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334화 (334/410)

제84장 황궁비사(皇宮秘事) (2)

해원기에게서 무서운 기세가 치솟자마자,

오소민은 일행을 끌고 십여 장 뒤로 물러났고, 이어서 은근히 빠져나갈 길을 찾기 시작했다.

함몰해버린 공산, 사방 오십 장을 태우고 저절로 꺼져버린 불길. 제독태감의 등장 외에 다른 기척이 없다고 해도 방심할 수는 없었다.

상덕공주를 중심으로 경계를 단단히 하면서 정록에게 주변을 더듬어보게 했는데.

연기의 벽이 무슨 독 바른 검은 휘장처럼 둘러쳐서 접근조차 어려웠다.

제독태감이 떠든 연장암막이란 이름 그대로.

어쨌든 정록의 행동을 숨기려고 오소민과 하일웅이 앞으로, 일월표객은 상덕공주의 좌우에, 맨 뒤에 정록을 두어 여섯 명이 나팔 같은 모양을 이루었는데,

불시에 해원기를 뛰어넘으려 한 육신사도 이를 염두에 둔 듯, 자연스럽게 여덟팔자로 벌어졌다.

해원기의 미간이 깊게 파였다.

장대한 체구를 지닌 원좌의 쌍장은 언제 눈앞까지 이르렀고, 또 그저 계책이나 꾸릴 줄 알았던 수보가 이런 거친 장력을 펼칠 줄이야.

당장 스스로 구하기에도 급급한 판.

그러나 그렇다고 일행을 노리는 육신사를 그냥 놔둘 수야.

양손을 빠르게 상하로 나누었다.

왼손으론 육신사를, 오른손으로 원좌와 수보를. 고검이 가운데에서 풍차처럼 돌며 찬란한 빛을 뿜었다.

본래 준비했던 군림검.

신쾌하고 예리하기 그지없는 금광섬삭으로 육신사를 단번에 베어버릴 셈이었으나, 거대무비한 힘이 산맥처럼 떨쳐 일어났다.

원좌와 수보의 쌍장에 정면으로 부딪치고, 육신사를 찍어 누르는 압력. 군림검에서 가장 무거운 대괴무극이다.

쿠쿵!

지면이 들썩일 굉음.

하지만, 크게 한 걸음 물러난 해원기가 이를 악물었다.

한꺼번에 쳐내려고 했던 장력인데 연속으로 전해지는 충격에 중심이 무너졌다. 먼저 눈앞에 이르렀던 원좌의 쌍장이 깨지는 듯하다가 수보의 거친 힘줄기를 이끌어 파고들었기에.

그 바람에 육신사는 둘밖에 잡아두지 못했다.

등사와 기린을 제외한 넷이 우리에서 풀려난 짐승처럼 오소민과 하일웅에게 달려든다.

그렇다고 뒤를 돌아볼 새도 없다.

“이얍!”

해원기의 바로 앞에 떨어진 등사와 기린이 함께 기합을 지르며 깃발과 단장을 내질렀고,

기세가 오른 원좌와 수보가 득달같이 좌우로 다가들었다.

파라라라락.

뱀처럼 꿈틀거리는 깃발만이 기이한 음향을 토할 뿐, 기린의 단장이나 원좌와 수보의 손에선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는다.

공중에서 풍차처럼 회전하는 군림검을 등사와 기린이 묶고, 그 틈에 원좌와 수보가 손을 쓸 셈인가.

해원기가 뒤로 물린 발에 힘을 주며 몸을 비틀었다.

내려갔던 오른손이 불끈 일어나고, 올라갔던 왼손이 뚝 떨어지자.

촤앙!

풍차의 축이 쑥 빠져나갔나. 회전하던 군림검의 빛이 그대로 폭발해 해원기의 전신을 뒤덮는다.

졸지에 목표를 잃은 등사의 깃발과 기린의 단장이 기세에 휘말려 휘어지고,

양쪽으로 파고들던 원좌와 수보가 빛무리와 맞부닥쳤다.

따다다당.

귀청을 울리는 쇳소리와 함께 넷이 훌쩍 거리를 벌린다.

끝이 너덜너덜해진 깃발과 부르르 떨리는 단장. 여전히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등사와 기린이지만, 뒤집어쓴 남색과 녹색 가죽이 헐떡거리는 것처럼 부풀고.

좌우에서 자세를 가다듬는 원좌와 수보의 얼굴은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어느새 꺼내 들었을까.

원좌의 양손에는 기괴한 모양의 수투(手套)가, 수보의 왼손에는 짧은 서축(書軸)이 들렸는데.

가는 진동이 멈추지 않는다.

승기를 잡았다고 여겼건만, 도리어 밀려났잖은가.

넷의 시선이 그제야 해원기의 손에 내려앉는 고검에 모여들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건지.

빠르면 강하고, 느리면 부드럽다.

그게 상식이지만, 원좌와 수보의 쌍장은 이 상식을 거꾸로 뒤집은 것.

원좌의 빠른 손은 음유한 힘을, 수보의 한 박자 늦은 손은 거친 장력을 쏟아냈고. 어검대법의 대괴무극을 예상이라도 한 듯이 파고들었다.

일종의 투경(透勁). 그렇게 해원기를 밀어내자마자 등사와 기린이 검을 노린다.

등사의 깃발은 뱀, 기린의 단장은 사슴의 뿔.

둘 다 영사태화를 바탕으로 삼아 뱀으로 휘감고 뿔로 얽으려는 강상이었다. 절세검왕에게서 검을 빼앗는 틈에 원좌와 수보가 허점을 찌르는 절묘한 배합.

더구나 이제껏 보이지 않았던 수투와 서축을 끄집어냈음에야.

쇳조각을 복잡하게 얽은 기묘한 수투가 이번에는 강하게, 좌르르 펼쳐지는 서축이 부드럽게 변하는 걸 상상도 못 하리라.

하나,

검을 노린 강상이 튕겼고, 수투와 서축은 변하기도 전에 부딪혀버렸다.

검이 먼저 의도를 알아차린 것처럼.

해원기조차 오른손에 거꾸로 잡히는 검을 새삼스럽게 볼 정도.

확실히 넷의 공격은 예상을 뛰어넘어서 순간적으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군림검을 등목구룡으로 바꾸어 등사와 기린을 막고, 원좌와 수보는 양손의 검왕수로 쳐낼 요량이었다. 검왕법신이 버텨줄 테니까.

그런데 풍차처럼 돌던 군림검이 스스로 검상을 바꾸었다.

양손이 검왕오형의 네 번째 역상정위를 취하자마자.

등목구룡이 수원광한으로 뒤집혀 전신을 수호하고,

수투와 서축의 강유상반(剛柔相反)을 미리 봉쇄하는 검.

자재검이었다.

해원기가 겨우 뒤쪽을 살필 틈을 얻었다.

현무, 주작, 청룡, 백호. 등사와 기린을 제외한 육신사의 넷에게 오소민, 하일웅, 이소천, 정록이 맞서고 있었다.

하나하나가 현신장에 버금가는 자들.

현무의 구절편이 미친 듯이 돌아가며 자욱한 기운이 몰려드는 가운데, 오소민이 왼손으로 하화를 쥐고서 연달아 십여 장을 내갈겼다.

파파파파.

꽃바구니에 가득 담은 꽃잎이 북과 피리 소리를 타고 흩날리듯.

구절편의 자욱한 기운을 거꾸로 옭아매려 한다.

항룡진기를 한껏 끌어올린 채 팔선의 무공을 있는 대로 펼치는 중.

퍼펑.

연거푸 폭음이 터지는데도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고, 그건 하일웅도 마찬가지였다.

주작의 파초선은 사람의 상반신을 가릴 만큼 큰 부채. 그 부채가 광풍을 일으켜 눈도 뜨기 어렵건만, 거창한 감산도가 마치 나비처럼 춤추며 광풍 속을 오간다.

쉬잇, 쉬익.

큰 부채는 무거운 힘을, 거창한 감산도는 가벼운 움직임을. 보기 드문 싸움이면서 단 한 차례도 서로 마주치지 않으니.

주위로 풍진만 거칠게 솟구쳤다.

반면에 청룡과 이소천은 그야말로 맹렬한 격돌.

청허신공을 담은 이소천의 두 손이 거침없이 청룡의 오형조와 마주쳐서,

타타타타타.

서로 치고받는 소음이 콩 볶듯 이어지고.

그 옆에선 흉험하게 찔러 드는 백호의 은추를 정록의 경교한 신법으로 자못 여유 있게 피해낸다.

원좌가 회복시키긴 했어도 판분천지에 당한 백호는 아직 제 기량을 완전히 발휘하지 못하는 듯.

그러나 해원기로선 이 이상 살필 수가 없었다.

휘리릭.

등사의 깃발이 깃대 위쪽으로 휘말려 들고, 기린의 단장이 빙글빙글 돌면서 각각 걸친 가죽과 같은 색을 뿜기 시작했다.

번들거리는 남린(藍燐)은 도깨비불처럼 퍼지고, 갈래를 치는 녹광(綠光)은 가시처럼 뻗는다.

그리고 철컥 소리를 내는 원좌의 수투와 또르르 말리는 수보의 서축.

이 또한 흔히 볼 수 없는 병기들이요, 뭉클 치솟는 기운은 등사와 기린의 강기에 못잖다.

몸을 비튼 자세의 해원기.

등 쪽에 위치한 원좌가 짧은 기합을 내질렀다.

“찻!”

어깨와 허리를 노리는 두 손. 또다시 기척도 없이 이르렀다.

얼굴 쪽에 자리한 수보가 두 손을 떨쳐 말렸던 서축을 내던지듯 펼치는 모습에 정신이 팔렸다간 그대로 얻어맞을 엄청난 속도.

해원기가 오른손에 거꾸로 쥔 검을 가볍게 퉁겼다.

보지도 않고 등 뒤를 무찌르는 검극, 그 기세를 따라 서축을 때리는 왼손의 검왕수.

검기조차 일어나지 않지만, 왼손 손끝에서 검극까지 하나로 이어진 선이 공간을 정적으로 꿰뚫는다.

적멸검의 무량대적.

수투와 서축이 보이는 것보다 훨씬 지독한 힘을 숨겼고, 강유상반으로 서로 호응한다는 특징도 눈치챘다.

어검대법조차 파고드는 투경에는 내부를 깨뜨리는 선검(禪劍)이 어울린다.

따앙!

종을 친 것 같은 소리. 그 울림이 퍼지기도 전에 해원기가 벼락같이 몸을 뒤집었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남린, 아래로 파고드는 녹광.

강기를 이룬 두 가지 병기를 두 발이 번갈아 찬다.

서슬 퍼런 추상검이 도깨비불을, 쇳덩어리 같은 본연검이 가시덤불을.

퍼펑!

“으윽.”

“큭.”

신음을 토한 건 수보와 원좌. 주르르 밀려나는 등사와 기린은 입가가 시뻘겋게 물드는 데도 역시 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러든 말든.

해원기가 빙글 돌면서 팔다리를 춤추듯 흔들었다.

손이 뻗고, 손목이 꺾이고, 어깨를 당기면서 팔꿈치를 튕긴다. 으쓱대는 허리를 따라 겅중거리는 무릎, 휘어진 발목에서 훌쩍 뛰어오르는 발끝까지.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한바탕 춤사위.

그렇지만 수보, 원좌, 등사, 기린이 자신을 돌볼 새 없이 각자의 병기를 휘둘러야만 했다.

검.

거의 동시에 네 명 모두에게 검이 날아들었으니.

게다가.

파팍, 채챙.

수보의 서축을 베려는 새파란 날과 원좌의 수투를 쪼개려는 힘.

촤아아, 파앙.

등사의 깃발을 꿰뚫는 검극과 기린의 단장을 두들기는 타격.

검은 검이로되 가위 같고, 도끼 같고, 창 같고, 몽둥이 같다.

한 자루 검이 어떻게 네 자루로 불어나고, 또 전부 다른 병기처럼 쓰이나.

해원기가 검왕법신으로 구사하는 신창삼절예 중의 다비농창. 아직 팔비나타(八臂那吒)로 팔극쇄(八極碎)를 이루는 경지에 이르진 못했으나, 네 가지 검상만으로도 네 명을 몰아넣기엔 충분했다.

순식간에 넷을 한 덩어리로 만든 해원기가 힘차게 검을 내뻗었다.

“질(叱)!”

꾸짖는 기합이 더해진 천손검법의 인점기중(人占其中). 네 명을 꼬치 꿰듯 뚫을 순간,

슈우욱.

쾅!

불현듯 해원기 앞에 일어선 거대한 벽.

인점기중이 거꾸로 튕기는 엄청난 반탄력에 해원기의 피풍이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으음.”

지독한 충격. 급히 검을 거두던 해원기가 눈을 부릅떴다.

몇 걸음 앞에 불쑥 솟구친 돌덩이. 넓이가 일 장, 높이가 이 척 정도의 다듬지 않은 돌덩이인데,

그 돌덩이 위로 문짝처럼 세워졌던 형상이 서서히 사그라든다.

어째서 돌덩이가 갑자기 지면에서 솟구쳤는지, 이 평범해 보이는 돌덩이가 무슨 능력을 발휘했는지 모르지만.

서서히 사그라드는 형상. 그 문짝이 무엇인지 모를 수 없다.

“지옥도(地獄圖)!”

장안에서 첨유진이 해원기의 검을 막으려고 최후에 끄집어냈던 수법. 작은 철패에 새긴 마공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었으나.

지금 인점기중을 막은 건 진짜 지옥도가 분명하다.

더욱이,

퍼퍽, 퍼퍼퍽, 퍽.

꼬리를 물고 사방에서 튀어나오는 돌덩이들. 전부 여덟 개가 해원기와 일행들을 둥글게 포위한 형태이고,

제독태감의 느물대는 음성이 이어진다.

“지옥도가 아니라 지옥도(地獄道)지. 밑천을 죄다 쏟아 부어야 하다니 과연. 쩝.”

해원기가 상대하던 넷을 무시하고 곧장 몸을 뒤로 날렸다.

도(圖)가 아니라 도(道)라는 제독태감의 말뜻을 헤아리기보다, 여덟 개의 돌덩이가 출현하는 순간에 와락 전해지는 기척들.

사방을 차단한 연장암막 속에서 무수한 인영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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