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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왕춘추-341화 (341/410)

제86장 만검귀종(萬劍歸宗) (1)

긴장하고, 당황하고, 초조하고, 의아하고.

상황이 긴박하게 변하면 사람의 감정 역시 급격하게 바뀌는 법이다.

해원기에게 뒤를 맡기고 서둘러 빠져나가야 했던 오소민은 더욱 그랬다.

개방의 순행장로, 팔선의 공동제자인 유룡개. 그러면 뭐하나? 도움이 되기는커녕 싸우는데 방해가 될까 걱정해야 할 판. 전황을 파악하는 안목도, 형세를 판단하는 지혜도, 심지어 뜻밖에 발휘하는 기지도 부족하다.

결국, 해원기 혼자에게 모든 짐을 떠맡긴 셈.

그래도 당면한 문제를 푸는 데 먼저 집중하고자 했다. 일월표객의 비표인 상덕공주. 어떻게 된 일인지는 나중에 알아보고, 일단 공주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켜야만 한다.

그러나 그저 벗어날 것만 생각했었다.

원좌가 신호탄을 올려 원군을 불렀다고 추측했으면서. 은허에 밀각육학사가 나타났다는 것도 알았으면서.

제독태감 곁에 수보만 보였을 때 의심했어야 했다. 동창에겐 수족뿐 아니라 주구도 즐비하다는 걸 염두에 뒀어야 했다.

바보, 멍텅구리.

가까운 조가보에서 원군이 나오지 않을 리 있나. 또 은허에서 당한 후에 전력을 보충하지 않았을 리 있나. 스스로 머리를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고.

그다음에는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상황이 빠르게 변했다.

육학사의 둘이 끌고 온 반룡령의 주구들. 소위 십삼령주라는 자들의 실력을 재보기도 전에 해원기가 날아 내렸고,

해원기에게 제독태감 쪽의 경과를 물을 새도 없이 언덕 뒤쪽에서 벌어지는 일들.

이전에 제남에서 반룡령의 소령주인 백문량과 함께 훼방을 놓았던 인색이귀가 참으로 오랜만에 모습을 보였지만, 어째 동창의 원군이 아닌 듯.

그리고 등장한 소녀.

그때부터,

오소민은 해원기의 옆얼굴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고구마 대장’이란 별명을 붙여 놀려대긴 했으나, 해원기가 참으로 순후한 성품이란 걸 누구보다 잘 안다.

말재주가 없고 반응이 좀 느리지만, 그렇다고 둔하진 않다. 그저 저 덤덤한 얼굴에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을 뿐.

그런데 지금 해원기의 얼굴엔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

따스하고 다정하며 애틋함이 가득해서, 마치 딴사람을 보는 것 같다.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아? 오빠에, 소유라고?’

자산을 오르면서 들은 적이 있다. 해원기의 대사모가 낳은 딸. 이사모가 아기를 잃은 후로 살던 곳을 떠났다고. 살생의 숙업에 휘말리지 않도록 먼 바다 가운데로 갔다는.

그렇게 기억을 되살리는데.

순간 불끈 치솟는 해원기의 눈매.

딴사람을 보는 것처럼 부드러웠던 표정이 홱 바뀌었다.

노기. 해원기가 화내는 걸 몇 차례 본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불같이 노하는 것도 처음.

부릅뜬 눈에서 진짜 불길이 쏟아지는 착각이 들고,

그게 엄청난 신광이란 걸 깨닫기도 전에,

“에구머니나.”

“으음.”

오소민과 정록이 뭐에 떠밀린 것처럼 밀려나는데,

“이놈드으을!”

그야말로 벽력같은 해원기의 고함.

하일웅을 비롯한 일행 전부가 어깨를 움츠리며 전신을 떨어야 했다.

바로 눈앞인데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고, 곧바로 귀청이 떨어져 나갈 듯 어마어마한 굉음이 터졌으니까.

꽈꽝!

빛. 캄캄한 밤에 갑자기 피어난 거대한 빛.

아무리 고수라도 정면으로 태양을 바라보면 순간적으로 시력을 잃는다.

해원기가 왼손을 잡아당기면서 오른손을 전력으로 내질렀다.

십 년 만에 만난 여동생.

어떻게 여기에 나타났는지,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이사모의 단봉무후도강과 대사모의 해룡검강을 동시에 펼칠 정도의 경지에 올랐다는 게 놀랍고 대견하고.

그런데 언덕 너머에서 누군가 ‘년’이라고?

누가 감히,

내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에게 누가 감히 욕을 한단 말이냐!

신왕공을 있는 대로 끌어올려 그대로 검을 뻗었다. 검상이 무엇이고, 어떤 검법을 썼는지도 의식하지 않은 채.

고함을 질렀는지조차 몰랐다. 손을 떠난 검이 거대한 광구(光球)로 화하고서야 군림검이라고 생각했으나.

얼마나 힘을 줬기에 왼손까지 움직였을까. 거대한 광구에 뒤질세라 풍뢰가 무섭게 뒤따른다.

군림검이라면 어검대법. 수원광한, 등목구룡, 폭령진화, 금광섬삭, 대괴무극이 오행제림(五行齊臨)으로 한꺼번에 뒤엉켰다.

밀각 중사와 비전 장령 이백을 일거에 베어버리고 어검비공으로 날아왔기에 군림검이 나왔나.

그러나 앞을 가로막은 건 백운동 입구의 언덕배기.

여동생에게 욕한 놈을 가린 게 영 거슬렸던지.

왼손이 조금 전에 깨달은 검상을 불쑥 꺼내었다.

군림검과 짝을 이루려는 천형검. 질풍치뢰가 오귀전륜(五鬼轉輪)으로 더해져서,

군림검의 빛에 천형검의 그림자다.

검왕오형의 다섯 번째, 유야무야(有耶無耶)지만.

삼전태를 이룬 후에 신왕공을 모조리 일으키긴 처음이다.

언덕배기가 아니라 백운동 입구가 통째로 날아갔다.

본래 언덕 아래에는 독두조곤, 요조낭군, 귀무파의 수하들이 일행을 기습하다 물러선 상태. 게명구도니, 장단쌍살이니, 무흔무적이니 하는 자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는데.

불같이 노한 해원기의 눈에는 아예 보이지도 않았고,

군림검과 천형검이 어울린 유야무야의 일격에 그대로 휩쓸렸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날아가 종유석과 바위에 처박히지만, 그 종유석과 바위마저 산산조각이 나서 날아가는 데야.

“으아앗!”

“크윽, 이게…….”

대신 손에 쥔 몽둥이가 박살 난 독두조곤이 소리를 지르며 나가떨어지고, 전신이 찢긴 요조낭군은 낭자한 파편 속에 나뒹굴며.

겨우 피해서 한쪽 구석에 주저앉은 남 학사와 귀무파도 성한 곳이 없다.

그나마 대삼림에서 뛰쳐나온 남칠도의 동료에게 뛰어내리려 했던 셋. 구밀복검, 궁팔각, 훼불화상은 목숨을 건졌으나.

전부가 유야무야의 여파에 휘말려 창백한 얼굴로 비틀비틀, 중심도 잡지 못한다.

훤하게 트인 지면.

무너진 공산에서 백운동 입구의 공터까지 대패로 민 것처럼 평지가 되었고,

제대로 서 있는 자는 오히려 은림신월 하나뿐. 그마저도 교차했던 쌍도를 맥없이 내린 채 넋을 잃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

일행을 기습했던 여섯. 게조와 구겸창을 쓰는 계명구도는 하일웅을, 쌍단창과 새카만 쇠사슬을 쓰는 장단쌍살은 오소민과 이소천을, 암기와 쇠꼬챙이를 쓰는 무흔무적은 정록과 전천도를 노렸었다.

이자들이 비록 대단한 고수라고 할 수는 없어도, 상덕공주를 지키며 급히 공산을 벗어나야 하는 일행으로선 상당한 골칫거리. 괴상한 병기로 암습에 뛰어난 자들에게 오로지 방어로 맞서야 했으니까.

여기에 학사 셋과 반룡십삼령의 아홉이 가세했다면, 승패는 둘째 치고 상덕공주를 무사히 보호할 수 있었을지.

넋이 나간 건 상대만이 아니라 오소민과 일행도 마찬가지.

언덕과 다름없는 크기라고 해도 산이란 이름이 붙었고, 바닥이 무너졌어도 거창한 종유석이 기둥처럼 늘어선 입구거늘.

기습했던 여섯을 아예 지워버린 것처럼 지형조차 바뀌었으니.

학사든 반룡십삼령이든 멀쩡할 수가 없다.

너무나 엄청난 광경에 말을 잊을 수밖에.

이게 정녕 한 사람이 검 한 자루로 할 수 있는 건가.

굉음 뒤의 적막.

묵소유가 훨훨 날아 내리지 않았다면 이 적막은 한동안 지속되었을 것이다.

“오빠, 오빠가 왜 먼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을 건네는 도중에 그녀 뒤에서 와락 무릎을 꿇는 둘.

“해 대협을 뵈옵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이제나저제나 하면서 기회를 엿보던 인색이귀가 묵소유가 내려서자마자 달려들어서는 극진하게 머리를 조아린다.

나름대로 인연이 있다는 걸 강조하느라 목청을 높였지만,

검을 쥔 해원기는 눈길도 주지 않고,

“더러운 입을 놀린 놈이 누구냐?”

좌우를 훑는 눈빛은 여전히 냉전(冷箭) 같다.

좌측에는 백 학사를 부축한 현 학사, 피투성이로 굴러 나왔던 오아무성과 야랑법사는 도로 대삼림 경계로 쓸려나갔고, 남칠도의 다른 셋은 현 학사 근처에서 휘청거린다.

우측에는 남 학사와 귀무파 둘. 독두조곤과 요조낭군의 생사를 확인할 생각도 못 한 채.

죄다 구석에 몰려 전전긍긍. 그나마 멀쩡한 게 은림신월이지만, 한 쌍의 신월도를 축 늘어뜨리고서 허옇게 질린 얼굴에 경련이 그치지 않는다.

해원기의 무서운 기세에 인색이귀가 납작 엎드려 즉각 은림신월를 가리켰다.

“은림신월이라고.”

“바로 저놈입니다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해원기의 몸이 확 나가려는데,

“아 쫌!”

땅을 차면서 소리를 꽥 지르는 묵소유.

해원기가 멈칫하면서 비로소 고개를 돌린다. 암팡지게 찌푸린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여동생에게.

“내가 아까 뭐랬어. 알아낼 게 있다고 했잖아. 그래서 도망 못 가게만 하라고.”

입을 삐죽 내밀면서 투덜투덜.

“아, 그래, 그래. 들었지, 들었어.”

“그런데 이렇게 죄다 박살을 내면 어떻게 해. 전부 말도 못 하게 만들 셈이야?”

“아니, 그건 아니고. 너한테 욕을 한 놈이…….”

“깡패에 강도, 전부 쓰레기 같은 놈들이니 입도 더러운 게 당연하지. 이런 놈들이 아니면 내가 이 정해신검(定海神劍)을 뽑았겠어?”

“그,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정해신침(定海神針)을 언제 검으로…….”

“말 돌리는 거지? 에고, 툭하면 딴소리하는 버릇은 여전하네.”

토라진 티를 팍팍 내면서 따지고 드니.

오빠는 쩔쩔맨다.

불같은 노기도, 냉전 같은 시선도, 무서운 기세를 뿜던 검도 전부 기가 죽었다.

오소민이 콧등을 찡긋거리다가 한숨과 함께 기이한 검을 허리로 돌렸다.

검병과 호수가 있긴 해도 검신이 두 자 남짓, 협봉검(狹鋒劍)보다 더욱 가늘고 뾰족해서 바늘같이 생긴 검을 짙푸른 허리띠에 대충 끼워 넣으면서,

“후우, 서쪽으로 갔다더니. 여기에는 어떻게 온 거야? 또 동창?”

목소리와 말투가 부드러워지자,

해원기도 겨우 숨을 돌렸다.

“어, 음. 말하자면 상당히 복잡한, 동창은 맞다. 아, 그러고 보니 너는…….”

제정신이 들자 본래의 해원기로. 말재주는 없고 할 얘기는 태산이다.

“잠깐.”

오소민이 제때 끼어들지 않았으면 또 묵소유에게 닦달을 당했을 수도.

“안녕하세요. 해 형의 여동생이시죠? 나는 개방의 순행장로인 오소민이라고 해요. 일단 여기를 벗어나 안전한 곳을 찾는 게 중요해요. 지켜야 할 사람이 있으니까.”

묵소유를 똑바로 보면서 빠르게 건네는 말.

묵소유가 가만히 오소민을 보다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방향은?”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지도, 이유를 따지지도 않는다.

“동쪽. 관도로 나가면 북쪽으로.”

“알겠습니다. 출발하죠, 뒤는 제가 맡을게요.”

간결하면서 신속한 대화. 오소민과 묵소유는 처음 만나는데도 금방 상대의 뜻을 알아채는데.

가운데 선 해원기는 어정쩡하기만.

“그럼, 저자들은 어떻게 하고?”

공터의 좌우 끝에 몰린 학사 셋과 반룡령의 나머지 영주들을 살피는 모습에,

묵소유가 픽, 웃으며 해원기를 밀었다.

“나중에 또 잡으면 되지 뭐. 지킬 사람이 있다며. 어서 앞장서세요, 검왕 나으리.”

슬쩍 놀리면서 서슴지 않고 몸을 돌리자 뒤쪽에 엎드렸던 인색이귀가 기민하게 몸을 일으켜 뒤를 따를 태세. 그 행동이 꽤 익숙해서 누가 봐도 오래된 주종(主從)으로 여길 듯.

오소민의 눈이 반짝 빛났다.

어린 소녀가 무공만 강한 게 아니라 행동도 똑 부러진다. 오빠와는 다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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