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345화 (345/410)

제87장 녹림장관(綠林壯觀) (1)

어려서부터 여자답지 않게 담대하단 소릴 많이 들은 상덕공주지만,

이번에 겪은 일은 그녀로서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한마디로 경험(驚險). 목숨이 위태로운 일에 놀란 가슴은 여간해선 가라앉지 않는다.

공주로서 늠름함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으나,

일단 방으로 들어와 침상에 앉자 맥이 탁 풀렸다.

근시(近侍) 역할로 일월표객이 방안을 둘러보고 문가에 정좌하고 앉는 동안에도 전혀 신경을 쓰지 못했다.

물론 궁에서도 시위(侍衛)니 궁녀니, 남자 구실을 못하는 환관들이 언제나 가까이 머무르는 편이기에 딱히 어색하진 않았지만,

피곤이 밀물처럼 밀려든다.

낡은 침상과 딱딱한 침구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었는데,

문득 눈이 뜨였다.

방에는 자기 혼자. 근시인 일월표객은 어디 갔을까. 방문 밖도 조금 시끄러워서 평소 같으면 성질을 내며 한바탕 꾸짖었을 터.

그러나 지금의 처지를 금방 떠올리곤 오히려 궁금해졌다.

이렇게 자기만 내버려 둘 리가 없잖아.

경사에서부터 자신을 거의 업다시피 한 일월표객뿐 아니라 어마어마한 적들과 맞서 싸운 ‘의사’들 아닌가.

공주라는 신분을 알고는 호위에 더욱 힘을 쏟는 것 같더니.

무슨 일이 생겼을까. 호기심이 부쩍 나서 벌떡 일어나 살금살금 걸었다.

그리고 방문 사이에 눈을 딱 갖다 대자 보이는 광경에,

묘한 표정이 되었다.

근시 역할의 일월표객, 별서의 주위를 경계한다던 인색이귀, 정당 지붕 위로 올라갔던 하일웅까지.

처음 이 별서에 들어올 때의 인원 전부가 도로 정당에 모인 듯. 아니, 인원이 더 늘었다.

장방형 탁자 안쪽의 세 사람,

가운데 누군가 혼자 앉았고, 그 뒤에 시립한 두 남녀. 그러고 보니 다른 사람들도 전부 서서 상덕공주가 쉬는 방 쪽으로 몰려서.

‘누구지? 아까는 어린 여자애한테 죄다 극진하게 예를 차리더니만. 검왕이란 젊은이보다 더 센 사람인가.’

흐릿한 불빛 아래 사람들이 몰려서는 바람에 누군지 잘 보이지 않는다.

제대로 무공이라 할 만한 것도 배우지 않은 상덕공주.

그래서 혼자 앉은 사람 앞 바닥에서 해원기와 묵소유가 큰절을 올리는 걸 알아볼 수 없었다.

새까만 대나무 조각을 엮어 만든 오죽관(烏竹冠)으로 눈이 내린 듯한 백발을 단정히 묶었고, 몇 가닥 깊은 주름이 남은 얼굴에 큼직큼직한 이목구비. 아직 검은 빛이 남은 수염을 가슴까지 드리워서 몸에 걸친 짙은 녹색 장포와 어울려 의외로 고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노인.

활짝 웃으려던 얼굴이 불현듯 내려앉으려는 걸 감추려고,

수염을 쓰다듬는 척 입가를 가린다.

“그래, 그래. 이렇게 만나서 참으로 기쁘구나. 어험.”

혹시 목소리까지 낮아질까 싶어 헛기침으로 얼버무리곤 얼른 두 손을 내밀었다.

“자, 어서 일어나 앉자꾸나. 우리는 다 번잡한 예의를 따지지 않는 강호인, 내 비록 한집안 대우를 받아 너희 둘의 절은 받았지만, 다른 이들이 불편하겠다.”

“네.”

“예,”

해원기와 묵소유가 일어나자 노인이 비로소 웃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모두 앉으시오. 오랜만이구려. 허허.”

“그렇군요, 노관주.”

“이렇게 뵈니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노관주.”

그 웃음에 다들 반가운 낯으로 분분히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녹림장관의 노관주. 짙은 녹색 장포를 걸친 이 노인이 바로 녹림노조 방송서다.

기다란 탁자 좌우를 둘러보다가 시선이 다시 오른쪽 곁에 앉은 해원기에게 돌아간다.

“네가 절하는 모습을 보니 문득 예전 태원의 외진 주루가 기억나더구나. 원기, 네가 묵 형의 제자가 되던 그 날이. 허, 아주 옛날 같구먼.”

이제는 백발노인이건만,

끝내 아련한 추억의 한 자락을 끄집어내며 영탄조가 되어버렸다.

벌써 십팔 년이나 흘렀다. 매를 부리는 재주 때문에 머나먼 요동 벌에서 팔려온 꼬맹이가 천하제일검의 제자가 되었던 게.

그 꼬맹이가 이렇게 듬직한 사내로 바로 곁에 있구나. 사부의 검을 똑같이 등에 지고서.

감상을 금하기 어려웠다.

해원기도 마찬가지. 더벅머리를 흔들며 쓴웃음을 짓는다.

“어제 일처럼 선명합니다. 제가 입문하던 날, 노관주를 비롯한 여러분이 공증을 서주시고 축하해주시고. 예물을 받았으니 앞으로 녹림에 신경을 쓰라고 하셨던 노관주의 말씀도요.”

“핫하하하하!”

호방한 대소가 터지다가,

방송서가 바로 웃음을 그치면서 다시 수염을 쓰다듬었다.

“맞아. 우리 녹림이 아주 싼 값에 절세검왕을 얻었지. 험, 그런 일도 있었구나. 그런데 그 노관주라는 칭호는 영, 쯧.”

둘만이 회포를 풀기엔 어울리지 않는 장소. 대충 감정을 추슬러 마무리하려다가 또 불만이 툭 튀어나온다.

당세에 녹림의 신과 같은 취급을 받는 녹림노조를 노관주라고 부르는 게 싫은가.

혀를 차자 해원기 옆의 묵소유가 머리를 갸웃거렸다.

“인제(仁弟)를 얻으신 후에 직접 노조로 부르라고 하셨다던데요. 부모님은 인제를 생각해서 그냥 할아버지로 불러도 괜찮다고…….”

“헛, 안 된다, 안 돼!”

방송서가 질겁하며 두 손을 급히 내흔들더니,

“배분(輩分)이 이상해진 바람에. 이게 전부 네가, 흠흠.”

왼쪽 옆의 방온화를 보려다가 도끼눈을 의식하곤 얼른 딴청을 피우니.

고아한 분위기를 풍기던 차림새와는 전혀 딴판.

그 당황한 모습에 사정을 아는 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다.

고검협 묵세휘의 가장 가까운 벗.

송서(送暑)라는 이름이 송서(松鼠), 즉 다람쥐와 발음이 같다고 놀려댈 정도로 친했다.

형제와 같은 친구라서 해원기가 입문할 때에는 묵세휘가 직접 ‘방 숙부’로 부르라고 했지만,

묵세휘의 유일한 친인이라고 할 아우 탁관영이 딸인 방온화와 맺어지면서,

속칭 ‘족보’가 꼬여버렸다.

본래는 해원기와 묵소유가 조카여야 하는데.

방수인과 형제자매로 지내려면 천상 방송서가 할아버지가 되어야 한다.

그래도 싫다.

‘묵 형’의 제자와 딸에게 할아버지 소리를 들을 수는 없다.

비록 방수인을 얻었다고 묵세휘에게 자랑이랍시고 ‘녹림노조’라 자칭하는 편지를 보내긴 했어도.

무림에선 나이보다 배분이 더 중요하다지만, 묵세휘가 배분 따위 신경 썼을 리 없다.

어쩌면 제자와 딸을 통해 방송서를 놀려먹으려고 했을 수도.

무뚝뚝한 주제에 가끔 허파가 뒤집힐 짓궂은 농을 했으니까.

“묵 형과 두 분 형수는 도대체 뭔 생각으로, 에이.”

따지길 포기하는 게 낫다.

백발노인이 되었다고 성격이 바뀌지는 않는다.

워낙 소탈하고 호방한 방송서라 이런 채신머리 없는 자신의 언행에 별로 구애받지 않았는데,

탁자 끝을 보는 눈이 슬쩍 빛을 머금는다.

“그런데, 아까부터 눈에 거슬리던 저것들은 뭐냐?”

남들이 인사할 때는 뒤에 숨어서 뭉그적거렸고, 다들 자리에 앉을 때는 슬그머니 구석으로 물러나 어정쩡하게 선 둘.

방송서의 눈빛에 인색이귀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저것들’이라고 하자마자 소름이 쭉 끼치며 꼼짝할 수가 없으니.

졸지에 정당 안이 얼어붙는 것 같은 느낌에 좌중이 번쩍 정신을 차렸다.

과연 녹림노조.

그러나 아무렇지 않게 나오는 맑은 음성.

“아, 제 노복(奴僕)이에요. 예전 동해삼사 밑에서 배운 인색이귀라는 해적인데. 바르게 바닷길을 찾겠다고 약속해서. 반룡령에서 나쁜 짓 한 게 도움이 많이 되더라고요.”

묵소유가 고운 눈을 깜빡거리며 대답하자,

방송서가 당장 눈빛을 부드럽게 바꿔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해중천의 노복이라면 저것들에는 복이 터진 셈이지.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듣고, 일단 지금 상황부터 점검해보자꾸나. 배회촌을 떠난 지 꽤 되었는데 형대를 거쳐 이제 난성이라. 나는 망나니들 이끌고 석가장을 두 번이나 들락거려야 했단다. 흐음.”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건 질색하면서,

묵소유에겐 그야말로 뭐든지 들어줄 것 같은 인자한 모습.

화제를 바꾸려고 목을 가다듬는데,

방온화가 슬그머니 상체를 앞으로 내민다.

“아버지, 탐자들의 정보와 방금 정록이에게 들은 것까지. 상당히 복잡하고 긴 얘기일 것 같으니 여기서는 간략하게 정리만 하죠. 오 장로?”

약속을 정하고 만난 자리가 아니다.

배회촌을 떠나 자산을 거쳐 석가장을 들른 후에 곧장 경사로 향하려던 해원기와 오소민, 동창에 숨어들어 ‘위초산채’라는 암호를 보냈던 정록, 형대에 거점을 둔 하일웅과 일월표객, 그리고 머나먼 해중천에 있을 줄 알았던 묵소유.

우연이라고 해도 다양한 사건이 겹치고 겹쳐 여기에 함께 있을 터.

더구나 많든 적든 과거에 인연이 있는 면면이다.

자칫하다간 며칠 밤낮을 하염없이 떠들어도 모자랄 판.

배회촌에서 오소민의 영민함을 알아봤기에 서둘러 설명을 청했고,

한 자리 떨어져 앉았던 오소민이 바로 그 뜻을 알아들었다.

겨우 일각을 조금 넘긴 짧은 시간으로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는 건,

간결하다는 표현을 넘어서 경이롭다.

묵소유가 새삼스럽게 다시 쳐다보고, 지나온 일의 전모를 알게 된 다른 이들의 얼굴에도 놀라움이 어렸는데.

당연하다고 여기는 이는 해원기와 방온화 둘뿐.

방온화가 방송서를 힐끗 보면서 미소를 머금었다.

“역시 오 장로야. 점만 찍었는데도 선과 면을 물론 전체의 윤곽까지 보이는구먼. 아, 물론 뭘 그리려는지는 여전히 모호하지만.”

방온화를 보는 오소민의 얼굴에도 의미심장한 미소.

“네. 골치 아프네요.”

상덕공주를 재우고 논의하려던 화제. 그 중점은 동창의 숨겨진 의도를 파헤치는 데 있었다. 방온화는 오소민의 간결한 설명에서 이미 그 문제를 알아챘다.

하지만, 좌중이 다 두 사람처럼 뛰어난 지혜를 지니진 않았으니.

방온화가 곧장 말머리를 돌렸다.

“순서를 정해야 하겠어요. 동창이 참으로 엄청난 짓을 벌이고 그 규모도 갈수록 커지는데, 기묘하게도 우리 원기에게 자꾸 걸려서. 흠, 이러다간 원기의 일이 너무 늦어지죠.”

이 자리의 좌장은 누가 뭐래도 방송서.

지자(智者)는 정리에 능해도 함부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방송서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는데,

그 시선이 해원기를 향하면서 어쩐지 깊이 가라앉고, 손이 가만히 어깨를 쓰다듬는다.

여기저기 찢긴 옷, 소매도 거의 날아가서 격전의 흔적이 역력하지만,

넓고 강건한 어깨다.

“묵 형도 그러더니.”

수염 속의 입이 조그맣게 중얼거리다가 쓰다듬던 손이 힘차게 어깨를 쳐서,

짝.

해원기를 비롯한 좌중이 다 눈을 크게 떴으나,

“허허, 하여간 못된 것들도 나름 천적(天敵)을 알아보는 본능은 있나 보다. 핫하하하.”

또 정당이 떠나갈 듯한 대소.

그러나 이번에는 방온화가 눈치를 주기 전에 그쳤다.

고검(孤劍)의 숙명일까.

외로운 검을 진 자는 혼자서 그 어깨로 천하를 짊어져야 하나.

구양금오니 육악지력이니, 후예가 쓰던 활과 보병에 담긴 두꺼비든 뭐든. 하늘에 닿을 힘과 땅을 뒤흔들 보물이라도 전혀 관심이 가지 않는다.

정사마(正邪魔)를 가리지 않고 오로지 사람과 사람이 어울리는 세상을 위해,

한 자루 검을 들고 홀로 맞섰던 사나이.

반신이 부서진 몸으로 황산 천도봉을 달려가던 그 친구가,

다시 눈앞에 있는 것만 같았다.

이번에는, 이번만은. 기어코 한 팔 힘이 되어주어야만 한다.

웃음을 뚝 그친 방송서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 순서를 정해야지. 첫 번째는 원기를 경사로 보내는 것, 두 번째는 공주마마를 안전히 돌려보내는 것. 그러면서 동창이 뭘 꾸미는지 밝혀야 한다. 그러려면 충분한 인원과 기동성을 갖추어야겠구나. 일단 약왕당주와는 연락이 되었으니, 그동안은 온화, 네가 기책(奇策)을 내보아라.”

부녀지간이라도 지금은 공적인 얘기.

방온화가 가볍게 머리를 숙이곤 두 손을 탁자 위에 짚는다.

“기책이랄 것까진 아닙니다만, 당면한 상황을 풀어낼 궁리는 좀 해봤습니다. 하나는 진가난분(眞假難分), 또 하나는 이허위실(以虛爲實). 대략적인 설명은 오 장로가 해주고, 저는 우선 공주마마를 뵈어야겠네요. 날이 밝을 때까지 방문에 붙어계실 순 없으니까.”

다들 궁금한 시선을 오소민에게 돌리는 건,

상덕공주가 문틈으로 훔쳐보는 걸 진작부터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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