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344화 (344/410)

제86장 만검귀종(萬劍歸宗) (4)

전통적인 사합원은 정당 양쪽에 작은 방을 두어 집주인의 서재나 선조의 위패를 모시는 공간으로 쓴다.

낡은 침상과 단촐한 가재도구가 남아 있는 정당의 왼쪽 곁방에 우선 상덕공주를 쉬도록 하고, 그 호위는 일월표객이 맡기로 했다.

‘강호의 의사’니 뭐니. 그래도 상덕공주가 지금 가장 밑을 수 있는 이는 역시 경사에서부터 자신을 지켜온 일월표객이니까.

그리고 묵소유가 인색이귀에게 별서의 주위를 경계하도록 하자, 하일웅이 칼을 짚고 따라 일어섰다. 개심해서 바른길로 들어섰다고 들었으나 노도객은 아직 믿기 어려운 듯, 자진해서 정당의 지붕에 올라가 버렸다.

정록은 그사이 오소민과 몇 마디를 주고받더니 마지막에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고.

“후, 할 수 없네. 한번 주욱 둘러볼게.”

오소민이 대뜸 코웃음을 친다.

“흥, 탐자라면 탐자 일을 하라고. 더구나 여기는 본래 네 바닥이잖아.”

정록이 여물 먹는 소처럼 입을 주억거리더니 해원기와 묵소유에게 번갈아 목례를 보냈다.

“해 형, 묵 소저. 내 금방 다녀올 테니. 음, 제대로 된 요리라도 구해올까나.”

등 떠밀려 나가는 티를 역력히 내지만, 정당을 나서는 동작은 기민하기만.

그 뒷모습을 보지도 않고 오소민이 자리를 옮겨 앉았다.

“공산과 조가보 쪽 동정을 더듬어보라고 했어. 또 서둘러 녹림장관과 연락을 취해야 해서.”

정록에게 부탁한 일에 대한 간단한 설명.

해원기가 방온화와 나누었던 대화를 기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배회촌까지 방온화가 직접 내려왔고 녹림장관의 팔대탐자를 전부 소집했다고 했었다. 심지어 녹림노조 방송서가 녹건호한들을 이끌고 오는 중이라고.

자산을 넘어 육신지궁, 다시 형대로 갔다가 공산을 거쳐 난성으로 왔으니. 이 지역은 전부 녹림장관이 있는 석가장(石家莊) 부근. 당연히 이목이 퍼져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얘기를 듣고만 있던 묵소유가 짧게 탄성을 낸다.

“아, 노관주께 편지를 올렸는데.”

“엉?”

이게 무슨 소리인가. 상황을 정리하고 화제를 바꾸려던 오소민이 뜻밖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해원기도 얼떨떨한 표정.

묵소유가 해원기를 보고 싱긋 웃으며 손가락 하나를 세웠다.

“마침 저 녀석이 찾아왔거든.”

저 녀석이라면.

묵소유가 세운 손가락을 따라 위를 올려다보던 해원기가 눈을 껌뻑거렸다. 컴컴한 정당 천장을 보라는 게 아니겠지.

오소민이 먼저 그 의미를 알아차리고,

“동강, 동강이로군요.”

둔한 ‘고구마 대장’도 겨우 깨달았다.

자산에서부터 사라졌던가. 워낙 제멋대로인 녀석이라 심부름 몇 번 시켰다고 내뺀 거로 여겼었다.

툭하면 불만을 그런 식으로 표시하곤 했으니까.

‘하긴, 자산의 수사나 육신지궁에서도 보이지 않았지.’

인간 세상의 일에 함부로 끼어들지 못하는 계율. 그래도 육악을 흉내 낸 요물 따위라면 신이 나서 달려들었을 텐데.

자신도 연달아 이어진 괴사에 불러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다.

해원기가 머쓱해서 머리를 긁었다.

“그랬구나. 그 녀석이 용케…….”

“응. 중원에 들어올 때부터 은근히 기대했지만, 서주(徐州)까지 올라오고서야 만날 줄은 몰랐어. 그러지 않아도 사조님이 뭍에 오르면 먼저 노관주께 알리라고 하셨는데. 에, 내가 좀 바빴거든.”

말주변 없는 해원기는 그저 고개만 끄덕여대서,

오소민이 힐끗 째려보다가 끼어들었다.

“서주요? 실례지만, 묵 소저는 해중천을 이었다고. 그럼 해남에서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서주는 중원의 동쪽인 강소(江蘇)에 속하는 큰 고을. 개방이 비록 분타를 많이 줄였어도 나름 각지의 소식엔 빠른 편인데. 묵소유는 어디를 거쳐 북상했을까.

반룡십삼령이 기겁하던 능파신녀의 소문을 들어본 적이 없다.

묵소유가 웃는 낯 그대로 얼굴을 돌렸다.

“그게 바다를 건너자마자 묘한 일에 휘말렸지요. 백성을 지켜야 할 진해위(鎭海衛)니 하는 자들이 거꾸로 왜구와 결탁해 온갖 수탈을 자행하는 걸 목도하고 가만있을 수 없어서, 그러던 와중에 삼보해관에게 죽을 뻔한 인색이귀도 구했고. 동창과 반룡령이란 걸 자세히 들었죠. 그러다가.”

“왜 그랬느냐? 무조건 나부터 찾을…….”

“오빠가 환정곡에 가만히 있으리란 보장이 있어? 나도 사명(師命)이 있다고. 뭐, 노관주를 뵈면 당연히 오빠 소식도 들을 거로 생각했었지. 끝까지 들어봐.”

사문의 명을 받아 나왔다. 아무리 여동생이라도 간섭할 수 없는 부분.

게다가 집을 떠나 쾌체로 돌아다니다가 비로소 무림에 발을 들인 해원기로선 더 할 말이 없었다.

“삼보해관이 끈질기게 들러붙었고, 그러다가 해남검패란 자가 엉뚱한 수법을 썼어요. 당시엔 그저 미심쩍어서 인색이귀더러 반룡령을 찾으라고 했는데. 그다음에 무슨 귀신 나부랭이 같은 호화방이란 자들, 또 위로 올라가면서 장돌뱅이 차림의 정수회니 뭐니. 개중에 드문드문 신기한 기예가 섞였다는 걸 확인하고는, 음, 사조님이 내리신 명이 어떤 의미인지 깨달았다고 할까요.”

사조는 해중천의 정풍선자(定風仙子).

해원기에게서 묵소유의 사문에 대해 들었던 오소민이 얼른 인사를 덧붙였다.

“선자께서는 강녕하신지요? 안부를 여쭙는 게 늦었군요.”

묵소유 손을 모아 답례하며 환한 표정을 짓는다.

“고마워요. 편히 지내세요. 이제 골치 아픈 일은 전부 저한테 맡기셨으니까요. 음, 본래 서주에서 휘주로 넘어가려고 했는데 반룡령의 우두머리들이 갑자기 소집령을 받아서. 이것도 인색이귀가 빼내온 정보였죠. 그렇게 뒤를 쫓다가 형대 북쪽의 대삼림에서 따라잡은 거예요.”

“그렇군요.”

오소민이 눈가에 살짝 주름을 잡았다.

묵소유가 거친 경로는 그동안 해원기와 자신이 겪었던 길과 완전히 다른 쪽.

산동에서 내륙을 통해 장안으로 갔다가 다시 낙양을 지나 경사로 향하는 동서의 왕래와 달리 묵소유는 남쪽 끝에서 해안을 따라 곧장 북상한 셈이다.

그러면서 상당히 중요한 명사가 계속 나왔다.

능파신녀란 명호는 남해안 일부분에서만 불렸을 터. 중원에 알려지는 것보다 묵소유가 더 빠르게 이동했을 것이다.

삼보해관은 귀에 설지만, 호화방과 정수회는 전부 동창이 만들어낸 세력들. 그리고 반룡령까지.

신통하게도 딱 문젯거리들만 집어냈다. 과거에 반룡령에 고용되었던 인색이귀가 제대로 쓰였다지만, 동창의 세력을 획정해서 쫓은 배경은 아무래도 그 ’사명‘인 듯.

사문의 일이라면 외부인이 함부로 언급할 수 없다.

그러나 생각을 정리하는 오소민보다 해원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엉뚱한 수법과 신기한 기예라. 그게 무엇이냐?”

무공이라면 사람이 달라지는 성격이라기보다,

그게 묵소유 얘기의 핵심이란 것을.

오소민이 비로소 깨달았다.

더구나 기다리지 않고 먼저 답을 꺼내는 해원기의 얼굴이 심각하다.

“혹시 해중천의 무공이더냐?”

묵소유도 놀란 표정.

“어? 오빠가 어떻게, 설마 오빠도?”

해원기가 천천히 팔짱을 꼈다.

그답지 않게 민감하게 답을 떠올렸던 이유는 바로 얼마 전에 해중천의 무공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노문기가 검을 뽑기 전에 마지막으로 쳐냈던 수법. 곤도일장인이라고 했으나 그 바탕은 분명히 대해기공이었다.

벽세의 잔재가 연달아 드러나고, 지부의 마공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더니.

무겁게 내려앉은 해원기의 눈매를 보면서 묵소유가 짧게 혀를 찼다.

“쯧, 그렇지. 오빠는 해중천의 무공을 정확히 알아볼 수 있으니까. 뭐였어? 용음수(龍吟手)? 관음장(觀音掌)? 해파검결(海波劍訣)?”

“대해기공이다. 흐음, 남해관음공(南海觀音功)이 유출되었다면.”

묵소유가 언급한 게 이전까지 마주쳤던 해중천의 무공일 터. 해원기는 즉각 과거에 들었던 일을 기억해냈다.

천외육가의 세 집안인 대관원, 해중천, 적성문이 무림의 정도문파와 함께 신주영웅회를 결성하면서 창안한 다양한 신공 중 하나.

정풍선자의 사부인 남해선자 부부가 함께 해중천의 무공을 기반으로 정도 무공을 더해 만들었다던.

신주영웅회를 배신한 벽세의 추종자들은 과거에 전부 죽었다.

다만, 새로운 신공을 기록한 천지보록(天地寶錄)의 소재만은 끝내 오리무중. 그것도 초본(抄本)을 비롯해 판본이 몇 가지나 된다고 했으니.

해중천 출신인 대사모와 천지보록을 익힌 이사모가 따로 검증해서 차이를 살펴본 적도 있었다.

천지보록이 남았고, 동창의 손에 들어갔다면.

유출된 건 남해관음공만이 아닐 것이다.

해원기가 하려던 말을 장탄식으로 바꾸었다.

“후우우, 선자께선 여전히 강호를 걱정하셨구나. 천외(天外)가 일가(一家)만 남은 이유가 무엇인지 알겠다.”

천금가 천응령의 마지막 안배인 운혜덕택을 거치면서 마침내 천외육가의 기원을 깨달았었다.

내삼가인 풍뢰동, 천응령, 보병요는 진즉 사라져 마지막 심원을 해원기에 맡겼고,

외삼가인 대관원, 해중천, 적성문은 신주영웅회를 결성하면서 난세 속에서 몰락했다.

대관원은 이제 녹림에 새로운 뿌리를 내렸고, 적성문은 의가(醫家)로 바뀌었으니.

천외육가에서 제대로 명맥을 유지한 곳은 해중천 하나뿐.

세상을 향한 바다와 같은 사랑, 대해지애(大海之愛)를 잊지 않았기에 가능했고,

그것이야말로 운혜덕택에 담긴 예(羿)의 가르침이다.

‘아끼고, 그리워하고, 좋아하여라.’

스스로 혼자가 되어 세상과 떨어지려 했던 지난 세월.

해원기는 부끄러웠다.

오소민이 눈치만 보다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무림은 끝내 천외에 기댈 수밖에 없군요. 정풍선자의 일편고심(一片苦心)에는 천하가 다 부끄러워할 겁니다.”

묵소유의 사명이 무엇인지 어렴풋하게 짐작이 가면서,

아울러 해원기의 심정이 어떨는지. 은근히 그 마음을 위로하는 말.

묵소유의 시선이 돌아오자 오소민이 바로 표정을 고쳤다.

“그나저나 묵 소저의 얘기를 들으니 동창이 참 별의별 짓을 다 벌인다는 생각이 드네요. 해 형과 제가 겪은 일만 해도 갈피를 잡기 어려운 판인데. 갈수록 그 의도를 모르겠으니. 흐음.”

상덕공주를 쉬게 한 후에 따로 의논하려던 화제.

목을 가다듬고서 말머리를 끄집어내려는데.

묵소유의 선명한 눈매가 묘하게 올라간다.

“저, 오 장로는 여자분이시죠?”

“네?”

오소민이 당황했다.

“그런데 왜 오빠에게 형이라고 불러요? 함께 겪은 일이 적잖은 것 같고, 오빠가 이렇게 편하게 여기는 분이 있을 줄은.”

“아, 그게.”

이렇게 말문이 막혀보기는 생전 처음.

얼굴을 가까이하는 묵소유의 동그란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가득하고, 연이어 묻는 입술이 어쩐지 짓궂어 보이기까지 한다.

어떻게 알아봤지? 해원기가 몰래 알려줬나? 아니, 그런 주변머리는 없는데. 뭐라고 답해야 하나, 개방의 전통이라고 할까?

이런 생각이라도 나야 하거늘, 머릿속이 폭설이라도 내린 것처럼 하얘지면서.

뜬금없이 양쪽 볼이 뜨끈해지는 것만 느껴진다.

이 순간에 해원기가 돌연 일어서지 않았다면 어땠을지.

“잠깐!”

자리를 박차고 긴장한 모습에 묵소유와 오소민 모두 얼굴이 굳었다.

이 별서는 본래 동창의 전령소. 아무리 등하불명을 노리고 들어왔어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곧바로 이어지는 지붕 위 하일웅의 낮은 목소리.

“포위당했네. 숫자는 대략 오십쯤. 어, 정문에 언제…….”

해원기가 기척을 느낀 후에 모습을 바로 드러냈다는 뜻. 또한, 정문 쪽엔 하일웅이 놀라서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갑작스럽게 누군가 등장한 모양이다.

해원기가 급히 몸을 돌렸다. 정문은 자신도 전혀 감지하지 못했던 기척.

대단한 고수가 출현했다.

그러나.

하일웅의 흐려지는 말 대신에 전해지는 호탕한 웃음소리에,

“허허허허, 신응(神鷹)의 인도가 팔대탐자라는 것들보다 훨씬 낫구나. 수인아, 어서 이 할아비가 왔다고, 아, 그러면 너무 늙어 보일까?”

긴장이 탁 풀려버렸다.

신응의 인도, 팔대탐자, 그리고 방수인의 할아버지.

문밖에 온 사람이 누군지 모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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