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장 가모태감(假冒太監) (4)
사부는 강호에 두 번 출도했었다.
처음 출도해서 천하제일검으로 공인받았고, 두 번째 출도로 백 년이 넘게 이어졌던 난세를 매듭지어서,
천하제일검이란 위명도 부족했던지 백년제일검사라는 어마어마한 칭호가 더해졌다.
해원기가 사부와 같이 살게 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얘기였다.
특히 대사모나 교노인과 달리 이사모는 사부를 첫 출도 때부터 아는 사이여서, 사람들이 얼마나 사부를 경외했는지 자주 일화를 들려주곤 했었는데.
사부라면 이를 갈던 적들조차 함부로 사부의 이름을 부른 적은 드물었다나.
대개 고검협이라는 사부의 명호를 줄여 ‘고검’이라고 했단다.
그 명호의 유래도 지나치게 엉뚱해서 이사모가 처음 설명해주었을 때는 농담인 줄 알았었다.
검객이라면서 등에 멘 검은 당최 뽑을 생각도 하지 않으니.
협객의 검치고는 너무 외로운 처지. 그래서 고검이라고.
고검을 지닌 협객.
사부에겐 그걸로 충분했다. 천하제일이나 백년제일 같은 엄청난 수식에는 아무 관심도 없던 분이니까.
굳이 ‘팔자의 언약’을 내세워 과거를 스스로 지울 만큼 공명(功名)을 한낱 뜬구름으로 여겼던 분이니까.
그래도, 아니, 그렇기에.
사부의 이름 석 자는 그 무엇보다 귀했다.
적어도 해원기에게는.
치이이이이잉.
고검이 울부짖는다.
튀어나올 것처럼 한바탕 꿈틀하는 게 아니다.
전신을 떨며 조금씩, 조금씩 검집에서 삐져나오는 검신에는 무시무시한 예기가 엉겼고,
맹호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검명이 공간을 뒤흔든다.
제독태감의 풍성한 금의 자락이 선명하게 흔들리고, 밀각의 수보와 비전의 원좌가 본능적으로 손을 쳐들었다.
그뿐 아니라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던 오소민 들도 전부 어깨를 움츠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살아있는 것처럼 올라오는 검신,
그리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검명.
소름이 좍 끼친다.
해원기의 넓은 등에 비스듬히 걸린 한 자루 검이 완연히 노기를 드러내서,
아니,
해원기가 이렇게 노한 걸 이제껏 본 적이 없었다.
양쪽으로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두 손. 열 개의 손가락이 붙었다가 떨어지는 걸 깨닫지 못했으니,
고검이 저절로 뽑히며 울부짖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일월표객이 호송하던 비표가 황제의 누나인 상덕공주요, 이 공산에 불을 지르고 겁표하려던 자가 동창의 제독태감이란 것도 지금은 의미가 없었다.
전신이 불구덩이에 들어간 것 같고,
속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당장 눈앞에 있는 모든 걸 베어버리고 싶다.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고, 언제나 헝클어졌던 더벅머리가 한 올 한 올 일어서서 머리에 쓴 방립이 맥없이 벗겨졌다.
지나치게 힘이 들어갔던 손가락이 좌르륵 모이는데.
순간적으로 식겁했던 제독태감이 먼저 고함을 질렀다.
“육신사(六神使)!”
등 뒤에 병풍처럼 늘어섰던 복면인 여섯이 동시에 몸을 뽑아 해원기를 덮친다.
슈왁.
공간이 나중에야 진탕할 정도로 엄청난 속도.
해원기의 머리, 어깨, 배, 다리를 한꺼번에 노린다. 전신을 산산조각 낼 압력.
그러나 해원기의 두 손은 이미 검왕수로 화했고, 고검 또한 기다리지 않았다.
번쩍.
그야말로 전광일섬(電光一閃).
번개로 화한 검이 여섯 복면인을 단숨에 후려쳤다.
쩡!
귀청을 찌르는 지독한 쇳소리는 한 번이지만,
복면인 전부가 와르르 밀려났다. 머리를 노리던 자는 정수리가, 어깨를 노리던 자들은 어깨가, 배를 노리던 자는 가슴팍이, 다리를 노리던 둘은 허리춤이 전부 갈라져서.
그러나 피를 흘리거나 신음을 내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갈라진 검은 천 사이로 드러나는 기묘한 가죽. 흑, 청, 홍, 백, 남, 녹의 여섯 가지 색깔로 물들인 가죽이 고검의 일격을 버티게 했나.
밀려나자마자 부채꼴로 퍼져 해원기를 에워싸는 움직임은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은 듯.
해원기가 되레 어깨를 울리는 충격에 한 걸음 물러나야 했다.
절세오검의 섬전과 추풍을 발검제형에, 오악검법의 해운파랑과 기수검봉을 재단경위에 담아 뇌정결로 후려쳤을 것이다.
불끈 치솟은 분노에 휩싸여 사실 어떤 수법을 썼는지 자신도 모를 지경.
그래도 신왕공이 충분히 담긴 검왕수가 고검을 쥐고 휘둘렀거늘.
아무리 의식하지 않았다고 해도 검강을 품었을 텐데.
자르고 부수긴커녕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머리에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확 들면서 충혈되었던 눈이 빠르게 여섯 복면인을 훑었다.
‘이런 멍청이!’
스스로 꾸짖는 한 마디.
삶의 진체를 무도에서 구하는 자가 충동에 휩싸이다니.
천하에 다시없을 고수라도 생사의 경계를 가벼이 여길 수는 없다. 힘을 억지로 쓰면 공체가 허탈해지고, 상대와 나를 재는 지혜가 없으면 위험에 스스로 빠지게 되며, 마음이 흐려지면 어찌할 바를 모르는 법.
내가 분노를 부려야지, 분노가 나를 부려서야.
고검을 고쳐 쥐었다.
흑색 가죽의 복면인은 아홉 마디로 이루어진 구절편(九節鞭), 청색 가죽은 새파란 빛을 번뜩이는 오형조(五形抓), 홍색 가죽은 커다란 파초선(芭蕉扇), 백색 가죽은 팔뚝만 한 굵기의 은추(銀錐), 남색 가죽은 짧은 막대에 수건을 매단 모양의 기(旗), 그리고 녹색 가죽의 복면인은 뿔처럼 끝이 갈라진 단장(短杖)을 들었다.
검강을 버티는 가죽을 복면과 흑의 속에 받쳐 입은 여섯. 가죽마다 다른 색깔을 입힌 것처럼 손에 든 병기도 전부 다르고,
특히 강호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기문병기들이다.
냉정함을 되찾은 해원기의 눈에 신광이 맺히면서,
“육신사, 이번에는 육합신수(六合神獸)냐?”
색깔과 기문병기로 대강 어떤 자들인지 짐작했다.
육합신수. 사방상하(四方上下)를 수호하는 신령한 여섯 짐승. 현무, 청룡, 주작, 백호, 등사(騰蛇), 기린(麒麟)이다.
이전에 처음 조화부인과 마주쳤을 때, 그녀의 수하들이 오방신수(五方神獸)를 본떴던 기억.
해원기의 혼잣말을 들었는지,
짝.
그새 뒤로 훌쩍 물러난 제독태감이 수보와 원좌 뒤에서 손뼉을 친다.
“이번에는? 아항, 화숙인에게 내려준 다섯이 있었지. 그건 처음에 대충 만들어본 거야. 에, 근래에도 또, 그래, 사대수비라는 심부름꾼 애들도 만들었었구나.”
여전히 유치한 말투.
해원기의 노기에 구겨졌던 위신을 세우려는지 더 가벼워졌으나.
그 손뼉 소리에 육신사란 자들이 전신을 흔들고,
파파팡.
겉에 걸쳤던 복면과 흑의가 폭발하면서 가공할 기세가 솟구쳤다.
과연 해원기의 짐작대로.
육신사는 전부 몸에 딱 달라붙는 기묘한 가죽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뒤집어썼다. 색깔만 다르고 재질은 같은 듯, 신체의 굴곡이 고스란히 드러나 보기 민망하지만.
그보다 뿜어대는 기운이 예상을 훨씬 뛰어넘고, 각자가 손에 쥔 기문병기에는 찬란한 빛까지 어린다.
당장 숨이 턱 막히는 듯한 느낌.
‘하나하나가 한 갑자를 상회하는 내공. 게다가 기문병기로 응기성강에 이르렀다.’
기병(奇兵)에는 기공(奇功)이 바탕이 된다. 기문이라는 관형사가 붙으면 그만큼 다루기 어려운 병기요, 그에 맞는 독특한 공력을 익혀야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다.
채찍, 갈고리, 부채, 송곳, 깃발, 지팡이.
이런 병기로 강기를 형성하면서 웅후한 공력까지.
조화부인의 수하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고수들. 거의 현신장에 버금가는 기세를 보인다.
그러나 해원기도 벌써 평정을 되찾았다.
고검을 당기며 왼손으로 검신을 훑자,
후우우웅.
삼엄한 기세가 오히려 육신사를 향해 뻗기 시작했다.
공간을 검기핍인으로 채우는 신령검역.
사방에 쓰러진 나무들이 진저리를 치며 부서져 나간다.
선공은 사방신(四方神)의 몫인가.
키리릭.
구절편이 마디마다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토하며 날아들고, 구절편을 희롱하며 펄떡거리는 오형조.
츠츠츠.
파초선이 톱날처럼 공간을 잘게 써는 가운데 쪼개진 공간 사이사이로 번뜩이는 은추의 첨단.
첫 공격과는 달리 어디를 노리는지조차 분간할 수 없다.
더구나 병기에 어린 빛이 제멋대로 붙었다가 떨어져서 은근히 형상을 그려내기까지.
해원기가 힘차게 두 발을 굴러 하나로 모았다.
쿵.
투명한 순백색으로 화한 고검이 앞으로 뻗으며 원을 그린다.
응기성강을 이룬 기문병기들이 심지어 연강성상의 경지까지 드러내건만,
검기 한 가닥조차 흘리지 않는 고검.
하지만 검극이 그리는 원을 따라 공간이 통째로 뒤틀렸다.
고오오오오.
천손검법 제일초 홍몽무변. 그리고 검강지기를 검신 안에 오롯이 간직한 신왕검의 검상이다.
첫 격돌에서 전광일섬을 맞았던 탓일까.
사방신의 기문병기도 공간의 이변을 감지하자마자 즉각 변화를 일으켰다.
꿈틀대는 구절편에 들러붙은 오형조는 마치 용조현형(龍爪現形), 파초선의 톱날 위에 박혀 나래를 펴는 은추는 흡사 공작개병(孔雀開屛).
소위 용비봉무(龍飛鳳舞)의 형상을 짝으로 이루어 뒤틀리는 공간을 터뜨리려 한다.
콰앙!
아무것도 없는 공중에서 굉음이 울리고,
흔들리는 용비봉무의 강상 속으로 남색과 녹색이 스며들었다.
하늘로 치솟는 등사의 깃발을 따라 용조현형이 해원기의 머리 위로 태산이 무너지듯 떨어지고,
바닥을 달리는 기린의 단장을 타고 공작개병이 해원기의 하반신에 해일처럼 밀려든다.
서로 다른 기공으로 이룬 기병의 강기. 그 강기를 엮어 강상으로 나아가는 것만으로도 어려운데.
흔들리는 강상에 또다시 강기를 덧붙여 새로운 강상을 구현하다니.
게다가 공력이 갈수록 불어나 상상도 할 수 없는 압력으로 더해져서,
우지지직.
해원기를 중심으로 하는 지면이 죄다 으깨져 가루가 되어 흩날린다.
오직 해원기만이 고검을 뻗은 자세 그대로.
입술이 뭔가 말할 듯 달싹이고, 양손이 교차하면서 모았던 두 발이 살짝 엇갈렸다.
거대한 압력 속에 겨우 움직이는 듯한 간단한 동작.
하지만, 공격에 집중하는 육신사의 눈매가 전부 이지러졌다.
검.
해원기의 양손에 쥔 두 자루의 검.
언제 어디서 또 한 자루가 나타났는가.
순백의 검신과 상반된 새까만 검신이 마치 원래의 검에서 그림자만 뽑아낸 것 같다.
설마 눈을 속이는 환술일까?
신왕검과 사신검. 두 가지 검상이 또 원을 그린다.
기이이이잉.
천손검법 제이초 양의상전.
지금까지 양의상전이 두 가지 검상으로 시전된 적이 있었나.
용조현형이 뒤집혀 태산이 바다로 고꾸라지고, 공작개병이 뒤돌아 해일이 산을 때린다.
구절편이 파초선을, 은추가 오형조를. 등사의 깃발이 기린의 단장과 마주 부딪쳤다.
퍼퍼퍼펑!
지면이 연달아 폭발해 흙덩이가 분수처럼 솟구치고,
부채꼴로 벌렸던 육신사가 한 덩어리로 뭉쳐 비틀거린다.
다시 한 자루가 된 고검을 얼굴 앞에 곧게 세운 해원기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세 가지 기문병기가 강기를 더해 이룬 강상 두 개가 서로 상잔했다. 지면을 으깨던 엄청난 공력끼리 정면으로 부딪치게 했으니 적어도 절반은 큰 손해를 입어야 하건만.
비명도 신음도 없다.
육신사의 기문병기도 그대로. 비록 보기 민망하게 뒤집어쓴 가죽의 입가와 가랑이 사이가 축축해진 흔적이 내상을 입은 듯하지만.
해원기의 발조차 땅속으로 움푹 들어가 버린 이 충격을 견뎌냈다니.
육신사가 익힌 기공의 정체를 아직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