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337화 (337/410)

제85장 능파정해(凌波定海) (1)

오소민의 중얼거림을 듣고도 해원기가 얼른 몸을 세우지 못했다.

진짜 같은 가짜라도 팔대지옥의 네 가지 힘을 끌어냈고, 마지막에 현현한 여덟 개의 지옥문은 금성철벽(金城鐵壁)이 무색할 정도였으니.

신령검역에 더해진 천형검이라도 상당한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감로보병의 수정지력이 다시 이어지며 내부를 안정시키지만,

해원기의 미간은 여전히 깊이 파인 채.

비록 활강시인 육신사를 처리하긴 했으나 포위를 무너뜨리지 못했다.

초열, 대초열, 규환, 대규환. 살과 뼈를 태우고, 내장과 뇌리를 재로 만들 듯한 연옥의 불길을 공세에 휘감은 삼백의 고수도 그대로.

지옥문이 방패가 된 격이라 천형검의 이서형 아래에서 전부 멀쩡하게 전력을 보존했다.

대부분 짤막한 검을 든 비전의 장령. 백 자루의 검에 다시 회색 검기가 어리고.

어깨를 나란히 하여 쌍장을 쳐든 밀각 중사 이백은 물결치듯 좌우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개개인의 능력은 검강의 초입에 든 장령 쪽이 더 강해 보이지만, 중사들은 힘을 모으는 연수합격에 능숙해서 흉험하긴 마찬가지.

더구나 육신사가 불덩이가 되어 쓰러진 후에는 빠르게 포위를 늘리어 정면을 가로막았던 제독태감 쪽까지 이어졌다.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지이이잉.

해원기가 허리를 세우자 검이 다시 울었다.

상덕공주를 중심으로 좌우에 바짝 붙은 이소천과 전천도, 또 그 바깥에 세 방향으로 나누어 선 오소민, 하일웅, 정록.

일행의 안전을 확보하려면 어떻게든 이 포위망을 뚫어야만 한다.

검역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간다.

수보가 지혜를 짜내고, 원좌가 신호탄을 올리고.

짧은 소강상태에서도 제독태감의 눈은 바쁘게 움직였다.

기껏 데려온 육신사가 속절없이 무너지는 바람에 규환과 대규환으로 삼백의 수하를 밀어 넣어야 했고. 그러고도 팔열지옥초로 여덟 개의 지옥도까지 구현해야만 했다.

팔대지옥의 진행이 예상보다 너무 빠르다.

연장암막으로 공간을 차단한 결계가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이러다가 팔대지옥의 한계를 넘으면 수하들이 하나도 남아나지 않을 텐데.

그 시선에 비치는 해원기의 모습은 여전히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어떻게든 연장암막이 유지되는 상태에서. 에이, 다 쓸어 넣어도 상관없지.’

육신사든 삼백의 수하든 딱히 아깝지도 않아서.

마음을 정하자 양손이 빠르게 전면을 짚어나간다.

“밀각은 묶고, 비전은 친다.”

간결한 명령과 함께 등 뒤에서 광풍이라도 부는 것처럼 펄럭이는 풍성한 의복. 그리고 그 광풍에 날리듯 훌쩍 앞으로 나서는 수보와 원좌.

수보가 모양만 남은 서축을 땅바닥에 내리꽂고,

“흑승개문(黑繩開門)!”

원좌 역시 부서진 수투를 뿌리듯 벗어던졌다.

“등활개문(等活開門)!”

팔대지옥의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수보의 호령에 물결치듯 움직이던 밀각 중사 이백이 번갈아 쌍장을 내치면서 잦아들던 검은 불길이 수십 줄기 일어나고,

원좌의 호령을 따라 비전 장령 일백이 일제히 검을 찔러 넣는다.

흑승지옥의 검은 밧줄은 육신을 태우는 불줄기였었나. 밀각 중사 이백이 양손을 갈마들 때마다 갈라지는 검은 불길이 거대한 그물처럼 해원기와 일행을 덮치면서,

끊임없이 살을 자르고 뼈를 꿴다는 등활지옥의 이름대로 그 위로 누런 작살이 되어 꽂히는 비전 장령의 백 자루 검.

검은 불줄기는 포악하고, 누런 작살은 음험하다.

제독태감이 힘에 부쳐서 수보와 원좌를 내세운 게 아니라,

처음 해원기를 공격했을 때처럼 두 가지 힘이 교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수투와 서축의 강유상반이 흑승지옥과 등활지옥의 음양상접(陰陽相接)으로 화했다.

흑승지옥은 명도흑염을 흉내 낸 불줄기의 그물. 등활지옥은 황천유혼검을 본뜬 형해음화의 작살.

그물을 걷어내면 작살이 꽂히고, 작살을 막아내면 그물이 조여든다. 더구나 상대는 삼백이나 되는 인원. 앞서거니 뒤서거니 요철(凹凸)을 이루는 중사 이백과 빠르게 순차를 바꾸는 장령 일백이 곧장 달려드니.

이백 명은 수보의 서축이요, 일백 명은 원좌의 수투인 듯.

해원기의 두 눈에 신광이 번뜩였다. 규모가 커졌다고 원형을 알아보지 못할 리 없다.

아니, 오히려 삼백 명이 달려든 덕에 그 원형을 명확하게 파악했다고 할까.

처음에 거칠게 보였던 수보의 공격이 빠르기만 했던 원좌의 기세를 거듭해서 불러일으켰던 이유는.

“서권송긴(舒卷鬆緊)을 숨긴.”

휘릭.

천형검이 뒤집히며 폭풍이 미친 듯이 뻗자.

퍼퍼퍼펑.

흑염의 그물이 거꾸로 뒤집히고.

“목왕팔준(穆王八駿)의 변형이었군.”

우릉.

뒤집힌 천형검이 벼락 치듯 돌기 시작하자,

차차차창.

음화의 작살이 모조리 부러져나간다.

뻗어가는 폭풍을 감고 수레바퀴처럼 돌아가는 벼락.

그물이든 작살이든 가리지 않고 깔아뭉개면서 팔방(八方)으로 치달린다.

지옥도를 현현하는 여덟 개의 돌덩이를 향하는 능역형(凌轢刑).

장안에서 상대했었던 첨유진과 호경륭. 비록 첨유진은 체신이었으나 황천유혼검력을 섭선으로 시전했고, 호경륭은 전설에나 나오던 목왕팔준경을 익혔었다.

목왕팔준경과 마찬가지로 희귀하기 짝이 없는 서권송긴강기. 수보의 일견 거칠어 보이면서도 꺾였던 힘줄기를 되살리는 기예는 바로 이 서권송긴강기를 바탕에 두었고.

원좌가 두 손에 끼었던 이상한 수투는 여덟 개의 말발굽을 엮어 만든 것이었다.

서축과 수투가 망가지고 밀각과 비전의 수하를 동원해 흑승지옥과 등활지옥을 여느라 그 원형이 고스란히 드러날 수밖에.

아무리 숫자가 늘고 술진의 위력을 더했다고 해도 밑천이 다 드러난 바에야 어찌 당황하겠는가.

해원기는 아예 팔대지옥의 초석을 부술 생각이었다.

신령검역의 폭풍만뢰. 그러나 지금 손에 쥔 검상은 천형검이니.

주위를 죄다 깔아뭉개는 능역형은 폭풍만뢰에서 바뀐 질풍치뢰(疾風馳雷)다.

흑염의 그물이 거꾸로 중사들을 뒤덮고, 부러진 음화의 작살이 흩날리면서 삼백 명이 전부 나가떨어지려는 찰나,

또다시 일어서려는 여덟 개의 지옥문.

그러나 질풍치뢰로 이루어진 능역형은 이미 돌덩이를 짓이겼다.

콰콰콰콰쾅!

무지막지한 굉음. 돌덩이 여덟 개가 박살이 나고,

요철의 형태였던 중사의 절반과 검이 부러진 장령 대부분이 나동그라졌다.

“어억.”

“크윽.”

고통스러운 신음이 줄을 잇지만,

해원기는 도리어 검을 아래로 내리며 두 발을 모았다.

당장 수보와 원좌를 거쳐 제독태감을 노릴 줄 알았더니.

상덕공주를 보호하는 역할이 되었으나.

그렇다고 멍하니 모여 있기만 하진 않았다.

주위를 살피며 신경을 곤두세웠던 오소민이 급히 정록을 끌어당겼다.

“전 대협, 뭐라고 하셨죠?”

여성스러운 목소리에 따지듯 당돌한 말투지만, 신경 쓸 새가 없다. 전천도의 혼잣말이 귀에 덜컥 걸렸으니까.

“저 연장암막, 차츰 가까워지면서, 삼백의 졸개들에게 이상하게. 어째 식월지태(蝕月之態) 같은 느낌이.”

전천도가 어렵사리 중얼거렸던 말을 다시 꺼내자, 끌려온 정록의 눈이 확 커지고.

“식월지태면. 혹시 암천역위(闇闡逆位)가. 아차! 저 돌덩이가 팔면영롱경(八面玲瓏鏡)으로 쓰인 술진(術陣)이었구나!”

왠지 당황한 음성이라 경계에 집중하던 일행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흔들리는데,

“달을 좀먹는 형태라. 그래서 어두워지고 밝아지는 위치가 거꾸로 된다는 건가? 쓸모없는 재주만 잔뜩 가진 거울은 또 뭐지?”

그 와중에 툭 튀어나오는 상덕공주. 전천도와 정록이 언급한 단어들을 열심히 해석해대서. 공주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겁이 없는 여인이다.

그래도 그 해석이 도움이 된다.

전천도의 외호는 월영객. 형세를 읽고 암습과 매복을 간파하는데 뛰어난 속가의 기공을 익혔다. 아무도 모르는 새에 연장암막이 가까워지는 걸 눈치챈 것도, 그게 달도 없는 이 밤을 더욱 어둡게 만드는 식월지태란 것도 제월신공(霽月神功) 덕분.

갖가지 방술이물(方術異物)에 밝은 정록은 과연 이 팔대지옥의 구조를 알아낸 듯.

“아, 팔면영롱의 거울이 아니라 여덟 개의 영롱경이지요. 힘이 가해지면 진동으로 흐트러뜨리며 반짝거린다고. 거 있잖습니까. 물이 담긴 구리 대야를 문지르면…….”

“그러니까 뭔데?”

오소민이 대뜸 말을 잘랐다.

팔면영롱이 흔히 여러 가지 재주를 지녔어도 특출난 한 가지가 없다는 의미로 쓰이지만, 지금이 상덕공주에게 설명할 때냐.

내가공력(內家功力)을 수련하는 밀실이나 폐관 장소에 걸어두는 특별히 가공한 몇 겹의 구리판이 영롱경. 그러나 여기에는 돌덩이뿐이요, 반짝이긴커녕 지옥도를 현현했거늘.

정록이 스스로 뒤통수를 때린다.

“으응. 아까 육신사라는 물건도 그렇더니. 저 작자들, 회복이 지나치게 빨라. 더구나 연장암막에는 분명히 독기가 서렸.”

“이런!”

더 들을 필요가 없었다.

별별 해괴한 짓을 벌였던 자들이 이번에도 또 수상한 수작을 숨겼을 터.

서둘러 경고해야 하는데 한참 싸우는 해원기를 함부로 부를 수가 없다.

안타까운 탄성이 오소민의 입술 사이로 터진다.

그 탄성에 담긴 감정을 해원기는 즉각 알아차렸다.

지옥도를 현현했던 여덟 개의 돌덩이를 박살내자마자 검역을 일행 주위로 좁히면서,

심상치 않은 광경을 찾아냈다.

요철에서 튀어나온 부분이었던 절반의 중사들. 흑염 그물을 거꾸로 뒤집어쓰고 나동그라졌던 자들이 멀쩡하게 일어난다. 불에 그을린 흔적도 없이.

장령들 또한 언제 신음을 토했냐는 듯이 몸을 세우며 부러진 검을 태연히 고쳐 쥐는 모습.

천형검을 처음으로 꺼냈으나 본래 귀왕천형에서 유래한 가공할 법식이다.

자묵, 의월, 이서에 이은 능역형.

거대한 수레바퀴에 깔리는 형벌이라 초열지옥으로 갈라졌던 지면이 대패로 민 것처럼 매끈해졌고, 솟구치던 불길까지 흔적 없이 사라졌거늘.

삼백 명 중에 쓰러진 자가, 아니, 피를 흘린 자조차 없다. 돌덩이를 박살 낸 위력이 전혀 미치지 않았단 말인가.

그들만이 아니다.

전적으로 방어를 맡던 지옥문이 파괴되었는데도 동요조차 없는 수보와 원좌.

제독태감은 이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인지 두 팔을 크게 펼쳐서 몸에 걸쳤던 풍성한 의복이 깃발처럼 나부끼고.

“초도전륜(超度轉輪)!”

목을 울리는 음산한 호통. 그 호통에 놀란 것처럼 수보와 원좌가 펄쩍 뛰어 서로 위치를 바꾸니.

사아아아아아.

주위를 둘러쳤던 연장암막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린다.

마치 폭설처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