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장 능파정해(凌波定海) (2)
팔대지옥은 진짜 같은 가짜. 처음 육신사라는 자들이 육악을 모방한 걸 알았을 때부터 의심스러웠다.
다섯 왕위마의 우두머리 격인 유왕이 진왕련을 이룬 후에 혼자서 백협맹 전체를 곤경에 빠뜨렸던 엄청난 마공이었다고 들었는데.
각기 기문병기로 육악과 비슷한 강상을 이루긴 했어도 육신사는 영사태화 외에 제대로 육악지력을 갖추지 못했다. 그런 육신사를 내세우고, 연장암막 뒤에 숨겨두었던 삼백의 수하를 동원했다.
여덟 개의 돌덩이로 지옥문을 현현하는 것도 특이하고, 흑승과 등활지옥을 열 때는 수보와 원좌를 동원하기까지.
다섯 왕위마가 함께 하지 않으면 진왕련을 이룰 수 없다. 그것도 천마가 등극한 후에야 가능한 일.
그런데 능히 명도흑염과 형해음화를 만들다니.
뭔가 야료가 있다.
팔대지옥에서 남은 건 중합지옥과 무간지옥 두 개. 그런데 돌덩이가 박살 나자 제독태감의 구결이 달라졌다.
의심했던 대로 이건 가짜 팔대지옥. 장안에서 첨유진이 유명반혼진이라고 떠들었던 십전염왕진(十殿閻王陣)을 교묘하게 섞은 것이었다.
‘초도전륜’이란 호통이 바로 그 증거지만, 연장암막이 통째로 쏟아져 내릴 줄은 몰랐다.
시커먼 연기가 만든 암흑의 장막이 한순간에 가루로 바뀌어 폭설처럼 떨어져서,
새까만 눈발이 삽시간에 삼백 명을 뒤덮는다. 폭설이 눈사태로 바뀐 듯이.
새까만 눈발도 이상하지만, 눈사태가 삼백 명에게만 집중된 것도 해괴한 광경.
해원기의 미간에 주름이 선명하게 일어서는데.
“해 형, 식월지태로 암천역위를 초래하는 술법이.”
“팔면영롱경으로 힘을 흡수해서 저것들이 회복하도록 쓰는 거지. 게다가 독기까지.”
오소민과 정록이 거의 동시에 일러주는 말.
눈썹이 반사적으로 꿈틀한 해원기가 빠르게 말을 받았다.
“오 형은 보패로 항룡진결(降龍陣訣)을, 정 형은 다른 분들과 현공보원(玄功保元)을!”
항룡진기가 아니라 진결. 하화를 꺼내서 과해항룡진의 구결을 따르라는 뜻이고,
다양한 공력을 뜻대로 풀고 맺는 대관원의 현공십팔해 중에서 현공보원은 사술과 마공에서 자신을 지키는데 뛰어나다.
박대정심을 지향하는 해원기는 금방 벗들의 말을 알아들었고, 적시에 대처할 방도를 떠올렸다.
연장암막, 육신사, 여덟 개의 돌덩이, 그리고 십전염왕진을 섞은 팔대지옥을 왜 의심스럽게 여겼는지에 대한 단서.
달을 음(陰)이라 하지만, 달도 빛이다. 달이 사라지면 음이 더 깊어지는 게 아니라 음이 양인 양 행세하는 법. 어둡게 간직해야 할 음이 환하게 드러나는 양으로 쓰인다면 자리가 거꾸로 된 것이다.
아울러 흉내라고 해도 명도흑염과 형해음화가, 또 해원기의 검과 충돌한 여파가 영롱경에 흡수되어 연장암막에 건네졌고.
본래 연장암막에 내재하였던 독기와 함께 삼백 명의 적에게 스며들었다.
지옥도를 현현하며 팔대지옥의 초석처럼 보였던 여덟 개의 돌덩이는 실상 이를 위한 눈가림이었나.
공력을 갈취하는 사술을 오대마도에 섞은 술진. 확장된 사술은 더 넓게 영향을 끼치고, 공력이 폭증한 데다가 독기까지 갖춘 자들은 급격히 광포해진다.
“우으읏.”
“흐으, 흐으.”
조금 전에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던 자들이 이번에는 괴상망측한 소리를 내며 짐승처럼 숨을 몰아쉬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와압!”
“죽여!”
함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삼백의 인원. 손과 발에는 시커먼 기운이 선명하게 뭉쳤고, 부러진 검은 몇 자나 자라난 것처럼 도로 길어져서.
산이 무너지고 강이 뒤집힌 듯 무시무시한 압력이 밀어닥쳤다.
연기성형(煉氣成形).
장력이든 검법이든 내공에서 뽑아 올린 기운이 일정한 형태를 이루어야 고수의 경지에 발을 디뎠다고 한다.
팔대지옥이 시작되었을 때는 그저 단단한 장력과 괴이한 검법에 불과했었는데.
비록 이백 명이 쌍장을 휘둘러 사백 개의 손바닥으로 검은 불길을 바다처럼 넓히고, 일백 명이 황천유혼검을 펼쳐서 누런 땅거미로 지면을 온통 덮었어도 결국은 수가 많았을 뿐.
삼십 년 공력을 지닌 자가 열 명이 모인다고 삼백 년 공력이 되지 않고, 황천유혼검력이 열 자루 검에서 펼쳐진다고 고루검강(骷髏劍罡)으로 화하진 않는다.
그래서 중사들에겐 수보의 서권송긴강기가, 장령들에겐 원좌의 목왕팔준경이 더해져 흑승과 등활지옥을 열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중사들의 권장지퇴는 말이 날뛰듯 신쾌하고, 장령들의 검은 종잡을 수 없게 뻗어가며 죄다 강기를 이룬다.
“퇴(退)!”
해원기가 단호한 외침과 함께 천형검을 크게 휘둘렀다.
촤아아아.
무시무시한 예기가 거대한 원을 치달려 걸리는 것을 모조리 갈라버린다.
그러나.
신령검역이고 뭐고. 일거에 수십 명이 짚단처럼 쓰러지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으니.
으악, 커억.
팔이 잘리고 다리가 부러진 자들. 비명과 신음을 토하며 고꾸라지고 나자빠지지만, 단말마의 비명이 터질 때마다 나머지가 부르짖는 고함은 더욱 높아진다.
우와아아아!
쓰러진 자들에게서 핏물처럼 분출하는 검은 기운. 바로 뒤를 잇는 자들이 함빡 뒤집어쓰면서 눈이 더 뒤집혔을까.
날아드는 검이 보이지 않고, 죽음이 무섭지도 않은지. 막무가내로 덤벼드는 모습은 그야말로 미친 사람들.
광마(狂馬)처럼 날뛰는 중사의 권장지퇴가,
퍼퍼퍼펑.
포악하게 움직이는 장령의 부러진 검이,
파파파팡.
일제히 폭발해버렸다. 팔다리와 검만이 아니라 육신까지.
일행을 보호하며 무서운 속도로 돌아가는 질풍치뢰의 천형검이 주위를 완전히 차단할 수가 없다.
일행을 지키려고 검역을 좁혔기에 폭발력이 대부분 해원기에게 집중되었다.
‘으음.’
전신을 뒤흔드는 충격. 해원기가 신음을 삼키며 제자리에서 빠르게 몸을 뒤집었고, 검역 안에 일체경신이 미치면서 일행들도 쟁반을 돌린 것처럼 위치를 바꾸었다.
이미 방어를 준비했던 오소민과 정록.
“하앗!”
한 소리 기합으로 동시에 과해항룡진과 현공보원을 펼치기 시작하고,
그 안쪽에 하일웅, 이소천, 전천도 역시 어깨를 바짝 붙인 채 돌아간다.
상덕공주를 중심으로 작은 삼각형, 그 바깥의 또 다른 삼각형. 두 개의 삼각형이 과해항룡진으로 엮여서 현공보원이 더해진 또 하나의 결계가 된 셈이지만,
제대로 형태를 이루었는지조차 살필 새가 없다.
사아아아.
폭발한 살점과 핏물이 안개처럼 퍼져서 오소민이 반사적으로 하화에 공력을 집중하고,
그 살점과 핏물을 뚫고 막무가내로 몰려드는 공세에 정록과 다른 이들도 정신없이 손발을 놀려야 했다.
파파파파.
현공십팔해를 있는 대로 동원하는 정록, 청허신공으로 밀어내는 이소천, 제월신공을 마구 때려내는 전천도. 하일웅은 커다란 감산도를 휘두르는 대신에 방패처럼 써서 막아내기에 급급하다.
미친 듯이 덤비는 중사와 장령이 수십. 마구 내뻗는 손발은 법식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고, 부러진 검을 내던지며 아예 머리로 들이박고 이빨로 물어뜯으려 든다.
죄다 정신이 나간 것 같지만, 그 광포한 공세는 흉악하기 그지없다.
더구나.
펑, 퍼펑.
조금이라도 타격이 먹히면 육체가 그 자리에서 폭발해버리니.
“윽.”
“크읏.”
오소민과 정록이 비틀거리며 밀려나서 금세 작은 삼각형과 뒤섞여버렸다. 과해항룡진이고 현공보원이고 버틸 수가 없다.
해원기는 몸을 뒤집자마자 검을 바꾸었다.
연장암막이 무너져 중사와 장령들에게 흡수되고,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마구 덤벼들더니, 검이 닿는 순간에 폭발해 엄청난 충격을 준다.
삼백 명이 전부 미쳐서 동귀어진(同歸於盡)할 셈인가.
순간적으로 검상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다.
섬뜩하고 괴이한 광기를 파괴하는 데는 천형검이 적격, 그러나 적아(敵我)가 뒤섞인 상태에선 오히려 위험을 초래한다.
필경 귀왕천형은 오직 한 자루의 검으로 천하의 마를 멸절하려는 지독한 원한에서 탄생했으니까.
동료와 벗, 지켜야 할 사람이 곁에 있다.
신령검역을 검왕법신으로 응집한 해원기가 검과 함께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촤라라라라.
일행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열 폭 병풍. 그 가운데에서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는 해원기의 양손이 장생십경을 거침없이 무찌르고.
원통처럼 따라 돌아가는 장생십경에서 자재검이 벼락을 뿌린다.
콰콰콰쾅.
들이받던 중사의 머리가 부서지고, 꿰뚫린 장령의 몸뚱이가 폭발해도 거대한 회오리로 화한 장생십경의 벽을 따라 돌아갈 뿐.
사막을 휘감아 올라가는 용권풍이 아니라 하늘에서 겹겹이 내려앉는 뇌운(雷雲)이다.
콰앙!
마침내 동시에 폭발하는 오십여 명. 화산이 터지는 것 같다.
박살 난 나무와 흙덩이가 십여 장이나 솟구쳐서 천지가 거꾸로 뒤집힌 듯.
엄청난 폭발에 중사와 장령들까지 어지럽게 밀려났다. 삼분지일이나 줄어들었으나 그래도 이백 가까운 수.
지켜보던 제독태감의 얼굴은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팔열지옥초가 깨지고, 팔대지옥의 밑바탕인 십전염왕진과 연장암막에 깔아놓은 비장의 술법까지 발동시켰건만.
‘한 놈도 쓰러뜨리지 못했다. 홍황공멸(洪荒共滅)의 술법을 백 명이나 펼쳤는데. 이래서야.’
수지를 따지긴커녕 본전도 찾지 못할 판이다.
더구나 화산이 터진 듯 거창한 폭발 때문에,
포위망이 한쪽으로 몰렸고, 시야는 차단되었다.
“놓쳐서는 안 된다! 어서!”
제독태감이 급한 고함과 함께 양손을 벼락같이 밀어내는 형세에 휩쓸려 수보와 원좌도 나무와 흙더미를 향해 장력을 내치고.
이백 가까이 남은 자들도 뭐에 홀린 것처럼 한 방향으로 돌아섰다.
으와아아아아.
먹이를 발견한 짐승처럼 울부짖는 자들.
십여 장이나 솟구쳤던 나무와 흙더미가 흩어지면서,
훌쩍 거리를 벌린 해원기 일행이 얼핏 보인다.
남쪽. 이미 무너져내린 공산이라 험하긴 해도 빽빽한 삼림이 사라져서 확 트인 곳. 백운동 입구의 공터로 방향을 잡았다.
맨 앞에 감산도로 길을 여는 하일웅, 그 뒤에 상덕공주를 옹위한 일월표객이 바짝 붙었고, 뒤를 오소민과 정록이 맡아 몸을 날리는데.
해원기만이 따로 검을 비껴든 채 남아있다.
더벅머리는 엉망으로 헝클어졌고, 겉에 걸쳤던 피풍은 어디로 갔는지. 갈기갈기 찢긴 양쪽 소매와 군데군데 구멍이 난 옷자락이 낭패한 모습이지만.
고요히 제독태감을 주시하는 자세에선 형언하기 어려운 위엄이 피어오른다.
일부당관(一夫當關)이면 만부막적(萬夫莫敵)이라더니.
목표를 찾았다고 다시 광포하게 밀려드는 이백 명을 눈에도 두지 않은 듯.
포위가 느슨해져 일행이 빠져나갈 수 있게 되었으니,
더는 꺼릴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