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장 가모태감(假冒太監) (1)
솨아아아아.
대삼림의 거목들이 소스라쳐 나뭇가지를 떨고, 잦아들던 흙먼지가 놀란 듯 일어난다.
해원기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지는 기세.
일그러진 표정으로 해원기를 노려보던 노문기뿐 아니라 상황을 일러주던 이소천까지 강한 압력을 느꼈다.
한밤중, 빽빽한 숲속, 광풍에 날리는 옷자락.
이소천이야 밀려드는 기세를 빌어 뒤로 물러나지만,
노문기는 도리어 자세를 낮추며 소매를 떨쳤고,
“오냐!”
선뜻 의미를 알기 어려운 소리를 기합처럼 내지르며 두 손이 튀어나왔다.
퍼퍽, 퍼퍽.
서로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는 쌍장에서 무형의 장력이 주변 거목의 몸통들을 마른 흙처럼 부수며 뻗는다.
해원기의 위압을 단번에 꺾으려는 공격.
저절로 움직였던 고검을 의식하지 않고서 해원기가 왼손을 곧게 세워 내질렀다.
좌르륵 붙는 다섯 손가락은 검왕수의 오지미앙(五指未央).
펑!
무거운 폭음과 함께 회오리치는 거센 경력에 거목이 십여 그루나 꺾여나간다.
우지직.
해원기와 노문기 사이, 십여 장의 공간이 단숨에 훤해졌다.
팔꿈치 너머까지 말려 올라간 노문기의 소매. 반면에 피풍 끝자락이 찢겨서 나풀거리는 해원기가 눈을 가늘게 떴다.
“마묵뇌연(磨墨擂硯), 묵연장이 이렇게 쓰일 수도 있군.”
문방사보를 무공으로 쓰는 신유문의 기예. 그러나 지금의 쌍장은 이전에 악송령에게 펼쳤던 묵연장보다 훨씬 강한 수법이다.
어떻게 그런 변화가 일어났는지 간파했으나,
이 감탄은 노문기의 속을 완전히 뒤집어놓았다.
말려 올라간 소매를 내리지도 않고 노문기가 노성을 지르며 두 팔을 갈마들었다.
“감히, 네 이놈!”
위잉, 위잉.
꺾여나간 거목을 가루로 만들며 쏟아지는 장력. 웅후하면서도 예리해서 공간 전체가 으깨지는 듯하다.
해원기의 눈썹이 찡긋 올라갔다.
천지일사의 의손녀였던 이사모 덕에 신유문의 무공을 대강 훑은 적이 있어서,
연달아 쏟아지는 장력이 군자절영장(君子絶纓掌)이란 걸 바로 알아보았으나.
이 또한 배운 것과 다르다.
웅후함이 쇳덩이처럼, 예리함은 톱날처럼. 흉맹해졌다.
양손의 검왕수가 반사적으로 재단경위를 이루고,
비단을 짜는 듯한 저사직금의 오의가 면밀하게 펼쳐진다.
파파파파팟.
맨손의 군자절영장과 맨손의 검왕수가 맞부딪치거늘, 훤하게 드러난 공간에 무수한 불똥이 튀겼다.
이소천이 물러난 것은 해원기가 쏟아낸 기세 때문만이 아니었다.
[이 국주, 제 일행이 바로 이릅니다. 먼저.]
동시에 귀에 울린 전음.
대삼림을 일직선으로 뚫고 등장한 해원기가 하일웅과 같이 왔다고 했었다.
노문기의 정체가 명확하진 않지만, 이미 한번 손을 섞어본 이소천으로선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상황. 해원기의 전음은 이 자리를 피해 하일웅과 회합하라는 뜻이다.
“도제(濤弟)!”
낮게 부르는 소리에 전천도가 공중에서 뚝 떨어져 내린다.
노문기와 마주치자마자 거목 위로 몸을 숨겼던 은형(隱形)의 신법을 풀어서 바짝 부축했던 왜소한 인영도 여실히 드러났다.
솜저고리에 솜바지, 두꺼운 모자까지 눌러써서 용모가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자그마한 체구에 하얀 목덜미가 어린 소년인 듯.
“하 노사가 왔다면.”
눈치 빠른 전천도의 말에 이소천이 고개를 끄덕이곤 왜소한 인물에게 시선을 보냈다.
“괜찮습니다. 도와줄 이들이 왔으니까요.”
고객을 안심시키는 말. 딱히 반응을 바란 것도 아니어서 말과 함께 왜소한 인물의 어깨를 움켜쥐었고.
해원기가 뚫어놓은 흔적으로 몸을 날렸다.
평소 보표에선 은신에 뛰어난 월영객이 보호를 맡고, 일행천리표가 경계를 맡는 게 관례였지만.
지금은 속도가 우선이라 보호와 경계를 나눌 때가 아니다.
또한, 분수를 모르고 해원기를 돕는답시고 머뭇거릴 수도 없다.
왜소한 인물이 바로 지켜야 할 표물. 즉 비표니까.
찌익.
심의의 넓은 소맷자락이 잘려나가자 노문기가 이를 악물었다.
군자절영장의 새로운 연환수법인 산회파연(散會罷宴)은 바위도 갈아버릴 힘이 있건만, 장력이 거꾸로 갈기갈기 찢겨나간다.
절세검왕이라면서 상대도 자신과 똑같이 맨손.
장상공부(掌上工夫)라면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다는 자부심이 크게 상했다.
한 걸음 크게 내디디며 연환수로 갈마들던 두 손바닥이 붙었다가 떨어지고,
“주일(主一)!”
악물었던 입에서 터지는 기합.
좌아아아.
힘차게 떨치는 오른손에서 막강한 힘줄기가 무표정한 해원기의 얼굴을 두 쪽으로 쪼갤 듯 뻗는다.
저사직금으로 이룬 검기의 비단을 가르는 무서운 장력.
그러나 해원기가 마치 흉내라도 내듯이 검왕수를 서로 엇갈려 똑같이 오른손을 찔러넣었다.
재단경위로 풀어냈던 검기가 순식간에 하나로 모여든 발검제형.
노문기의 주일신장(主一神掌)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콰직.
장력과 검기가 마주쳤다기엔 어울리지 않는 괴음.
그리고 검기에 꿰뚫린 주일신장이 돌연 거대한 손 모양으로 바뀐다. 손가락 다섯 개를 살짝 구부리고 손바닥을 웅크려서 장법이라고 보기 어려운 수형(手形). 노문기의 전신을 가릴 만큼 크다.
휘리리링.
발검제형의 검기가 일순간 사라지고 공간이 마치 그 거대한 손아귀에 갇힌 듯한 느낌.
예상치 못했던 놀라운 변화.
검왕수의 기운이 사라지면서 수발여의의 오의는 아예 펼칠 수도 없게 되었고, 손아귀가 좁혀지는 대로 공간까지 움츠러든다.
깊은 바닷속에 빠지기라도 한 듯이.
압력과 와류에 몸이 굳어지다 못해 제멋대로 비틀려가는데.
해원기의 안색이 홱 변했다.
두 눈을 부릅뜨면서 찔러넣었던 오른손이 팔꿈치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고, 왼손이 그 사이로 가볍게 끼어든다.
마치 작은 창을 겨우 열어젖히듯.
아무런 검기도 보이지 않고, 미풍조차 일지 않지만,
퍼엉!
큰 북이 터지는 굉음 속에 노문기가 내디뎠던 발을 급히 뒤로 뺐고,
와드드드.
처음 격돌에 꺾여나갔던 거목들이 파도를 만난 것처럼 쓸려나갔다.
해원기가 미간에 깊은 주름을 잡았다. 뭔가 이해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난 것처럼.
노문기를 죽일 마음은 없다.
본래 살생을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아무리 사람이 변했다고 해도 신유문의 후예가 아닌가.
무림의 도의를 저버리고 조정의 주구가 되었어도 그건 노문기 자신의 선택. 아직 뚜렷하게 잘못이 드러나지 않았고, 문파를 막론하고 징치해야 할 악행을 저지르지도 않았다.
기세로 위압하고, 무공으로 제압하는 선에서 그칠 생각이었다.
우선 일월표객과 비표를 안전하게 피신시키려고.
그래서 마묵뇌연의 묵연장에 오지미앙으로, 산회파연의 군자절영장에도 재단경위로.
법식을 담지 않은 검왕수와 검왕오형의 하나로 막아내기만 했었는데.
똑같이 검기를 모아 쳐내려던 주일신장이 돌연 예상과 다르게 변하는 바람에 손에 힘이 들어갔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그 변화에 양손으로 검왕오형의 네 번째인 역상정위를 반사적으로 이루었고,
심지어 의도하지 않았던 자재검(自在劍)의 검상까지 튀어나왔다.
주일신장이야말로 신유문에서 가장 고절한 장법.
천지일사가 수십 년 세월을 들여 신유문의 모든 무공을 집대성해서 창안했다고 들었다. 익히지는 않았어도 그 이치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데.
거대한 수형으로 공간을 움켜쥐는 변화. 주일신장의 이치가 아니다.
노문기가 자신이 급히 뺀 발을 내려다보다가,
“곤도일장인(坤道一掌印)을 어떻게……?”
믿을 수 없다는 중얼거림을 해원기의 무거운 음성이 잘랐다.
“이건 사문위일신공(斯文爲一神功)이 아니다. 이걸 배웠다고?”
유가의 최고 신공. 사문위일신공을 익히고서야 천지일사는 주일신장을 성취할 수 있었다.
노문기가 처음 뻗은 주일신장은 분명히 사문위일신공이었으나,
발검제형을 일순간에 사라지게 한 변화는 절대로 사문위일신공이 아니었다. 곤도일장인이라는 장강(掌罡)을 이룬 바탕은,
“어디서, 누구에게 배웠느냐? 대해기공(大海奇功)을.”
땅 울림처럼 낮아진 목소리.
해원기의 두 눈에서 신광이 무섭게 피어올랐다.
해원기의 무공에 대한 열의는 싸우는 중에도 자주 상대의 기예를 살피려고 선수를 양보하곤 해서,
오죽하면 오소민이 ‘나쁜 버릇’이라고 놀리기까지 했겠나.
그러나 지금은 박대정심의 목표 따위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곤도일장인을 이룬 바탕은 대해기공.
대사모의 사문인 해중천(海中天)의 독문신공이다. 기본공(基本功)이긴 해도 그 요결을 해중천 외에 누가 알리오. 대사모와 대사모의 사부인 정풍선자(定風仙子), 그리고 해중천을 이으러 떠난 여동생 외에는 익힌 이가 없거늘.
신유문의 후예인 노문기가 어찌 대해기공을 안단 말인가.
“노문기!”
성큼 나서며 다그치는 소리에 노문기가 어깨를 움찔하며 머리를 드는데.
해원기는 남의 이름을 막 부른 적이 거의 없다. 전신에 은은하게 맺히는 무시무시한 기운, 해원기가 한 자루 검으로 화한 것만 같다.
무형의 검왕법신이 유형화할 정도로 엄청난 압박이지만, 노문기는 황망히 자신의 허리띠를 움켜잡으며 이를 갈았다.
“으득, 무슨 소릴 지껄이는 거냐? 맨손으로 검기를 일으킨다고 검왕? 어디서 해괴한 수법을 익혀 가지고는. 절세검왕이랍시고 사람을 속이는 주제에.”
욕이 담기지 않았다고 욕설이 아닐까.
거칠게 내뱉는 말투가 짐승이 짖어대는 것 같아서 의젓한 유생 차림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데.
치링.
눈 부신 빛이 번뜩이며 그 손에 한 자루 검이 쥐였다.
연검(軟劍).
허리띠 안에 숨길 정도로 부드럽고 종잇장처럼 얇은 검신이 파르르 떨리며 뿜어대는 금광(金光).
금빛이 아롱거리는 연검을 뽑고 나서야 해원기의 무서운 기세에서 벗어났는지.
노문기가 크게 숨을 들이마시면서 해원기를 노려본다.
“해원기!”
지지 않으려고 해원기를 부르는 노문기의 심의가 돌풍을 만난 것처럼 거세게 휘날리기 시작했다.
엄청난 내공이다.
스스스스.
검왕법신의 기세와 연검의 검광이 어울리자 주위로 뿌연 먼지가 밀려 나갔다.
꺾이고 쓸려나갔던 거목들이 대패질을 당한 것처럼 가루가 되어 간다.
해원기와 노문기가 떨친 검역(劍域)이 십여 장의 공간을 뒤덮으면서.
이 또한 의외.
노문기가 일으킨 내공은 한 갑자를 초월하고, 손에 쥔 연검은 범상한 물건이 아니며, 검이 뿜어대는 광채 역시 능히 검강에 이른 경지다.
검의 조예가 더 깊었던가.
해원기가 오른손을 천천히 위로 올렸다.
검왕법신에 검왕오형, 십대검상을 운용하면서 노문기의 조예를 헤아릴 수도 있지만,
‘나쁜 버릇’보다 의혹을 푸는 게 급선무. 고검을 뽑을 셈이다.
그런데,
해원기의 눈이 크게 흔들리고, 고검을 잡으려던 오른손이 대우신장으로 바뀌었다.
펑. 촤아악.
맞서던 검역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운 일.
대우신장으로 공간을 뒤집으면서 위에 걸친 피풍이 마구 찢겨나가는데도,
해원기가 돌볼 새도 없이 뒤로 몸을 날렸다.
신화검형에 의해 일직선으로 뚫린 길을 도로 거슬러가는데,
백운동에서 빠져나온 구멍에 이르기도 전에.
펑, 퍼펑, 퍼퍼펑.
사방에서 굉음이 터지며 불길이 확 일어난다. 백운동에서 빠져나온 구멍을 중심으로 방원 오십여 장. 구릉처럼 완만하게 솟은 공산의 윗부분을 둘러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