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장 황궁비사(皇宮秘事) (4)
해원기가 검왕수를 완성했을 때,
사부는 환정곡 뒤쪽의 절벽 구석으로 데려가서 해원기의 양손을 어루만지며 선물을 내려주었다.
손가락 하나에 검상 한 가지. 십지(十指)에 십검(十劍).
이미 고검으로 원하는 검상을 구현할 수 있었으니 무의미한 일이었지만,
피폐한 사부가 다정하게 손을 잡아주는 것만으로도 해원기에게는 더 바랄 게 없는 선물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절벽 구석을 가리키며 해주었던 이야기.
“여기는 예전에 이 사부가 홀로 폐관했던 곳이란다. 폐관을 끝내고 나서는 완전히 무너뜨려서 이젠 흔적도 없다만. 흠, 귀왕검을 뜻대로 발현할 수 있게 되었고, 세 개의 빗장을 열었으니 그 정도면 네 사조께서 남기신 부탁을 완수한 거라 여겼거든. 허허.”
제자 앞에서 옛일을 떠올리는 게 겸연쩍었을까.
사부는 웃음으로 얼버무리면서 천천히 몸을 돌렸고, 해원기는 그저 다시 사부를 부축해 환정곡으로 향해야 했었다.
사부가 왜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냈는지,
그 얘기에 무슨 뜻이 담겼는지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아마 사부는 미리 짐작했던 모양이다.
해원기가 고검을 여간해선 뽑지 않으리란 걸. 십대검상 중의 살기가 짙은 몇 가지는 아예 없는 셈 치려는 걸.
비록 사부가 귀왕검을 제하고 사조의 신령검으로 대신했으나,
꺼림칙하기는 천살검도 마찬가지였는데.
지금 해원기는 서슴지 않고 쥐었던 검을 퉁겼다.
사아아아아아.
고검이 조용히 떠오르면서 엄숙한 기상이 공간에 퍼져나간다.
사부가 손수 전해준 십대검상에는 없었던 검상.
마침내 스스로 찾아냈다.
천살검이 아닌 천형검(天刑劍)을.
일행이 다급히 쏟아낸 장력이 바닥의 불길과 널브러진 나무까지 어지럽게 밀어내지만,
육신사는 전신에 뒤집어쓴 민망한 가죽에 불이 붙지 않는지 막무가내로 달려들었다.
정수리로 떨어진 자묵형에 의해 각자의 기문병기가 파괴되었고, 그 충격으로 나뒹굴었던 자들이.
간신히 일어서고, 비틀거리더니, 이제는 멀쩡하게 장력을 피하면서.
망가진 병기와 맨손을 섞어 기세를 일으키는 모습이 특이하다.
그러나.
위이잉.
떠오른 검이 지면과 평행으로 눕자 삼엄하게 굳어지는 공간.
퍼퍽.
육신사가 멈칫하다가 일제히 고꾸라졌다. 누가 발목을 잡아 걸어 무릎을 꿇리고, 뒤통수를 눌러 머리를 처박은 것처럼.
해원기가 양손을 들어 떠오른 검을 무겁게 눌렀다.
무우웅.
단지 공중에서 움직일 뿐인데 또다시 일어나는 무거운 울림.
그게 위무(威武)라는 형당개전(刑堂開典)의 구령이라는 걸 알아듣는 이는 없었다.
죄를 지은 자는 끌려와 사실을 소상히 살핀 후에 법에 따라 벌을 정한다.
이를 심판(審判)이라 하니, 판관(判官)은 형리를 좌우에 늘어세운 당(堂) 가운데 올라 무거운 마음으로 법전을 여노라.
의지에 따른 천형검의 현현.
“컥!”
누구의 입에서 터진 소리일지. 머리를 처박은 육신사가 죄다 피를 토했다.
귀왕검이었다면 그 흉살지기(凶殺之氣)가 미치는 공간을 귀역(鬼域)으로 바꾸었겠으나,
신령검역에서 위의(威儀)를 드높인 검기핍인도 이에 못잖았다.
멀쩡해 보여도 이미 심각한 내상을 입은 육신사로서는 태산처럼 짓누르는 심판의 위압을 견딜 수 없었다.
스스스스.
육신사만이 아니었다. 쩍쩍 갈라진 지면에서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일어나던 불길조차 잦아들기 시작하자.
이 광경에 기가 막힌 표정을 짓던 수보와 원좌가 황망히 제독태감의 곁에 붙고, 제독태감도 기다렸다는 듯이 급히 두 손을 뒤집었다.
“대초열(大焦熱)!”
화라락.
잦아들던 불길이 놀란 듯이 벌떡 일어서지만,
천형검은 이미 뒤집혀 지면을 무섭게 때렸다.
두웅.
커다란 북을 친 듯한 기음. 판결을 내리자 작두가 상반신을 끊고, 낫이 하반신을 벤다.
촤아아아아아.
뒤집어쓴 갖가지 색깔의 가죽, 검강도 막아냈던 그 가죽이 갈기갈기 찢겨 눈보라처럼 흩날리고,
비명도 지르지 못한 육신사가 피를 뿌리며 날아갔다.
자묵형에 이은 의월형(劓刖刑). 코를 자르고 발꿈치를 벤다는 글자지만, 실은 신체의 나온 곳을 끊고 움직이는 곳을 베어 사람의 형상을 지우는 형벌.
사람 같지 않은 자들은 사람으로 있어선 안 된다.
장안에서 상대했던 첨유진의 체신과 마찬가지로 육신사는 전부 오련칠혼의 사법을 거친 자들. 사법이 더욱 지독하게 시전 되어 활시인을 넘어 거의 강시와 다름없는 신체를 지녔어도 형벌을 피할 수는 없다.
제독태감이 급하게 불러일으킨 대초열지옥의 불길은 도리어 육신사의 끔찍한 형상을 화장(火葬)하듯 집어삼키고,
날아가는 여파에 휩쓸려 불길이 거꾸로 바깥을 향하니.
화르르르.
여덟 개의 돌덩이에서 반사적으로 지옥도의 형상이 솟구친다.
대초열의 지옥 불에 지옥도가 반응할 리 없건만.
이 상황이 해원기의 검세에 의한 것임을 알아챈 제독태감이 곁에 붙은 수보와 원좌를 아랑곳하지 않고 두 손을 크게 휘저었다.
“규환(叫喚)! 대규환(大叫喚)!”
밀각의 중사 이백이 동시에 쌍장을 휘두르며 뛰어들고,
비전의 장령 일백은 병기를 흔들며 날아들었다.
기겁한 제독태감의 연이은 호령에, 규환에는 중사 이백이, 대규환에는 장령 일백이 움직인 것.
쏴아아아.
중사들은 일행의 왼쪽과 뒤쪽. 사백 개의 손바닥이 쏟아낸 힘이 대초열의 불길을 시커먼 해일처럼 세우고,
오른쪽에서 날아든 장령의 병기들에서는 회색 기운이 땅거미 지듯 늘어나서.
수도 수지만, 장력의 검은빛과 병기의 회색 기운은 밀려나던 대초열의 불길까지 조종하는 듯.
산사태처럼 해원기와 일행에게 밀려든다.
엄숙한 심판의 장에 함부로 난입하는 자는 그 누구라도 용납할 수 없다.
해원기가 몸을 돌리며 힘차게 땅바닥을 디뎠다.
쿵.
그리고 지유진과 함께 빙글빙글 돌아가는 천형검. 일행을 둘러싸고 여덟 줄기 바람이 폭발하듯 고개를 들고,
눈 깜짝할 새에 팔풍(八風)이 뒤엉켜 세 방향으로 굴러가기 시작하더니,
콰콰콰콰.
한 바퀴 구를 때마다 배나 거세지는 검풍. 초열지옥이 열릴 때 벌어졌던 지면이 사정없이 갈라진다.
기운찬 우마(牛馬)가 거대한 써레를 끌고 나아가듯.
밀려드는 산사태를 통째로 찢어발길 셈이다.
귀왕천형의 이서형(犁鉏刑)이 시커먼 해일과 회색 땅거미를 정면으로 들이받았다.
콰콰쾅!
“아악.”
“엇.”
굉음과 지진. 땅바닥이 뒤흔들리며 쑥 가라앉는 바람에 상덕공주와 그녀를 감싸던 전천도가 중심을 잃을 지경.
해원기도 지유진을 펼쳤던 다리가 꺾이면서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야 했다.
어마어마한 충격.
이서형이면 설사 삼백 명의 고수라도 꺾을 위력인데. 대초열의 불길을 휘감은 시커먼 해일과 회색 땅거미를 부수는 순간에 여덟 개의 지옥도가 병풍처럼 늘어섰다.
의월형으로 육신사를 날렸을 때까지는 돌덩이에서 솟구쳤던 형상이,
안으로 밀려든 삼백의 인원이 와르르 무너지려 하자 그 앞에서 출현할 줄이야.
이를 악물었다.
“으음, 그냥 흉내는 아니구나.”
이백의 중사가 펼친 것은 모두가 열양류(熱陽類)에 속하는 장공. 그 힘이 대초열의 불길과 어울려 명도흑염(冥道黑炎)과 비슷해졌고,
또 백 명의 장령이 병기에 실은 것은 죄다 황천유혼검(黃泉幽魂劍)에서 파생된 기운이라 형해음화(形骸陰火)를 절로 이룬다.
오대마도에 속하는 명부도(冥府道)와 형해도(形骸道).
해원기의 신령검역이 아니었다면,
일행이 설사 삼백 명의 공세를 막아내더라도 이 굉음과 지진에 내부와 외부 모두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다.
당년에 유왕이 혼자서 백협맹을 곤경에 몰아넣었던 진짜 팔대지옥과는 다르지만,
규환과 대규환을 열어 능히 지옥도를 끌어낼 수 있는 진짜 같은 가짜다.
“으득, 지독한 놈.”
제독태감도 이를 갈아붙일 수밖에.
직접 보면서도 선뜻 믿기지 않는다. 그간 절세검왕에 대한 보고를 접할 때마다 말도 되지 않는다고 했던 자들. 수보와 원좌 같은 자들에게 되레 주의하라고 경고하는 편이었으나.
이게 정말 사람인가.
연혼대법(煉魂大法)을 거듭 시행해 활강시(活僵尸)가 된 육신사. 영사태화의 일기연환으로 심령을 하나로 묶고, 강기를 견디는 육신갑(六神甲)까지 만들어 입혔거늘,
육신사를 장난감처럼 다루고, 수보와 원좌가 가세했어도 여덟 가지 기문병기를 수수깡처럼 망가뜨렸으며, 기어이 육신갑을 박살내어 활강시를 파괴해버렸다.
비장의 팔열지옥초(八熱地獄礎)까지 일으켜 문을 네 개나 열었건만, 전혀 우세를 점하지 못하잖는가.
아니, 우세는 무슨. 팔열지옥초 덕에 지옥도가 출현하지 않았으면 육신사를 파괴한 검에 얼마나 큰 손해를 보았을지.
사람은 하나, 검은 한 자루.
십 년에 걸쳐 베푼 술법과 수백이나 되는 인원으로 오히려 수세에 몰릴 줄이야.
상덕공주는커녕 그녀를 지키는 자들조차 건드릴 수가 없다니.
절세검왕이란 외호 그대로다.
수보가 모양만 남은 서축을 품에 안으며 바짝 얼굴을 들이민다.
“조금 전 상덕공주의 말이. 반룡십삼령(盤龍十三嶺)을 한곳으로 모을까요?”
조심스럽게 속삭이는 말에 제독태감이 인상을 썼다.
주인을 위해 머리를 짜내는 게 모신(謀臣)의 역할이라. 상덕공주가 했던 말을 되새겨 대비하자는 뜻이다.
칠성검 서문창. 십여 년 전에 갑자기 나타나 금의위 직제에도 없는 대영반에 임명된 자다.
은허에서의 고약한 결말 이후에 조가보까지 왔다가 바로 떠났다지만,
이 공산에 연장암막을 베푼 것은 바로 그자 때문.
동창이 설립된 후에 천방백계로 금의위를 망가뜨려 수족으로 삼았다. 본디 황제의 직속으로 호위와 감찰을 행하는 금의위를 유명무실하게 만들어 그 권한을 빼앗아야 동창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으니까.
그런데 정체불명의 인물이 대영반에 올랐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대내제일고수로 공인된 실력. 어리숙한 황제를 위해 태황태후나 황태후가 몰래 키운 친위근시(親衛近侍)라는 의심이 강하게 든다.
황제가 어쭙잖은 미행(微行)이랍시고 나온 줄 알았더니 상덕공주. 사전에 서문창과 교감이 있었을 수도.
어떻든 주위 상황을 파악하고 서문창의 주의를 다른 곳에 돌리는 방안으로 반룡령의 정예를 관도 곳곳에 뿌려두었었다.
지금까지 특별한 소식이 없다는 건 일단 그 방안이 성공했다는 방증이고,
이쯤에서 병력을 충원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미 육신사를 잃었다. 여기서 삼백의 수하를 다 잃어도 상덕공주를 놓칠 수는 없는 일.
‘제길, 어마감을 앞세운 같잖은 아문 몇 개 때문에 이게 무슨.’
겉으로는 협조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동창에 반감을 지닌 태감들. 그놈들 중에 몇은 또 황태후랑 선이 닿았을 수 있어서 수보가 조가보를 비우는 데 애를 먹었다고 했다.
만일을 위해 서문창을 상대할 패로 준비했던 노문기도 쓸모가 없고.
“그래. 쯧.”
제독태감이 내키지 않는 심정에 혀를 차고 말았다.
반룡령을 이끄는 열세 명의 우두머리라지만, 결국은 건달패 두목이잖나. 기껏해야 먹이를 주어 기르는 개에 불과한 강호의 무부 따위를 동원해야 하는 게 영 마뜩잖다.
허락이 내리자 원좌가 곧장 신호탄 하나를 공중으로 내던졌다.
파르르르.
높다랗게 날아오르는 불꽃. 작아도 캄캄한 밤에는 멀리까지 보인다.
해원기를 방해하지 않으려는 생각보다 너무나 무서운 천형검의 위력 때문에 일행은 본능적으로 바짝 붙게 되었다.
상덕공주를 중심으로 똘똘 뭉친 형태. 험한 싸움 속에서도 담 크게 입을 놀렸던 상덕공주도 목을 잔뜩 움츠린 채.
긴장해서 자세를 취했던 오소민이 솟구치는 불꽃을 확인하곤 중얼거렸다.
“여기서 또 원군을 부른단 말인가?”
육신사를 처리했어도 아직 포위된 상황. 제독태감 앞에는 수보와 원좌가 건재하고, 팔대지옥을 차례로 여는 여덟 개의 초석과 삼백이나 되는 적은 여전히 불길한 기세를 뿜으며.
그 뒤의 연장암막도 멀쩡하다.
뚫고 나갈 길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또 화포를 쏘아대진 않겠지만, 도대체 얼마나 많은 고수를 끌어 모았을지.
황제를 시해하려는 함정이란 걸 새삼스럽게 실감했다.
그러면서 해원기를 향하는 시선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회오리친다.
괜찮은지 걱정스러운 마음, 도움이 되지 못하는 안타까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려는 초조함.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곁에 있겠다는 각오.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절령제이십일(節令第二十一) 대설(大雪)
대설은 기후특징을 반영하는 절기 중의 하나로 이때가 되면 기온이 현저히 떨어지고 강수량이 증가하여,
따뜻한 공기와 교차하는 지점에선 갑작스레 큰 눈이 내리거나 폭설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꼭 이때 일 년 중 가장 많은 눈이 온다는 의미는 아니어서, 대설은 소설과 마찬가지로 단지 눈으로 대표되는 동계의 특징을 표시할 뿐이다.
실제로 일 년 중 가장 눈이 많이 내리는 때는 소설도, 대설도, 소한(小寒)도, 대한(大寒)도 아니라 오히려 봄으로 접어든 우수(雨水) 시기이다.
옛사람은 대설의 조짐을 세 가지 들었는데,
첫째는 할단불명(鶡鴠不鳴)이라 추위에 강한 산새도 울기를 그치고,
둘째는 호시교(虎始交)라 호랑이가 짝짓기를 시작하며,
셋째는 여정출(荔挺出)이라 향초가 뜬금없이 싹을 내미는 것이다.
왜 이런 조짐에 주목했을까? 흔히 소설엔 봉산(封山)이요, 대설엔 봉하(封河)라고 심해지는 추위가 산하를 덮는다고 했으니. 음극이쇠(陰極而衰)하면 일양(一陽)이 되살아나는 법.
겨울이 깊어갈수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이미 생명이 움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