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장 납롱인심(拉攏人心) (4)
비표는 강호에서 흔히 사용하는 은어.
당연히 표국에서 많이 쓰이는 말이지만, 표물을 노리는 녹림뿐 아니라 거지와 장거리 쾌체도 무슨 뜻인지 안다.
표물이 뭔지 모르고 계약하는 표행. 자칫 좋지 않은 물건이거나 나쁜 일에 연관될 우려가 있어서 그다지 환영하진 않지만, 그만큼 보수는 일반 표행의 몇 배.
물론 일월표객이 보수 때문에 비표를 받았을 리 없고,
또 보표가 주업종인 이상 이번의 대상은 상당히 중요한 인물일 것이다.
정록이 잠깐 멈췄던 말을 이어간다.
“강호와는 기질이 다르지만, 소위 대내무림이라고 칭하는 자들이야. 해 형에게 일패도지해서 쥐구멍에 숨었다 쳐도 어떻게든 자기들끼리 만회하려고 하겠지. 동창과 이십사아문의 내분은 잠시 젖혀두고서. 더구나 육신지궁의 소식도 지금은 전해졌다고 봐야 해.”
은허에선 칠성검 서문창의 등장으로 싸움을 멈추고 물러났다.
그런 해원기가 계택에 숨겨놓은 육신지궁에 또 나타났다.
동창의 밀각과 이십사아문의 일부분이 서로 다른 궁리를 했어도 똑같이 손해를 본 결과.
외부에 강대한 적이 있으면 내부가 힘을 합치기 마련. 허황된 겉치레만 내세우던 교활한 내시들이라면 그간의 분란도 슬쩍 덮어둘 만하다.
오소민이 진지한 표정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해 형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한다고 여기겠지. 더구나 지금 저쪽은 우두머리가 너무 많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의견을 통일하는 데도 애를 먹을걸. 한데 어울렸어도 속마음은 전부 다를 테니까. 음, 역시 이상해. 여기에 비표를 노리고 노문기가 왔다는 건 어울리지 않는다고.”
이상하다.
동창에선 육학사의 수보가 이끄는 전력이, 이십사아문에선 태감과 국감들이. 운해신조경의 마지막에 조화부인과 함께 나타났던 자들은 어디에 속하는지 모르지만,
금의위 대영반이란 자도 등장했었다.
강호무림이 흑백 양도로 나뉘고 구주정문이란 이름으로 구분하듯이, 대내무림도 내부적으론 서로 경쟁하고 다투는 분위기일까.
여기에 칙명순안사라는 노문기까지.
총명한 오소민도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
해원기가 정록과 오소민을 차례로 보면서 입을 열었다.
“이따가 약정한 곳에 가보면 좀 더 확실해지겠지. 하 대협의 말대로 조금 쉬도록 하세.”
“알았네.”
“그럼 작은 방은 내가 쓰지.”
사람은 쇠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제는 정말 휴식을 취해야 할 때, 오소민이 잽싸게 안쪽으로 향했다.
유시(酉時)가 되기 전에 이수화점을 떠난 일행은 넷이 되었다.
길 안내라는 명목으로 기어이 동행한 하일웅. 정록이 웃는 낯으로 곁에 붙었다.
“회계가 아니라 주방을 맡으셨던 거 아닙니까? 배가 꽉 찼는걸요.”
출발하기 전에 먹은 저녁. 평범한 요리가 전부였지만, 솜씨가 훌륭해서 모두 양껏 즐겼었다.
칭찬에 하일웅이 껄껄 웃는다.
“허허허, 다 근처에서 사 온 거요. 물론 내가 맛에 좀 까다롭긴 해서. 대주루의 요리사도 직접 뽑았었지만. 장방이란 그런 일이거든.”
“하긴, 대주루라고 건물만 그럴듯하게 꾸미고 음식은 형편없는 곳이 많지요. 장안에서도 오래된 맛집이라고 해서 몇 군데 가봤는데 영.”
“음, 점점 그렇게 돼가는 것 같군요. 겉만 번드르르, 실속은 없는. 세상 모든 일이 다 그렇지만, 음식에도 공을 들여야 하지. 사람이 먹고 마시는 것이잖소. 그런데 그저 남한테 보이려고 사치하고. 쯧쯧.”
“음식만 그런가요, 뭐. 옷 한 벌 짓는데 얼마나 비싼데요. 사내나 계집이나 전부 나풀나풀, 자기가 신선이나 선녀인 줄 알죠. 허리엔 반질반질한 옥돌을 박은 띠, 그 띠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검을 매달아서…….”
“허, 그런 검이 뽑힌 걸 봤소?”
“하아, 그게 검입니까? 대장간에서도 내다 버릴 다 썩은 쇳조각을 대충 붙여놓은. 뽑히기라도 하면 다행이죠. 금실 은실 수놓은 검집 속에서 녹이 슬어 딱 붙어버리잖아요. 참, 그러고 보니 하 선배의 칼. 요새는 보기 드물군요.”
정록의 시선이 왼손에 쥔 감산도에 머물자 하일웅이 눈을 끔뻑했다.
“감산도?”
산을 쪼갠다는 이름처럼 상당히 큰 칼. 워낙 두껍고 무게도 많이 나가 중병(重兵)이라 할 만하다.
“감산도도 그렇지만, 허리나 등에 묶지 않고 들고 다니시잖아요.”
근래에 병기를 휴대하는 게 유행이지만, 다들 멋진 장신구로 여겨 허리띠에 매달 뿐.
하일웅처럼 큰 칼을 손에 들고 다니는 이는 거의 없다.
“허허, 난 처음부터 이렇게 배웠소이다. 양의도법(兩儀刀法)의 기본이니까.”
“양의도법이면…….”
어느새 하일웅의 오른쪽에 붙은 오소민이 눈을 둥그렇게 뜬다.
“일원검(一元劍), 양의도(兩儀刀), 삼재권(三才拳), 사상봉(四象棒)의 그 양의도?”
하일웅이 머리를 크게 끄덕였다.
“바로 그 양의도법이오.”
무슨 특별한 무공 법식이 아니다.
하나로 모아가는 검, 서로 뒤집혀 이어지는 도, 상중하를 두루 때리는 주먹, 사방으로 뻗는 몽둥이.
무공을 익혀 병기를 고를 때 가장 먼저 익히게 되는 기초다.
과거에 작은 표국의 표사를 하기엔 지나칠 실력을 지녔다는 연조도객. 웅풍대주루에서 보였던 당당한 모습과 해원기가 인정할 정도의 경지라고 해서 희귀한 절학을 익혔다고 여겼는데.
그냥 양의도. 그걸 굳이 양의도법이라고 자신 있게 밝힌다.
정록과 오소민이 뜻밖이라고 이것저것 묻는 것도 당연하지만,
홀로 뒤에서 따라가던 해원기가 조용히 미소를 머금었다.
‘과연 하 대협은 이미 상승의 경지에 들었구나. 서로 뒤집혀 이어지는 도리로 법식을 이루었으니. 악 형이 있었다면 큰 도움을 받았을 것을.’
문득 악송령이 떠올랐다. 하일웅은 실로 담도(膽刀)의 화신이라고 할 만한 경지에 이르렀기에.
그러고 보니 낙양에서 헤어진 이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경사의 현도관으로 가려고 혼자 나선 길.
금방 도착할 줄 알았는데 계속해서 사건에 휘말렸다. 오소민이 동행하지 않았다면, 또 옛 인연과 새 친구를 만나지 못했다면 얼마나 헤맸을지.
지금도 하일웅이 함께 해주지 않나.
그러나,
마치 해원기가 경사로 가는 걸 싫어하는 것처럼 계속해서 일이 생긴다.
공산백운동에 과연 노문기가 나올지, 나오지 않았다면 가까운 조가보를 무사히 탐색할 수 있을지.
형대에서 한 시진 남짓 걸리는 공산백운동, 다시 한 시진 정도 더 가면 석가장이고.
경사는 또 석가장에서 세 시진쯤 거리다.
장안에서 낙양까지 쉬지 않고 달렸던 기억. 지금이라도 전력을 다하면 현도관까지 하루도 걸리지 않을 터.
해원기가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현도관의 강 사부와 조원록이 염려되어 서두른 여정이었지만, 눈앞에서 이어지는 일을 돌보지 않을 수 없다.
사부가 구한 세상을 지켜야 한다는 거창한 의지보다,
가까운 이들과 무고한 사람들이 해를 입지 않길 바라기에.
밥 한 끼, 술 한 잔 나눴다고 사람이 친해지진 않는다.
무인이라면 역시 무공 얘기가 재미있는 걸까.
형대를 벗어나 대삼림에 접어들자 오소민과 정록은 하일웅과 거의 허물없이 얘기를 나누었고,
덕분에 하일웅은 당세의 형세를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겨울로 접어들면서 해가 일찍 떨어져 눈앞의 대삼림은 마치 검푸른 바다 같았고,
걸음을 멈춘 하일웅이 해원기를 돌아보았다.
“여기서부터가 실제 대삼림 안이고, 보기와는 달리 지형이 상당히 험해서 조심해야 합니다. 이런 곳에 보(堡)를 지었으니 어마어마한 인력과 물자가 들었을 텐데. 우리가 가는 공산백운동은 조가보에서 조금 오른쪽, 꽤 알려진 명승지라 멀리 돌아서 다시 관도로 나가는 길이 있습니다.”
손가락으로 공중에 반원을 그리는 건 그만큼 돌아간다는 뜻.
집을 지으려면 먼저 길을 뚫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과 자재가 들어갈 수 있으니까. 조가보는 바로 공산백운동까지 난 길을 이용해 대삼림 안에 지어진 듯.
해원기가 바다 같은 대삼림을 보며 방향을 가늠했다.
“가능하면 곧장 갔으면 합니다. 이왕이면 조가보를 거쳐서.”
오소민과 정록이 뭐라고 하기 전에 하일웅이 바로 몸을 돌리더니,
“그게 좋겠군요. 시간은 충분하니까.”
말이 끝나자마자 맨 앞에 보이는 커다란 나무 위로 몸을 솟구친다.
특별한 것 없는 간결한 신법.
“내가 밟은 곳만 따르시오.”
짧은 말과 함께 또 웅크렸던 몸을 날려서,
해원기 들이 바로 움직여야만 했다. 유룡개라는 외호를 가진 오소민이나 녹림의 대탐자로서 고화문과 대관원의 기예를 배운 정록은 당연히 뛰어난 경공을 지녔고,
해원기라면 아예 대삼림 위로 날아갈 수 있었지만, 군소리 없이 하일웅의 뒤를 따랐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기까지 한 하일웅의 움직임이 평범해 보이지만, 평범하지 않다는 걸 다 같이 느꼈기에.
[말씀은 잘 하시지만, 어쩐지 악 형이 생각나네.]
오소민의 전음에 해원기가 또 씩 웃었다.
줄곧 하일웅이 앞장서고, 그 좌우에는 오소민과 정록. 해원기는 뒤에서 따르는 형태였는데.
경공을 펼치자 하일웅의 바로 곁에 해원기가 어깨를 나란히 해서.
거침없이 나뭇가지를 박차고 나아가던 하일웅이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형대에서는 향도(嚮導)를 좌우에서 지키고, 뒤를 방비하는. 대삼림에 들어와선 또 거꾸로. 세 사람은 이미 말하지 않아도 뜻이 통하는구나.’
길 안내를 맡은 하일웅을 보호하면서, 고을에선 뒤를 받치고 삼림에선 앞을 경계한다.
아직 서른이 되지 않은 젊은이들. 그러나 그 이름에 걸맞게 뛰어나고, 또 깊은 신뢰로 이어졌다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절세검왕, 개방의 순행장로, 녹림장관의 대탐자.
이들을 이끌고 가는 하일웅은 젊은 시절의 호기가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런데.
“하 대협, 잠깐.”
막 몸을 날리려고 웅크린 하일웅을 멈추는 해원기.
오소민과 정록이 곧장 이르자 해원기가 캄캄한 앞을 가리킨다.
“인기척. 수는 적지만 상당한 자들이 모여 있네.”
하일웅이 비취처럼 기이한 광채를 흘리는 해원기의 두 눈을 신기하게 보다가 미간을 좁혔다.
“조가보는 동쪽으로 정문을 냈으니까 그 앞의 공간일 겁니다.”
보는 돌로 벽을 쌓아 올린 작은 성. 진짜 해자를 만들진 않아도 비슷한 형태를 꾸미고 정문에는 돌사자 같은 장식을 놓는다. 대삼림 안이라도 정문 앞에는 어느 정도의 공터를 만들었을 터.
해원기만이 알아챈 인기척은 조가보 정문 앞이다.
“두 사람은 하 대협과 함께 천천히 접근하게. 내가 먼저 가보겠네.”
오소민과 정록을 둘러본 해원기의 신형이 단번에 흐릿해지더니 그 자리에서 사라진다.
사술이라고 여길 정도의 부신수영.
눈을 부릅뜨는 하일웅에게 오소민이 쓴웃음을 지었다.
“절세검왕이잖아요.”
엄청난 크기의 거목이 빽빽하게 엉킨 대삼림에 갑자기 탁 트인 공간이 나오고,
커다란 돌사자 두 마리가 옆에 세운 석등의 불빛에 그림자를 일렁거린다.
그 앞에 선 다섯.
왼쪽 돌사자 앞에는 밀각육학사의 우두머리인 수보와 각주인 첨유진이,
오른쪽 돌사자 앞에는 사마대가와 상선태군이 마치 인사라도 하는 것처럼 양쪽으로 늘어섰고.
그들 앞에 조금 떨어져서 문사건에 심의를 걸친 인물이 차분히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부신수영으로 가장 가까운 나무 사이에 몸을 붙인 해원기가 바로 알아보았다.
‘노문기.’
곡부에서 헤어졌을 때의 낙척문사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 양쪽 앞에 선 수보와 사마대가를 번갈아 보며 미소를 짓는다.
“어명을 받을 때 제독태감이 은근히 부탁한 게 생각나 잠시 들러봤을 뿐이외다. 첩형대인이나 공공께서 직접 배웅을 나올 필요까지야.”
수보가 얼른 머리를 조아리고,
“아닙니다. 소관이 불민하여 제때 영접하지 못한 죄를 지었습니다. 순안사께서 여기까지 온 줄도 미처 몰랐으니.”
사마대가 또한 안타까운 표정.
“이쪽은 이미 저희가 제독태감의 명으로 직접 살핀 터라. 굳이 순안사께 수고를 끼치지 않았도 되었을 것을. 너무 바쁘신 게 아닌가 염려됩니다.”
공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자세.
노문기가 미소를 지은 채 가볍게 혀를 찼다.
“쯧, 그래도 이왕 와서 보았으니 모른 척할 수도 없구려. 내 일이 끝나는 대로 첩형을 도와 도적 떼를 소탕하도록 하겠소. 그러니.”
잠깐 말을 끊으면서 사마대가와 상선태군을 차례로 훑는 시선.
“두 분 공공은 조속히 궁으로 돌아가시구려. 신분을 감추느라 꽤 신경은 썼소만, 어마감과 상선감의 두 분이 꾸민 차림새는 영 어색해서. 어흠.”
미소와 달리 눈빛은 차갑고 말에는 뼈가 들었다.
공공이라고 높여 부르긴 해도 어차피 내시. 노학자 같은 사마대가와 노부인 모습의 상선태군이 눈에 거슬리는 모양이다.
사마대가와 상선태군의 표정이 확 굳어졌지만, 환관은 본디 내심을 숨기는 재주가 뛰어나다.
“삼가 순안사의 가르침을 받자옵니다!”
둘이 목소리를 높이며 허리를 숙이니 노문기가 의젓하게 읍한 손을 흔들곤 몸을 돌렸다.
“그럼.”
휘적휘적 걸어가는 그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머리를 조아린 수보와 첨유진, 허리를 숙인 사마대가와 상선태군. 누구도 꼼짝하지 않았다.
어지간히 겁을 집어먹은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