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장 권경천하(權傾天下) (3)
‘함부로 가르치려 하지 마라. 배우려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지 않으면 도리어 미움을 사는 법이니라.’
언뜻 사부의 목소리가 들린 듯해서.
해원기가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조금 흔들었다.
연검대초로 매질을 해서라도 깨우치려는 생각은 괜한 과시욕일 수도.
이미 노문기는 말이 통하지 않는 상태. 독선과 아집으로 똘똘 뭉쳐 어쩔 도리가 없고, 오직 자기 주관으로만 모든 걸 판단한다.
구주정문에서 유가의 으뜸이었던 신유문의 후예거늘.
이젠 단지 동창의 주구로 대해야 하나.
과거의 역사를 아는 해원기로선 아무래도 손이 선뜻 나가지 않는데.
병기를 뽑은 현보와 황필이 노문기 곁에 바짝 붙는다.
“대인, 사태가 시급하오니 서두르셔야.”
“여기는 저희가 맡겠습니다.”
조심스럽게 건네는 말 속에 은근히 조바심이 담겼고,
그 말에 해원기를 노려보던 노문기의 표정도 조금 바뀌었다.
활짝 펼쳤던 넓은 소매를 떨쳐 거두면서,
“쯧, 일에는 순서가 있지. 어쩔 수 없군.”
중얼거리는 혼잣말에 불쾌함이 잔뜩 묻어난다. 당장 손을 쓰지 못하는 게 아쉬운 듯 턱을 주억거리다가,
“공무에 얽매인 몸, 사사로이 내 뜻만 내세울 때가 아니다. 그러나 신주를 어지럽힌 잘못, 반드시 내 손으로 징치할 것이야. 하아!”
비장한 목소리로 장탄식.
그리고는 현보와 황필에게 근엄하게 이르며 뒤로 물러서니.
“방자하게 얻은 절세검왕이란 헛된 이름도 그렇지만, 나머지도 가벼이 여길 자들은 아니오. 경고를 제대로 알아먹지 못한다면 아예 조가보로 넘겨도 좋소. 그럼.”
해원기를 무시하고 그냥 떠나겠다는 의미다.
이건 또 뭔가.
처음에는 갖은 예를 다 차리고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잔뜩 늘어놓다가, 이제는 수하에게 맡기고 저 혼자 이 자리를 뜨겠다?
참으로 제멋대로인 오만함.
해원기와 다른 이들은 기가 막혀서 입을 열 생각도 들지 않고,
그저 현보와 황필이 순안사께 인사를 올리고 성큼 나서는 광경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공산백운동 안으로 몸을 날리는 노문기.
순식간에 동굴의 어둠에 삼켜졌다.
“순안사께서 직접 징치하신다고, 경고만 내리라 하셨으나. 흐흥.”
비웃음을 입가에 매달며 장검을 세우는 현보.
폭이 좁은 검신, 길이는 보통 검보다 훨씬 길어서 사 척이 넘고 검극으로 갈수록 좁아져서 얼핏 기다란 송곳처럼 보이는데. 새파란 기운이 불꽃처럼 일렁인다.
황필 또한 칼을 눕히며 피식거렸다.
“후후, 명을 받들어 목숨은 붙여두는 거로 하세. 어떻게 나눌까? 아니면 그냥 조가보 쪽에 넘겨?”
대조적으로 폭이 넓고 끝이 뭉툭한 판도(板刀). 채 삼 척도 되지 않는 짧은 도신에 기름을 바른 것처럼 윤기가 반지르르 흘러서. 이 또한 범상치 않다.
노문기가 떠나자마자 건방을 떨기 시작해 가까이 있는 해원기조차 눈에 두지 않는 모습.
삼 장.
손짓 한 번에 닿을 거리를 두고 병기를 내민 채 노닥거린다.
노문기가 사라진 새카만 백운동 안을 보면서 해원기가 미간을 찡그렸다.
고수는 기세부터 남다르다.
새파란 기운과 반지르르한 윤기.
독특한 검기와 도기를 형성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경지에 이른 자들이건만, 어째서 이렇게 시정잡배처럼 허술한가.
일부러 상대를 현혹하려는 걸까.
그러나 굳이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어이쿠, 하 대협, 여기서 소란을 피우면 조가보에서 알겠죠?”
“삼림이 우거져서 소리가 잘 전해지지 않소. 해 공자의 발소리에도 여태껏 아무 반응이 없으니까. 그래도 조심해야겠지요.”
“아하, 그럼 빠르게, 조용히 처리하면 된다는 말씀.”
등 뒤로 가까워지는 말소리.
정록과 하일웅이 가볍게 대화를 나누고 오소민이 코웃음을 덧붙인다.
“흥, 징치? 경고? 웃기고 자빠졌네. 조가보가 기어 나오든 말든 빨리빨리 움직이자고. 고상하신 순안사 나리께서 만사를 제쳐두고 내빼신 걸 보면, 아무래도 비표가 드러난 듯하니. 하 대협, 공산백운동이 어디로 통하나요?”
“흠, 글쎄요. 이 입구 외에 따로 출구가 있다는 얘긴 들어보지 못했는데.”
해원기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노문기와 현황보필이란 자들의 가소로운 언행을 더는 참지 못하고 마주 조롱하는 게 아니다.
개방의 순행장로와 녹림장관의 대탐자가 그저 이름뿐일까.
오소민과 정록의 총명함과 기민함은 나이보다 훨씬 노련하게 상황을 파악한다. 노강호인 하일웅이 감탄할 만큼.
지금도 일부러 해원기에게 들려주는 얘기.
현황보필이 늦게 등장하고, 또 노문기가 갑자기 떠나가고.
그 이유는 바로 ‘일월표객’이란 뜻이다.
규찰사가 수하를 이끌고 웅풍대주루에 난입했던 일. 노문기가 순안사랍시고 역당의 수괴를 나포하러 왔다는 말.
전부 일월표객이 맡은 비표와 관련이 있다.
비합전서로 비표의 계약을 맺었다고 했으니 접수한 웅풍대주루를 찾아왔듯이 비둘기가 출발한 곳 역시 발견했을 터.
비표의 단서를 얻어 일월표객이 호위하는 자를 쫓는 중이었구나.
깨닫는 순간, 해원기가 두 손을 곧장 떨쳤다.
우우웅.
현황보필을 한꺼번에 밀어내는 대우신장.
삼 장의 공간이 통째로 뒤집혀 밀려들자 건방을 떨던 현황보필이 깜짝 놀랐다.
“엇.”
현보의 장검이 새파란 검기를 크게 부풀리고, 황필의 판도가 반지르르한 윤기를 길게 뽑지만.
퍼펑.
본래 타격보다 밀어내는 효능의 대우신장이다. 딛고 선 지면까지 움직이는 통에 꼼짝없이 좌우로 벌어질 수밖에.
파파팟.
그 사이로 기다렸다는 듯이 뛰어드는 세 사람. 오소민, 정록, 하일웅이 동굴로 뛰어들고, 마지막에 해원기가 떨쳤던 두 손을 활짝 펼치며 몸을 날린다.
촤아아아.
현보에겐 기수검봉이 실린 발검제형, 황필에겐 섬전추풍이 담긴 발검제형. 밀려나던 현황보필에게 쌍검이 날아드는 듯.
쩡, 쩡.
“으윽.”
장검과 판도가 쇳소리를 울리고 현황보필이 동시에 신음을 토하며 비틀거리는 모습은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해원기 일행이 삽시간에 백운동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발검제형과 정면으로 부딪친 장검과 판도가 부르르 떨고,
중심을 잃은 현보와 황필이 엉덩방아라도 찧을 것처럼 정신없이 뒷걸음치는데.
문득,
낭패한 모습의 둘이 우뚝 멈춰섰다.
서로를 마주 보는 눈에는 기이한 광채가 떠오르고, 시선이 잠깐 백운동 쪽을 향했다가 돌아오면서.
“흐음, 과연 절세검왕이로군. 웅후한 장력도 그렇지만, 맨손의 검기가 현천검(玄天劍)을 흔들다니.”
침중한 표정을 짓는 현보와 차분히 판도를 거두는 황필.
“현신장들이 몇 번이나 낭패를 보았다고 했잖은가. 내 황룡도(黃龍刀)도 마찬가지, 뭐 이 정도면 되겠지. 응기성강을 참느라 애썼네.”
묘한 대화가 시작된다.
현보 역시 자신의 긴 장검을 등 뒤로 돌리면서 혀를 차고,
“쯧, 어쩔 수 없지. 그나저나 처음엔 엉터리라고 여겼더니 그게 이런 식으로 이어질 줄은 몰랐구먼. 밀각육학사의 수보, 상당한 책사야.”
“허어, 어찌 수보의 머리에서 나왔을까? 전부 다 존주(尊主)의 손바닥 안인 것을. 자, 그럼 어서 수보를 부르도록 하세. 백운동이 복잡하긴 해도 그리 오래 시간을 끌 순 없으니까.”
“알았네.”
존주. 그 단어가 나오자 현보가 금세 엄숙한 표정이 되고, 서둘러 품에서 작은 통 하나를 꺼내 공중으로 쏘아 올렸다.
화르르르르.
노란 불꽃이 길게 꼬리를 물고 올라가는 신호탄.
백운동 앞의 공터 외에는 대삼림이라 신호탄을 쏘기 어렵다. 그 불꽃을 바라보는 현황보필에게선 조금 전의 경망스러움이나 검왕수에 충격을 받은 티가 전혀 없었다.
“에고, 난 땅굴이 아주 질색인데.”
들어오자마자 정록이 앓는 소리를 하며 두리번거리고, 오소민도 입맛을 다셔야 했다.
“이곳은 태고에 이루어졌다는 종유동(鐘乳洞)이라, 대낮에도 횃불을 밝히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지요. 쯧.”
형대 토박이인 하일웅조차 선뜻 앞장서기 어려운 곳.
백운동 안으로 들어서서 얼마 나아가지도 못했다.
아무리 고수라도 이렇게 전혀 빛이 들지 않으면 시야가 차단되고, 더구나 앞에는 종유석이 대삼림이 무색할 정도로 빽빽하게 늘어섰으니.
“그런데 이 작자는 잽싸게도 내뺐네. 딱히 불을 밝힌 것 같진 않던데.”
“화섭자라도 붙여볼까?”
정록이 품속을 더듬자, 해원기가 그제야 입을 연다.
“주변을 좀 더 살펴보세.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몰라도 화섭자로 버티기는 어렵겠지.”
비취를 박아 넣은 것처럼 빛나는 시선.
동시안 덕에 남들보다 훨씬 잘 보여서 이 백운동이 상당히 복잡하다는 걸 알았다.
자연이 만든 종유동이다. 종유석의 크기며 위치가 전부 제각각, 어떤 건 위에서 내려오고, 어떤 건 아래에서 솟구치며, 또 어떤 건 기둥 가운데가 불룩하다.
화섭자로 잠깐 불빛을 일으킬 수는 있어도, 나뭇조각 하나 없이는 금방 꺼지고. 이런 복잡한 동굴 안에서는 불빛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힘든 일.
노문기의 경공신법이 아무리 대단해도 그 짧은 시간에 이렇게 종적 하나 없이 사라진 건 분명히 이유가 있다.
현황보필도 불빛을 밝히지 않고서 불쑥 등장하지 않았었나.
다른 통로가 있는 게 확실한데 함부로 움직이는 게 과연 유리할지.
검왕수로 충격을 주긴 했어도 현황보필이 뒤쫓아 올지 경계해야 하고, 혹시 조가보 쪽에 연락을 취해 원군을 부를지도 모른다.
노문기가 일월표객의 비표를 찾았다면 이 종유동을 통해 어디로 나가는 걸까. 또 역당의 수괴라는 비표의 인물은 누구기에.
여러 가지 생각이 한꺼번에 들어 조금 조급해지는데.
“흐흥, 요것 봐라.”
정록의 목소리에 해원기가 급히 고개를 돌렸다.
“해 형이 잘 봤구먼. 불을 들었다간 오히려 헤맸겠어. 여기 점 두 개가 찍혔고, 저쪽에 또 점 하나가 보여. 전부 일종의 희미한 형광(螢光)이라서.”
왼쪽의 커다란 종유석에 원숭이처럼 매달려서 히죽거리는 정록의 모습에,
해원기가 입속으로 짧은 탄성을 삼켰다.
깜빡 잊었었다. 정록이 고화문 주장선의 후대란 걸.
과거에 강호사괴(江湖四怪)로 불린 기인 중에 주장선은 그야말로 신출귀몰한 재주를 지녔던 사람. 변신, 역용, 잠행, 은신, 추종에 독보적인 능력을 지녔고, 온갖 잡학방술(雜學方術)에 뛰어났다고 했다.
오소민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젓는다.
“어휴, 누가 화호초 아니랄까 봐. 잘했어, 그럼 그게 길을 알려주는 거야?”
이번에 별명을 들먹인 건 조롱이 아니라 칭찬. 그렇지만, 종유석을 주르르 미끄러져 재빨리 뛰어나가는 정록은 진짜 담비 같았다.
“응, 점 두 개면 오른쪽으로, 점 하나면 직진. 대강 무슨 뜻인지 알겠네.”
해원기가 훌쩍 앞으로 나섰다.
“오 형, 하 대협, 제 피풍을.”
걸쳤던 피풍 자락을 내밀자 오소민이 피식 웃는다.
“뭐 하러. 됐어. 그냥 우리를 끌고 가면 되잖아. 서둘러야지.”
아직 형광 표시의 뜻을 다 파악한 건 아니다. 정록을 앞세우면 노문기나 다른 매복이, 오소민과 하일웅을 뒤에 두면 현황보필이나 원군이 걱정되어서 해원기가 나름 머리를 짜낸 모양이지만.
오소민은 그런 해원기의 마음을 금방 알아챈다.
해원기가 조금 머쓱해졌지만, 오소민의 말대로 지금은 시간을 다툴 때. 곧장 오소민과 하일웅의 소매를 잡고 정록의 뒤로 붙었다.
부신수영에 풍운결에서 유래한 전궁유향을 더하고, 신왕공을 일행 모두에게 전해 일체경신(一體輕身)으로 이끌 셈.
정록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지켜주고, 오소민과 하일웅이 따로 신경을 쓰지 않고도 해원기를 따라 편히 움직이도록 부랴부랴 만든 방법인데.
‘음?’
해원기가 되레 눈을 껌뻑였다. 남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해원기 주위에 구름 같은 기운이 일어나서.
검을 뽑지도, 상대를 치려고도 하지 않았거늘 검역(劍域)이 왜 이런 형태로 이루어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