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322화 (322/410)

제81장 납롱인심(拉攏人心) (2)

한 세대 전이었을 게다.

검을 쥔 청년과 극을 든 소년, 의형제의 소문이 강호에 짜하게 퍼졌던 때는.

그 청년은 천하제일검으로 추앙받았고, 그 소년은 중원제일기병이란 예칭을 얻었는데.

남을 시기하고 등 뒤에서 헐뜯기 좋아하는 못난이들은 어디에나 있는 법.

그때도 천하제일검과 중원제일기병을 흉보는 말을 만들어냈었다.

과언단행(寡言斷行), 검선기의(劍先其意).

말이 적고 행동만 하는데 검이 그 생각보다 앞선다. 말도 제대로 하지 않고서 대뜸 검을 들이댄다는 천하제일검.

기지무극(寄志武極), 설리어병(舌利於兵).

뜻을 무의 극치에 두었으나 혀가 병기보다 날카롭다. 무도에 평생을 바쳤다더니 상대를 병기보다 말재주로 찍어누른다는 중원제일기병.

천하제일검은 무식한 칼잡이, 중원제일기병은 시비나 거는 건달패라고 욕한 거다.

그중에서도 싸움이 시작되면 언제나 먼저 나오는 저 설리어병.

그냥 말재주가 아니라, 듣는 입장에선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이 뒤집힐 것만 같은 도발이 우박처럼 쏟아지는 격이라.

욱하는 기분에 함부로 덤벼들기 일쑤. 그러다가 제 실력의 반도 내지 못하고 흠씬 두들겨 맞은 고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니.

오죽하면 중원제일기병에겐 따로 풍사귀(瘋死鬼), 완전 미친놈이란 노골적인 욕설까지 더해졌을까.

천하제일검의 외호는 고검협, 중원제일기병의 외호는 바로 천극이었다.

방립을 쓰고 피풍을 걸친 채 검대를 풀어 꼼꼼하게 묶는 해원기에게서,

하일웅은 고검천극을 한꺼번에 보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과연. 예광이라는 규찰사가 버럭 고함치며 몸을 날린다. 좌우에 문사 차림의 수하가 서른이나 되는데 혼자서.

“이놈!”

바람에 날리듯 유연하면서 빠른 경공, 해원기가 올라선 담장까지 이십 장은 족히 될 거리를 단숨에 좁혀들지만,

이미 검대를 묶은 연검대초가 어느새 정수리 위로 떨어졌다.

펑.

“컥.”

엉겁결에 손을 들어 막긴 했으나 전신이 부서지는 듯한 격통. 덤벼들던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튕겨 나가서는 엉덩방아를 찧는다.

갈기갈기 찢겨나간 평정건, 이마에 두른 홍책이 흘러내리는 예광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고 들어 올렸던 두 손을 내리지도 못하고 벌벌 떤다.

쇠몽둥이로 맞은 것 같다. 바로 일어나지도, 신음을 토한 입을 닫을 줄도 모르고 꼴사나운 모습 그대로.

그제야 늘어섰던 문사들이 정신을 차렸다.

“뭐, 뭐가? 규찰사!”

“규찰사를 지켜!”

“모여, 모여라.”

그래 봤자 당황으로 허둥대는 한심한 꼬락서니라서 서른 명이 이리 뛰고 저리 몰리고 어쩔 줄을 모른다.

반응을 보던 해원기가 한숨을 내 쉴 정도로 한심스러운 모습.

연검대초의 고검을 쥐고 훌쩍 아래로 내려섰다.

‘차라리 제라섭풍으로 한꺼번에 혼을 낼 걸 그랬다.’

조양신문을 아는 게 분명해서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추었으리라 예상했건만, 눈에도 차지 않는 오합지졸들.

괜히 입 아프게 떠들었다는 후회까지 든다.

그런데.

예광 바로 오른쪽에 있었던 문사가,

“쯧!”

가볍게 혀를 차는 소리에 귀가 쨍하니 울리고,

허둥거리던 서른 명이 마치 바늘에 찔린 것처럼 동시에 움찔하며 빠르게 흩어진다.

차차차착.

갑자기 다른 사람이라도 된 양 신속하고 기민한 움직임, 다섯 명씩 둥글게 모인 무리가 다섯이요, 나머지는 예광의 옆에 모였다.

걸음을 옮기려던 해원기의 눈썹이 꿈틀했다.

평범한 얼굴에 수염을 짧게 기른 삼십 대의 문사. 잠심침령에도 특별히 느껴지지 않았던 인물이 이렇게 혀 차는 소리를 날카롭게 내다니.

그러나 이런 상황이 이젠 그리 낯설지 않다.

“우두머리는 따로 있었단 말이지.”

고검을 어깨에 턱 하니 올리면서 시선을 그 문사에게 돌렸을 뿐. 내디딘 발을 멈출 생각은 없다.

다섯 개의 원형을 이룬 스물다섯 명은 아예 보이지도 않는 듯이.

삼십 대 문사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입을 열더니,

“소사제(少師弟)를 일으켜라. 흠, 검을 든 걸 봤으면 일월표객이 아니고, 조양신문을 언급했으니 뻔히 격장법이라고 짐작했어야지. 어이, 그쪽도 검을 뽑지 않는 걸 보면 굳이 피를 보려는 건 아닌 듯한데?”

거침없이 걸어오는 해원기를 응시한 채 목소리를 높인다.

규찰사라고 스스로 신분을 밝힌 예광에게 소사제라고, 또 다가오는 상대를 보고도 상당히 침착한 어투다.

해원기도 선선히 말을 받았다.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그냥 내쫓으려던 거라서. 그런데 진짜 우두머리가 달리 있는 걸 감쪽같이 숨기면서 자못 수련된 모습이구먼. 오인 일조로 다섯 개의 원형이라, 뭔지 궁금하네.”

예광이 당하자 허둥대던 자들. 혀 차는 소리 하나로 딴사람이 되어 정연하게 위치를 잡는 건 평소의 수련이 어떠했는지 보여주는 증거다.

삼십 대 문사가 일부러 말을 걸어 피를 보지 않고 끝내자는 의미를 전했으나, 해원기는 오히려 다섯 개의 원진에 대한 호기심으로 받아넘기고.

저벅저벅.

웅풍대주루 후원을 걷는 발소리가 무겁게 울린다.

주루 안을 살피러 간 오소민과 우회해서 주위를 둘러보는 정록에게서 아직 전음이 오지 않았다.

또한 해원기가 형대로 온 이유. 동창과 이십사아문이 모인 곳을 찾기 위함이 아닌가.

규찰사니 뭐니 하는 이들이 조양신문인지 아닌지는 둘째 치고 집포령을 행하러 왔다면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있을 터.

이대로 놔줄 생각은 없다.

빠른 걸음도 아닌데 금방 십 장으로 가까워지자,

삼십 대 문사의 목소리가 홱 바뀌었다.

“오상전륜(五常轉輪)!”

파파파파파.

역시 그냥 다섯 명씩 원을 그린 게 아니다. 진결의 호령이 떨어지자 다섯 개의 원진이 각기 한 방향으로 돌아가며 해원기를 에워싸고,

후원 가득히 흙먼지가 일기 시작했다.

단번에 해심에 갇힌 해원기. 다섯 개의 원진이 돌아가는 속도가 제각각, 그러면서 또 위치를 조금씩 바꾸어 겹쳐지면서 기이한 기세가 전신을 옭아매려 한다.

무표정한 해원기는 그저 물끄러미 삼십 대 문사만 볼 뿐.

이전에 곡부에서 노문기가 조양도진이란 걸 상대했었다. 그것과 달리 지금 스물다섯의 문사는 전부 맨손이고 구성과 운용도 처음 보는 것.

그렇지만,

“경지영지(經之營之)!”

삼십 대 문사의 입에서 다음 진결이 나오자마자 해원기의 두 발이 거침없이 지면을 밟았다.

두둥.

우렛소리와 함께 지면에 퍼지는 충격. 멀리 떨어진 하일웅까지 흔들릴 파장이었으니 진결에 따라 장력을 모으려던 다섯 개의 원이 어찌 멀쩡할 수 있겠는가.

전부 중심을 잃고 비틀비틀, 개중엔 아예 콩 튀듯 펄쩍거리는 자까지 있어서 손이 제멋대로 나가고 원진이 뭉그러져 하나로 엉켜버렸다.

그 사이로 연검대초가 폭풍처럼, 번개같이 뻗으니.

퍼퍼퍼퍼펑.

“으억.”

“켁!”

“악.”

폭음과 비명이 겹쳐서 그리 오래 가지도 않고. 스물다섯 명이 한꺼번에 나가떨어졌다.

검강도 어검도 아니다.

비록 풍뢰지력이 담겼어도 그저 지유진의 진각(震脚)에 몇 가지 검법을 섞어 펼쳤을 뿐.

어느새 제자리로 돌아와 똑같은 시선을 보내는 해원기가 입맛을 다셨다.

“씁, 역시 영렬전륜진(英烈轉輪陣)을 흉내 낸 거로군. 하지만 영원수(靈猿手), 아니, 미후인(獼猴印)도 익히지 않고서는 무리다. 그것보다…….”

다섯 개의 원진이 뭔지 이미 훤히 알아봤기에 파해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문제는 영렬전륜진.

과거에 이 진법을 창안한 이는 천지일사 제대광이고, 이사모 외에는 진법을 아는 사람이 없다.

제대광에게서 진법을 배운 자. 신유문의 후예다.

삼십 대 문사를 향한 해원기의 눈에서 신광이 번뜩였다.

“노문기라는 이름을 아느냐?”

이제 멀쩡하게 서 있는 자는 삼십 대의 문사와 예광을 부축한 네 명.

예광과 부축한 네 명은 안색이 변했지만, 삼십 대 문사는 평범한 얼굴로 눈만 가늘게 뜨고,

“나도 미숙했군. 귀하는 누구요?”

자책하며 말투를 바꾼다.

비장의 진법을 펼친 수하들이 죄다 나가떨어졌는데도 동요하지 않으니 범상치 않은 자다.

지금의 반문은 인정과 같은 의미. 해원기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 조양신문의 새 문주가 되었다더니. 그는 지금 어디 있는가?”

조규헌에게 들었던 말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도대체 어떤 경과로 이렇게 되었을지. 유가를 더럽히는 조양신문을 징치하겠다고 했던 자가 새 문주로, 또 한림에서 발탁되어 특명순안사라는 거창한 이름을 달고 일월표객을 집포한다니.

신유문이 연관되었다는 생각에 답답해졌다.

삼십 대 문사의 가늘어진 눈매가 해원기의 안색을 살핀다.

“별 걸 다 아는구려. 어디 있는지 알려주면 어떡할 셈이기에?”

탐색하는 질문.

“전혀 모르는 사이도 아니니. 한 번 만나봐야겠다.”

직접 그 사연을 들어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일 터. 삼십 대 문사의 눈이 확 커지고,

“흐음, 문주님과 아는 분이었다니. 이거 큰 실례가 되었을 수도…….”

쇠몽둥이에 맞은 것처럼 나가떨어져 끙끙대는 자들을 죽 둘러보면서 말투를 또 바꾼다.

“이렇게 손에 사정을 두셨는데 숨기기도 그렇고. 그렇지만, 특명순안사는 존재부터 비밀, 함부로 소재를 알릴 수 없습니다. 대협께선 이 점을 이해하시겠죠? 저희는 문주의 제자이면서 동시에 특명순안사 좌하의 규찰사, 받은 명을 어기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습지요.”

정중하면서 사리가 분명한 언사.

영렬전륜진을 이룬 스물다섯을 검집으로 때려서 하나도 죽이지 않은 해원기다. 예광을 도발할 때 이미 조정의 관작을 아는 것도 드러냈고.

문주의 제자는 문주의 명을 거역할 수 없고, 순안사의 수하가 순안사를 거스를 수 있을 리 없다.

당연히 해원기가 이해할 수 있는 논조고, 곧바로 다른 제의를 해온다.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저희가 더 이 자리에 있을 면목은 없으니 바로 돌아가 사정을 보고하겠습니다. 대협께서 하루 이틀 정도만 더 머물러주시면 문주께서 직접 찾아뵙는 거로. 아니면.”

어린애 속임수 같은 수작이지만,

“아니면?”

“대협께서 일시와 장소를 정하시고, 제가 아뢰는 방법은 어떨지요?”

해원기의 눈치를 보며 나름 열성을 보이는 꼴이 안쓰럽기도 하다.

해원기가 잠시 말없이 쳐다보다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좋소. 당신들이 먼저 이곳을 떠나시오. 나중에 웅풍대주루 문 앞에 시각과 장소를 적어놓으리다.”

당장은 형대의 지리도 자세히 알지 못하고, 무엇보다 먼저 하일웅의 안전을 확보해야 한다.

물론 이런 적절한 대답도 해원기 혼자 생각해낸 것은 아니었고.

삼십 대 문사가 즉각 몸을 돌려 재촉한다.

“자, 무엇들 하나. 어서 제자들을 일으켜 물러나도록 하게. 빨리!”

평소에도 상당히 엄격한 듯. 지시가 떨어지자 예광과 나머지 넷이 부리나케 뛰어다니며 나가떨어진 자들을 챙긴다.

살길이 생기면 사람은 평소보다 훨씬 민첩해지나 보다.

채 일 각도 되지 않아서 웅풍대주루에 쳐들어왔던 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마지막으로 삼십 대 문사가 해원기에게 포권의 예를 취했다.

“그럼 이만. 아, 문주께 어떤 분이라고 아뢰어야.”

꽁무니를 빼면서도 신분 확인은 잊지 않았다.

검대를 도로 풀어 등 뒤에 매던 해원기가 나직하게 답했다.

“내 본래 앉는다고 성을 바꾸고, 일어선다고 이름을 고치는 성격은 아니나. 지금은 그저 곡부에서 함께 마차를 탔던 이라고 하면 될 것이요.”

알쏭달쏭한 대답이지만, 삼십 대 문사는 바로 손을 흔들고는,

“알겠습니다. 이만 물러갑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나가는데. 해원기는 그 뒷모습을 확인할 겨를도 없었다.

“하! 그 말투, 그리고 그 검. 분명, 분명 그 두 분의. 하하, 이럴 수가. 세상에 이런 일이. 하하하.”

겨우 참고 있었던 하일웅이 감격에 겨워 달려왔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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