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장 능파정해(凌波定海) (3)
갑자기 배나 강해져 미친 듯이 달려들고, 죽은 자에게서 공력을 흡수해 동귀어진의 자폭도 감행한다.
이렇게 괴이하기 짝이 없는 수법은,
‘홍황독전(洪荒毒典)에서 유래한 벽세의 광혈단(狂血丹), 그리고 지부의 왕위마가 시행하는 광혼(狂魂)의 술법.’
사부에게 들은 얘기는 하나도 잊지 않았다.
사신구멸(捨身俱滅)의 극악한 동귀어진을 접하자마자 기억해냈고, 아울러 광혈단과 광혼 중 어느 한 가지라고 규정지을 수 없다는 것도 알아챘다.
두 가지를 대충 뭉뚱그렸든지 혹은 다른 방술을 또 섞었는지 모르겠지만.
그게 중요하지는 않다.
사람의 생명을 이런 식으로 쓰다니. 언제나 마음대로 버릴 수 있는 도구로 취급하는 게 바로 사마의 본질이다.
광포하게 몰려드는 자들이 동창이 아니라 사부에게 들었던 벽세와 지부로 보이면서,
비껴들었던 검을 왼손이 받쳐 든다. 환상처럼 둘로 나뉘는 고검.
고오오오오.
왼손에는 조용히 선향(禪香)을 머금은 적멸검, 오른손에는 엄숙한 단죄의 천형검.
눈이 미치는 곳에 저절로 신령검역이 펼쳐지고, 두 개의 검상이 동시에 공간을 갈랐다.
파앗.
돌연 모든 것이 멈춘다.
광포하게 달려들던 이백 명의 짐승 같은 고함도, 미친 듯한 움직임도 덜컥 그쳤다.
터벅터벅, 비틀비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겁이 났나. 공력이 이어지지 않아 맥이 빠졌나.
입만 떡 벌린 채 어정쩡하게 멈춰선 이백 명이 한두 걸음 움직이다가,
털썩.
무릎이 풀려 주저앉는 놈, 허리가 접혀 고꾸라지는 놈, 술 취한 것처럼 빙글 돌아 쓰러지는 놈. 앞에서부터 차례로 와르르 무너져가고.
그 파도가 끝에 이르자 십여 명이 왈칵 피를 토하며 무릎을 꿇었다.
백 장이 넘는 땅바닥에 질펀하게 드러누운 중사와 장령들. 그러고 보니 지면 위로 어느새 핏물이 번져간다.
단 한 명도 폭발하지 않았다.
적멸검의 무량대적(無量大寂), 천형검의 대벽무사(大辟無赦).
무량대적이 내부를 베고 대벽무사가 목숨을 끊는 검왕오형의 네 번째 역상정위에 이백 명이 쓰러졌다.
광혈단이든 광혼이든, 혹은 홍황독전의 비결이든 내부의 경맥이 삭은 노끈처럼 잘리고 동시에 숨통이 끊기고서야 동귀어진을 어찌 시도하겠는가.
“후우, 음?”
그런데 본래의 형태로 돌아온 한 자루 고검을 거두던 해원기의 안색이 홱 변하고,
두 발이 급하게 바닥을 찬다.
휘익.
아직 수보와 원좌, 그리고 제독태감이 남았건만,
멍하니 입을 벌린 셋을 놔두고 해원기의 신형이 비쾌하게 남쪽으로 향했다.
일행이 향한 방향에 뭔가 엄청난 기운이 닥친다는 예감.
제독태감이 신호로 부른 원군이 이곳이 아니라 남쪽으로 왔을까.
포위망이 뚫린 곳이 마침 남쪽이기도 했지만, 거쳐온 백운동 입구가 낯선 길보다는 나을 터.
이미 원좌가 신호탄을 올린 걸 봤기에 어디서든지 적의 원군은 나올 수 있다.
비록 백운동 입구에는 불을 지른 노문기의 수하, 현황보필이란 자들이 아직 있을 수 있으나. 그래도 아는 길이다.
형대에서부터 길 안내를 맡았던 하일웅이 무너진 종유동 위로 용케 방향을 잡자, 일월표객은 아예 상덕공주를 얼싸안다시피 하며 달렸다.
뒤를 맡은 오소민과 정록은 연신 뒤를 돌아보고.
개방의 순행장로, 녹림장관의 대탐자면 뭐하나. 계속 해원기에게만 의지하다 이렇게 혼자만 남겨두고 도주하는 꼬락서니라니.
아니, 그런 수치스러움보다 걱정이 앞서서다.
반 각이나 지났을까.
엄청난 폭발음이라도 전해졌으면 해원기가 치열하게 싸우나 보다 했을 텐데. 뒤쪽에선 아무런 소리도 전해지지 않고,
도리어 앞에서 쇳소리가 터진다.
채채챙.
“어엇.”
급히 고개를 돌리던 정록이 바로 앞에 우뚝 선 일월표객에 부딪칠 뻔했다.
공산이 통째로 무너져내린 것 같았으나, 백운동 입구는 화포로 일어난 불길 바깥이었는지. 두툼한 언덕배기를 종유석이 기둥처럼 받친 형태.
그 언덕배기에서 두 명이 떨어져 하일웅을 공격하는 광경에 오소민과 정록이 곧장 앞으로 뛰었다.
역시 현황보필이 남아있었나.
허나 하일웅의 상대를 확인할 새도 없었다.
쉬잇, 쉬잇. 피피피픽.
별안간 옆구리로 날아드는 매서운 경풍과 전신을 노리는 무수한 살기.
파팡.
반사적으로 몸을 뒤튼 오소민이 양팔에 힘을 주어 날아드는 단창 두 자루를 후려치고,
형태도 보이지 않는 암기들이 날아든 정록은 놀란 망아지 마냥 펄쩍펄쩍 뛰며 손발을 정신없이 놀려야 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오소민의 옆으로 황망히 뻗는 이소천의 주먹, 정록 뒤에서 땅바닥을 빠르게 때리는 전천도의 두 손.
펑, 퍼퍼퍽.
이쪽에선 새카만 쇠사슬이 소리도 없이 말려 돌아가고, 저쪽에선 땅거죽이 뒤집히며 쇠꼬챙이를 쥔 인영이 튀어 오른다.
그리고 문득 귀를 울리는 탄성.
“오호라!”
공격이 그치면서 거리를 벌리는 상대들. 비로소 용모와 행색을 살필 틈이 생겼는데.
“일행천리표와 월영객. 일월표객이라면, 이 늙은이는 한때 연조도객이라 불렸던 인물이로구먼. 그리고…….”
탄성에 이어지는 목소리는 언덕 위. 몇 개의 인영이 불쑥 일어나면서 다른 목소리가 또 연달아 울린다.
“흐음, 저 준수한 외모는 개방의 유룡개 같네. 이쪽은 모르겠는걸.”
“이건 사전에 일러주신 것과 다른 일이잖소? 에, 남 학사.”
하일웅의 앞에는 닭발 모양의 병기인 계조(鷄爪)와 둥글게 휘어진 낫인 구겸자(鉤鎌子)를 든 청년 둘.
오소민의 상대는 짧은 단창을 양손에 쥔 중년인이고, 정록 쪽에는 헐렁한 장포를 걸친 백발노인이.
이소천을 노렸던 새카만 쇠사슬은 산발한 말라깽이의 손에 감겼으며, 지하에서 쇠꼬챙이를 쥐고 튀어나온 자는 경장에 복면을 뒤집어써서 눈구멍 두 개만 보인다.
전부 독특한 병기를 들어서 얼핏 육신사를 떠올렸으나,
언덕배기 위에 올라 내려다보는 자들은 어쩐지 동창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
박박 깎은 머리에 불그스레한 얼굴로 큼지막한 몽둥이를 든 자는 소도둑 같은 인상이요, 화의를 걸치고 옥을 박은 허리띠에 장검을 멋지게 늘어뜨린 중년인은 시정의 한량처럼 느슨한 표정이며,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장내를 훑어보는 주름살투성이 노파은 전신에 오색 천을 몇 겹이나 감았다.
행색이 특이하고 똑같이 오만한 눈빛으로 장내를 살피는 눈.
강호에서 오래 굴러먹은 무림인 특유의 냄새를 풍기는데, 이 셋과 어깨를 나란히 한 꾀죄죄한 남색 장삼의 노인만이 딴판.
밀각육학사의 남 학사가 엉성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픽 웃었다.
“훗, 일이란 언제나 변수가 있는 법. 세 분 영주(嶺主)는 그냥 유람이라도 나온 기분인가 보오?”
가느다란 눈에 기광을 띠고 둘러보자 소도둑과 한량이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고, 주름살투성이 노파가 게슴츠레한 눈을 치켜뜬다.
“유람? 그럴 리 있나. 반룡의 남북십삼령을 소집하고, 밀각의 학사께서 직접 접응하신 일인데. 우리 애들을 막아내는 것만 봐도 쉬운 상대는 아니겠소이다.”
끼어들 빌미가 생겼는지 소도둑과 한량도 제꺽 말을 받았다.
“그렇네. 다 늙은 칼잡이 혼자서 내가 직접 키운 계명구도(鷄鳴狗盜)를 막아냈으니.”
“아아, 그놈의 작명 솜씨는. 아무거나 그럴듯하면 갖다 붙이지 말라고. 에, 하여간 우리 장단쌍살(長短雙煞)과 노무파(老巫婆)의 무흔무적(無痕無跡)이 전부 득수하지 못한 건 처음인가.”
계조와 구겸자라고 계명구도. 기다란 쇠사슬과 단봉을 들었다고 장단쌍살. 땅속에서 몰래 기습하는 무흔과 잘 보이지 않는 암기를 뿌려서 무적.
별반 다를 것 없는 작명 솜씨지만, 소도둑과 한량, 그리고 주름살투성이 노파가 각각의 우두머리란 걸 알 수 있었다.
하일웅이 감산도를 누이면서 혀를 찼다.
“쯧쯧, 보아하니 무인의 자존심을 내다 팔고 조정의 주구가 된 반룡령의 쓰레기들 같구나. 내 강호를 떠난 지 꽤 되었으나 모른 척하기는 어려우니. 그래, 어떤 쓰레기인지 제대로 고해 보아라.”
해원기의 신분을 알고선 기꺼이 길잡이를 자처했고, 일월표객을 만난 후론 보표에 신경을 쓰느라 뒤를 받치기만 했으나.
본래 강개한 성품으로 연조도객이라 불렸던 호걸.
지금이야 일월표객이나 개방 장로, 녹림 대탐자에 비하면 잊힌 이름에 불과하지만, 이럴 때 나서지 않고 무슨 선배인가.
호탕하게 꾸짖어 도발하고, 상대가 달려들면 목숨을 걸고 싸울 작정이다.
의기 넘치는 언사. 그러나 반응은 하일웅이 어리둥절할 정도로 뜻밖이었다.
멀뚱멀뚱한 얼굴로 머리를 쓰다듬는 소도둑, 아예 못 들은 척 딴청을 피우는 한량, 치켜떴던 눈을 도로 게슴츠레하게 내리는 노파.
‘쓰레기’라고 불린 게 아무렇지도 않은지. 아예 입도 벙긋하지 않고.
남 학사만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기 시작했다.
“허허허…….”
그러나 그 웃음은 나오자마자 금방 그쳤으니.
타탁, 타탁.
“산동 북쪽에서 바닷가를 끼고 온갖 이권을 집어삼켰다는 독두조곤(禿頭粗棍), 하남의 기루란 기루는 전부 제 것이라는 요조낭군(窈窕郎君), 산서에서 몰래 살수를 팔아 치부했다는 귀무파(鬼巫婆). 꽤 악명을 날리던 작자들이 십여 년 전에 갑자기 종적을 감추었는데. 전부 반룡령에 들어갔었구먼. 허 참, 감옥에 처넣어도 부족할 패류(悖類)들이.”
온몸을 털면서 중얼거리는 정록의 말에 남 학사뿐 아니라 딴청을 피우던 셋까지 움찔한다.
소도둑이 독두조곤, 한량이 요조낭군, 주름살투성이 노파가 귀무파.
정체가 단번에 밝혀진 것도 놀랍지만, 먼지라도 터는 듯한 정록의 행동에 수십 개의 암기가 스르륵 떨어지기에.
어떻게 막아냈는지 알 수가 없다. 설사 보의(寶衣)를 걸쳤다 해도 그냥 털어내면 떨어지는 암기가 아니거늘.
사실 정록의 옷자락에는 십여 개나 구멍이 났다. 현공보원으로도 완벽히 받아내기 어려웠던 독한 암기들. 그러나 하일웅이 나서준 이상, 상황을 빨리 파악하고 기를 세워줄 필요가 있어서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과연 남 학사와 세 패류를 움찔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이마저도 효과가 길지 않았다.
“흐음, 소령주가 급하게 인원을 소집했던 이유가 녹림이랬으니까. 현 학사, 저 젊은 놈은 녹림장관의 팔대탐자 중 하나일 거외다.”
언덕 위로 또다시 줄지어 올라서는 자 중의 하나가.
아무도 밝히지 못했던 정록의 신분을 대뜸 추정해낸다.
이번에도 넷.
마른 몸매에 짙은 현의를 걸친 현 학사 옆에서 불룩한 배를 내밀고 통통한 얼굴을 갸웃거리는 사내가 말을 꺼냈고,
궁색한 차림새에 오만상을 찡그린 중년인과 승복을 입고 머리를 길게 늘어뜨려 용모를 가린 자는 뭔가 탐탁지 않은 기색.
귀무파가 코를 울리며 아는 체를 했다.
“흐응응, 녹림장관이라. 그럴 수도 있겠지. 강서, 절강, 복건. 남쪽에만 있던 양반이 용케 알아보는구려. 근래 장사가 신통치 않다던데.”
반룡십삼령이랬다.
남 학사와 함께 온 셋은 북육성 중의 셋, 현 학사의 동행 셋은 남칠성 중의 셋. 불룩한 배, 궁색한 중년인, 장발 승복 역시 보통내기가 아닐 터.
궁색한 중년인이 귀무파의 말에 거칠게 침을 뱉는다.
“퉤. 약 올리는 건가? 제대로 소령주를 돕지도 않은 주제에. 아니, 그보다 회람은 어떻게 되었나? 무슨 일을 이따위로.”
어지간히 모난 성격인 듯. 대뜸 눈을 부라리는 걸 현 학사가 손을 저어 말리곤,
“얘기는 나중에. 음, 백 학사가 늦는구려.”
남 학사를 보는 표정이 침중하다.
뜻밖의 내용인지 남 학사의 눈이 얼핏 흔들리다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일단 이들부터 제압하고 수보와 회합합시다. 연장암막이 풀렸으니 대사는 이루어진 거로 봐야. 어흠, 주 학사와 북육성의 나머지 세 분 영주보다 늦겠소.”
별도로 행동하는 황 학사를 제외하고 네 명이 조가보에서 동서남북으로 나뉘어 반룡십삼성을 지휘했다.
신호를 보고 공산으로 급행하던 중, 동쪽의 남 학사와 서쪽의 현 학사는 마침 백운동 입구에서 하일웅 등을 마주친 것이고, 북쪽의 주 학사는 직접 공산으로 향했을 터. 대삼림에서 형대까지 이미 지나왔던 방향은 훨씬 수월하리라 여겨서 회복이 덜 된 백 학사에게 맡겼으니 오히려 먼저 와도 이상하지 않거늘.
이렇게 연락이 원활하지 않은 상황에 또 어떤 변수가 생겼을까.
은허에서 조가보, 또 이 공산. 워낙 일이 꼬이고 또 꼬이는 판이라 명석한 남 학사도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눈앞의 무리부터 제압하는 게 우선.
연조도객, 일월표객, 개방의 유룡개와 녹림장관의 탐자 정도다.
당장 반룡십삼령의 여섯 영주와 그들의 심복 고수들을 전부 투입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숙였던 고개를 다시 들던 남 학사, 아니 언덕 위에 늘어선 영주들과 현 학사까지.
경악과 당황으로 자기도 모르게 사방을 살펴야만 했다.
쇄애애액.
이게 무슨 소리인가. 귀청을 찢고 전신에 소름이 돋게 하는 지독한 음향. 어디서 전해지는지 공중이 전부 이 음향에 쪼개지는 것 같고,
남쪽의 대삼림에서 처절한 비명이 그 음향 사이를 비집고 전해진다.
“으아아악!”
“인색이귀, 너희가 왜…….”
뭐가 뭔지 모르겠는 건 오소민 쪽도 마찬가지. 휘둥그레 뜬 눈이 본능적으로 북쪽을 향했다. 혹여 해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