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장 가모태감(假冒太監) (2)
그냥 불을 지른 게 아니란 걸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폭발.
경계선을 친 것처럼 둥글게 불길이 오르더니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폭음이 연속으로 터져.
퍼퍼퍼펑.
사십 장, 삼십 장.
와자작, 쿠쿵, 쿠쿠쿵.
빽빽한 거목들이 마구 흔들리면서 불길에 섞여 연기가 당장 자욱해졌다.
워낙 밀집한 대삼림이라 나무 하나 제대로 쓰러뜨리기 어려운 곳. 해원기가 신화검형으로 쪼개고 꿰뚫어 길을 낸 것과 달리 거목이 쓰러진다기보다 주저앉는 것 같았다.
공산의 윗부분이 전부.
해원기의 동시안이 급히 자신이 낸 길을 거쳐 백운동에서 빠져나온 구멍까지 살폈다.
노문기에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해도 전혀 감지하지 못했었다.
노문기가 연검을 쥐고, 검역과 검역이 상충하고 나서야 비로소 기이한 감각이 들었고,
오십여 장이 넘는 먼 곳에서 미약한 기척을 겨우 찾아냈다.
심도경으로 검역을 확장하지 않았으면 몰랐을 터.
공력을 집중해서 잠심침령에 최대한 주의하면 족히 백 장 범위를 살필 수 있는데. 아무리 노문기에 신경을 썼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다.
따지는 건 나중. 멈춰 선 일월표객을 발견한 해원기가 공중에서 곧장 떨어져 내렸다.
빠른 경공으로 떠나갔던 자들이 왜 저리 머뭇거리고 있나.
“이 국주!”
부르는 소리에 이소천이 급히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해 공자, 땅이!”
곁에 막 내려서던 해원기가 눈을 크게 뜨다가 황망히 이소천과 전천도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드드드드.
지진이 난 것처럼 요동치는 땅바닥. 공중에서 본 것과 달리 발을 딛자마자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
지면이 제대로 보이진 않지만, 그냥 흔들리는 게 아니라 가라앉고 있었다.
거목들이 주저앉는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정말로 주저앉는다. 사방이 함몰되어 중심도 잡기 어려운데.
파앗.
일체경신.
“어, 어?”
이소천과 전천도가 둥실 뜨는 것 같은 느낌에 어쩔 줄 모르고, 두 사람에게 안기다시피 한 인물도 고개를 쳐들지만,
전궁유향에 탁 소숙에게 배운 위타과질(韋陀過疾)까지 더한 해원기의 신형은 번갯불이 무색할 지경.
무려 십 장에 가깝게 뛰어오르면서 두 발이 자맥질하듯 공중을 찬다.
검왕법신은 손이 아니라도 검왕오형을 시전하니. 두 발에서 뻗는 검기가 검림소연을 거꾸로 펼치고.
콰콰콰.
바로 아래쪽의 거목 몇 그루가 한꺼번에 베어져 어지럽게 쌓이기 시작했다.
벌목장에서 마구 내던진 통나무를 쌓아 올린 것보다 더 위태로운 모양이라도 지금은 높은 곳이 필요하다.
“후읍.”
급히 숨을 들이마시곤,
“두 분, 중심을.”
어느새 쌓인 거목 더미 위로 떨어져 내리는 해원기의 목소리에 이소천과 전천도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타탁.
발을 딛는 세 사람의 눈에 엄청난 속도로 튀어 나가는 해원기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슈아아아아.
한 자루 검이 되어 거듭되는 폭음을 자르듯 날아가는.
그야말로 뭐가 뭔지 모를 정도의 격변. 나름 독특한 신공을 익힌 일행천리표와 월영객조차 간신히 몸을 추스르는 판에,
가운데의 왜소한 인물이 겁도 나지 않는지 커다란 눈을 깜빡거렸다.
“저 사람은 누구기에……?”
공산. 산 내부가 텅 비었다는 뜻이라고 했다.
노문기를 쫓느라 백운동 내부를 자세히 살필 겨를이 없었으나, 어쨌든 오랜 세월 침식으로 이루어진 종유동.
비록 종유석이 든든한 돌기둥 역할을 하겠지만, 이런 폭발이라면.
오소민 들이 잘 빠져나왔을지.
일단 일월표객과 비표의 안전을 확보하고서 곧장 신화검형으로 단숨에 날아갔는데.
퍼퍼퍽.
해원기가 빠져나왔던 구멍이 와르르 부서지며 세 사람이 낭패한 모습으로 튀어나온다.
돌가루와 흙먼지가 왈칵 솟구치는 가운데 정신없이 콜록대는 모습.
“에헤, 컥. 우리가 너구리냐?”
“백운동이 무너질 줄은. 에, 에취!”
정록과 하일웅이 머리를 흔들고, 오소민이 하화를 품에 넣다가 얼굴을 가렸던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해 형!”
그 와중에도 재빨리 주위를 확인한 오소민이다.
쿵.
얼마나 급했는지 땅바닥에 때려 박듯 내려서는 해원기. 그 바람에 지면이 또 흔들리지만.
“다들 괜찮습니까? 어떻게 된 일이죠?”
신화검형의 여력이 일진 선풍이 되어 솟구치는 흙먼지를 날려버리면서, 정록과 하일웅도 즉각 자세를 바꾸었다.
“대체 이게 무슨…….”
기껏 지하에서 나왔더니 사방이 온통 지진으로 흔들리고 불길과 연기가 치솟는 광경.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를 판. 그래도 감산도를 곧추세워 경계하는 하일웅은 노련한 선배답다.
“백운동 입구에 화탄을 던져 넣어 독한 연기가 밀려들었소이다. 적의 원군이 따라 붙었나 확인하다가.”
해원기가 떠나자마자 일어난 변고. 그 때문에 조금 머뭇거린 게 이렇게 돼버렸다는 뜻이다.
설명을 길게 할 여유 따윈 없다.
오소민이 빠르게 사방을 훑어보며,
“일월표객 두 분은? 노문기 말고 또 누가. 으음?”
대강의 상황이라도 파악하려던 목소리가 확 뒤집히면서 시선이 위로 올라간다.
캄캄한 종유동에서 나왔더니 여기저기 불길이 이는 밖. 그리곤 이렇게 선명하게 밤하늘을 메우는 무수한 빛이라니.
피이이이이.
그제야 귀를 간질이는 미세한 소리. 어디 멀리서 밤새가 우나 싶을 정도지만,
오소민뿐 아니라 모두의 얼굴이 굳어졌다.
막 고점(高點)을 지난 화살, 그것도 불화살이 내는 소리다.
어디서, 언제 쏘아 올렸는가. 상공을 뒤덮은 무수한 불빛이 폭우처럼 쏟아진다.
하일웅이 감산도를 쳐들고, 정록이 여 대부로 화신했을 때부터 지녔던 철필을 꺼내며, 오소민이 몸에 걸친 피풍을 넓게 펼치는 건 반사적인 행동.
그러나,
차앙!
손도 대지 않은 고검이 먼저 검집에서 날아올랐다.
“이 국주 쪽으로. 조심!”
해원기의 단호한 외침이 전해졌으나 세 사람은 그만 날아오르는 고검에 눈을 뺏기지 않을 수 없었다.
위이이이이잉.
팽이처럼 회전하는 고검이 순식간에 범위를 넓히며 비상하고, 그 궤적을 따라 회오리치는 바람. 그리고 바람을 쫓아 나선형으로 쌓이는 구름.
회전(回轉), 선풍(旋風), 적운(積雲).
해원기를 포함한 네 사람을 둘러싼 공간이 거대한 울타리로 화했다.
고오오오오오.
게다가 둥실, 가벼워지는 신형.
일체경신으로 이끄는 해원기를 따라 일행이 함께 움직이자, 이 거대한 울타리 또한 고스란히 이동하며 더욱 강해져서.
쏴아아아.
지면에 나뒹굴던 거목조차 갈가리 찢겨 흙덩이와 같이 휘말려 오르니,
타타타타타타타타.
폭우처럼 쏟아져 내리던 불화살이 수수깡처럼 튕겨 나간다.
거대한 울타리는 이미 회오리치는 거대한 구름.
감산도를 쳐든 자세 그대로 하일웅이 멍하니 중얼거리는 소리.
“어, 용권풍(龍捲風)? 말도 안 되는.”
정록이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이고, 오소민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젓고.
하일웅이 말한 대로. 말이 되지 않는다.
대막(大漠)에서나 발생한다는 거대한 모래폭풍, 그중에서 가장 무서운 게 모든 걸 집어삼키는 회오리바람이라던데.
한겨울 하북의 형대 북쪽에 용권풍이 일어날 리가 없잖은가.
한 자루 검이 만들어낸 조화(造化).
바람은 검풍이요, 구름은 검기란 걸 알지만,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
네 사람은 그야말로 어떤 외부의 힘도 미치지 않는, 안전하기 이를 데 없는 용소(龍巢)에 머문 셈이었다.
이 조화가 어떻게 가능한지.
해원기는 자연스럽게 그 답을 깨닫고 있었다.
운혜덕택.
사람이 사람을 지키려고 하는 마음이다. 심중덕이 발하면 당연히 상상지와 대지체가 하나로 이어지는 법. 풍뢰지결과 수정지력을 아우른 신왕공의 지극한 현현을 굳이 삼전태라고 규정할 필요나 있을지.
계역이 오직 싸울 때만 이루어진다는 건 하찮은 편견에 불과하다.
사마를 무찌르는 것보다 사람을 구하는 검이 훨씬 신령할지니.
신령검역이 용권풍을 이루지 못할 리 없다.
감탄을 금치 못할 광경이지만, 오소민은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그냥 불을 놓은 게 아니라, 백운동 입구를 무너뜨린 것과 같은 화탄. 군부에서나 쓸 법한 작약(炸藥) 같아. 여길 전부 무너뜨리려는 건가. 불화살도 기계로 쏘는 연노(連弩)로 보이고. 설마 순안사랍시고 이렇게까지 준비했을까?”
워낙 급박한 상황이라. 목소리를 가다듬지 못하고 빠르게 입을 놀리는 바람에 새가 지저귀는 것 같지만.
남장여자라는 걸 따질 때가 아니다.
해원기가 빠져나온 후, 아마도 현황보필이 수작을 부렸을 터. 백운동 입구에 화탄을 던져 무너뜨린 영향으로 오소민 들이 빠져나오는 데 시간이 걸렸고.
방원 오십 장에서부터 거듭된 폭발과 시차를 계산해 발사한 불화살.
방식과 규모가 도저히 강호무림이라고 여길 수가 없다.
아무리 독선에 눈이 멀어서 조정의 주구가 되었다 해도 나름 자부심이 넘치던 노문기가 이런 함정을 미리 마련했을지. 노문기를 싫어하는 오소민조차 믿기 어렵다는 말투.
드드드.
그러는 사이에도 계속 지면이 함몰되지만, 진동이 차츰 가라앉는 듯한 기미가 보인다.
해원기가 양손을 기이하게 교차하면서 일체경신을 풀고,
상공에서 회전하던 고검이 서서히 내려앉기 시작했다.
스스스스.
용권풍이 잦아드는 건 일월표객이 머무르는 곳에 가까워졌기 때문.
용권풍의 안팎으로 격리되었던 사람들이 비로소 서로를 알아보고 한 덩어리가 된다.
“하 표두 님!”
“이 표사, 전 표사!”
표국에서의 습관대로 반가운 옛 호칭이 오가지만,
머리 위로 내려오는 고검을 잡으려고 손을 드는 해원기의 표정은 바위처럼 딱딱했다.
구릉처럼 완만하게 솟았던 공산이 거꾸로 우묵하게 내려앉은 형태로 바뀌면서,
거목 숲이 주저앉고 용권풍에 휩쓸린 탓에 시야가 훨씬 넓어졌지만.
경계선처럼 오십 장 범위를 둘러쌌던 불길이 차츰 가까워진다.
화르르르.
용권풍으로 튕겨낸 불화살이 사방에 떨어지면서 기세가 금방 거세지는 듯.
해원기가 고검을 비껴들고 비스듬히 섰다.
“그새 사라졌군. 그런데 주위에 기척이 없어.”
낮은 목소리지만, 오소민에게 하는 말이다.
해원기가 시선을 보내는 곳을 힐끗 살핀 오소민이 얼굴을 찡그렸다.
일월표객과 만난 곳에서 십여 장 아래. 한바탕 싸운 흔적이 남은 장소에 노문기가 있었을 것이다.
자세한 사정을 듣지 않아도 해원기는 노문기와 싸우면서 일월표객을 자기들 쪽으로 피신시켰을 터.
이 정신없는 격변 속에 노문기가 내뺀 걸 알아차리긴 어려웠겠지만, 그쪽에만 불길이 없는 것도 수상하다.
더구나 이 넓은 범위에 화약을 터뜨리고 연노로 불화살을 폭우처럼 쏘았거늘 기척이 없다니.
“이걸로 끝일 리 없지. 또 무슨 수작을…….”
대답하던 오소민의 말이 문득 끊겼다.
“그런데 비표, 두 분이 호위하는 이분은 누굽니까?”
정록이 일월표객 가운데의 왜소한 인물에게 호기심을 보이는 질문 때문에.
그러고 보니 지금 벌어지는 사태의 중심이 바로 이 왜소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