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340화 (340/410)

제85장 능파정해(凌波定海) (4)

예감.

은허에서 운혜덕택을 얻은 이후로 이른바 삼전태가 제대로 이루어져서인지.

이전에 잠심침령으로 기척을 알아채던 것과 달리 불현듯 마음에 전해지는 울림이 있다.

일행이 향한 백운동 입구, 남쪽에서부터 엄청난 기운이 이른다.

육신사를 쓰러뜨린 후에 원좌가 쏘아 올렸던 신호탄을 기억하는 해원기로선 당장 제독태감이 부른 원군을 떠올리게 되었고,

이렇게나 엄청난 기운이라면 큰 위험이 될 터.

다급한 마음에 앞뒤 잴 여유가 없었다.

어떻게든 가장 빠르게 일행에게 돌아가야만 한다.

막 적멸검과 천형검을 거두고 갈무리하던 참에 이 다급한 심정이 고스란히 검상에 투영되어서.

일신에 지닌 상승의 경공보다 먼저 군림검이 튀어나왔다.

위이이이잉.

오행어검대법에서 가장 빠르고 예리한 금광섬삭.

찬란한 금빛 덩어리로 화해 무서운 속도로 날아가니. 마치 어두운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한 줄기 혜성.

순식간에 공간을 쪼개면서 일행에게 향하는데.

남쪽의 대삼림을 가르며 다가오는 기운 또한 군림검에 못잖은 소리를 내면서 금광섬삭이 무색하게 빠르다.

지이이이잉.

그리고 이 두 가지 파공성이 어울리자 그야말로 천지를 찢을 듯 무시무시한 음향.

장내가 공황에 빠질 정도로 종잡을 수 없게 울려댄다.

이 공황을 먼저 깨뜨린 건 바로 비명과 함께 대삼림의 끝에서 튕겨 나오는 몇 개의 인영들.

제대로 된 경공이 아니다.

“크으윽, 저게 어떻게 여기까지.”

“나, 남 학사! 빨리 구해주…….”

세 명. 피투성이가 된 두 명이 서로 얼싸안은 채 지면으로 굴러 떨어지고, 흰옷을 입은 늙은 유생 하나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거린다.

허겁지겁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숲속에서 맹수라도 만나 도망치는 듯.

귀에 익은 목소리에 남 학사를 비롯해 언덕 위에 늘어섰던 자들의 시선이 와락 모여들었다.

“백 학사?”

말끝이 절로 올라갔다.

방금 현 학사가 언급했던 백 학사라니. 대체 반룡십삼령의 넷을 인솔하러 갔다가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같이 밀각육학사로 지내면서 이렇게 경황망조(驚惶罔措)한 모습은 본 적이 없다.

현 학사가 반사적으로 백 학사를 부축하러 몸을 날리고,

현 학사와 같이 등장한 불룩한 배와 궁색한 중년인이 얼떨떨해서 주춤거리는데도,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되지 않는다.

“운남(雲南) 오아무성(烏鴉無聲)?”

“저거, 귀주(貴州)의 야랑법사(夜郞法師)잖아!”

비로소 피투성이로 굴러 떨어지는 자들을 알아보곤 장발 승복까지 급히 몸을 돌렸지만,

펑!

폭음과 함께 나뭇가지가 와수수 부서져 날리는 바람에 동작이 멈춰버렸다.

우지직.

아름드리나무 한 그루가 밑동부터 기울면서 그 사이로 등을 보이며 뒷걸음질 치는 또 한 명.

양손에 초승달처럼 휜 신월도(新月刀)를 쥐고 날렵한 청의 경장에 붉은 허리띠를 길게 드리운 자가 술에 취한 것처럼 비척거리다가 왈칵 피를 토한다.

강한 충격에 물러서는 모습.

“으웩! 지, 지독한 계집.”

피를 뿜어서인지 어색한 발음이지만, 얼핏 뒤를 살피는 눈에 빛이 돌아왔다. 그게 안도의 눈빛이란 걸 알아챈 남 학사가.

“광서(廣西)의 은림신월(隱林新月)까지. 누구냣!”

정신이 번쩍 들어 벼락같이 두 손을 내뻗었다.

파파파파.

소매에서 화살처럼 날아가는 십여 개의 은광. 은림신월이라는 청의 경장이 빠져나온 아름드리나무의 좌우를 빠르게 꿰뚫는데.

좌라락, 치릭치릭.

괴상한 소리가 연달아 울리더니 웃음이 이어진다.

“흐헤헤, 은탄(銀彈)이라니. 드문 암기인데 이거 진짜 은일까?”

“동창에는 은자가 많으니까 믿어봐야지. 호오, 호오.”

은림신월을 좌우에서 노리던 기척. 남 학사가 그 기척을 깨닫자마자 소매 속의 암기를 날렸건만, 효과는커녕 놀림감이 된 듯.

대삼림에서 두 명이 희희낙락 모습을 드러낸다.

하나는 둥근 공 같은 체형, 또 하나는 비쩍 마른 체구. 뚱뚱이는 손에 든 주판에서 동그란 은빛 구슬을 하나씩 꺼내고, 홀쭉이는 기다란 저울대에 그 구슬을 올리면서.

누군지 모를 수가 없다.

백 학사와 차례로 대삼림에서 나온 세 명뿐 아니라, 언덕 위에서 몸을 돌렸던 남 학사와 반룡령의 영주들도 익히 아는 얼굴.

다만, 여기서 이렇게 저 둘을 만날 줄은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던 터라 눈만 크게 떴고.

그 때문에 자신들이 조금 전까지 주시했던 장내를 순간적으로 잊었다.

“인색이귀?”

공중에서 의아한 음성이 전해지고서야 화들짝 다시 고개를 돌렸지만,

찬란한 빛이 그림처럼 바닥에 내려서는 희한한 광경에 다시 한번 눈을 껌뻑여야 했다.

혜성이 사람으로 바뀌다니.

게다가 대삼림에서 희희낙락 나온 둘을 알아보잖나.

어검비공(御劍飛空)을 푼 해원기도 방금 목격한 두 사람의 출현에 곤혹스러워서 미처 오소민과 일행의 안부를 확인하지 못했다.

예감했던 대로 제독태감이 부른 원군이 일행을 막아선 상황.

남 학사, 현 학사, 백 학사 모두 은허에서 본 적이 있다. 그들과 함께 있는 아홉 명도 상당한 고수.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하다. 킬킬거리며 나서는 인색이귀는 이들과 같은 편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아니, 이전에 인색이귀는 분명히 강호를 떠나겠다고 했는데. 결국, 믿지 못할 자들이었던가.

더구나 예감으로 전해졌던 그 엄청난 기운이 감쪽같이 사라졌으니.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헷갈린다.

“저들은 반룡령의 반룡십삼령. 남칠북육(南七北六) 십삼도(十三道)에서 이름깨나 날린 악패(惡覇)들이야. 북쪽 삼도(三道)만 빠진.”

“인색이귀라고? 그자들이 왜? 같은 반룡령이었던 자들이 어째…….”

정록과 오소민이 서둘러 알려주는 말로 상황을 이해하려는데.

굳이 애쓸 필요가 없었다.

해원기의 곤혹스러움을 풀어주겠다는 듯이 깔끔한 소개가 시작되었으니까.

“에, 동창의 핵심은 밀각이란 조직. 그 밀각을 운영하는 밀각육학사가 있다고 했습니다요. 대강 걸친 옷의 색깔로 부른다든가 하던데. 그러니까 저희에게 이 은탄을 선사한 녀석이 남 학사겠고, 허겁지겁 도망갔던 저 늙은 유생이 백 학사, 검은 옷은 현 학사겠네요.”

인색이귀의 뚱뚱이, 일모불발이 짧은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목청을 돋우자,

홀쭉이, 근근계교가 자신의 저울대로 하나씩 가리키기 시작한다.

“남 학사 옆에 있는 소도둑, 기생오라비, 못생긴 노파는 차례로 독두조곤, 요조낭군, 귀무파라는 깡패. 북육도의 셋입니다. 나머지는 다 남칠도, 현 학사에 붙어있는 배불뚝이, 궁색한 녀석, 장발 승복은 또 구밀복검(口蜜腹劍), 궁팔각(窮八角), 훼불화상(毁佛和尙)이라는 강도지요. 저희한테 여기까지 쫓겨온 오아무성, 야랑법사, 은림신월이란 것들과 똑같은 쓰레기들인데 죄다 반룡령의 십삼령주라는 감투를 썼습죠. 아, 나머지 한 놈은.”

“삼보해관(三保海關)에서 까불던 그 해남검패(海南劍覇)랍니다.”

착착.

근근계교가 머리를 갸웃거리자 일모불발이 주판을 튕겨서 남칠도의 일곱을 채운다.

설마 어검비공으로 혜성처럼 날아온 해원기를 알아보고, 그 곤혹스러운 심정을 위해 이렇게 자세한 소개를 시작했을까.

더욱이 둘 다 윗사람을 대하듯 보고하면서 완전히 반룡령을 욕하는 말투.

갈수록 장내를 어리둥절하게 하는데,

정말로 놀라운 일은 바로 그다음이었다.

인색이귀의 소개가 끝나는 순간, 대삼림에서 솟구쳐 오른 신형 하나. 높디높은 거목 위에 사뿐히 올라서자 가냘픈 몸매를 감싼 백의 자락이 환상처럼 나부끼고,

“역시, 오빠!”

반가움이 담뿍 담긴 탄성을 내는 데야.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모여들었다.

까마득히 높은 거목 위에 선 소녀.

나이는 열대여섯 살쯤일까. 꽃이 피어나듯 환한 느낌.

삼단 같은 검은 머리칼을 느슨하게 묶고 흔한 장식 하나 꽂지 않았다. 동그란 얼굴에 짙은 눈썹, 오뚝한 콧날이 귀여운 용모면서, 선명한 눈매와 입술에는 감히 범하기 어려운 단호함이 어렸고.

늘씬한 체구에 품이 넓은 백의, 짙푸른 허리띠를 질끈 매어서 가냘프게 보이지만. 늘어뜨린 오른손에 쥔 기이한 모양의 한 자루 검. 은은한 광채가 고요하면서도 숨이 막힐 듯 무겁다.

인색이귀의 윗사람이 이 어린 여자애라.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은데다가, 갑자기 또 누구를 ‘오빠’라고 부른 거냐.

대답은 금방 나왔다.

“어, 그래. 소유(小柔)야.”

다정한 음성.

장내의 시선이 바쁘게 그 음성의 주인을 향하고,

그렇게 대답한 해원기가 멍한 시선을 거목 위에 보낸다.

습관. 그래, 습관이었다. 언제나 ‘오빠’를 찾으면 이렇게 답했었기에.

십 년이나 들어본 적이 없건만, 이렇게나 쉽게 나오는구나.

아니, 다시 십 년이 지나도, 언제 어디서든 이럴 것이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내 동생이 부르면.

올해 열일곱이던가. 많이 컸구나. 이젠 아가씨가 다 되었네.

툭하면 망고암에 데려가 달라고 칭얼대던 녀석이.

나이보다 일찍 철들어 일부러 명랑한 척하던 녀석이.

선명한 눈매와 입술은 사부를 똑 닮았고, 동그랗게 귀여운 얼굴은 대사모, 흔한 장식 하나 꽂지 않은 차림새는 이사모 같아.

여동생의 자란 모습을 하나씩 뜯어보던 해원기는 지키려던 일행이 바로 뒤에 있다는 것도, 제독태감의 원군인 반룡십삼령이 앞에 늘어섰다는 것도 다 잊고서.

참았던 감정이 울컥 올라와,

“소유야!”

다시 크게 불러보았다.

사부의 일점혈육, 하나뿐인 여동생 묵소유(墨小柔)의 이름을.

전부 다 얼이 빠졌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헤아리기 전에 갑자기 오누이 상봉이라니.

오소민과 정록 등이 해원기와 거목 위의 소녀를 번갈아 보며 눈을 껌뻑이고, 남 학사의 무리도 갈피를 잡지 못해 서로 얼굴만 쳐다보는 중.

이 잠깐의 황당함은 백 학사에 의해 깨졌다.

“헉, 이, 이런 일이. 능파신녀(凌波神女)가 절세검왕과, 나, 남매지간? 그, 그러면.”

현 학사에 기대 겨우 숨을 돌린 백 학사가 더듬거리는 말이 모두를 일깨웠고,

현 학사만이 아니라 언덕 위에 있던 자들이 모두 화들짝 놀란 기색.

“능파신녀? 저 계집이 능파신녀라고?”

“설마 회람에 언급했던.”

“삼보해관을 뒤집어엎었다는 여고수가.”

남칠도에 속하는 자들은 눈을 부릅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요, 남 학사와 북육도에 속하는 셋은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진다.

의아한 시선을 서로 교환하는 건 오히려 오소민 쪽. 일행 중에 ‘능파신녀’라는 이름을 들어본 이가 없다.

하지만, 소녀는 오랜만에 만난 오빠에게 자랑거리가 생겨서 흥이 올랐다.

묵소유가 기이한 검을 흔들며 미소를 지었다.

“오빠, 내 외호가 능파신녀래. 바다에서 용귀이령(龍龜二靈)을 타고 몇 번 놀았더니. 아 참, 이건 조금 있다가 얘기하고. 오빠, 이놈들 좀 도망 못 가게 해줘. 제대로 혼을 내서 알아낼 게 있거든.”

지잉, 지잉.

어린애가 조르는 듯한 말투지만, 기이한 검을 흔들 때마다 공간이 출렁거린다.

십 년의 세월을 건너뛴 건 해원기만이 아니어서, 묵소유도 도로 어린 시절도 돌아간 듯. 오빠에게 실력을 보여주려는 치기가 엄청난 기세를 드러냈다.

해원기의 어검대법과 어울려 천지를 찢을 듯 무시무시한 음향을 만들었던 바로 그 기세.

공간이 상하로 나뉘어 돌아가기 시작하는데,

위쪽은 붉은 기운이 나래를 펴는 듯하고, 아래쪽은 푸른 기운이 넘실거리는 듯하며, 가운데 선 묵소유는 마치 한 떨기 백련(白蓮)과 같다.

달도 없는 캄캄한 밤에 이 무슨 조화인가.

해원기만은 이 광경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단박에 알아보았지만,

‘단봉무후도강(丹鳳武后刀罡)과 해룡검강(海龍劍罡)의 용봉정상(龍鳳呈祥), 게다가 천수관음인(千手觀音印)까지 맺는다고?’

입이 딱 벌어질 지경.

언제 이런 경지에 이르렀단 말인가.

해원기가 놀랄 정도이니 백운동 언덕 앞은 전부 기겁할 수밖에.

피투성이가 된 오아무성과 야랑법사가 급하게 부르짖고,

“또, 또 저걸. 조심, 조심해!”

“검강과 도강이 한꺼번에 쏟아진다아아!”

두 자루 신월도를 황망히 교차하는 은림신월도 이를 부득 간다.

“지독한 년!”

저 엄청난 기세에 자신과 오아무성, 야랑법사가 데려온 심복들이 대삼림 안에서 전부 거꾸러졌다. 겨우 열대여섯 밖에 안 된 계집이 이렇게나 무서운 공격을 거푸 해댈 수 있다니. 사람 같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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