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325화 (325/410)

제82장 권경천하(權傾天下) (1)

먼저 몸을 세운 건 오른쪽 돌사자 앞의 둘.

상선태군이 흉한 표정으로 이를 갈아붙인다.

“으득, 어디서 빌어먹다 온 놈이 감히.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천방지축…….”

당장 욕설이 덧붙으려고 하자 사마대가가 가볍게 손을 저어 말렸다.

“그만하게. 저렇게 기뻐 날뛰니 다행이지 않은가. 쓸모가 있는 건 잘 써야 하지. 당분간 즐기게 놔두자고. 으흠.”

그럴듯한 말투에 의젓한 모습이지만,

노문기가 사라진 곳을 보는 두 눈에선 살기가 진득하게 흐른다.

겉으로야 순안사인 노문기를 공손하게 받드는 척했으나 속으로 느낀 굴욕은 상선태군보다 더 심했던 듯.

헛기침과 함께 옆을 힐끗 살피는 시선.

“창공(廠公)께서도 일을 참 복잡하게 하시는구먼. 지금 신경 쓰이는 곳이 하나둘이 아닌데, 대영반에 순안사까지. 뭐 달리 내려진 명이 없다면 우리는 이쯤에서 돌아가는 게 좋겠네. 수보도 방금 들었다시피 아문을 비운 지가 좀 되어서 말이지.”

고개는 돌리지 않고 느릿느릿 말을 건넨다. 별로 말을 섞고 싶지 않은 심정을 드러내긴 했어도, 보는 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다.

조아렸던 머리를 들던 수보가 미소를 지었다.

“윗전의 뜻을 소관이 어찌 짐작하겠습니까? 편하신 대로 하시면 됩니다. 여러 공공께서 이번에 힘써주신 일은 잊지 않도록 합지요. 아, 밀각이 이번 일로 손이 많이 부족해져서 잘 모시지도, 또 가시는 길을 살필 수도 없는 상황이라.”

“됐소. 다 아는 판에 뭘. 그럼 우리는 먼저 차비를 좀.”

밀각육학사의 우두머리인 수보라고 해도 관위로는 동창의 첩형이다.

어마감의 태감인 사마대가로선 이 자리를 조금이라도 빨리 피하고 싶은 심정이라서 얼른 수보의 말을 끊고 몸을 돌렸다.

어쭙잖은 것들과 어울리는 것도 지친다.

그리고 수보와 오래 붙어 있어서 좋을 일은 하나도 없고.

분통 터지는 걸 간신히 참고 있는 상선태군을 재촉해 곧장 조가보 안으로 향하는 사마대가를 보며,

건성으로 손을 들어 예를 표하는 수보. 그 옆으로 첨유진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다가섰다.

“급한 모양이군요.”

바로 곁에서도 들릴락 말락 작은 목소리지만.

수보가 얼른 고개를 저으면서 몸을 돌렸다.

정문보다는 노문기가 사라진 쪽에 더 관심이 있는 듯이.

그 눈이 가늘어지더니 입술이 살짝 달싹인다.

“윗전의 뜻을 어찌 짐작하겠느냐? 더구나…….”

바짝 붙은 첨유진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자 수보의 입가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쓸모 있는 걸 그냥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지.”

사마대가와 나누었던 대화 중에 이미 나온 말들.

그러나 미소를 머금은 수보의 입에선 전혀 다른 뜻처럼 들렸고,

첨유진이 그 의미를 알았다는 듯 머리를 연방 끄덕여댔다.

노문기가 사라지자 해원기는 조용히 뒤로 빠졌다.

노문기를 배웅하러 나온 넷. 조가보가 은허에서 패주한 무리가 모인 곳임을 확인했으나, 섣불리 쳐들어갈 수는 없다.

작은 성과 같은 거창한 건물을 여기에 세운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터. 적의 의도와 전력을 확실히 알지 못한 채로 쳐들어갈 정도로 무모하진 않고,

무엇보다 노문기의 행위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갑갑한 기질인 걸 알지만, 그래도 신유문의 적통을 이어받은 후예. 무림의 정도를 수호해야 할 그가 어째서 관과 손을 잡았을까.

특히 그들 사이의 대화를 통해서 노문기가 동창의 제독태감과 가까운 듯 보였으니.

설마 당세에 동창이 어떤 짓을 벌이는지 모른단 말인가.

약정한 대로 직접 만나야 이런 의혹을 풀 수 있을 터.

혹여라도 미세한 기척이라도 남길까 봐 부신수영에 더 신경 쓰면서 은밀하게 움직였다.

길이 없는 대삼림이라더니 조가보의 정문에서부터 동쪽으로 뻗은 작은 길. 위쪽은 나뭇가지로 뒤덮여 마치 동굴 같은 모양이지만, 이렇게 공산백운동까지 이어지나 보다.

길이 난 것까지 알았으니 일행을 찾는 게 먼저다.

부신수영이 은신과 밀탐에는 유리하지만, 아무래도 속도는 처지는 편. 그래도 어렵지 않게 오소민이 머문 거목을 발견했다.

[하 대협과 정 형은?]

불쑥 전해지는 전음에 놀랄 법도 하건만, 오소민이 아무렇지 않게 해원기를 보면서 손짓했다.

[하 대협은 공산백운동 쪽, 중간에 화호초를 두어서 방향을 잃지 않도록 했어. 어떤 놈들이 떠들던가?]

[밀각의 수보와 각주, 어마감과 상선감의 태감, 그리고 노문기. 흠, 시각이 되었으니 일단 약속 장소로 가세.]

오소민이 눈을 깜빡거리곤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간략한 대답이지만 그걸로 충분하다. 대내의 두 세력이 모인 조가보의 존재, 그리고 노문기와의 관계. 굳이 자세한 내용을 물을 필요는 없다.

정록이 있다는 곳으로 해원기와 함께 몸을 날렸다.

공(崆)은 산이 높고 험하다는 뜻이지만, 공산에서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인 듯.

그리 높지 않은 완만한 구릉을 산이라고 부른 건 속이 텅 비었기 때문이다.

워낙 사방이 거목으로 가득 차서 그 앞에 이르기 전까지는 이게 완만한 구릉이란 것도 알기 어렵다.

나무 대신에 허연 지면이 드러난 좁은 공터. 그 뒤로 거대한 괴물이 아가리를 딱 벌린 것처럼 보이는 커다란 동굴.

동굴 앞에 태연자약하게 서 있던 노문기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고.

공터의 맞은편에 소리도 없이 내려선 해원기가 주먹을 말아 올렸다.

“노 학사, 오랜만에 뵙는군요.”

노문기는 넓은 소매를 두어 번 흔들어 손을 모으는 시늉.

“역시 해 사부, 아, 사부라는 호칭은 어울리지 않는구려. 하여간 귀하일 거로 생각했소.”

해원기는 흔한 포권, 노문기는 노숙한 관원들이 할 법한 공수(拱手)의 예.

인사부터 전과는 다르다.

“흐음, 제가 딱히 노 학사의 기억에 남을 줄은.”

“이렇게 보는 게 우연은 아닐 테고. 이전의 일행들도 같이 온 모양인데. 구면에 모른 척은 예의를 잃는 일이지요.”

노문기가 해원기의 말을 딱 자르면서 시선을 좌우에 던졌다.

해원기 외에 다른 이가 있다는 걸 이미 알아채는 것도 남다른 능력이다.

구차하게 계속 숨을 일도 아니어서 오소민이 천천히 걸어 나오자, 노문기의 표정이 조금 묘해졌다.

“유람 나온 풍류공자는 그대로인데, 어째 시동과 마부는 바뀐 듯하오?”

오소민만 아는 얼굴, 그새 영특한 동자로 분장한 정록이나 감산도를 든 하일웅은 증명단과 악송령이 아니니까.

그러고 보니 구성이 예전과 그다지 차이가 없어서 오소민도 고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다.

어쨌든 이왕 나선 이상, 모른 척할 수는 없는 노릇.

그런데 노문기가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바로 말을 잇는다.

“개방 순행장로인 유룡개, 나찰여귀라 불리는 항산의 용낭자, 곡부에서 나에게 재주를 뽐냈던 도객(刀客). 그런데 이번엔 연조도객이 끼고 낯선 시동이라. 이렇게 다양하고도 유명한 이들을 이끄는 귀하는 과연 누굴까?”

구면이라고 아는 체하는 대신에 알아낸 내력을 읊고는,

시선이 해원기에게 꽂혔다.

정체를 밝히라는 말인가. 그러나 해원기가 굼뜬 입을 놀린 새도 주지 않는다.

“내 사문도 금방 알아보고. 흠, 웅풍대주루에선 규찰사가 이끈 전륜진도 단숨에 깨뜨렸으니. 절대로 평범할 리 없지. 오호, 더구나 이전과 다르게 등에는 훌륭한 장검도 한 자루 비꼈구먼. 마치 내가 누구다, 라고 선포하듯이.”

해원기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답을 원해서 물었던 게 아니다.

노문기는 해원기가 누군지 알면서, 일부러 조롱을 담아 떠들고 있었다.

적의(敵意).

처음부터 해원기에게 적의를 품고도 이렇게 거짓 예의를 차리는 것. 왜 이러는 걸까.

적대하는 의도가 뻔히 보이는데 가만히 듣고만 있을 오소민이 아니다.

웃음을 터뜨리며 해원기를 쳐다본다.

“하하, 노 문사는 우리가 아주 그리웠던가 봐. 뒷조사라도 한 것처럼 모르는 게 없으시네. 그래놓고 해 사부니 뭐니 엉너리를. 이렇게 재미있는 양반인 줄 미처 몰랐구먼. 아차, 우리도 노 문사라고 부르면 실례겠지? 그때, 작정하고 때려잡으려던 그 뭐야, 조양신문인가의 새 문주가 되셨다잖아. 혹시 문주가 되려고 때려잡던 거였나, 아, 이것도 무지한 소리겠네. 순안사? 뭐 그런 어마어마한 대관인께는 무례, 무지를 넘어 불경죄(不敬罪)지, 암.”

웃었다 찡그렸다. 혼자서 감탄하며 고개까지 끄덕이는 통에.

노문기의 매끄러운 혀가 비로소 멈추었고.

해원기가 오소민의 비웃는 말을 못 들은 것처럼 곧장 무겁게 입을 열었다.

“신유문의 후예가 어째서 동창과 손을 잡았소?”

처음부터 노문기에게 알고 싶은 것은 단 하나.

적의를 보이든, 말재주로 조롱하든 상관없다.

노문기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재미있군. 우선 하려던 말을 마저 하지. 이전에 곡부에서 만났을 때는 한 명이 더 있었소. 용문세가의 천금. 그녀를 호위하느라 개방과 항산, 그리고 흥륭이 끼었을 터. 그럼 지금은 뭘까? 연조도객을 이렇게 떡하니 대동한 건 이번에 일월표객과 관련이 있다는 방증 아닐까. 예전부터 가까운 사이인 개방에다가, 흠, 지역이 지역이니 저 낯선 시동은 어쩐지 녹림이란 느낌이 드는구려. 내가 직접 겪는 것만으로도 두 번째라. 스스로 잘못을 저지른다는 자각은 있는지 모르겠소.”

해원기의 개문견산(開門見山)하는 직선적인 질문 따위 들리지도 않는 듯.

여전히 자신의 말투로 줄줄 늘어놓는 노문기의 말에,

“잘못을 저지른다는 자각?”

이번에는 정록이 의아하게 중얼거리며 오소민과 하일웅을 번갈아 본다.

용문세가의 지낭 오보혜를 호송했던 일은 들어봤고, 이번 일월표객의 비표는 아직 뭔지 모른다.

자신을 녹림으로 보는 안목도 희한한데 이 두 가지 일이 어째서 잘못이요, 또 해원기가 왜 자각해야 하는지.

정록만이 아니라 다들 얼굴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도통 알아먹기 어려운 소리.

말없이 쳐다보는 해원기에게 노문기가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찼다.

“쯧, 하나는 세정문란(稅政紊亂), 또 하나는…… 쉬운 말로 해야 알려나. 전에는 역당의 재원(財源)을 끊지 못하게 했고, 이제는 수괴(首魁)를 피신시키려 하는 죄를 범한다는 거요. 국기(國基)가 흔들릴 일이거늘, 기껏 알량한 무공으로 국사(國事)를 그르치려 하다니. 참으로 어리석은! 아하, 아니지, 아니야.”

말하면서 감정이 격해지나.

목소리가 커지고 탄식이 더해지다가 갑자기 오만상을 쓰면서,

“신주(神州)의 안녕과 중화(中華)의 정통이 어떻게 되든 아무 상관없다는 거겠지. 그런 식으로 세상을 제멋대로 만들어, 소위 구주정문이라는 자들까지 정도(正道)를 벗어나게 했으니까. 안 그렇소? 절세검왕. 허황한 천명(天命)이나 읊조리는 하찮은 동이(東夷)의 후손이여.”

이를 가는 것처럼 거친 음성.

등진 동굴이 놀랐는지 웅웅 울어댄다.

이게 노문기의 대답이었나.

해원기의 눈썹이 돌이라도 매단 양 무겁게 내려앉았고, 동굴의 울림만이 공터를 맴돌았다.

생각지도 못한 얘기에 다들 얼이 빠졌는지 잠시 적막이 흐르더니,

오소민이 먼저 헛바람을 내뿜었다.

“허, 세정문란의 죄? 용문세가와 흥륭상단이 역당의 재원이라.”

말이 되는 소리냐.

정록도 시동으로 꾸민 머리를 갸웃갸웃.

“나라의 기틀을 흔드는 대역무도한 사건이라니. 그럼 우린 국사범(國事犯)인감?”

얼토당토않은 과장이라기엔 규모가 너무 크잖아.

이제껏 입을 열지 않던 하일웅조차 눈살을 찡그렸다.

“정도가 무엇이기에? 지금이 무슨 원말(元末)도 아니고.”

원(元)의 통치를 몸소 겪은 나이는 아니지만, 노문기의 말은 딱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논지.

그러면서도 모두의 시선이 절로 해원기를 향하는 건,

동이의 후예라는 말 때문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해원기는 그저 노문기만을 볼 뿐.

“그래서 동창과 손을 잡았소?”

똑같은 목소리로 다시 한번 묻는다.

이 반문에는 노문기도 조금 황당해졌다. ‘그래서’라니. 자기가 얘기한 것 중에 뭘 가리키는 건지.

목을 가다듬었다.

“어흠, 동창이 물론 행사에 과실이 적지 않지만, 그 또한 어쩔 수 없이 택한 방법이요. 황실의 적통(嫡統)이 바뀌긴 했으나 천하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부득이한 일. 바탕을 다지고 뿌리를 굳혀야 할 때, 난신적자(亂臣賊子)가 틈을 노리고 고개를 쳐드는 법이니 이를 일거에 제거해야만 하지. 참초제근(斬草除根)이요, 발본색원(拔本塞源)하려는 고심이 동집사창을 세우게 한 동기랄까. 물론 내관들이 맡기엔 어려운 일이지만, 그만큼 과해졌을 때 바로잡기도 어렵지 않으니까. 동창과 손을 잡았다라, 어처구니없는 얘기군. 내가 유문(儒門)을 정리하고 조야(朝野)에 걸친 요운(妖雲)을 날려버릴 결심을 한 게 기껏 내관 때문이라고 보이오? 다들 웅풍대주루에서 규찰사가 한 말을 들었을 텐데?”

칙명순안사.

도어사(都御史)를 능가하는 직위를 황제에게 직접 받았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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