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342화 (342/410)

제86장 만검귀종(萬劍歸宗) (2)

내키지 않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서야 할 상황이다.

혹시라도 또 다른 원군이 이르거나 뜻밖의 매복이나 함정이 있을 수 있으니 누구보다 기척을 빨리 감지하는 해원기가 앞장을 설 수밖에.

그렇게 해원기가 앞, 묵소유가 뒤. 주변 지리를 모르면서 반 시진 가량 달렸다. 일단 오소민이 정했던 방향으로.

공산을 벗어나서 관도, 관도를 타고 북쪽. 해원기가 속도를 줄이다가 멈춰섰다.

“이 정도면 형대를 완전히 벗어났겠지. 딱히 뒤를 따르는 기척도 없군.”

뒤쪽을 돌아보며 하는 말에 오소민이 눈을 치켜뜨려다가 얼른 고개를 돌렸다.

앞장을 서랬더니 뒤를 따르는 기척까지 살폈단다. 어지간히 여동생에게 신경을 썼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왠지 미묘한 불만이 울컥 올라오는 걸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다행이네. 자, 그럼.”

아무렇지 않은 척 일행을 둘러본다.

“날이 밝으려면 아직 꽤 시간이 남았습니다. 그때까지 숨을 돌릴 곳이 있어야지요. 여기가 어디쯤이고 또.”

상덕공주를 번갈아 업었던 일월표객과 하일웅에게 차례로 건네는 시선.

하북 지리를 잘 아는 이들의 조언이 필요하다.

이소천이 하일웅과 마주 보다가 짧게 혀를 찼다.

“쯧, 표행이 도로 돌아는 격이라. 음, 난성(欒城) 부근인 것 같으니 그렇다면…….”

경사에서 출발해 남하하던 비표가 다시 경사로 향하게 되었다. 관도를 따라 북상하자는 오소민의 제의를 순순히 따른 이유는 바로 비표의 정체 때문.

당금 황제의 누나.

어린 태감인 줄 알았더니 상상도 못 할 신분. 표물의 내용을 속이는 건 중대한 계약위반이지만, 그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가 더 궁금했다.

난성에서 안전하게 피신할 곳을 궁리하는데,

불쑥 끼어드는 목소리.

“에, 이쯤이면 그 별서(別墅)가 가깝지 않나?”

“대강 그런 것 같지만. 거긴 동창 애들이 지시를 내리던 곳이라…”

천천히 다가오는 묵소유 곁의 인색이귀였다.

별서란 부호나 고관대작이 한적한 시골에 마련한 장원의 일종. 장(莊)이라고 이름 붙여도 규모나 크기가 천차만별인 것처럼 별서도 시정의 저택보다 훨씬 큰 것들이 적잖지만, 일행이 막 들어선 이곳은 상당히 아담했다.

백여 호쯤 되는 시골 마을 촌장 집이랄까. 가운데에 정당(正堂)을 두고 양쪽으로 나란히 늘어선 방, 정면은 담장과 작은 문으로 닫힌 전형적인 사합원(四合院)의 형태다.

그러나 다듬지 않은 마당은 흙더미에 뒤덮였고, 제대로 문이 닫힌 정당 외에는 수북하게 쌓인 먼지들. 버려진 폐가라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끼익.

잽싸게 정당의 판자 문을 열어젖힌 인색이귀가 안을 살피곤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해 대협, 드시지요.”

오는 내내 해원기의 눈치를 보더니 이제야 어렵사리 말을 붙인 건데,

둘을 번갈아 보는 해원기의 무표정에 조금 찔끔하는 모습.

앞장섰던 해원기가 옆으로 물러났다.

“하 대협, 이 국주와…….”

말을 끌며 전천도가 업은 상덕공주 쪽을 돌아보자 하일웅이 의미를 알아채고 먼저 움직였다.

“음, 먼저 불을 밝히고 정리를 하지. 막힌 혈도도 풀어줘야 하고. 음, 다행히.”

뭔가 하려던 말을 꿀꺽 삼키곤 정당으로 들어선다.

막힌 혈도. 상덕공주가 지금까지 조용한 건 오소민이 수혈(睡穴)을 짚어 잠재웠기 때문이다.

처음에야 어린 태감으로 여겼고, 노문기에게 맞서 싸울 때도 그냥 보호만 하다가, 제독태감이 등장하고서야 상덕공주란 걸 알았으나.

긴박하고 위험한 상황이라 미처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무림인이라도 속이 떨릴 싸움이 거듭되는데 공주마마가 버틸 수 있었을까.

오소민이 중간에 때맞춰 혈도를 점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그래도 이미 반 시진이 넘었다. 수혈이라도 시간이 오래되면 회복할 때 마비나 경련 등 어려움을 겪기에 몸을 주물러 풀어줘야 한다.

하지만, 상대가 상덕공주. 존귀한 신분은 둘째 치고 여자 아닌가.

이미 오소민이 여자란 걸 눈치챈 하일웅이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낼 일은 아니다. 마침 묵소유도 있잖나.

하일웅과 일월표객, 그다음에 오소민과 정록이 들어가고 나서야 해원기가 묵소유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들어가자. 듣고 싶은 얘기가 많구나.”

평소의 무표정은 어디 갔는지. 봄바람이 이는 듯 부드러운 표정이다.

두껍게 종이를 바른 지등이 하나. 덕분에 정당 안은 겨우 사물을 분간할 정도로 희미하게 밝아졌다.

네모난 석판을 고르게 깐 바닥, 장방형의 큰 탁자와 열 개나 되는 의자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정당.

낯선 곳이지만 딱히 불편하진 않았다. 판자 문을 닫으면 찬바람도 그다지 들지 않고, 인색이귀가 기민하게 술 단지와 사발까지 찾아서 올려놓았기에.

두세 번 온 적이 있었다나. 이 별서는 소위 전령소(傳令所)라고 동창에서 반룡령의 주구에게 명령을 내릴 때 쓰는 장소. 인색이귀가 소령주 백문기를 만나 제남으로 올 때도 이곳을 거쳤다고 했다.

워낙 영악한 인색이귀라 이 전령소가 어쩌다 가끔 쓰이는 임시 건물이라는 걸 눈치채서, 아예 숙식의 거점으로 삼았던 모양. 악착같이 재물을 아끼는 자들 아니던가.

묵소유가 상덕공주에게서 손을 떼자 모여들었던 시선이 비로소 흩어졌고,

이제야 비로소 마음이 놓이는지 하일웅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오 장로의 추측대로 이 전령소가 지금은 가장 안전한 장소로구먼. 겨우 호랑이 아가리를 벗어났다는 실감이 난달까.”

나이 든 사람답게 먼저 말문을 연다.

인색이귀가 나눈 대화를 용케 귀담아듣고, 반룡십삼령까지 소집한 동창이 더는 이 전령소를 쓰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이가 오소민.

모양이 뒤틀어진 전립을 뒤로 넘긴 오소민이 고소를 지었다.

“동창이란 게 워낙 상대하기 곤란한 조직이라. 일월표객 두 분을 특정해서 하 대협을 찾았을 때부터 곳곳에 이목을 심어두었을 거로 생각했습니다.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지요.”

비표를 노린 동창. 조양신문을 동원해 형대의 웅풍대주루를 덮쳤고, 새 문주가 된 노문기는 직접 일월표객을 막아섰다. 동선과 부근의 자잘한 정보까지 전부 파악해놓았을 가능성이 있다.

마침 인색이귀가 전령소를 거론해준 덕분에 등하불명(燈下不明)을 떠올렸으니 운이 좋았다고 할 수밖에.

설마 전령소에 피신했을 줄은 모를 터.

“그런 판단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죠. 그나저나 공주마마시라니. 이런 귀인을 지키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한 걸요.”

차분하고 맑은 목소리가 오소민의 말을 받는다.

상쾌함까지 느끼게 하는 음성에 제정신을 차린 상덕공주가 자신을 살피는 소녀에게 눈을 깜빡거렸고,

“누구……?”

묵소유가 몸을 일으켜 두 손을 모았는데,

“공주마마를 뵙습니다. 소녀는 묵소유라는 초민(草民)이지요. 불편하신 데는 없으신지?”

예를 차리는 모습에 갑자기 탁자 주위가 분분히 일어서는 통에 상덕공주는 어리둥절해야 했다.

나이가 지긋한 하일웅의,

“묵 소저를 만난 게 삼생의 영광이외다. 하북 연조도객 하일웅이라 하오.”

정중한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이소천과 전천도가 정식으로 포권한 손을 내민다.

“인사드립니다. 귀한 가르침을 받았던 일행천리표 이소천이고,”

“인사드립니다. 살아갈 길을 찾은 월영객 전천도라고 합니다.”

이 무슨 일인가.

나름대로 강호니 무림이니 관심을 가졌기에 무림인이 자기 명호를 또렷이 밝히는 게 무슨 뜻인지는 안다.

극진한 존경. 그러나 지금 이 나이깨나 먹은 무림인들이 존경을 표하는 대상은 자신이 아니라 바로 자신에게 예를 차리는 어린 소녀.

이미 제독태감과의 대화에서 신분이 밝혀졌잖나. 그런데 당대의 공주인 자신을 놔두고서,

“묵 소저, 개방 순행장로 유룡개 오소민입니다.”

“하, 사부께 한번 들은 적이 있지요. 녹림장관 대탐자 정록이라고 합니다. 묵 소저.”

오라버니뻘 되는 젊은이 둘까지 깍듯하게 인사를 하다니. 더구나 이제 열예닐곱 밖에 되지 않은 소녀에게 ‘소저’라.

당혹스러운 시선이 탁자 주위의 면면을 일일이 확인하다가,

상덕공주는 비로소 한 사람만 일어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더벅머리에 평범한 용모의 젊은이. 제독태감의 괴상망측한 수하들을 혼자서 몰아세우던 어마어마한 무공의 소유자.

그래, 제독태감이 뭐라고 지껄였었어.

고검협 묵세휘의 후대인 절세검왕이라고.

묵소유가 몸을 돌려 미소를 머금었다.

좌중을 둘러보던 눈이 살며시 감기고, 포권했던 손을 펴 머리를 숙이는 읍(揖).

“미처 알아보지 못한 불민한 저를 용서하세요. 소녀 묵소유가 삼가 여러 선배께 인사 올립니다.”

해원기를 보던 상덕공주의 시선이 또 묵소유에게 돌아간다.

장읍(長揖)은 무림에서 거의 쓰지 않는 고례(古禮)라던데. 아니, 그보다 이렇게 한꺼번에 답례해도 되는 건가.

하북 연조도객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일월표객에 개방과 녹림장관의 우두머리 급이라. 새파랗게 어린 계집애가 건방을 떤다고 트집이라도 잡히지 않을지.

그런데 좌중은 이걸로 만족한 듯 전부 밝은 표정으로 예를 마쳐서,

상덕공주 자신이 헷갈릴 정도로 묵소유가 더 공주 같다.

묵소유가 손을 풀고 해원기에게 고개를 돌렸다.

“공주마마는 괜찮으세요.”

할 일을 마쳤다는 의미.

“그래, 수고했다. 음, 공주마마께는.”

그런 묵소유를 대견스러운 표정으로 보던 해원기가 조금 어색하게 말을 멈추자,

오소민이 앉으려던 몸을 도로 일으킨다.

“저, 공주마마께 제대로 인사를 올려야 하겠습니다만, 워낙 자리가 어울리지 않는지라. 잠시 편의를 봐주실 수 있을 지요?”

두 손을 모아 가슴 아래로 내리고 은근하게 묻는 말.

상덕공주가 겨우 당혹스러움에서 빠져나왔다.

“아, 그럽시다, 그래요. 내가 이런 모습을 꾸밀 때부터, 음, 여기는 궁중이 아니잖소.”

대답이 조금 어색하지만, 금세 평정을 찾는 의젓함.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다.

허락을 예상했던 오소민이 냉큼 사례하고 자리에 앉았다.

“감사합니다. 자, 그럼 대체 동창이 뭔 짓을 꾸미는지 따져봅시다. 어째 갈수록 꿍꿍이속을 모르겠으니. 쯧.”

혀 차는 소리가 불만스럽게 덧붙자 좌중이 고개를 끄덕여 동감을 표한다.

이제야 문제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영특한 오소민이지만, 오랜만에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문제.

따져보자고 말은 했어도, 문제가 하나둘이 아니요, 전부 가벼이 다룰 수 없는 것들이니. 게다가 여기에는 우연이 겹쳐 함께 모인 사람들. 당연히 서로 궁금한 게 많다.

화제를 하나씩 꼽는 것보다 사건의 흐름을 따르는 게 옳겠지.

“각지에서 강호를 어지럽히는 동창과 맞서면서 여러 가지 일을 겪었습니다. 이런 혼란을 일으키는 의도, 그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려면 경사에 들러야 할 필요가 있다고, 뭐 그런 결정에 따라 해 형과 제가 낙양에서부터 올라오던 중이었죠.”

일단 말머리를 간결한 설명으로 열었다.

낙양과 은허에서 벌어진 일은 몇 마디로 건너뛰고, 동창의 뒤를 쫓아 형대로 일월표객을 찾아갔다가 공산백운동까지 이른 대목이 지나자.

이소천이 짧게 혀를 찼다.

“쯧, 아까 하 표두님께 급한 대로 말씀드렸습니다만. 이번 비표 건은 정말 골치 아픈, 음. 경사 남쪽 평안교라는 곳에 비밀 접수처를 두었지요. 아는 사람이 극히 적지만, 이미 몇 차례 사용하면서 혹여 노출되었을까 싶어 폐쇄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어흠.”

중간 중간 헛기침이 들어가는 건 상덕공주만을 의식해서가 아니다.

이소천의 시선이 얼핏 탁자 끝쪽에 나란히 앉은 인색이귀를 스치자, 맞은편에서 다시 묵소유의 맑은 음성이 전해진다.

“저 두 사람은 괜찮아요. 그간의 잘못을 뉘우치고 저를 따른 지 꽤 되었답니다.”

당장 자라목처럼 움츠러드는 인색이귀. 이 또한 알아볼 사정이지만, 화제가 흩어지면 곤란하다.

이소천이 알겠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이곤 말을 이었다.

“폐쇄된 평안교의 비합전서를 아는 건 단 한 사람, 평안교 근처에 작은 서당을 연 노학구(老學究)뿐이고…….”

“장(蔣) 참의(參議)는 내가 어렸을 적에 글을 가르쳐준 사부라오.”

불쑥 끼어든 상덕공주.

말이 끊긴 이소천이 이번에는 어색하게 머리를 숙이면서,

“네, 예전에 회하방을 이끌었던 장전민(蔣殿民) 학사. 그렇지만, 평안교에 접수처를 둔 이래로 단 한 번도 비합전서를 쓴 적이 없었지요. 더구나 회하방 총령인을 건넸다는 건 그만큼 중대한 표행이란 의미여서. 에, 설마 비표가. 으음.”

더듬거리며 불편한 눈치. 뭔가 중요한 연락을 맡았다고 여겼던 태후궁의 어린 내시가 상덕공주란 걸 왜 알려주지 않았을까.

답은 상덕공주에게서 나왔다.

“내가 그리 부탁했거든. 노(盧) 낭중(郎中)도 갑자기 행방불명이 된 터라 조금이라도 방심할 수가 없었으니까. 들어본 적 없나? 노종련(盧宗漣)이란 이름.”

생소한 이름. 다들 눈을 껌뻑이는데, 해원기의 미간이 확 좁아졌고, 계속 주목하던 상덕공주는 금방 알아챘다.

“아는 모양이군. 저, 검왕이라는. 흐흠, 왕이라.”

아직 이름을 모르니 그냥 검왕이라고 부르려다가 흥미가 이는 듯.

그러든 말든 해원기는 사부에게 들었던 옛일을 기억해내면서 가슴에 전해지는 묘한 느낌에 유의했다. 얼마 전부터 느껴지던 일종의 예감.

노종련은 과거에 병부 낭중 벼슬에 있다가 회하방의 주력이 된 인물. 사부와 탁 소숙 외에는 모른다. 장전민과 노종련은 모두 백가장(百家將) 도자명(屠子明)이 길러낸 인물. 문득 최근에 마주친 한 사람이 떠오르고, 이 예감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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