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장 납롱인심(拉攏人心) (3)
웅풍대주루에서 난리가 났던 아침나절,
진시(辰時)가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중심가로 나올 수 있었던 백성들은 창과 문이 다 부서진 광경에 서로 눈짓만 나누며 흩어졌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몰라도 다들 끼어들면 위험할 거라는 눈치는 있어서.
입구의 문틀에 붙은 작은 종이가 궁금하긴 해도,
뭐라고 쓰였는지 확인할 엄두는 내지 못했고,
그래서 그 작은 종이를 누가 떼어갔는지도 보지 못했다.
- 금일 술시(戌時), 공산백운동(崆山白雲洞).
관병들이 스무 명 남짓 나와 조사랍시고 주위를 차단한 건 한참 뒤였다.
중심가에서 조금 떨어진 좁은 골목.
작은 점포가 늘어서서 사람의 통행이 꽤 잦은 곳이지만, 점심때는 아무래도 왕래가 적을 수밖에 없고.
그런 이유로 오시(午時)에는 아예 문을 닫고 쉬는 가게도 적지 않았다.
헌 옷가지와 신발, 낡은 가재도구 따위를 파는 이수화점(二手貨店)은 평소에도 그리 장사가 잘 되는 곳이 아니어서.
오늘은 아예 문을 열지도 않았다.
헤진 이불 따위가 사방에 잔뜩 쌓인 이수화점의 내부,
하일웅이 장탄식과 함께 자신의 흰 수염을 쓰다듬었다.
“하아, 세상이 많이 변했지요. 강호의 인심도 변해서 의(義)가 잊힌 지도 이미……. 이거, 나이 먹었다고 쓸데없는 소리를. 쯧쯧.”
쓰다듬던 자신의 흰 수염이 안타까운 듯, 잠시 표정이 어둡다가 얼른 허리를 펴고.
“제대로 쉬지 못한 분들을 모시고 이야기가 너무 길었습니다. 안쪽으로 작은 방이 하나 있으니 잠시라도 눈을 붙이시지요. 저는 오 국주에게 들렀다가 오겠습니다. 한두 시진 걸릴 겁니다.”
손을 모아 둘러보는 정중한 인사.
해원기뿐 아니라 오소민과 정록 모두 얼른 일어나 답례를 취했다.
“예. 감사합니다.”
사의를 표한 건 해원기 혼자.
오소민과 정록은 그저 읍하듯 머리까지 숙여야 했다.
하일웅이 떠나자마자 목덜미를 문지르며 길게 숨을 토하는 정록.
“후유우, 이렇게 숨 막히기는 오랜만이네. 연조도객이라고 해서 열혈의 호걸인 줄 알았더니 엄청 중후한 양반이잖아. 소구인도 꼼짝 못 하고 개방 장로 시늉을…….”
“으잉? 시늉? 나야 본래 장로라고. 순식간에 의젓한 대탐자로 둔갑한 네가 웃겨서 참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나 참.”
“둔갑이라니. 누가 들으면 요괴인 줄 알겠네.”
오소민과 또 툭탁거리기 시작해서,
어르신이 자리를 비우면 이때라고 애들이 떠드는 것과 똑같다.
그 옆에서 해원기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해원기의 정체를 알고는 뛸 듯이 기뻐하던 하일웅. ‘풍화절세, 응양구천’의 소문을 잊지 않고 절세검왕의 출현을 기대했던 심정을 여실히 드러냈지만,
일단 자리를 옮긴 후에는 옛 기억을 떠들며 회포나 풀려던 늙은이가 아니었다.
사마의 난세가 끝나고도 한결같이 생업을 일으키려 애썼고, 표국이 맞지 않는 오건민을 위해 업종을 바꾸어 주루의 장방 노릇도 마다치 않았다.
어려서 입었던 은혜를 갚기 위해 쇠락해가는 용위표국에 들어가 혼자 험한 일을 도맡았던 사람.
남들처럼 입신양명할 욕심이 없지 않았을 테고, 또 그럴 실력도 갖추었건만.
수십 년을 한결같이 보은으로 지냈으며, 현실에 파묻혀 의로움을 잊지도 않았다.
일월표국의 접수처를 맡은 것도 일월표객이 옳은 일을 하기 때문.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아무런 이익이 없어도.
‘불긍기공, 불벌기능.’
굳이 팔자의 언약을 들먹일 필요가 있을까. 하일웅은 스스로 고협(古俠)의 삶을 살고 있었으니.
사부와 탁 소숙에게서 배웠다는 그의 말은 깊은 감동을 주었고.
‘그러면서 스스로 수련을 쉬지 않았으리. 사부님이 의기남아라고 칭찬하신 그대로다.’
육십이 넘은 나이. 그러나 해원기가 나서지 않았어도 규찰사가 거느린 서른 명의 문사를 능히 감당했을 것이다.
해원기가 감았던 눈을 떠 구석에 아무렇게나 기대어 놓은 큰 칼을 보았다.
하일웅의 애병인 감산도(坎山刀). 웅풍대주루에서는 만약을 위해 정자 구석에 숨겨놓았었다.
관병과의 충돌이 불필요한 살상으로 번질까 꺼내지 않았다고 했으나, 그만큼 맨손으로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는 뜻.
충분히 느낄 수 있었던 웅후한 내공과 숙련된 경지는 해원기를 부끄럽게 한다.
무(武)가 도(道)라는 것.
해원기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
“거봐. 해 형도 이제야 숨통이 트여서…….”
“에잇, 좀! 어째 갈수록 눈치도 없어져서. 음, 괜찮아? 하 대협 얘기 중에 걸리는 게 있어?”
오소민이 정록을 때릴 것처럼 손을 들었다가 얼른 해원기에게 궁금한 얼굴을 돌렸다.
처음 인사를 나눈 하일웅은 개방의 순행장로와 녹림장관의 대탐자에게 지나칠 정도로 깍듯했다.
문파와 지위가 어떻든 무림의 선배. 그래서 대화가 주로 하일웅에게서 듣는 식으로 진행되었는데.
해원기가 표정을 고치고 오소민과 정록을 번갈아 보았다.
“아니, 두 사람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네.”
웅풍대주루를 찾았던 목적 외에 새로운 소식도 있어서 함부로 판단하기 어렵다. 똑똑하고 기민한 벗이 같이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오소민이 콧등을 찡긋거리다가 먼저 입을 연다.
“그래. 여기서 하 대협과 만난 게 큰 의미가 있는 것 같아. 하나씩 정리해보자고. 형대를 중심으로 주변 고을에 십여 년 전부터 무관이 많이 생겼고, 그 무관들의 우두머리가 바로 풍운무관. 실제로는 관아에 있는 무관이지. 선발을 거쳐 풍운무관에 이름을 올리면 그때부터 적으나마 매달 돈을 주고, 굳이 무과(武科)를 거치지 않아도 관직에 나갈 수 있다고 했으니까. 그 덕분에 건달패가 확 줄어서 백성들이 환영하는.”
“건달패를 뽑았다는 거잖아. 토호(土豪)니까 재산도 있는 놈들인데.”
슬쩍 끼어드는 정록은 본체만체.
“동창이든 이십사아문이든 인원을 그런 식으로 충당했겠지. 그것보다 백성들이 환영했다는 점에서 조양신문이 떠오르더군. 이게 태안과 형대뿐일 리 없고, 태안과 형대 같이 무림에서 조금 떨어진 지역에서 벌어진 게 아닐까 싶어.”
“환심을 산다?”
해원기의 반문에 힘이 들어가고, 정록이 무시당하든 말든 바로 말을 받는다.
“자고로 무림은 관권에 저항해 백성이 기댈 언덕이었지. 호오, 요런 식으로 슬금슬금 무림을 흡수해버리면……, 잘하면 관에 속한 녹림도 나오겠어. 그런 관림(官林)이라고 부르려나?”
우스꽝스러운 비아냥이었으나, 정록의 표정은 전혀 밝지 않다.
백성의 환영을 받아 그 환심을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녹림에 속한 정록은 그 위험성을 단박에 알아챈 듯.
오소민도 미간을 찡그렸다.
“무관만이 아니야. 여러 가지 겪었잖아. 구란와자며 수차제며. 근래에 특별한 이유 없이 사치와 향락이 유행하는 것도. 쯧, 일단 다음으로 넘어가지. 조가보의 위치는 형대 북쪽의 대삼림이지만, 왕래한 이도 없고, 내부의 상황도 전혀 알려지지 않았어. 경공을 써도 한 시진이 넘는 거리면 거의 형대와 석가장의 중간에 해당해. 완전히 외부에 감추어진 장소, 즉 은허에서 패주한 자들이 모이기에 적합하다는 거지. 그래서 하 대협도 만날 지점을 근처로 정했고.”
대삼림이란 명칭처럼 외부인이 함부로 들어가면 길을 잃기 일쑤.
조가보와 가까우면서 눈에 뜨이는 곳이 필요하다.
그렇게 공산백운동으로 결정되었고, 그 지형에 관한 설명을 자세히 들었다.
오소민이 머리를 갸웃하며 말을 이었다.
“묘한 게 아까의 규찰사 무리가 풍운무관, 즉 관아에서 나왔다는 점이야. 역사가 오래된 고을이니만큼 웅풍대주루의 인맥이 두루두루 퍼져서 일찌감치 습격의 조짐을 확인했다지. 조가보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처럼.”
정록이 일부러 머리를 오소민 앞으로 내민다.
“조양신문인지 신유문인지 그 노문기라는 작자, 완전히 따로 노는 거 아냐? 해 형이 얘기한 그, 칠성검인가 하는 대영반도 동창 밑이나 닦는 금의위 같지 않았다며.”
이렇게까지 봐달라는데.
오소민이 대뜸 콧방귀로 물리치면서,
“흥, 칙명순안사라고 했잖아. 사칭이든 뭐든 칙명으로 순안사에 임명하려면 황제가 허락하는 과정이 필요해. 자세히는 몰라도 조정이 환관 수중에 떨어진 지 한참 되었으니, 정상적인 순서를 밟았을 리 없지. 뭐, 한림이 칙명순안사가 되는 것 자체가 비정상이지만.”
도끼눈이 정록을 내리찍는데.
해원기가 적시에 손을 들어 막았다.
“잠깐. 우리 문제만 따지지 말고. 하 대협이 먼저 얘기해 준 일월표객의 일. 그게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아.”
도끼에 찍힐 뻔한 정록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짓고.
오소민도 눈을 깜빡이며 입술을 깨문다.
집중이 지나쳐 주변을 잊는 경우. 그런 실수를 했다.
하나하나의 사건을 여러모로 해석하는 능력은 없다.
그런 건 머리가 기민하게 돌아가는 영민한 이들이나 가능할 터.
그 대신 ‘고구마 대장’에겐 전체를 한꺼번에 보려는 마음이 있었다.
하일웅을 만나 본래 원했던 정보를 얻으면서도, 웅풍대주루에서 벌어진 사건의 발단을 잊지 않았다.
일월표국의 접수처를 찾아 일월표객을 만나고, 정보도 일월표객에게서 얻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 마주친 칙명순안사의 무리들.
예광이란 자가 분명히 일월표객을 언급하는 걸 들었었다. 그들의 목적은 일월표객, 웅풍대주루에 쳐들어와 주인인 오건민과 방장인 하일웅을 집포하는 건 전부 일월표객을 잡기 위함.
조야에 얽힌 역당이 불측한 일을 도모하고, 이를 감찰해야 할 유사조차 휘말린 정황이라고 했었다.
일월표객은 역당인가, 아니면 감찰해야 할 유사에 휘말린 건가.
어디서 일월표객의 접수처가 웅풍대주루란 걸 들었을까.
오소민이 머리를 거칠게 흔들었다.
“깜빡했었네. 잠깐만 있어 봐. 그간의 소문이나 화산에서 들은 바로는 일월표객이 맡았던 보표 일이 대부분 조정 대신의 호위와 피신이었지. 동창에 의해 억울하게 역적으로 몰린. 이게 불측한 일을 도모하는 역당에 해당하는 부분이야. 하 대협은 일월표객이 얼마 전에 급박한 표행이 들어와 북쪽으로 갔다고 했어. 그것도 상당히 중요한 비표(秘鏢)라 하 대협에게도 사정을 밝히지 못했다고. 일종의 비합전서(飛鴿傳書)로 접수된 것도 특이한 일이라서, 음?”
비합전서는 비둘기로 서신을 보내는 것.
보낸 곳과 목적지를 기억하는 비둘기가 왕복한다.
해원기들이 동창의 근거지를 찾는다는 걸 듣고서는 하일웅이 얼른 얘기를 그쪽으로 돌렸기에 일월표객에 관한 내용은 그 정도로 그쳤으나.
오소민은 그 짧은 내용을 정확히 기억했고, 정록 또한 주의할 부분을 금방 짚어냈다.
“비합전서를 따라왔다는 건가? 그럼 누가 어디서 보냈는지 미리 알아야.”
“그래. 어디로 가는지 확인했겠지. 그리고 웅풍대주루가 어떤 곳인지 알아봤을 거야.”
“하지만, 일월표국의 접수처라는 걸 금방 알아낼 수가…….”
일행천리표와 월영객, 두 사람만으로 이루어진 표국이다. 사람을 지키는 보표 일을 대놓고 떠들었을 리 없고, 더구나 동창의 눈엣가시인 상태에서 접수처를 노출했을까.
면관의 주인장도 몰랐거늘.
오소민이 찡그린 얼굴로 해원기를 보았다.
“과거를 당사자도 아니면서 안다? 동창이 강호의 내막을 샅샅이 조사해서 기록했댔지.”
오소민과 같이 들었던 얘기. 해원기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용호방과 풍운책.”
흥륭전장에서 황륙이 알려주었었다. 당금 무림의 현황인 용호방과 이전의 역사를 기록한 풍운책.
규찰사 무리가 일월표객을 잡으려고 웅풍대주루로 쳐들어오고, 또 웅풍대주루의 장방인 하일웅이 연조도객임을 알았던 게 전부 풍운책에 의했다면.
소위 칙명순안사라는 노문기는 동창과 이어질 수밖에 없다.
해원기와 오소민의 시선이 어지럽게 교차하는데,
정록은 조금 더 기본적인 문제를 들먹였다.
“보표를 청한 비둘기를 쫓은 건 일월표객이 목적이라기보다 그 비표일걸. 그런데 동창이 굳이 그 칙명순안사를 동원할 이유가 있을까? 아무리 해 형에게 큰코다쳤다고 해도.”
은허에서, 또 육신지궁에서.
시간상으로 맞지 않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이제까지의 동창과는 그 행태가 다르다. 당두와 번역으로 이루어진 자체의 무력, 금의위라는 수족, 반룡령이나 하북팽가 같은 주구들을 부릴 여력이 충분하잖나.
심지어 태항산 위에 있다고 거짓으로 퍼뜨린 녹림장관을 친답시고 주변 지역에서 활동하던 자들을 끌어모으는 바람에 대영반까지 등장했었다.
해원기와 오소민이 동시에 정록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 또한 소홀했던 점이다.
동창이 밀각의 거의 모든 역량을 은허에 쏟아 부은 이유, 이십사아문 내부에 동창과는 다른 길을 가는 집단, 육신지궁을 설치한 목적과 마지막에 나온 작은 두꺼비.
아직 하나도 해답을 구하지 못했는데, 여기에 또 일월표객의 문제까지 더해졌다.
어째 경사로 가는 길이 점점 멀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