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장 황궁비사(皇宮秘事) (1)
여섯이 함께 진법을 형성했다고 볼 순 없었다.
구절편을 든 흑색은 현무, 오형조를 쥔 청색은 청룡. 홍색에 파초선은 주작이요, 백색에 은추는 백호일 터.
서로 다른 색깔의 보기 민망한 가죽을 뒤집어쓴 채 둘씩 짝을 지어 강기를 합쳤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간단한 일이 아니다.
특별한 비결이 있다고 해도 강기를 둘이 합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공을 들여야만 한다. 같은 배에서 난 형제가 똑같은 병기를 익혔어도 어려운데, 각기 다른 기문병기를 익혔음에야.
더구나 합쳐진 강기가 용조현형과 공작개병의 강상으로 나아가기까지.
그리고 한 호흡 늦게 가세한 나머지 둘.
‘남색 가죽에 깃발을 든 자가 등사고, 녹색 가죽에 단장을 쥔 자가 기린. 그 둘이 가세하면서 강상이 또 한 단계 진화했다. 진법이 아니면서, 수가 늘고 힘을 합친다고 경지가 높아진다?’
말이 되지 않는다.
그게 가능하다면 뭐하러 수십 년씩 고된 수련을 하겠나. 한 갑자 내공을 지닌 절정 고수라도 십 년 정도 단련한 무인 일곱만 있으면 이겨낼 텐데.
그런데 육신사라는 자들은 바로 이 말도 되지 않을 일을 눈앞에서 구현했다.
분명히 이유가 있다.
지금도 한 덩어리가 되어 비틀거리던 자들이 금세 중심을 잡고 자세를 취하니.
가죽으로 가려졌어도 젖었던 입가가 어느새 차분해졌다.
적잖은 내상을 입었다고 생각했는데 회복이 지나치게 빠르다.
여섯 개의 기문병기에서 다시금 솟구치는 예기도 처음과 그다지 차이가 없고,
그 기세에 흙먼지가 순식간에 날아갔다.
그리고 예의 박수 소리.
짝짝.
“역시 듣던 대로구나. 현신장들이 하나같이 힘을 쓰지 못했다고 하더니만. 그래도 육합신피(六合神皮)를 걸치고, 표리(表裏)의 차이가 있는데. 에잉.”
수보와 원좌를 앞에 세우고 머리만 빼꼼 내민 제독태감이 신기한 구경이라도 하듯.
손뼉을 치다가 불만스럽게 입을 삐죽거린다.
육신사가 걸친 색색의 가죽이 육합신피. 들어본 적도 없는 이름이요, 더구나 표리의 차이란 뭘 의미하는지.
그런데 지면에 빠진 발을 빼내던 해원기의 눈썹이 꿈틀했다.
육합. 전후좌우상하를 이르는 말이지만, 넓게는 세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육신은 본래 세상을 수호하는 신수(神獸).
안팎이라는 표리가 상반(相反)된다는 뜻이라면 육신의 반대는 세상을 파괴하는 육악(六惡)이다.
실마리가 잡히자,
우웅.
고검이 크게 울며 순간적으로 형태가 사라졌다.
검상은 투명하기 이를 데 없는 유리검이지만, 눈에 보이지도 않는 쾌검이 폭우처럼 육신사를 뒤덮는다.
오악검, 절세오검, 흑백연주오절검에 세상에 아는 이가 드문 희귀한 검법이 더해졌고. 심지어 탁소숙에게 배운 자룡창법과 온후패왕극의 절초까지 섞인 검왕오형의 검림소연이 육신사 주위의 공간을 삽시간에 점했다.
슈슈슈슛.
소리가 뒤늦게 날 정도의 엄청난 속도.
육신사도 멍하니 기다리지만은 않았다. 정말 아무런 내상도 입지 않았는지 각각의 병기가 단번에 강기를 두르고서 거침없이 마주쳐 나온다.
키리릭, 파라락.
기음을 토하는 건 거칠게 흔들리는 구절편과 파초선, 오형조와 은추는 쾌검에 못잖은 속도로 뻗고, 깃발과 단장은 무겁고 진득한 힘으로 밀어내려 하는데,
쏟아지는 폭우에만 정신이 팔려서인지 해원기의 검이 어느새 선명한 형태를 되찾고 은은한 빛을 품었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유리검에서 적멸검으로.
육신사의 기문병기가 검림소연과 부딪치려는 순간,
퍽.
폭우가 연기처럼 사라지고,
해원기가 벼락같이 휘돌며 적멸검을 횡으로 그었다.
번쩍.
뇌정결이 담긴 천손검법 제삼초 판분천지는 그야말로 가로로 치는 번갯불.
육신사를 한꺼번에 베고 나서야 굉음이 터진다.
쾅!
동시에 벤 듯해도 검로(劍路)는 시작과 끝이 있는 법.
맨 왼쪽의 현무부터 시작해서 오른쪽 마지막에 선 백호까지.
강기로 회전하는 구절편이 세 마디나 부서졌고, 오형조의 발톱이 문드러졌으며, 깃발과 파초선이 훌떡 뒤집히고, 단장은 뿔 한쪽이 날아갔다.
충격에 부들부들 떨면서 밀려나는 자들, 여전히 앓는 소리조차 내지 않는다.
그런데.
“끄엑.”
멀쩡한 은추를 회수한 백호만이 괴상한 비명을 토하면서 뒤로 붕 날아가고,
제독태감 앞을 지키던 원좌가 별안간 용수철처럼 튀어나왔다.
백호의 등을 단숨에 십여 차례나 두드리는 기이한 행동. 원좌의 소매가 돌풍에 휘말린 것처럼 미친 듯이 나부끼면서,
파파팍.
백호가 간신히 중심을 잡고 땅을 디디자마자 흙덩이가 마구 튄다.
원좌가 적시에 지탱해 충격을 풀어낸 모양이지만, 백호의 입을 가린 곳부터 목 부분까지 흰 가죽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그런데도 원좌는 마지막으로 사정없이 백호의 등에 일 장을 갈기니.
펑.
도로 앞으로 던져진 백호. 고꾸라질 것처럼 비틀거리다가 몸서리를 치며 고개를 들고,
육신사의 나머지도 전염이라도 된 듯이 똑같은 행동을 취한다.
“이건 뭐야?”
눈 깜빡할 새에 벌어진 일. 그 와중에 제독태감이 의아하게 중얼거리는 말에는 수보가 답을 내놓는다.
“여기서도 능히 검진(劍陣)을 이루는군요. 쾌검으로 육신사를 공간에 가두는 척하다가 검세를 단번에 하나로 묶어 갈라버렸습니다. 공체의 변화가 대단히 빠릅니다.”
검림소연과 판분천지의 변화를 알아는 보았어도,
검상의 변화를 그저 바탕인 신공이 바뀌었다고 여긴다.
하긴, 이 정도만 해도 대단한 안목.
지켜보던 해원기가 왼손의 검왕수를 풀었다. 엄지가 접히는 사대결(四大訣), 그에 따라 오른손도 검병을 둥글게 말아쥐는 구주결(九州訣)로.
수보가 대단한 안목을 과시했으나, 해원기 또한 육신사의 정체를 간파했다.
‘영사태화의 일기연환(一氣連環).’
각기 다른 기문병기로 강기를 이루었지만, 여섯이 공통으로 운용하는 바탕에 영사태화가 존재한다.
그것도 태화기공(蛻化奇功)에 중점을 두어 여섯이 하나로 이어지는 방식. 누가 공격을 받든 그 충격을 나누어 벗어버릴 수 있어서, 실로 겉으로 보이는 진법이 아니라 내공이 연결된 내공진(內功陣)이다.
다만, 내공진이라도 결국 진법의 이치를 따라야 한다.
사방신이 먼저 나서고 나머지 둘이 나중에 더해져 강상이 진화한 이유가 바로 이 이치.
해원기의 시선은 공 튀듯 왕래한 백호보다 등사와 기린을 향했다.
본래라면 현무와 청룡 다음에는 등사가, 주작과 백호 다음에는 기린이었을 터.
한 덩어리로 몰아넣은 후에 검림소연으로 옥죄었기 때문에 육신사의 위치가 엉켰고, 그게 진법의 이치를 흔들면서 마지막의 백호로선 판분천지의 힘을 전부 벗어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얼마 전에 영사태화를 강상으로 구현하던 자를 보지 않았던가.
암혼번으로 암혼사동을 이루던 암야무명.
중간에 충격을 전달하는 중추가 등사요, 마지막에 완전히 벗어나는 역할이 기린이다.
왜냐하면, 등사가 바로 수사고 기린이 봉희니까.
‘현무가 알유, 청룡이 구영, 주작이 대풍, 백호가 착치. 육악지력을 변형했다.’
각기 다른 기문병기로 이룬 강기를 더해서 강상을 이루었던 배경이다.
제독태감이 지껄인 ‘표리의 차이’가 무슨 의미인지 확인했고,
곧장 금광섬삭의 군림검으로 무찌를 요량인데.
“어떻게 된 거야? 벗어날 수가 없어.”
투덜거리는 정록의 목소리에 해원기가 놓으려던 검병을 도로 잡았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제독태감의 웃음.
“하하, 십 년이나 걸린 연장암막이라고 했잖으냐. 본래 목적과는 달라졌지만, 그리 쉽게 내뺄 수 있을까?”
수보의 설명이 아니라 정록의 투덜거림에 귀를 기울였나.
제독태감이 양손에 낀 장신구를 자랑하며 해원기를 향해 눈까지 찡긋거린다.
[하 대협과 일월표객을 먼저 피신시키려 했는데 보이지 않는 벽이 막아선 것처럼. 독기까지 담겨서 화호초도 길을 찾지 못해.]
오소민의 전음에 비로소 환경이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
사방 오십 장 범위에서 닥쳐들던 불길이 저절로 잦아들면서 시커멓게 치솟던 연기. 밤중이라 눈에 잘 띄지 않았지만, 보통 연기가 아니었다.
폭음과 함께 불길이 일었고, 지진이 난 것처럼 공산이 내려앉으면서 대삼림이 무슨 벌목장처럼 변했잖나.
그리고 제독태감이 화포 이십 문이니 연장암막이란 소릴 했었다.
십 년의 시간을 들여 설치한 것. 발동에 이십 문이나 되는 화포가 필요했던 것. 해원기를 겨냥한 함정일 리 없었다.
누굴 노렸을까.
개방의 순행장로? 녹림장관의 대탐자? 이십 년 전에 은퇴한 연조도객? 다 말이 안 된다.
또 몇 차례나 동창에 대항해 고관들을 호송했던 일월표객이 목표라고 해도 제독태감이 친히 나선 건 과하다.
남은 이는 상덕공주 한 사람.
그런데 분명히 ‘사슴’ 대신 ‘조랑말’이라고 했으니.
해원기의 복잡해진 머릿속이라도 본 것처럼 제독태감이 히죽거리며 말을 이었다.
“절세검왕이니 뭐니. 자신의 몸값을 지나치게 높이 여기지 말라고. 본좌가 기껏 칼잡이 나부랭이 때문에 나섰겠느냐? 공주 하나론 성에 차지 않지만, 뭐 다음 기회가 또 있겠지. 너희가 설사 승천입지(昇天入地)하는 재주를 지녔다고 해도 이번엔 어려워. 에, 당장 이곳에 쓰인 인력이, 얼마나 되지?”
검을 내지 못하고 멈춰버린 해원기를 조롱하다가,
머리를 좌우로 돌리며 묻는 말에 수보와 원좌가 굽실 조아린다.
“네. 밀각에서 중사(中士) 이상으로만 이백입니다.”
“비전의 장령(將領) 백 명을 배치했습니다.”
삼백 명.
해원기의 얼굴이 바위처럼 굳어졌다.
제독태감이 등장하기 전까지 아무런 기척을 느끼지 못했거늘. 눈앞의 아홉 외에 삼백이나 되는 인원이 있다.
신왕공의 잠심침령에도 감지되지 않았다는 건 연장암막이라는 수작에 야료가 있다는 뜻.
“이런, 이런. 탐보귀(貪寶鬼)에 맞춰주다가 손해를 좀 봤구나. 게다가 금의위를 부릴 수 없는 게. 흠, 공주에게 자세히 들어야 할 내용이 적지 않.”
아쉽게 고개를 젓던 제독태감의 말이 뚝 끊겼다.
“네 이놈! 황상을 시해(弑害)하려던 것이었느냐!”
쨍하게 울리는 상덕공주의 노한 외침.
해원기 일행이 전부 움찔했다.
어느 정도 예감은 했으나, 설마 이런 짓을 꾸몄을 줄이야.
육신사가 다시 자세를 가다듬어 기력을 되찾지만, 선뜻 손이 나가지 않았다.
당금 황제를 해치려는 함정이라.
세상의 권력에 무관심한 강호무림이라도 이건 지나치게 무거운 사안.
모두의 시선이 모여드는데, 제독태감은 자신의 말을 끊은 상덕공주에게 입을 삐죽거리며.
“황상을 우습게 보는 건 공주 쪽도 마찬가지 아니었습니까? 만약 불알 두 쪽이 매달렸다면 아마 누구보다 먼저 시해를 꿈꿨을 분이. 쯧쯧.”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혀를 찬다.
불알 두 쪽. 사내로 태어났으면 공주가 아니라 왕자였을 터. 대담하고도 어처구니없는 비난에 상덕공주의 목소리도 더 높아졌다.
“헛소리! 감히 어디서 더러운 주둥이를 놀리는 게냐? 태황태후 때부터 너희 내시들을 그리 경계하시더니만. 이런 쳐죽일 놈들!”
복스럽게 생긴 얼굴과는 달리 보통 성격이 아닌 듯, 일월표객 사이에서 당장이라도 뛰쳐나올 것처럼 몸부림친다.
분위기가 묘해졌다. 대화의 주체가 제독태감과 상덕공주로 바뀌어서 병기를 들고 싸우던 자들이 되레 어정쩡해질 판.
그러나 해원기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삼백이나 되는 인원을 찾으려고 신왕공을 한껏 끌어올린 동시안이 번쩍 빛나고,
고검이 유성처럼 날아올랐다.
혀를 차던 제독태감의 입술이 살짝 비틀린 순간, 동시에 몸을 날리는 육신사 아래로 원좌와 수보가 별안간 두 손을 내뻗으니.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원좌의 쌍장은 환상처럼 해원기의 눈앞에 이르렀고,
위이이잉.
반면에 선비 차림의 수보는 무지막지한 힘줄기를 광포하게 떨쳐냈다.
해원기를 피해 공중에서 방향을 트는 육신사의 목표는 뒤쪽. 일행을 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