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장 만검귀종(萬劍歸宗) (3)
‘칠성검 서문창.’
금의위 대영반이라는 직제에도 없는 자리에 있는 자. 그와 검을 맞대자마자 즉각 어떤 검인지 알아보았었다.
은하칠정검(銀河七政劍).
아는 이가 드물지만, 패도적인 검강지기를 이루는 상승의 검법으로 속가제일신공으로 꼽히는 제왕군림신공을 능가할 위력을 지녔다.
과거에 속가의 영수였던 백가장 도자명이 장장 한 갑자의 세월을 들여 창안했으나 끝내 완성하지 못했던 검법.
그래서 칠원진(七元陣)을 구성하는 일곱 명과 함께하고서야 천운칠정(天運七政)의 검강을 발휘할 수 있었다던데.
서문창은 혼자서 천운칠정의 검강을, 그리고 어검으로 변화시키기까지 했었다.
그건 은하칠정검이 마침내 칠원진을 배후에 두지 않아도 가능해졌다는, 황극천운(皇極天運)의 경지에 올랐다는 의미다.
공산 위에서 팔대지옥에 포위되었을 때, 상덕공주는 서문창과 칠성좌라는 이름을 언급했었지.
장전민, 노종련, 서문창. 뭔가 연관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지만,
당장 따져 묻기는 어렵다.
상대는 상덕공주잖나.
오소민이 말없이 미간을 좁히는 해원기를 잠깐 보다가 눈에 띄게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렇군요. 그럼 공주마마께서 어쩐 일로 이렇게 홀로 황궁을 나서게 되셨는지, 감히 여쭈어도 될까요?”
해원기가 노종련이란 이름을 안다는 것쯤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굳이 해원기를 닦달하고 싶지 않았고, 또 화제가 지엽적인 사항으로 흐르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어차피 이렇게 전부 모여서 얘기하는 건 상덕공주에 관한 문제로 국한해야 할 터.
일부러 예의를 차려 물었다.
“음, 어? 하긴. 그러고 보니 그대들은 모두 황친(皇親)을 구한 의사(義士)로구먼. 마땅히 큰 상을 내려야 옳겠으나, 지금은 역시 상황을 잘 알아야겠지. 그러나 이는 가벼이 말할 수 없는 일이라, 하아!”
딴생각하던 상덕공주가 새삼스럽게 좌중을 둘러보며 근심스러운 인상을 보인다.
황친을 구한 의사니, 큰 상을 내리느니.
좌중에게는 어색하기만 한 소리를 입에 올리다가 한숨을 지으며 어렵사리 말을 잇는 척.
오소민의 입매가 살짝 이지러졌다.
비표라도 표물의 내용을 속이는 건 계약위반. 그 때문에 일월표객과 하일웅은 하마터면 이유도 모르고서 위험에 처할 뻔했었다.
강호의 사정을 알 리 없는 귀하신 공주마마께 따질 생각은 하지도 않았지만, 이렇게 ‘가벼이 말할 수 없는’ 사정을 서슴없이 일러주시다니. 좌중을 전부 상덕공주의 호위로 엮을 셈이다.
구중궁궐에서 세상 물정 모르고 살아온 바보는커녕 영악하기 짝이 없는 여인.
‘주황실(朱皇室)은 하나같이 교활하지.’
오소민으로선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당금 황제는 어려서부터 환관들을 총애해서 마침내 동창에 큰 권한을 맡기고 말았다.
선대에 동창이 막 설립되었을 무렵에는 그저 대내의 동정을 샅샅이 살펴 아뢰는 역할에 불과했으나,
궁중의 이목으로 지냈어야 할 동집사창이 시간이 지날수록 비대해지면서 더는 하찮은 환관 무리라고 업신여길 수 없게 되었다.
지나치게 커진 권력은 반드시 문제를 일으키는 법.
어느새 조정이 황제보다는 동창의 눈치를 본다는 의심이 들었을 때는 이미 궁중조차 의심스러운 자들에게 포위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러다가 자칫 어처구니없는 변고라도 일어난다면.
“……생각하기도 싫지만, 역대 왕조에서도 항상 유의했던 일이니까. 하지만, 이미 간사한 내시들이 황상의 눈과 귀를 가리는 형국이라 모후(母后)께서는 우려를 금치 못하셨소. 태후궁의 비복 몇을 제외하곤 금의위라도 믿기 어렵기에. 그래서 우선 동창이 어떻게 변질되었는지 살필 필요가 있었다오. 가능하면 그들이 저지른 잘못의 증거를 찾아내고, 또 누가 불측한 마음을 먹었는지 밝히는 것도.”
길게 이어지는 상덕공주의 말에 슬슬 불편해지는 분위기.
궁중 말투로 우활하게 늘어놓기만 해서야 논점이 흐리멍덩해지기만 할 뿐.
오소민이 얼른 머리를 조아려 말을 끊었다.
“아아, 너무나 엄청난 내용이라 들을수록 두렵기만 합니다. 그럼 공주마마께서 직접 사정을 알아보시려고. 한데 어찌 수행하는 인원도 없이 혼자서?”
상덕공주의 눈동자가 빠르게 좌우로 움직이고,
“화제가 너무 무거웠던가. 뭐, 모후의 밀명(密命)으로 미행(微行)을 나오는데 거창한 행렬을 이룰 수는 없잖소. 본래는 황상께서 흥미를 느껴서 직접 나오실 생각이셨지만, 워낙 이랬다저랬다 하는 성격이라, 어흠. 슬쩍 소문만 흘리고 실제로는 내가 비밀리에 몇몇 믿을 만한 이들과 회합할 계획을 세워서.”
황제의 누나. 환관에게 휘둘리는 어리석은 동생에게 불만이 적지 않았으리.
황제의 미행이라는 소문도 황제 스스로 내도록 했던 모양이다.
“말씀을 편히 하시지요. 조금 전에 말씀하셨던 장 학사, 노 낭중이 그런 분들이겠군요. 그러나 이미 겪으셨듯이 그분들 몇몇으로는.”
오소민이 머리를 가볍게 흔들자 상덕공주가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후, 나도 그렇게 어리숙하지는 않소. 장 학사와 노 낭중은 모후와 나만 아는 이들, 이미 오래전에 이름을 버리고 몸을 숨겼는데도 노 낭중이 행방불명 되었으니. 장 학사에게 굳이 일월표객을 부르도록 한 것도 최대한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서였지요. 조정의 강직한 신료들이 적잖이 도움을 받았다는 걸 알기에. 흐음, 당장 대영반과 연락을 취하는 게 급선무였소.”
나름 머리를 써서 궁을 빠져나온 이유.
“대영반이라면 금의위의 칠성검 서문창이겠군요. 금의위도 오래전에 동창의 수족으로 전락했다던데.”
“그래서 서문 대인에게 금의위 대영반 자리를 맡긴 거지. 상대를 알려면 그 속으로 들어가봐야, 금의위든 동창이든 대내제일의 무공을 지닌 대영반 앞에서는 저절로 옥석이 구분될 테니까.”
“호오, 대내제일의 무공. 대단한 인물이로군요. 다행히 믿음직한 인물이 공주마마 곁에, 아, 그럼 미리 명을 내리셔서 함께 움직이셨어야.”
“그게 묘하게 꼬여버렸다오. 막 연락을 취하려고 할 즈음에 갑자기 태항산 쪽에 산적 떼가 모여 큰 소란을 피운다는 전갈이 들어오는 바람에 금의위를 전부 조발하라는 칙명이 내렸거든. 경사에서 멀지 않은 지역이라.”
“아하, 그럼 출궁을 조금 연기하셔야 했습니다. 황실의 천금이신 공주마마께서 지켜줄 호위 하나 없이 홀로 나서시는 건 아무래도.”
“나도 억지로 위험을 무릅쓸 생각은 아니었지만, 흐음, 이미 황상의 미행이라는 소문이 났을 때가 동창의 행동거지를 살피기에 가장 좋은 기회라고. 국사(國師)의 조언을 받아들였지.”
대화가 진행될수록 말투에 하대가 많아지는 상덕공주.
신분이 신분이니만큼 개의치 않던 오소민이 말을 멈추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황실에 하나밖에 없는 공주가 혼자 궁을 떠나 일월표객의 비표가 된 배경. 그리고 동창의 제독태감이 직접 나서서 해치려고 했던 연유.
하나씩 상황을 짚어가며 풀어가다가 의미심장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국사.
묘한 표정 그대로 오소민의 눈이 저절로 해원기를 향하고,
해원기 또한 미간을 좁힌 채 오소민을 보았다.
상덕공주가 국사라고 칭한 이는 분명 경수사의 주지인 묘능일 것이다. 이전에 방온화와 나누었던 얘기가 동시에 두 사람의 머리를 스친다.
연왕을 도와 황제의 자리에 올린 전 경수사 주지 도연의 뒤를 이었다는 자. 강호를 재편할 모략을 계승해서 동창의 배후로 의심했었는데.
그가 상덕공주에게 조언을 했다니.
오소민이 해원기에게 눈을 한번 깜빡여 보이곤 다시 시선을 돌렸다.
“공주마마, 국사라는 분이 아마 경수사의 묘능대사인 듯한데.”
“오오, 잘 아는군. 맞아, 영락대제 때부터 황실과 가까운 인연이니까. 그나마 국사가 그간 남모르게 머리를 짜내주지 않았다면 모후와 나도 어쩔 줄 몰랐을 걸세. 그러고 보면 국사의 조언대로 동창의 역심이 고스란히 드러나지 않았나. 일이 꼬여서 험한 꼴은 보았어도 이렇게 훌륭한 의사들의 도움을 받아서 말이야. 어떻게든 대영반과 조속히 연락이 닿아서 국사까지 자리를 함께했으면 좋겠구먼.”
상덕공주가 기대하는 얼굴로 좌우를 둘러본다.
대가 세고 높은 자리에서 사람을 부렸던 공주라도 낯선 환경은 힘겹다. 소위 ‘강호의 의사’들에게 도움을 받아 지켜지고는 있지만, 역시 서문창이 보고 싶은 듯.
그러나 이제까지 말을 잘 받아주었던 오소민이 이번에는 입을 닫고 인상을 썼다.
상덕공주의 말에 담긴 묘능에 대한 신뢰.
방온화의 추측이 틀렸나.
오소민이 서둘러 표정을 고쳤다.
“말씀을 들어보니 국사가 여러모로 황실을 위해 힘을 기울였나 봅니다. 그러면 금의위 대영반이란 자리나 이번 공주마마의 출궁…….”
“개방의 순행장로라고 했었던가? 생김새로는 전혀 믿을 수가 없더니, 아주 영민한 사람일세그려. 어떻게 거기까지 짐작했을꼬. 딱 맞추었네, 금의위에 특별히 대영반이란 자리를 두는 것, 내부와 외부에서 동창을 제어하는 방안, 전부 국사의 계획이지.”
“아무리 국사라고 해도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을 텐데. 공주마마께는 송구스럽습니다만, 세간에서는 황친국척도 동창 앞에선 설설 긴다고 소문이 난지라, 설사 경수사라 할지라도 동창의 눈 밖에 나면. 쩝.”
“송구스럽긴 뭘. 그냥 말해도 괜찮아. 한심스럽기는 해도 틀린 말이 아니란 걸 실감했으니까. 국사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지. 환관 놈들이 총애를 입으면서 설마 경수사를 의식하지 않았겠나? 한때는 머리와 손발의 관계였으니 더욱, 으흠, 그런 셈이지.”
괜한 소리까지 할까 얼버무리는 상덕공주. 오소민이 모른 척 질문을 덧붙였다.
“과연 국사라는 칭호를 받을 만하군요. 저희 같은 무부들은 머리를 쓰는 데에 약해서. 국사가 문(文), 대영반 서문 대인이 무(武)를 맡은 격이라 황실에 큰 힘이 되리라 봅니다. 아, 그런데 대내에는 뛰어난 고수도 많다고 들었고, 동창이 횡포를 부리는 바탕에는 무력이 큰 몫을 차지하는 편이라. 서문 대인은 어디서 그런 고절한 무공을 익혔을지. 혹시 얻어들을 수 있을까요?”
강호의 무부. 머리 쓰는 데 약한 만큼, 무공 쪽에는 관심이 크다.
슬쩍 화제를 돌려 서문창에 대해 궁금한 시늉을 하자,
그러지 않아도 황제나 국사에 관해서는 말을 삼가려 하던 상덕공주가 냉큼 말을 받는다.
“과연 무인은 그쪽에 흥미를 느끼겠지. 뭐, 황궁무고(皇宮武庫)에는 갖가지 뛰어난 무학이 갖춰져 있으니까. 서문 대인은 게다가 천하에 으뜸가는 신비한 검문(劍門)의 유학을 이었다던가. 동창의 누구도 상대가 되지 않을 걸세. 아까 공산에서 제독태감이 끌고 나왔던 그 괴상한 것들이라도…….”
수보와 원좌, 육신사와 팔대지옥을 이루었던 삼백.
오소민과 일행들이 감히 끼어들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험악한 싸움의 일단을 보았으면서도, 상덕공주는 서문창을 철석같이 믿는 듯.
오소민이 ‘검문’이라는 단어에 얼른 입을 열었고,
“신비한 검문의 유학이라. 이름이 무엇인지요?”
상덕공주가 기억을 더듬느라 눈을 깜빡거리더니,
“그게, 아마 만검귀종문(萬劍歸宗門)인 것 같은데.”
자신 없는 투.
좌중이 조금 술렁거렸다. 대화를 오소민에게 맡겨놓고 듣는 처지였으나, 화제가 무공으로 바뀌면서 흥미가 생겼었다.
그러나 처음 듣는 생소한 이름. 서로가 모른다는 걸 확인할 수밖에.
오소민의 시선에 얼핏 해원기의 의혹 어린 표정이 들어왔다.
절세검왕조차 알지 못한다.
만류귀종(萬流歸宗).
본래 불가에서 쓰는 말로 모든 물줄기와 수없이 많은 물결이 마침내 바다에서 하나가 된다는 의미지만, 무림에서도 수많은 이치를 하나로 꿰는 지고한 경지를 이르게 되었다.
그 만류귀종에서 글자 하나만 바꾼 만검귀종문.
좌중에 한 사람도 들어본 이가 없고, 심지어 절세검왕조차 모르는데 천하에 으뜸가는 신비의 검문이라니.
상덕공주가 잘못 기억했을 수도 있지만, 강호에서 누가 이런 소리를 지껄였다면 당장 사기꾼으로 몰렸을 터.
좌중이 의혹을 느끼는 와중에 정록이 손을 든다.
“저, 오 장로, 언제까지 얘기만 해서야. 험한 일을 겪으신 공주마마께서 계속 저희와 계시는 건, 음, 어떻게든 존체를 쉬시도록 하면서 저희가 대영반을 찾도록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순진한 얼굴과 잔뜩 긴장한 말소리.
물론 정록의 장기가 나온 거지만,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들었으니 이제 분위기를 바꾸라는 의미다.
오소민이 과장되게 놀란 몸짓을 하며 손을 모은다.
“아, 이런. 정 형이 깨우쳐주지 않았으면 큰 죄를 지을 뻔했군요. 하여간 강호에서 뒹구는 무지한 무부라, 저, 공주마마.”
굽실거리며 어려워하는 모습에 상덕공주도 좌중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죄는 무슨. 그러나 정 의사의 제안이 정히 내 뜻과 맞소. 서둘러 서문 대인과 연락이 닿으면 좋겠구려. 으흐흠.”
끝에 목소리를 가다듬는 건 비로소 피곤함을 깨달았기 때문.
궁중에서 자란 공주로선 지나치게 무리했던 긴 하루였고, 아직 날은 새지 않았다.
“예. 그럼 그 일은 저희에게 맡기시고. 어울리지 않는 곳이긴 하지만, 쉬실 곳을 마련해보겠습니다.”
오소민이 정록과 일월표객, 그리고 묵소유를 차례로 보았다.
이제 남은 얘기로 넘어갈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