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331화 (331/410)

제83장 가모태감(假冒太監) (3)

처음에 해원기가 신화검형으로 뚫은 길, 이어서 일행천리표 이소천을 구하면서 노문기에게 맞섰던 곳. 그리고 용권풍으로 이동한 거리.

공산 위의 거목들을 미리 무너뜨린 부근에선 닥쳐들던 불길이 갑자기 약해졌고,

딱히 기척이 느껴지지 않기에 한 덩어리가 된 이들은 자연스럽게 불이 일어나지 않은 방향, 즉 북쪽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정록의 호기심보다는 당면한 상황이 우선.

표사 출신인 하일웅이 일월표객 앞에서 감산도로 주위를 쳐냈다.

“어째 이쪽으로 왔는가? 도착지가 어디기에?”

비표의 신분이나 행로를 묻는 건 사실 표국의 금기. 그러나 이렇게 마주친 배경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른바 겁표(劫鏢)를 만난 표행에 무림의 동도들이 구하러 온 셈이니까.

이소천이 전천도를 한번 보곤,

“경사 남쪽 평안교(平安橋)에서 출발했습니다. 본래 형대를 거쳐 안양 관아로 가는 건데, 중간에 서쪽으로 비틀어야 해서. 음, 조가보 북쪽이나 형대 관아가 도착지로 바뀌었죠.”

“평안교? 거긴 평민들이 쓰는. 한동안 연결이 끊겼던 곳이라며? 그런데 긴급 비표라.”

“네. 저도 처음엔 강호의 일인 줄. 당장 따라붙는 자들이 있어서 따질 겨를도 없었습니다. 일이 완전히 꼬인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쯧.”

하일웅이 왜 묻는지 이소천도 안다.

해원기가 불쑥 등장하고, 이어서 개방 순행장로에 녹림 대탐자. 게다가 이들이 하일웅과 함께 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표국의 금기보다 아는 사실을 빨리 전하는 게 급하다. 일부러 다 듣도록 목소리를 키웠다.

“관아? 안양 관아에서 형대 관아로?”

“네.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회하방(淮河幇)의 총령인(總領印)을 지녀서.”

“에? 그건 예전에 없어진. 어떻게?”

“태후궁(太后宮)의 어린 내시랍니다.”

출발지, 도착지, 중간에서 바뀐 경로, 비표를 접수한 배경에다 마침내 신분까지 밝히자.

모두의 시선이 동시에 왜소한 인물에게 모여들었다.

노문기가 역당의 수괴라고 했었는데.

그 수괴가 태후궁의 어린 내시라니.

왜소한 인물이 머리까지 뒤집어쓴 피풍 속에서 눈을 깜빡거린다.

손태후(孫太后).

당금 황제가 어렸을 때 섭정했던 할머니 효소황후(孝昭皇后)만큼은 아니어도 대단한 여장부라고 세간에 알려진 인물이다.

그 손태후를 모시는 어린 내시가 역당의 수괴라는 건 누구도 믿지 못할 일.

동글동글한 얼굴에 흰 피부, 늘어진 눈매에 오목조목한 이목구비가 한참 어려 보이는 용모.

이 어린 내시 하나를 노리고 칙명순안사가 직접 나섰잖나.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잠깐.”

앞장선 해원기가 왼팔을 펼치며 멈춰 섰고,

반사적으로 좌우를 살피는 일행. 오소민이 재빠르게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아 해원기 옆에 바짝 붙었다.

“불길이 잦아드네. 대신…….”

폭발과 함께 솟구쳤던 불길. 대삼림을 태우는 큰불이 될 줄 알았더니. 해원기에 의해 무너진 숲 때문만이 아니었다. 북쪽을 빼곤 삼면으로 다가들던 불길이 갑자기 약해지면서.

검은 연기가 자욱하게 일어난다.

영특한 오소민이 달라진 기미를 발견하고, 기민한 정록이 또 이상한 점을 짚어낸다.

“그러고 보니 풍세(風勢)가 없는데?”

불이란 바람을 타야 번지는 법.

공산 윗부분을 향해 삼면에서 불길이 몰리는 건 정상이 아니다. 불길이 잦아드는 지금도 시커먼 연기가 그냥 장막처럼 올라갈 뿐.

함몰된 오십 장 범위. 이젠 완만한 구릉 형태도 아니어서 공산이란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다.

무너진 숲, 나무들이 어지럽게 쓰러져 쌓인 얕은 분지랄까.

해원기 일행이 멈춰 서자,

불이 나지 않았던 유일한 방향, 북쪽이 묘하게 일렁거린다.

공산을 벗어나는 길목, 대삼림이 끝나는 경계라 나무도 얼마 없이 그저 어둡기만 했는데.

내렸던 휘장을 걷는 것처럼 어둠 속에서 몇 개의 인영이 서서히 드러났다.

“십 년이나 걸려 설치한 연장암막(煙障暗幕)을 이렇게 소모할 줄이야. 화포(火砲)를 이십 문(門)이나 쓴 건 또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그러고도 기대했던 사슴 대신에 조랑말 한 필이라. 쯧쯧.”

늙수그레한 음성.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차자마자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바로 이어진다.

“그래도 검왕이란 놈이 끼었으니 그리 아깝지 않습니다. 장래에 큰 장애가 될 만하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자칫하면 기껏 키운 순안사를 잃을 수도 있었기에.”

그 목소리에 해원기의 눈썹이 꿈틀했다.

밀각육학사의 수보다.

그런데 공손히 손을 모으고 조아린 모습은 바로 곁의 인물이 상전이라는 의미.

뒤에는 검은 옷에 검은 복면을 뒤집어쓴 여섯이 병풍처럼 늘어섰고,

좌측에는 밀각의 수보를, 우측에는 장대한 체구의 낯선 중년인을 거느리고서 나선 노인.

몸에 걸친 화려한 금포는 비단을 몇 배나 썼는지 풍성하기 이를 데 없고, 곱게 빗어 늘어뜨린 머리칼은 은빛으로 반짝이며, 얼굴은 분을 바른 것보다 더 하얗다.

잔주름이 가득하지만, 수염 한 올 없이 매끈한 면상. 부귀한 티가 줄줄 흐르는 용모에 작은 눈이 웃는 듯 휘어지더니.

“그래, 그럼 조랑말이 아니라 송아지라고 할까? 황태후(皇太后)한테 당한 꼴이 되어서는.”

어이없다는 말투에 당장 수보가 허리를 꺾는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말 한마디에 벌벌 떠는 모습. 그런데 그보다 엉뚱한 외침에 해원기 쪽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제, 제독태감?”

맨 앞에 해원기, 좌우에 오소민과 정록. 그 뒤로 왜소한 어린 내시를 양쪽에서 감싸듯 보호하는 일월표객과 뒤를 받친 하일웅.

별안간 머리를 쳐들면서 버럭 외친 이는 바로 어린 내시.

제독태감.

오직 동창을 다스리는 사례감의 태감에게만 쓰이는 칭호다.

저 부귀한 티를 줄줄 흘리는 노인이 동창의 우두머리일 줄이야. 어려도 내시, 태후궁을 받들던 내시가 잘못 볼 리 있나.

그런데 더욱 놀라운 일은 그다음.

제독태감이라 불린 은발의 노인이 머리를 살짝 조아리며,

“공주마마, 별래무양하셨는지요. 그나저나 이 무슨 고생입니까?”

부드럽게 건네는 말에 해원기조차 움찔하며 고개를 돌려야 했다.

머리를 쳐드는 바람에 뒤집어쓴 피풍이 눌러쓴 모자까지 벗겨 버려서,

틀어 올렸던 머리칼이 한꺼번에 풀어져 내린다.

어린 내시가 아니라 여자였구나. 아니, 그보다 공주마마라면.

누구보다 경악을 금치 못한 일월표객. 이소천과 전천도가 휘둥그레 뜬 눈으로 어쩔 줄 모른다.

“고, 공주마마? 태후궁에서 왔다고…….”

“어, 황상에겐 아직 소생이 없는데.”

당황하긴 마찬가지지만, 같은 남장 여인이라서일까. 오소민이 머리를 흔들다가 한숨처럼 한 마디를 중얼거렸다.

“설마 상덕공주(常德公主)란 건가.”

당금 황제는 갓 섭정에서 벗어나 아직 혼인하지 않았다.

궁중에서 공주라고 불리고 태후궁과 관련이 있는 이는 단 한 명. 바로 손태후의 소생으로 황제의 한 살 터울 누나뿐이다.

흥미롭게 바라보던 은발 노인, 제독태감이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개방의 순행장로 유룡개라더니. 행색도 거지라 보기 어렵고, 아는 것도 많구나. 그런데 그 눈매가 누굴 많이 닮았는데. 얼핏 기억이 나지 않는구먼.”

공주에게 인사를 올린 건 그냥 시늉이었나.

해원기 일행의 반응과 오소민이 중얼거린 한 마디가 재미있는 듯. 그렇지만, 이 말은 어린 내시로 분장한 여인의 신분을 인정하는 의미.

노련한 하일웅까지 충격을 감추기 어려웠다.

동창의 제독태감이 등장하고, 비표인 어린 내시는 상덕공주였다니.

대내의 최고 권력자와 궁중의 존귀한 신분이 함께 나타난 셈. 여기가 무슨 경사의 황궁도 아니고.

강호에서 뒹구는 무림인으로선 대체 어떻게 대해야 할지.

그러나,

“조랑말 한 필은 누구를 가리킨 비유지?”

다시 고개를 돌린 해원기는 덤덤하게 묻는다. 대내든 궁중이든 전혀 듣지 못한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이놈이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수보가 당장 인상을 쓰며 꾸짖는 걸 제독태감이 손을 저어 끊었다.

“됐다. 그가 어떤 출신인지 알잖느냐. 간단한 비유도 쉬 알아듣지 못하는 모양이지. 뭐, 수수께끼도 아니고 그냥 가르쳐 주자꾸나. 흔히 중원의 패권을 사슴에 견주는 고사(故事)가.”

거창한 소매에서 나온 손에는 보석 반지가 한가득.

느긋하게 유래를 일러주려 거드름을 피우는데,

“흠, 역당의 수괴를 잡는다더니, 거꾸로 역당에 가담한 건가. 이 사실을 알기나 하는지. 사람을 가지고 노는 재주는 대단하다만.”

해원기는 그저 필요한 말만 할 뿐이다.

한림에 뽑혀 칙명순안사가 되었다는 노문기. 제독태감과도 아는 사이로 보였으나, 결국은 이용당한 신세였구나.

한심하고 안타까운 심정.

그리고 사슴이 황제를 가리켰다면 조랑말은 상덕공주일 터.

말을 이어간다.

“표물을 겁탈하는 건 해선 안될 행동이지. 먹고살기 어려워 저지르는 거로 이해해 주기도 그렇고.”

여기에 함께한 이들은 전부 무림의 동도. 일월표객을 도우려고 나섰다. 상덕공주든 누구든 지금은 일월표객의 비표요, 제독태감이 이를 노리는 행위는 바로 겁표.

손가락마다 보석 반지를 낀 제독태감이 곤궁에 지쳐 어쩔 수 없이 산속에 모여든 도적일 리 없잖나.

조롱이 절묘하다.

오소민이 정록에게 눈짓하며 슬그머니 뒤로 물러섰다. 상덕공주를 중심으로 둥글게 둘러싸는 형태.

말재주 없는 해원기가 저렇게 절묘한 조롱을 시작했다는 건 싸울 맘을 먹었다는 증거.

과연 해원기가 서슴지 않고 나아가기 시작한다.

“이쯤에서 관두겠다고 하면 굳이 혼을 낼 생각은 없다. 물론 혼이 나기 전에는 알아먹지 못하는 게 문제지.”

그야말로 상대의 속을 긁는 도발.

입은 탁 소숙에게 배운 말투를 흉내 내지만, 걸음마다 일어나는 기세는 사부를 닮았다.

저벅저벅.

그런데.

말이 끝나기 전에 제독태감의 우측에 선 장대한 체구의 중년인이 힘껏 발을 굴렀고.

쿠웅.

해원기의 발이 덜컥 멈추었다.

지면을 타고 전해지는 대단한 충격. 함몰했던 땅바닥은 멀쩡하고, 뒤쪽의 일행도 놀란 티가 없는데 해원기의 두 발만 쇳덩이가 채워진 것 같다.

지유진과 유사해 보이지만, 단순한 격진(隔震)이 아닌 기특한 공력. 일종의 계역이다.

하지만, 멈췄던 해원기의 발이 곧장 지유진으로 바뀌면서,

두웅.

북소리 한 번에 중년인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웬만한 고수라도 내부에 충격을 받고, 함부로 움직였다간 발목이 어긋날 위력이건만, 곤박(困縛)의 경계가 한순간에 스러지다니.

“이런! 예상보다 입도 거칠고 성급하구먼. 그런데 수보(首輔)나 원좌(元佐)나 절세검왕을 너무 가벼이 보는 듯해. 책을 열심히 읽으라고 그리 일렀거늘. 쯧쯧쯧.”

제독태감은 웃는 낯 그대로.

연방 혀를 차더니 두 손을 가볍게 모아쥔다.

“아, 소개가 부족했구나. 이쪽은 알지? 밀각의 수보. 일이란 게 갈수록 많아져서 밀각만으로는 힘에 부칠 때도 있더구나. 그래서 비슷한 걸 또 하나 만들었단다. 여기는 비전(秘殿)의 원좌라고. 뭐, 그 이름이 그 이름이지. 머리 좋고 힘깨나 쓴다는 애들이지만, 아무래도 지나치게 곱게 키웠나 봐. 자부심이 강해지면서 과거의 기록을 우습게 보는 경향이 생겼거든.”

어린아이가 이것저것 장난감을 자랑하듯.

용모와 어울리지 않게 유치한 말투로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지.

“전통의 구주정문과 전설의 천외삼가가 함께 이룬 신주영웅회, 신대(神代)의 어둠에서 비롯된 천하 마종의 본맥인 만세신궐. 여기에 성길사한이 찾아낸 신화 속의 흔적까지. 백여 년에 걸친 그 혼란을 정리한 검 한 자루의 이야기를 영 믿으려 하지 않아서 말이야. 하긴, 우습잖아?”

뭐가 우스운가.

가만히 듣고 있던 해원기의 눈매가 확 올라붙었다.

“역사에 제대로 남지도 않은 오랑캐 따위가 그런 위업을 이루었다는 게. 아, 우습다기보다는 한심스러울까. 천하제일이니 백년제일이니. 어떻든 너, 절세검왕은 고검협 묵세휘의 후대니까.”

사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른다.

감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