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장 황궁비사(皇宮秘事) (3)
지옥도는 이른바 지부의 다섯 왕위마가 공통으로 사용하는 기괴한 방어.
오직 왕위마만이 오대마도(五大魔道)를 익혔고, 오대마도의 공력을 완성한 자만이 지옥도를 시전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땅속에서 솟구친 돌덩이가 그 지옥도를 구현했고, 한두 개가 아니라 여덟이나 되는 돌덩이가 주위를 포위한 형태.
방어로 쓰인다고 마음을 놓을 수 없고, 더구나 돌덩이가 출현하자마자 몰려나오는 무수한 인영들은 분명 동창의 인마일 터.
밀각의 중사 이백에 비전의 장사 백. 도합 삼백이라고 했었다.
연장암막을 돌파하기는커녕 갈수록 더 위험해지는 상황에 해원기는 만사를 제쳐두고 일행에게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상대하던 자들이 고이 보내줄 리 없다.
꼼짝없이 인점기중에 꼬치 꿰듯 당할 뻔했는데도, 해원기가 몸을 날리자 수보와 원좌가 등사와 기린을 마치 짐짝처럼 내던진다.
쉬익.
화살처럼 날아가는 둘. 정면을 본 채 뒤로 물러나던 해원기의 시선이 흔들렸다.
해원기를 향한 게 아니라 좌우로 확 갈라진 등사와 기린. 다른 이들이 목표고, 해원기를 노리는 건 뒤따라 달려드는 수보와 원좌.
촤르르르.
수보의 서축이 파도처럼 밀려들고, 원좌의 수투가 흔들린 순간에 예의 지독히 빠른 장력이 닥친다.
굳이 뒤를 둘러보지 않아도 잠심침령으로 일행의 기척을 파악한 해원기다.
등진 바로 뒤쪽에는 상덕공주를 지키던 하일웅과 이소천, 그리고 그들보다 조금 더 좌우로 거리를 벌린 오소민과 정록.
등사와 기린이 덮쳐간 곳은 바로 오소민과 정록 쪽이었다.
앞에는 서축과 장력, 등사와 기린이 향한 좌우에는 현무와 백호, 등 뒤엔 청룡과 주작.
해원기가 공중에서 두 발을 교차하며 허리를 퉁겼다.
키이잉.
고검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해원기의 전신을 휘감으면서 공간이 비명을 지르고,
서축과 장력 따위는 수직으로 해원기를 띄우는 맹렬한 돌개바람 앞에 흔적도 남지 않았다.
백운동 구멍에서 오소민들을 일체경신으로 이끌었던 용권풍.
그보다 더욱 무섭게 돌아가는 바람기둥에서,
파지지직.
사방으로 번갯불이 갈라친다.
신령검역을 전신에 수렴하니 폭풍만뢰 또한 의지에 귀납한다.
팔풍이 함께 휘도는 바람의 갑옷이 검왕법신에 더해지고,
팔뢰가 깃드는 고검이 분노한 뇌신의 형상을 그려냈다.
콰르릉!
장내가 굉음에 진저리를 치고, 연장암막에서 몰려나오던 삼백의 인원들이 뇌성에 굳어진다.
그야말로 뇌천대장(雷天大壯).
더욱이 우레보다 먼저 여덟 줄기 번개가 수보와 원좌, 육신사를 노리고 일시에 떨어졌으니.
꽝!
우레 끝이 귀청을 찢는 폭음으로 바뀌었다.
수보의 서축은 전부 펼치면 십 장까지 이르는 길이. 그게 짐승이 씹어먹은 것처럼 갈기갈기 찢겼고. 원좌의 특이한 수투도 도끼에 마구 찍힌 듯 절반이나 부서졌다.
마디가 전부 끊긴 구절편, 손잡이만 남은 파초선, 발톱이 뭉그러져 몽둥이로 변한 오형조, 아예 박살이 나버린 은추.
현무, 주작, 청룡, 백호는 충격으로 바닥을 구르는데. 가세하려던 등사와 기린만이 황망히 사신사를 부축하느라 분주하다. 그런 둘의 깃발과 단장 역시 이미 제 모습을 잃었고.
기문병기의 파괴는 바탕인 내공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여덟 중에 멀쩡한 자는 하나도 없다는 뜻. 과연 제대로 중심을 잡은 건 그나마 수보와 원좌뿐이어서.
비틀거리면서도 어떻게든 뒤로 물러섰다.
벽력일순(霹靂一瞬)이랄까.
상대하던 육신사가 일거에 나가떨어지는 바람에 맞서던 이들도 얼떨떨해졌다.
뭐가 번쩍하더니 싸움이 삭 정리된 셈.
해원기가 가운데로 내려서지 않았다면 한참 멍했을 터.
표정이 이상한 건 해원기도 마찬가지.
빠르게 일행을 살피면서도 가슴 앞에 세운 오른손을 내릴 줄 모른다.
수도(手刀)처럼 꼿꼿하게 새운 손, 그런데 곡예라도 하는 것처럼 가운뎃손가락 끝에 고검의 검병이 아슬아슬하게 얹혀있다.
우레를 치고 번개를 뿌려서인지 기이한 광채가 꿈틀거리는 검신. 세웠던 손을 펴서 손잡이를 잡자 비로소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다들, 괜찮습니까?”
일행이 그 목소리에 정신이 들어 와락 모여들었다.
오소민은 전립과 피풍이 다 찢겼고, 이소천은 양쪽 소매가 걸레쪽이 되었다. 정록은 창백한 얼굴로 거친 숨을 몰아쉬고, 그나마 가장 멀쩡한 하일웅도 머리칼과 수염이 엉망으로 헝클어진 채.
육신사의 하나와 맞서면서 흉험한 싸움을 벌였던 흔적. 다들 상승의 무공을 익힌 고수건만, 현신장에 버금가는 자들에겐 힘에 부쳤던 거다.
서로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오소민이 하화를 소매에 넣으며 인상을 썼다.
“밀각과 비전? 소위 대부라는 작자들을 몇백이나. 전력을 기울였다는 건가?”
영민한 그녀는 힘든 싸움 가운데에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어느새 주위를 둘러싼 삼백의 인원. 왼쪽과 뒤쪽은 밀각의 대부들과 유사한 차림새요, 오른쪽은 경장에 흉갑을 걸쳤으니. 이백은 밀각의 중사요, 백은 비전의 장령이란 자들이다.
정록도 가까이 가지 못했던 연장암막을 가벼운 휘장처럼 열어젖히고 나섰고, 그들 뒤로 다시 연장암막이 닫히면서 기척이 차단된다.
정록이 호흡을 고르면서 맥없이 코를 울렸다.
“후, 흐흥, 황제를 시해할 계획이었다잖아. 희한한 돌덩이들이 튀어나오면서 문이 열렸나? 진세라기보다는 술법 같은데.”
이 친구 또한 보통내기가 아니라서. 한편으로 백호의 은추를 상대하고 또 한편으론 상황이 변하는 기미를 파악했었다.
제독태감의 느물거리던 목소리도 빼놓지 않고.
“근데 지옥도가 아니라 지옥도라.”
오소민의 시선이 홱 돌아왔다.
“여덟 개의 돌덩이, 지부의 마도. 설마…….”
정록도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팔대지옥(八大地獄)? 에, 그건 노조의 허풍이라고 여겼.”
말을 제대로 맺지 못한다.
상덕공주를 지키던 전천도, 이소천과 하일웅은 무슨 소린가 의아한 표정이지만,
오소민과 정록은 과거의 결전을 직접 겪었던 이들의 후예.
어렸을 때 개방팔선과 녹림노조에게서 들었던 얘기를 떠올리게 된다.
다섯 왕위마 중의 우두머리인 유왕(幽王) 이랬던가. 당년에 혼자서 백협맹 전체를 곤경에 밀어 넣었던 가공할 능력의 일단이 팔대지옥의 구현이었다고.
너무 허황된 내용이라 허풍이나 과장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는데.
해원기가 당장 고개를 저었다.
“진왕련(眞王聯)으로 오대마도를 통합해야 가능해. 흐음.”
왕위마가 단 하나도 세상에 나올 수는 없지만,
이미 몇 번이나 오대마도의 흔적이 나왔었다. 동창에선 따로 패도오경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했고.
소위 제일마왕(第一魔王)이란 존재가 없어도 팔대지옥을 구현할 방도를 찾았을까? 돌덩이와 함께 나타났던 지옥도는 이전 첨유진의 조잡한 수준이 아니었다.
잠깐의 대화.
아직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다.
뒤집어쓴 민망한 가죽이 피로 물들었는데 억지로 일어서는 육신장. 각자의 기문병기가 꺾이고 심각한 내상을 입고서도 어떻게든 버텨낸다.
도로 제독태감 앞까지 물러난 수보와 원좌는 육신장보다 훨씬 빠르게 정상을 회복하는 눈치에,
여덟 개의 돌덩이을 따라 늘어서기 시작하는 삼백 명이 전부 살벌한 기세를 내뿜어대니.
첩첩산중이다.
“조금만 버텨요. 대영반이 칠성좌(七星座)를 거느리고 꼭 올 테니까.”
슬쩍 뒤로 빠져 둥글게 방어하는 형태를 취하려는 하일웅과 이소천에게 상덕공주가 말을 건넨다.
응원인지 격려인지.
하여간 구중심궐의 공주님이라고 보기 어려운 담량.
그러나 귀에 익은 단어에 해원기의 시선이 절로 돌아갔다.
“칠성검 서문창?”
“응? 아는 사이?”
해원기와 눈이 마주친 상덕공주가 신기하다는 표정을 짓지만,
여기서 그 이름이 왜 나오나. 은허의 싸움 막판에 불쑥 등장해서 동창과 아문의 태감들을 구했던 자 아닌가.
해원기의 의혹에 답이라도 하듯이 제독태감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허어, 공주마마께서 나름 준비를 하신 모양이오만, 기다리던 원병이 제때 이르겠습니까? 아니, 설사 온다 해도 큰 의미가 없지. 그걸 상정해서 팔문지옥도(八門地獄道)를 포설해놓은 거랍니다. 허허허.”
조롱의 웃음을 터뜨리는 제독태감의 얼굴에는 여전히 여유가 넘친다.
수보와 원좌, 그리고 육신사를 한꺼번에 꺾어버린 해원기의 위세를 목격하고도.
여덟 개의 돌덩이. 팔문지옥도의 출현과 삼백이나 되는 수하가 아직 든든하다는 건가.
상덕공주가 약이 올라 버럭 소리를 지르는데,
“이놈! 진즉부터 금의위를 엉망으로 만들더니, 기어이…….”
제독태감의 느물거리는 여유는 거기까지. 장신구로 치장한 두 손이 기묘하게 엮이면서,
“초열개문(焦熱開門)!”
구결을 외치는 음성이 쇠를 긁듯 거슬리고,
삼백이나 되는 인원이 한사람같이 힘차게 발을 구른다.
쿵!
쩌저적.
그 충격 때문인지 여덟 개의 돌덩이에서부터 갈라지는 지면. 게다가 시뻘건 불길이 그 틈에서 치솟았다.
진세라기보다는 술법 같은 팔문지옥도. 초열지옥의 문이 열렸다.
싸움을 거치면서 지면에 쌓였던 나무들이 많이 날아갔지만, 본래 공산 위를 빽빽하게 덮었던 삼림. 장작이 지천으로 널린 격이요, 지면에선 처음에 화포로 일으켰던 불길이 기다렸다는 듯 머리를 쳐들었으니.
삽시간에 불길이 크게 번진다.
‘아까 불길이 잦아들었던 건 지하에 심어두기 위함이었나? 그걸 삼백의 발 구름으로.’
팔대지옥의 구현은 본래 지심마화(地心魔火)로 시작된다.
그건 오대마도 중 심왕(心王)의 곤혹도(困惑道)에서 비롯되거늘.
뭔가 사부에게서 들었던 것과는 다르게 어설프다. 하지만,
펑, 퍼펑, 펑.
당장 닥쳐드는 불길. 일행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바닥에 장력을 쏟아내야 했다. 해원기도 생각을 멈추고 대우신장을 연달아 세 번이나 밀어냈다.
그러면서 얼핏 오른손에 쥔 고검을 살피는 시선.
평범한 이제검으로 돌아왔으나,
조금 전 뇌천대장, 벽력일순의 놀라운 위력을 보였던 검상은 해원기조차 처음 보는 것이었다.
본래 펼치려 했던 것은 다른 검상.
자재, 적멸, 추상, 본연의 네 가지 검상을 신령검 하나로 바꾸어 용권풍을 일으키려 했었다.
전후좌우에 흩어진 상대를 한꺼번에 처리하려면 신령검역의 폭풍만뢰. 허나 폭풍만뢰는 계역 안의 적아를 구분하지 않는다.
그래서 신령검역을 한껏 일신에 응축했더니 신령검 대신에 불쑥 천살검(天殺劍)이 나와버렸다.
사부가 심어준 십대검상(十大劍相) 중에서 해원기 자신이 제일 꺼리는 검상.
그런데 오랜만에 현현해서인지 기억과는 조금 달라서,
소름이 끼치는 살기 대신에 모골이 송연한 기백을 갖추었고.
게다가 폭풍만뢰를 귀납해 원하는 목표만 처단하려는 변화. 그건 놀랍게도 해원기가 배우고도 시전할 수 없었던 검이었다.
‘귀왕천형(鬼王天刑)의 검.’
우레를 동반한 여덟 줄기 번갯불은 분명히 귀황천형의 첫 번째인 자묵형(刺墨刑).
사부가 귀왕검을 제(除)한 후로는 구현이 불가능했거늘.
그저 참고로 배웠던 검이건만.
이 또한 운혜덕택의 힘이었다.
해원기가 단호한 표정으로 검을 세웠다.
불길을 피하지 않고 서서히 다가오는 육신사, 여덟 개의 돌덩이, 외곽을 둘러싼 삼백 명, 그리고 수보와 원좌를 앞세운 제독태감.
귀왕천형을 펼칠 수 있다면 이들 전부를 상대할 수 있다. 팔대지옥이 한꺼번에 열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