칠까 몰라.”

가벼운 얘기가 오가고.

해원기와 오소민이 간단히 요기하는 걸 보다가.

방온화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버지는 가원외(假員外)를 데리고 다시 석가장으로 가셨다. 아는 연줄을 다 통해서 관아에 들어온 소식을 알아보신다고. 저녁 무렵엔 돌아오실 거야. 일단 서문창이란 자를 찾아야 공주마마의 문제가 풀릴 테니까. 오 장로에게 얘기를 듣고서 좀 놀랐단다. 금의위 대영반이라, 은하칠정검을 완성했다며?”

가원외는 누가 봐도 은퇴한 고관으로 보일 법한 차림새의 팔대탐자 중 하나.

하북에서 가장 큰 고을인 석가장의 철금장을 본거지로 한 녹림장관은 그동안 관아에도 연줄을 만들었나 보다.

“네. 동창이나 이십사아문의 환관들이 다 꺼리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음. 너도 알다시피 난세의 마지막에 속가의 백가장인 도 어르신은 세상을 떠나셨다. 당시 친군지휘사사의 부지휘사였던 이진원, 도 어르신이 길러낸 후대도 칠성장(七星將)이라는 수하 일곱을 동원하지 않고선 은하칠정검을 완전히 펼칠 수 없었다고 했었어. 무엇보다 난세가 끝나고는 이 부지휘사와 연락이 끊겼기에. 황궁 내부의 변화에 딱히 신경 쓸 겨를도 없었고.”

백가장 도자명을 따라 결전에 참여했던 이진원이지만, 본래 신분인 친군지휘사사로 복귀한 후에야 다시 귀찮게 할 이유가 없다.

황궁의 친군지휘사사가 금의위로 개편된 것도 무림과는 상관없는 일.

그런데 지금 은하칠정검을 완성한 서문창이 등장했다.

톡톡.

방온화가 탁자를 가볍게 두드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공주마마에게 이전 회하방이었던 이들 소식도 들었다. 아버지도, 나도 네가 경사에 가려는 이유를 감히 묻기 어렵다만.”

회하방의 총령인 장전민을 통해 일월표객에게 의뢰를 했다고. 단, 당시 병부낭중의 벼슬이었던 노종련은 행방불명.

해원기가 미심쩍게 여겼던 부분을 방온화 역시 상덕공주에게 다시 확인했었고, 잠깐 말을 멈춘 건 해원기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검협 묵세휘와 천극 탁관영만이 아는 경사의 어떤 인물. 가장 오래된 동료인 방송서나 철금선생 종지음조차 정체를 모르는 신비스러운 인물이 있다.

묵세휘의 사문 혹은 집안과 관계가 있으리라는 추측뿐.

“지금의 경사는 호혈(虎穴)이라고 불러도 틀리지 않을 게다. 우리가 전에 배회촌에서 나누었던 내용, 기억하지?”

이어지는 말소리에 염려가 느껴진다.

“네.”

“동창, 이십사아문, 경수사. 제독태감, 상보태감, 태상, 국사. 구양금오와 당금의 정세에 깊숙이 관여된 이름들이 전부 경사에 있다. 내 마음 같아서는 네가 갔다가 바로 돌아오던가, 아예 록이나 수인이를 대신 보냈으면 싶은데, 후, 쓸데없는 소릴 했구나.”

고소를 머금자, 오소민이 머리를 저었다.

“그러실 만도 하지요. 왠지 이 친구에겐 자꾸 일이 얽히니까. 그것도 동창 쪽에서 나름 몰래 꾸미던. 하, 배후가 누군지 몰라도 어지간히 이가 갈릴걸요.”

묘하게 두 사람의 표정이 비슷하다.

마치 문제아가 어머니와 누나 앞에 끌려온 듯한 분위기.

당사자인 문제아는 평소 얼굴 그대로 덤덤한데, 방온화가 그 덤덤한 얼굴이 재미있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그것도 닮았구나.”

이가 갈리게 만드는 재주라. 누굴 닮았을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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