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326화 (326/410)

제82장 권경천하(權傾天下) (2)

헛소리.

어려운 문자를 연방 써가면서 나라의 기틀이니, 난신적자의 제거니 떠들지만 결국은 허망한 장광설이다.

한 마디로 간결하게 표현할 수 없나.

무인이라면 협의(俠義)라고, 유생이라면 인의(仁義)라고 얘기하면 그만인 것을.

화려한 수사(修辭)를 덧붙여봤자 부실한 알맹이를 더 드러낼 뿐이다.

더구나 노문기의 주장은 그 바탕부터 잘못되어 있어서,

사건을 보는 시각이 완전히 거꾸로요, 또한 논지의 비약이 심하다.

오직 자기만 옳다는 독선(獨善)에 남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아집(我執)이다.

동창의 행위를 제멋대로 옹호하고, 그 동창조차 한낱 쓰고 버릴 도구로 여기는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구원이라니.

사건만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눈까지 비뚤어졌다.

이따위가 유가의 으뜸이었던 신유문의 후예라.

상상도 하지 못했던 얘기에 잠시 말문이 막혔던 오소민이 발끈하며 나서려다,

눈앞에 가만히 올라온 손에 주춤했다.

노문기가 장광설을 늘어놓는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바라보던 해원기.

등 뒤에 선 세 사람이 어떻게 반응하든 그저 듣고만 있더니,

돌아보지도 않고 오소민이 성을 내려는 걸 알아챘나 보다.

그 넓은 어깨가 부풀었다가 내려오면서,

“후우.”

간신히 참았을까. 장탄식처럼 새어 나온 긴 한숨 끝에 혼잣말이 낮게 이어진다.

“이사모가 왜 왕래를 끊으셨는지 이제야 알겠구나.”

주춤거렸던 오소민이 눈을 크게 떴다.

이 얘기를 얼마 전에 들었었다. 뭐였더라.

해원기에게는 사모가 두 분 있는데, 난산 끝에 아기를 잃고서 그 슬픔으로 예전의 인연을 다 끊었다던 분이 바로 이사모. 그분에게 의조부가 있었다던가.

말재주도 없는 주제에 워낙 단편적으로 드문드문 일러준 탓으로 누가 누구와 연결되는지 헷갈렸던 관계가,

문득 환하게 이어진다.

이사모의 의조부가 바로 신유문의 천지일사였었다.

해원기가 오소민을 막았던 손을 내리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이미 끊으신 걸 내가 함부로 할 순 없고, 또 그럴 자격도 되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냥 좌시하기도, 아니, 좌시해서는 안 되겠지.”

여전히 혼잣말.

공산백운동 앞에 선 노문기가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내밀었다.

자신의 웅변(雄辯)을 알아들었는지 아닌지, 뭘 저리 중얼거리는 건가.

그 마음을 알아차린 것처럼 해원기가 눈을 똑바로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둔한 머리지만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소. 흐음, 내가 워낙 말재주가 없어서 뭐라고 해야 할지…….”

그 말대로 둔해 보이는 무표정과 답답한 말투.

적당한 단어를 바로 찾지 못해서 괜스레 가슴 앞의 검대를 만지작거리나.

그러나 바로 이어진 건,

“아, 사부님이셨다면 아마, ‘미친놈.’이라고 하셨겠군.”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말.

모두가 귀를 의심하느라 멀뚱멀뚱 해원기를 쳐다보다가,

“흐끅.”

욕을 먹은 당사자 노문기가 순간적으로 딸꾹질을 해버렸고,

기다렸다는 듯이 폭소가 뒤따랐다.

“푸하하하! 그렇지.”

“미친놈, 맞아, 왓하하하하.”

하일웅이 뒤로 넘어갈 듯 허리를 꺾으며 웃어젖히고, 정록이 한 박자 늦게 배를 움켜쥔다.

내려던 성을 억지로 참았던 오소민조차 그만 얼굴이 풀어질 정도로,

절묘한 장면이었기에.

셋 중에 해원기의 사부를 직접 만나본 사람은 하일웅 혼자. 아마도 해원기의 말에 그분을 떠올려서 먼저 웃음이 터졌겠으나.

설사 그분을 모른다고 해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자기가 아닌 사부의 말을 인용해서 욕을 하고, 욕먹은 당사자는 정곡을 찔려 딸꾹질을 해대고.

그야말로 출기불의(出其不意)의 정문일침(頂門一針).

구질구질한 이론과 너절한 수식으로 암만 떠들어봐야 뭔 소용이 있을까. 헛소리를 진심으로 떠들면 제정신이 아닌 거다.

그걸 꼭 집어낸 사람이 하필 고구마대장이니.

게다가 슬그머니 검대를 만지작만지작. ‘미친놈’에겐 ‘몽둥이’가 약이라는 의미잖나.

통쾌하기 짝이 없다.

보는 사람은 통쾌하고 즐거워도 당하는 쪽은 똥물이라도 뒤집어쓴 듯한 기분.

본능적으로 입을 가렸던 손이 내려가자 노문기의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이 드러났다.

분노로 퍼렇게 일렁거리는 눈빛.

힘을 주어 악다물어서 푸들푸들 떨리는 입가.

당장 해원기를 향해 소름 끼치는 살기가 뻗는데,

“참으로 무례하고 경망스러운 작자들이로다.”

웅하고 울리면서도 또렷하게 귀에 전해지는 목소리. 저절로 폭소를 잦아들게 하고, 해원기도 검대를 풀려던 손을 멈췄다.

노문기의 등 뒤에 두 개의 기척이 나타난 걸 비로소 깨달았다.

“야밤에 이런 곳에 온 것부터 수상하잖나. 아 참, 그러면 우리도 포함되나? 아니지, 우린 공무 때문에 잠도 못 자고 이 고생이라.”

또 하나의 목소리.

공산백운동 안에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두 사람이 나온다.

“고생이라니? 우리가 무슨 고생이야. 진짜 고생은 불철주야 동분서주하시면서도 무식한 것들에게 엉뚱한 소리나 듣는 우리 순안사시지. 허어!”

“그렇구먼. 참으로 순안사를 뵐 낯이 없네그려. 그런데 순안사께서는 저런 것들을 대하면서 어찌 그리 평정을 유지하실꼬? 나는 속이 울렁거리고 토악질이 나오던데.”

“동감이야, 동감. 곁에서 모시면서 조금이라도 배워야 할. 어이쿠, 이럴 때가 아니지.”

“맞아. 어서 서두르세.”

동굴 안에서야 울림이 있을 수 있다손 쳐도, 이미 밖으로 나와 노문기 바로 뒤에 이르고서도 계속 울리는 말소리.

말을 하기 전에는 있는 줄 몰랐으니 절대로 평범한 자들이 아니다.

오십 초반의 나이. 한 사람은 오사모(烏紗帽)에 흑색 장삼을 걸쳤고, 또 한 사람은 누런 복건에 황색 장삼을 입었다. 흑삼을 걸친 자는 등 뒤에 긴 장검을, 황삼을 입은 자는 허리 뒤에 커다란 칼을.

노문기의 등에 대고 공손하게 손을 모아 예를 차리면서,

“삼가 순안사를 뵙니다!”

동시에 외치는 목소리도 좁은 공터를 뒤흔들고,

솨아.

흙먼지가 뽀얗게 밀려들어 해원기가 눈을 가늘게 떴다.

언제부터 백운동 안에 있었던가.

노문기가 얼른 안색을 고치면서 의젓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오시오. 여기저기 일이 많다 보니 내가 두 분께 못 볼 꼴을 보였구려.”

“아닙니다.”

검을 멘 흑삼 노인이 머리를 저으면서 시선을 해원기 쪽으로 돌리고,

“명을 받고서 어찌 태만할 수 있겠습니까? 단서를 찾았으니 일 각이라도 빨리 아뢰려고 서둘러야지요. 그나저나…….”

칼을 찬 황삼 노인이 바로 말을 이어간다.

“규찰사들은 어디 가고 몸소 하찮은 무리를 상대하고 계시는지? 저희가 속히 치우리까?”

파팟.

하나씩 얼굴을 살피는 시선이 마치 화살처럼 날아와 꽂힌다.

오소민과 정록의 얼굴이 확 굳어지고, 하일웅이 자기도 모르게 감산도 자루에 손을 얹을 만큼 매서운 시선.

대단한 고수들이다.

두 노인의 등장에 솟구치던 분기가 풀렸는지, 노문기가 두 팔을 크게 떨쳐 뒷짐을 지면서 혀를 찼다.

“쯧, 일이 꼬여서 규찰사로는 어려웠던 모양이오. 마침 두 분이 자리를 비웠으니 별수 있겠소? 또 근처에 있는 조가보도 둘러봐야 하기에. 흐음, 하지만 현황보필(玄黃輔弼)의 두 분이라도 간단히 치우기는 어려울게요.”

뜻밖의 말에 현황보필이라는 두 노인의 표정이 살짝 흔들린다.

이 허름한 무리가 누구기에.

두 노인이 보기 편하게 슬쩍 비스듬히 몸을 돌린 노문기.

“용모가 뛰어난 젊은이는 개방의 순행장로, 칼을 든 영감은 왕년의 연조도객, 가운데의 시동 차림은 녹림도로 보였소만. 그보다 앞에 나선 저 친구가 바로 그 유명한 절세검왕이라오.”

턱을 쳐들고 하나씩 가리키며 알려주는데.

해원기를 향해서는 가소롭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기까지.

현황보필. 오사모에 흑삼 차림이 현보(玄輔)요, 누런 복건에 황삼을 두른 자는 황필(黃弼)인가.

두 노인이 새삼스럽다는 듯 해원기를 위아래로 훑어보자,

오소민이 더는 참지 못했다.

“이거, 이거. 배운 놈이 더 못됐다더니. 아주 고약한 양반이네. 그냥 미친 게 아니라 아주 곱게 미쳤다니까. 어이, 순안사 나으리, 졸개 둘이 오니까 어깨에 힘이 빡 들어가나? 하아, 그리고 무슨 현황보필? 뜻이나 제대로 알고 붙인 거야?”

당장 달려들어 멱살이라도 쥘 기세.

해원기가 말릴 새도 없이 바로 옆에 서서 씩씩댄다.

노문기가 오만하게 내려다보는 자세를 거두지 않고 픽, 하니 웃지만.

“유가라며? 글자 하나라도 삼가며 써야 하는 건 못 배웠나? 칙명순안사가 어지간히 높은 자리인가 봐? 에, 현황은 천지(天地)요, 보필은 훌륭한 인물을 좌우에서 돕는다는 뜻이니까. 하늘과 땅이 도우면 지극히 존귀한 자리라. 그럼 설마 진명(眞命)……? 으에엑, 설마, 이거야말로 대역무도(大逆無道)한 소리잖아. 그러지 않아도 국사범으로 몰릴 판에. 조심, 또 조심해야. 으잉? 칙명순안사가 대역무도? 허 참!”

삿대질을 섞으면서 혼자 놀라다가 어깨를 움츠리고, 또 기가 막혀 혀를 차고.

시정의 이야기꾼은 저리 가라고 할 연기에다가.

비웃던 노문기의 안색이 홱 변했다. 현황보필을 듣자마자 자신을 진명천자(眞命天子)에 갖다 붙여 공박할 줄이야.

개방의 거지가 이렇게 유식할 줄은 몰랐겠지.

“이놈!”

“어디 감히!”

모시는 상전이 당하는 걸 좌우에서 보필하는 자가 모를 수 없다.

솨아아.

현황보필이 눈을 부릅뜨고 고함을 치자 맹렬한 기세가 돌풍을 일으켜 밀려드는데.

해원기가 곧장 발을 들어 힘껏 지면을 디뎠다.

마치 밀려드는 돌풍을 짓밟듯.

펑.

폭음과 함께 돌풍이 일순간에 사라지고,

눈을 부릅뜬 현황보필이 중심을 잃을 뻔해서 급히 자세를 낮추어야 했다.

드드드.

언제나 오소민을 보호하려고 마음먹은 해원기다. 공력을 충분히 실은 지유진의 일격에 공산백운동의 입구까지 흔들리는데.

아예 걸음을 옮겨 앞으로 나아간다.

“내 공부가 부족하지만.”

저벅저벅,

“뭐가 잘못되었는지는 알겠다.”

말투가 딱딱해졌고 걸음마다 무게가 실린다.

“배움은 쓰임이라고 배웠지.”

쿵쿵.

땅을 울리며 걷는 해원기의 전신에서 태산 같은 기세가 일어나고,

“가르침을 잊지 않고 열심히 익히는 이유는 쓰일 때와 쓰일 곳을 위해서다.”

노문기만을 보는 눈에서는 신광이 횃불처럼 타오른다.

현보가 급하게 검병을 잡고, 황필이 황망히 칼집을 세우든 말든.

오직 노문기를 향하던 해원기가 삼 장의 거리를 두고 우뚝 섰다.

그리고,

“내가 마음대로 쓰기 위함이 아니라.”

단호한 음성.

고오오오오.

기세가 좁은 공터를 넘어 노문기 뒤의 백운동까지 퍼지자 현보와 황필이 더는 견디지 못하고 병기를 뽑아 들었다.

차창!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새파란 빛이 일어서는데.

“그만!”

노문기가 크게 외치며 뒷짐 졌던 두 손을 둥그렇게 휘둘렀다.

스스스스.

기묘한 소리가 울리며 울림이 가라앉고.

넓은 소매를 펼친 채 잔뜩 인상을 쓴 노문기가 입술을 떨며 웃기 시작했다.

“흐하하하, 마음대로 쓴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나를 평가하는 것이지? 왕도(王道)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쭙잖은 재주로 세상을 속이는 오랑캐 주제에.”

다친 짐승이 헐떡이는 것 같은 웃음. 해원기를 노려보는 눈에는 독기가 가득하다.

해원기의 기세를 풀어내는 능력이 대단하지만,

그것보다 오랑캐라는 소리에 해원기는 어쩐지 맥이 빠져버렸다.

이렇게 한심한 작자였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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