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321화 (321/410)

제81장 납롱인심(拉攏人心) (1)

이전에 조규헌을 비롯한 조양신문의 인물들을 만났던 기억. 선비들의 유삼(儒衫)을 걸치긴 했어도 머리에는 도사들이 쓰는 혼원관을, 허리에는 군부에서도 드물게 쓰는 짧은 극도를 갖추었었다.

그래서 다시 만난 조규헌이 구시술을 쓰는 도사 차림인 것도 그러려니 여겼는데.

웅풍대주루를 포위하고 집포령을 행하는 자들.

장원급제한 이로 오해할 만한 행차요, 열 명의 관병을 제외하곤 전부가 문사 차림이라서 이상하다고만 생각했다.

오소민이 아니었다면 조양신문을 떠올리지 못했을 터.

정록이 선뜻 앞으로 나선다.

“경공보다. 이쪽으로 빠지는 게 더 빨라.”

높은 담장이 늘어선 좁은 골목 끝의 작은 문을 용케 찾아내고,

“여긴 고성(古城)의 중심가잖아. 이웃한 상점끼리는 뒤뜰이 이어지는 경우가 많지. 어서!”

녹림의 대탐자답게 구조를 잘 아는 듯.

해원기의 손을 거꾸로 잡아끌고 달리자, 오소민도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서두르자고. 그런데 주인 말고 장방까지 잡아가는 건……?”

끄덕이던 고개가 갸웃.

기민한 임기응변이지만, 어떤 상황인지 아직은 모른다.

면관에서 방금 들은 정보. 일월표국의 접수처인 용위표국은 이미 문을 닫았고, 그 주인이었던 이가 지금은 웅풍대주루를 운영한다니.

그래서 웅풍대주루를 찾아가는 길에 이런 광경을 맞닥뜨렸다. 게다가 조양신문을 연상시키는 무리가 집포령으로 나서는 상황.

정말 공교롭다는 느낌이 든다.

오건민이라는 이름이 과거 용위표국의 주인이요, 바로 일행이 찾는 인물일 터. 그런데 회계를 맡는 장방까지 잡아가는 건 지나치잖나.

하지만,

“기억나네. 연조도객(燕趙刀客) 하일웅. 용위표국의 총표두였던 의협지사(義俠之士)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해원기의 대답에 오소민이 눈썹을 바짝 세웠다.

해원기의 이런 말투는 대부분 그 사부나 탁 소숙에게서 들었다는 의미다.

오소민과 정록 모두 처음 듣는 명호. 근 이십여 년간 전혀 무림에 나온 적이 없었던 인물이겠지만.

고검협과 천극이 협사라고 칭했다면 이런 상황에 가만히 있을 리 없다.

과연,

골목 끝의 좁은 문을 지나자마자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린다.

“으하하하, 지금까지 살면서 이런 집포령은 처음 보는구나. 정체도 모를 것들이 함부로 남의 가게를 부숴? 아무래도 관을 사칭한 도적 떼 같은데.”

걸걸한 음성이 말을 끝내기 전에,

퍼펑.

폭음이 연달아 터지고 옷자락이 어지럽게 스치는 소리.

해원기 들이 두 번째 후원을 가로지르는 순간에 집포령을 외쳤던 예의 차가운 음성이 바로 이어진다.

“잠깐. 늙은 도자수(刀子手), 네가 하일웅이로구나?”

도자수는 칼잡이라고 낮춰 부르는 말. 장방이라고 하다가 대뜸 칼잡이라고 부르니 하일웅을 알고 왔다는 뜻이다.

“허어, 도자수라.”

어이없다는 걸걸한 음성은 무시한 채,

“이쯤에도 나오지 않는 걸 보면 일월표객이란 놈들은 여기 없는 것 같군. 쯧. 으응?”

기대와 어긋난 실망에 혀를 차려던 게 뚝 끊긴다.

담장 위에 별안간 한 사람이 나타났으니까.

좌중의 시선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모여들었다.

“해 형 혼자 나가. 나는 몰래 웅풍대주루에 들어가고, 화호초는 더 뒤로 돌아 살필 테니까.”

“아니, 왜 내가 뒤로…….”

“유룡은 위로 오르고, 꽃 담비는 바닥을 기어야지. 빨리!”

“쳇.”

오소민의 지시에 따라 정록이 뿌루퉁해서 옆으로 몸을 날리는 걸 보고서야,

해원기가 담장 위로 뛰어올랐다.

이유를 따질 필요 없이 그저 오소민의 말대로 하면 된다. 언제나 영민하고 주도면밀하니까.

대주루의 후원.

족히 백 명을 수용할 크기는 대주루답지만, 꽃과 나무도 없이 을씨년스러운 작은 정자만 하나. 더구나 그 정자마저도 바짝 붙여 지은 창고 때문에 아무 쓸모가 없다.

일반적으로 주루 뒤뜰에 창고를 두긴 해도 대부분 구석에 지어 나무나 가산으로 가리고, 화원과 연못으로 운치 있게 꾸민 정자로 시선을 끌게 마련인데.

웅풍대주루는 거꾸로랄까.

구석으로 밀려난 정자 바로 앞에는 수건을 머리에 쓰고 단삼을 걸친 흰 수염의 노인이,

모조리 열어젖힌 창문을 등지고 수십 명의 문사 차림이.

그리고 반쯤 부서진 문짝 앞에 집포령을 읊어댔던 젊은 유생이 서 있다.

한꺼번에 모여드는 시선.

너덜너덜해진 방립에 두터운 피풍을 걸치고 등에는 검을 멘 사나이의 출현에 잠시 적막이 흘렀고,

해원기가 상황을 파악하자 비로소 젊은 유생의 질문이 날아들었다.

“일월표객은 아닌 것 같은데, 넌 누구냐?”

거듭 일월표객을 거론하는 소리에 이 집포령의 목적을 알아챌 수 있었다.

웅풍대주루의 주인 오건민과 방장 하일웅은 미끼. 일월표국의 접수처란 걸 알고 일월표객을 잡으려는 것이다.

해원기가 못 들은 척 고개를 흰 수염의 노인에게 돌리고,

정중하게 두 손을 모았다.

“연조도객 하 대협께 삼가 문후드립니다.”

본 적 없는 얼굴. 그래도 오면서 들었던 대화로 이 흰 수염 노인이 하일웅이라고 확신했다.

흰 수염 노인이 뜻밖의 인사에 눈을 껌뻑이지만,

정중한 포권의 예에 자신도 서슴없이 손을 모아 올린다.

“노부가 하일웅이오만. 소협은 뉘시기에 노부를 알아보는지.”

걸걸한 목소리에 차분한 말투.

머리에 수건을 쓰고 몸에는 단삼을 걸친 평범한 주루 장방의 차림새지만, 부리부리한 눈매와 단단한 자세가 태산 같다.

집포령이랍시고 주루를 때려 부수며 난입한 자들, 그리고 불쑥 튀어나와 예를 표하는 생면부지의 청년.

누구든 전혀 겁날 것 없다는 태도.

해원기가 손을 풀어 방립을 조금 들어 올렸다.

“어째 이상할 때 찾아뵈었군요. 제가 때를 못 맞춘 탓에 하찮은 패거리를 끌고 온 게 아닌가 염려가 됩니다. 사부님께서 아셨다면 크게 혼을 내셨을 터. 혹시 하 대협께서 개의치 않으시면 정리를 조금 하고 나서 정식으로 인사를 올려도 되겠습니까?”

얼굴을 보인다고 뭐 특별할 것 있나.

더벅머리에 수염도 제대로 깎지 않은 평범한 용모.

그러나 이 호방한 말에 하일웅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어젖혔다.

“핫하하하, 재미있군. 아주 맘에 들어.”

집포령을 앞세운 젊은 유생도 모르는 인물이 이 소란이 자기 때문에 벌어졌다고. 그래서 정리를 자신이 맡겠다고 하니.

누군지 몰라도 통쾌하다.

그러고 보니 방립 아래의 평범한 얼굴. 길게 파인 눈매와 각진 턱이 참 사내답구나.

해원기의 말에 웃는 이는 또 있었다.

‘얼씨구, 연극도 꽤 하잖아. 하여간 싸운다 맘먹으면 사람이 변한다니까.’

오소민이 웅풍대주루의 이 층으로 스며들며 피식거렸다.

오소민과 정록을 위해 주의를 끌려는 의도에 하일웅을 만난 감상이 더해져서 해원기가 조금 과하다 싶게 호기를 부리는구나.

저러면 ‘하찮은 패거리’에겐 노골적인 도발이잖아.

아니나 다를까.

당장 젊은 유생의 욱한 고함이 들린다.

“이 빌어먹을 놈은 뭐야? 네 이놈! 칙명전권의 집포령을 거행하는 데 끼어들면 무슨 죄가 되는지나 알고 까부는 것이냐!”

주루 안의 기척을 살피면서도 오소민의 신경은 어째 전부 밖으로만 향해서.

해원기의 대답이 궁금해졌다.

고구마 대장이 이번에는 어떻게 받아치려나.

아직 오소민은 해원기가 이런 도발을 누구에게서 배웠는지 모른다.

해원기가 방립을 들었던 손으로 뺨을 긁었다.

“흐음, 칙명전권의 집포령? 강호의 무부가 알아듣기에는 꽤 어려운 관화(官話)로구먼. 그러면 전부 관원이요? 에, 관원이면 관원답게 관모 쓰고, 관복 입고, 관화 신고, 허리띠라도 제대로 매어야. 삼법사로 보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일개 포쾌로 보기엔 먹물 냄새가 진하니. 아아, 혹시 미복(微服)으로 암행(暗行)하는. 설마? 그쪽이 당금 황상이라도 되오?”

사람을 위아래로 훑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또 혼자 놀란 듯 눈을 둥그렇게 뜨며 줄줄 말을 이어가니.

고함을 질렀던 젊은 유생이 얼떨떨해졌다.

위압적인 용어로 을러대면 웬만해선 다 겁을 집어먹거늘. 검 한 자루 메고 하일웅에게 깍듯이 예를 취하는 거로 봐선 별 볼 일 없는 삼류 낭인일 텐데.

삼법사를 거론하다가 아예 황상까지 들먹인다.

무식한 놈일수록 겁이 없다나.

그러나 보이는 것과 달리 다른 뜻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젊은 유생이 인상을 쓰면서 억지로 성질을 눌렀다.

“어디 감히 황상을 입에 담고. 어흠, 삼법사니 미복 암행이란 말을 알면 그에 어울리는 눈치 정도는 갖추어야 할 것을. 잘 듣거라, 근자에 조야(朝野)에 얽힌 역당(逆黨)이 불측한 일을 도모하고, 이를 감찰해야 할 유사(有司)조차 휘말린 정황이 드러남에 민심의 동요를 막고자 특별히 한림(翰林)에서 올곧은 이를 발탁해 특명순안사(特命巡按使)로 임명하셨도다. 여기 있는 내가 바로 그 순안사 좌하 규찰사(糾察史)의 한 자리를 맡은 예광(倪光)이란 사람이다. 뭔 얘기인지 알아들었다면 냉큼 조아려 성명과 의도를 고해야 할 터. 그렇지 않았다간 정말 경을 칠…….”

무식해도 알아듣게 잘 타일러주는데.

“호오, 한림이 순안을 맡았다? 그거 정말 특별하구만. 그럼 그냥 순안사가 아니라 도찰원을 책임지는 도어사(都御史) 급이고. 어마어마한 권한을 휘두르는 자리라. 이런 특례를 누가 건의해서 준주(准奏)되었을지, 또 그 어마어마한 분은 누구신지 모르겠네.”

해원기의 끼어드는 혼잣말에 입이 바보처럼 벌어졌다.

이건 뭘까. 한림의 품계도 알고, 순안사가 뭔지도 알고, 어떻게 결정되는지까지 알잖나.

예광이라고 스스로 이름을 밝힌 젊은 유생이 정신을 차릴 틈을 주지 않고서,

해원기가 바로 말을 이었고.

“예 규찰사,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혹시 조양신문이라고 아시오?”

마지막 물음에 예광뿐 아니라 문사들 전부가 소스라치게 놀라는 모습이 역력하다.

그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이,

해원기가 또 말투를 바꾸었다. 누구에게나 다 들리는 혼잣말.

“그래, 어쭙잖은 것들이 너절한 장식을 좋아한다고 하셨지. 역당이든 한림이든, 특명전권의 순안사든 뭐든 간에 어지간히 한심스럽구나. 뭐? 민심의 동요를 막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두 손을 가슴팍에 모으며 예광과 문사들을 주욱 둘러본다.

“아침나절이 지나도록 문을 닫아걸고 숨을 죽이는 이들, 주루를 두들겨 부수는 소리에 얼마나 놀랐을까. 엉터리나 지껄이면서 강호의 의협을 얽어맬 수작이나 부리는 주제에 감히 민심을 입에 올려?”

번쩍.

번갯불이 치듯 무서운 시선에 절로 주눅이 들어,

가슴팍에 모은 손이 검대를 풀기 시작하는 것도 몰랐다.

“허망한 소리를 믿기 어렵다만, 진짜 황명을 받은 특명전권의 순안사라고 해도. 쯧.”

짧게 혀를 차더니,

“좀 맞아야겠다.”

다들 듣기는 들었어도 얼른 이해가 가지 않는 말.

예광과 문사들이 눈만 껌벅거리는데, 기이하게도 탄성이 반대쪽에서 나온다.

“허어, 설리어병(舌利於兵)! 그리고…….”

휘둥그레 뜬 눈으로 해원기를 바라보는 하일웅. 그의 눈에는 과거에 만났던 두 사람의 모습이 겹쳐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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