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328화 (328/410)

제82장 권경천하(權傾天下) (4)

계역(界域).

심도경(心道境)에 이른 고수가 자신이 지닌 공체(功體)의 힘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설정한 공간이다.

일반 무인이라 해도 무공을 부단히 연습해 능숙해지면 자신의 권각과 병기가 어디까지 힘을 미치는지 자연스럽게 깨닫는 법.

내공을 쌓고 깨달음을 얻으면서 그 범위가 차츰 늘어나고 범위 안에서는 더 정확하고 효율적인 공격과 수비가 이루어진다.

그러다가 마침내 심도(心道)의 경지에 진입하면 마치 개안(開眼)이라도 한 것처럼 남들과 달리 공간을 환하게 인지하고,

의식하지 않아도 어떻게 행해야 할지 알게 된다.

이를 진법이나 술법에 빗대어 일인성진(一人成陣), 자주결계(自做結界)라고도 하고,

병가(兵家)에서는 심병지권(心兵之圈)이라고도 하는데.

자유자재(自由自在)의 자리에 들었을 때야말로 공간을 뜻대로 다룰 수 있으니.

비로소 계역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고,

절세(絶世)라고 칭함에 부끄럽지 않으리.

고검에 남은 사조의 잔령 덕분에 해원기가 얻었던 것은 신령검역. 물론 사부로부터 전해 받은 자재검도의 기초가 있었기에 가능했으나.

아직 심도경의 온전한 자리에 들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비유하자면 마루에는 올랐어도 여전히 방문 앞에서 열까 말까 머뭇거리는 상태랄까.

해원기는 아득한 고죽의 역사 속에서 신왕공이 세 개의 빗장을 이루지 않는 유일한 경우다.

체육(體育)과 지육(智育)을 거쳐 덕육(德育)에 이루는 신왕공의 세 관문. 그 빗장을 전부 열고서 삼전태(三全泰)를 이루어야 신왕공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지만.

빗장이 없음에야 무엇으로 삼전태를 알 수 있겠나.

타고난 호생지덕(好生之德) 때문에 신왕공을 익히자마자 덕육부터 거꾸로 열렸으니.

그래서 사부도, 사조도, 고죽의 선조 누구도 가본 적이 없는 길을 스스로 찾아야만 했다.

다만,

그 보상인 것처럼 남다른 기연이 이어져서,

청강주에 담긴 비밀을 동강과 함께 풀면서 수정(水精)과 풍뢰(風雷)의 힘을 이었고.

그것으로 체육과 지육을 대신할 수 있었다.

그러면 충분하지 않나.

면면부절의 수정지력으로 대지체(大地體)를, 변환무궁의 풍뢰지력으로 상상지(上上智)를. 그리고 처음부터 심중덕(心中德)은 지니고 있었으니까.

대충 이 정도면 됐다고 여겼었다.

더구나 고력사의 지하무덤에서 감로보병에 담긴 마지막 한 방울까지 얻어 드디어 수정지력이 완전해지기까지 했잖은가.

신령검역을 뜻대로 펼칠 수 있음이 바로 삼전태를 이루었다는 방증이리라.

그런데.

뭔지 모르게 억지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천생의 덕성(德性)으로 살기가 약한 탓이겠지.

본래 무인이란 살기를 품어야 하거늘.

눈을 껌뻑이던 해원기의 머릿속에 얼마 전에 들었던 목소리가 다시 울리는 것 같았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한 덕이 없고, 사람이 사람을 지키는 것보다 더한 덕이 없으며, 사람이 사람 아닌 것을 내치는 것보다 더한 덕이 없느니라.」

뜻이 통하는 벗을 아끼고, 정을 주고받은 여인을 사랑하며, 오랜 인연을 고이 지켜온 절조를 우러른다.

정록에겐 우애를, 오소민에겐 사랑을, 하일웅에겐 존경을.

스스로 천손의 자리에서 내려와 운사가 되었던 예의 가르침이 또렷하게 새겨지면서,

해원기가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아련한 미소를 매달았다.

그렇구나.

신기역 보병요의 수정지력, 지밀경 풍뢰동의 풍뢰지결과 달리 형태를 가지지 않는 깨달음.

그것이야말로 천금가 천응령에 간직되었던 마지막 힘.

바로 운혜덕택(雲惠德澤)이었다.

‘계역은 그저 상대를 꺾기 위한 힘이 아니다. 무력(武力), 무(武)는 본디 싸움을 그치려는 힘이어야 한다.’

살생을 위한 폭력이라고, 그런 편견 속에 갇혀 있었다.

부신수영이든 전궁유향이든. 어떤 기예로 얼마나 공력을 쓰든 무슨 상관이랴.

주위에 있는 이들이 마치 자신과 하나가 된 것처럼 움직일 수 있는 일체경신.

진정 삼전태를 이루었다는 법열(法悅)의 미소였다.

물론 일체경신의 계역에 둘러싸인 이들은 당사자보다 더 놀라고 신기해할 수밖에.

해원기의 능력을 누구보다 잘 아는 오소민도, 어느 정도 짐작하는 정록도, 당연히 아득히 높은 경지일 거로 생각했던 하일웅도.

우선 몸이 구름에 뜬 것처럼 가벼워져 빽빽한 종유석 사이를 마음대로 돌고,

그다음엔 눈앞에 불이라도 밝힌 것처럼 시야가 환해졌으니.

정록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전부 종유석에 은밀하게 새겨진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점 하나는 직진, 점 두 개는 우회전, 점 세 개는 좌회전. 그리고 점이 찍혀진 위치가 바로 통로가 뚫린 높이.

이 종유동은 직선이 아니라 구절양장(九折羊腸)이 무색하게 구불거려서,

점 표시를 발견한다고 해도 제대로 통과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텐데.

일 각만에 갈지자 구비를 세 개나 지났다.

“너무 간단한데?”

정록의 말에 일행의 속도가 줄고, 모두가 커다란 종유 기둥 앞에 모였다.

하일웅이 겨우 해원기의 어깨에서 손을 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신기한 경험에 몸이 좀 결렸나.

“매복이나 함정은 없나 봅니다.”

노문기가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백운동에 뛰어든 셈이다. 해원기 덕분에 일행이 상당히 빠르게 움직였는데 아무런 기척도 찾을 수 없었다.

오소민은 해원기의 어깨를 짚었던 손을 내리다가 팔을 살짝 당겼다.

“우리보다 눈이 밝으니까 더 멀리 볼 수 있지?”

뭔가 이유가 있어서 시키는 일.

해원기가 동시안에 더 유의해 주변을 살피곤 그 이유를 금방 알아챘다.

“저 뒤로는 상당히 가파르게 올라가는데 거기서부터 점이 보이지 않는군.”

영민한 오소민은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도 점 표시의 개수와 빈도까지 비교했었다.

“꽉 막힌 동굴일 리 없지. 현황보필도 괜히 잠복했다가 나온 게 아닐 테고. 하 대협은 여기에 다른 출구가 있다는 얘길 들은 적이 없다고 했으니까. 최근에 새로 출구를 뚫고 이 통로를 표시했을 거야. 그래야만 할 이유가.”

오소민이 분석을 시작하자 하일웅이 머리를 갸웃거렸고.

“공산은 대삼림의 동쪽에 치우쳤지요. 이 안이 구불거리긴 해도 대삼림 밖으로 크게 우회하는 관도보다는 훨씬 빠르게 북쪽으로.”

말이 끝나기 전에 오소민이 혀를 찼다.

“쯧, 공산이었지. 이 종유동에만 신경 쓰느라 깜빡 잊었네요.”

속이 텅 비어 백운동이란 종유동이 되었다고 해도 외곽은 산이다.

정록이 바쁘게 종유석들을 훑다가 얼른 고개를 쳐들었다.

“야밤이라도 비표인데 관도를 이용했을 리 없지. 일월표객이.”

사람을 호위하는 일월표객이니 따로 거창하게 표행을 꾸릴 필요가 없다. 아무리 밤이라도 훤히 보이는 관도를 느긋하게 걷진 않았을 테고.

오소민이 여전히 미간을 찡그린 채 말을 이었다.

“그건 당연하고. 어째서 일월표객이 이쪽으로 오는지 좀 궁금해. 산동에 있어야 할 노문기가 여기로 온 것도, 규찰사니 보필이니 끌고서. 흐음.”

규찰사가 수하를 끌고 웅풍대주루에 쳐들어왔을 때부터 수상하게 여겼던 부분이다.

본래 육신지궁에서 얻은 단서로 탁청대인이란 자가 도주한 곳을 알아보려던 게, 형대로 오면서 일월표객의 일에 휘말리게 되었다.

물론 신유문의 후예인 노문기가 동창의 주구로 전락한 사실도 중요하지만,

뭔가 묘하게 일이 휘몰아치는 듯한 느낌.

현황보필이나 다른 원군이 보이지 않는 것도 어쩐지 허술하다.

지금까지 동창의 행사에는 언제나 적잖은 인원이 동원되었는데.

그러나 이 기묘한 느낌에 매달릴 여유는 없었다.

정록이 손을 들어 한쪽을 가리킨다.

“위로 뚫었군. 저기가 출구일 거야.”

지형과 흔적을 살피는데 뛰어난 정록이다. 일행이 멈춘 바로 앞, 해원기가 가파르게 올라간다고 한 그 지점이었고,

정록의 말을 듣자마자 해원기가 바로 몸을 날렸다.

팔을 쥐었던 오소민이 깜짝 놀랄 정도.

“먼저 가지.”

매복과 함정이 없고, 뒤에서 쫓아오는 기척도 없다면.

이제부터 직접 서둘러야 한다.

이렇게 거대한 종유동을 이루려면 공산은 거의 전부가 석회암으로 이루어졌을 터.

정록이 발견한 곳도 두께가 얇은 바위였고 우물처럼 위로 구멍을 뚫었다.

한 사람이 겨우 통과할 크기, 표면이 거칠고 주위가 어지러운 건 뚫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흔적.

해원기가 전신에 공력을 끌어올려 단숨에 솟구쳐 올랐고, 시야가 바뀌면서 밖이 어떻다는 걸 빠르게 확인했다.

속이 텅 빈 거목 그루터기를 씌워 구멍이 바로 보이지 않도록, 또 주위에는 길게 자른 통나무를 이리저리 쌓아서 가렸으나.

나무를 베어낸 공터가 대략 일 장 넓이.

그리고 바로 거친 기합과 타격음이 멀지 않은 곳에서 전해져서,

해원기가 그 방향으로 그대로 몸을 틀었다.

일체경신의 계역은 풀었어도, 구멍을 빠져나오면서 전신에 검왕법신을 시전했기에.

통나무 더미를 거침없이 쪼개고 날아간다.

파아악.

신체를 검으로 삼아 어검대법으로 움직이는 가공할 신법. 신화검형(身化劍形)에 통나무 더미가 산산이 부서졌고,

오소민이 구멍에서 빠져나왔을 때는 이미 오십 장이나 되는 삼림을 일직선으로 가르고 난 후였다.

석회암층인 공산 위라서 나무가 조금 적은 편이지만, 그래도 대삼림의 일부.

울창한 숲속에서 나뭇조각과 흙먼지가 뽀얗게 휘날리고,

퍼펑, 펑.

장력과 지풍이 부딪치는 곳마다 폭음이 일었다.

병기를 휘두르기엔 불편한 환경. 기민한 신법으로 움직이며 맨손으로 싸워야 한다.

생전 처음 보는 젊은 유생이 칙명순안사라고, 극히 조심해서 움직이던 비표를 정확히 알아내 막아선 것만 해도 놀라운 일인데.

혼자 맞서던 이소천은 이 칙명순안사의 놀라운 무공에 진땀이 날 지경이었다.

신법, 내공, 기예 모두 자신을 압도하는 실력. 강호를 오가며 얻은 경험과 울창한 숲이 아니었다면 벌써 낭패를 면하지 못했을 터.

그래도 비표를 지키기 위해 물러서게 한 아우를 부를 수는 없었다.

표객 아닌가. 표행을 지키려고 목숨을 거는 인생이다. 형제 중의 누구 하나가 죽더라도 맡은 일은 반드시 완수해야 하는 법.

이를 악물고 아우에게 먼저 피하라고 외칠 참이었는데.

콰콰콰콰.

숲 한쪽이 와르르 무너지며 지면이 울리는 통에 자기도 모르게 손이 멈추었다.

칙명순안사라는 상대도 마찬가지.

넓은 소매를 크게 떨치면서 물러나는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한 아름이 넘는 거목이 꺾여나간 뒤에 우뚝 일어서는 그림자.

“해, 해 공자?”

일행천리표 이소천이 믿기 어렵다는 듯 외치는 소리에 노문기의 굳은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과연 일월표객은 해원기와 아는 사이였다.

화청궁에서 헤어지고 두 계절이 지나간다.

강호의 삶이란 게 만나고 헤어짐이 무상하다지만, 그때 제대로 회포도 풀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한스러웠는데.

어떻게 여기서 만날 수 있는지.

이소천이 얼이 빠질 정도로 격동하지만, 해원기는 노문기에게 시선을 보낸 채 침착하게 대답했다.

“이 국주, 웅풍의 하 대협도 왔습니다. 비표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하일웅을 언급하면 어느 정도 상황에 대한 설명이 되겠지.

이소천이 잠시 멍했다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 슬쩍 한 걸음 옆으로 움직였다.

“예. 골치 아픈 표행이란 걸 금방 알아챘지요. 지금 아우와 함께 은신하고 있습니다.”

월형객 전천도가 비표를 보호하고 있으며, 아직은 사고가 나지 않았다는 뜻.

대화 사이에 노문기의 불쾌한 음성이 끼어든다.

“현황보필을 빨리도 통과했군. 기어이 역적이 되려는 건가? 일월표객이 호위하는 자가 누군지나 알고서?”

해원기 혼자만 먼저 왔다고 여기나. 또 역당의 수괴라고 했잖은가.

노문기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면서 해원기가 입을 닫았다.

특별한 표정이 없는 건 평소와 다름없으나, 두 눈에 신광이 짙어지면서 삼엄한 기운이 일어난다.

굳게 닫힌 입이 열리면 당장 뇌성 같은 꾸짖음이 나올 것만 같고.

철컥.

아무런 동작도 하지 않았건만, 등 뒤의 고검이 스스로 검집을 벗어나려 한다.

위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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