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장 천자단정(擅自斷定) (4)
“허, 일월표객(日月鏢客)이란 이름은 많이 들었어도, 그들의 표국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던데. 설마 형대의 용위표국(龍威鏢局)이.”
형대로 접어든 후에도 정록이 또 중얼거리는 소리에,
“어이구, 해 형에게 설명 다 들었잖아. 뭐 그리 감탄하는지.”
오소민이 타박해도 정록은 여전히 신기한 듯.
“그렇잖아. 일행천리표와 월영객, 일월표객이 특별한 보표(保鏢)만 맡고, 또 근래에 억울한 일을 당한 많은 관원을 지켜줬다는 건 널리 알려졌지만. 해 형의 사부님과 인연이 있을 줄은. 허.”
관심의 초점은 아무래도 과거의 인연인가 보다.
또 오소민이 뭐라 할까 싶어 해원기가 얼른 말을 받았다.
“탁 소숙과의 인연이라고도 해야겠지. 음, 선한 자와 의로운 자가 많다 해도 행할 힘이 없으면 악과 불의를 구할 수 없다. 스스로 구하도록 돕는 것도 또한 협이라고, 사부님과 똑같은 말씀을 자주 하셨으니까.”
해원기의 사부님과 탁 소숙.
어찌 단순한 인연이겠나. 그 인연으로 당대에 일월표객으로 불리게 되었으니.
훌륭한 가르침이란 건 그 영향이 이렇게 심원한 법.
두 남자의 은근한 공감에 오소민이 입을 삐죽이다가 앞을 가리켰다.
“그쯤 하시고. 먼저 용위표국을 찾아야 할 것 아냐. 밤을 꼬박 새워서 속도 출출하다고.”
해가 뜨자마자 형대에 들어와서 겨우 아침이 시작될 때.
아직 오가는 인적도 드물고 문을 제대로 연 곳도 드물다.
정록이 바로 동의한다.
“찬성! 배도 채우고, 무엇보다 뜨거운 차 한 잔이 그립구먼.”
해원기도 마찬가지.
자산을 떠나 수사와 한바탕 하고, 그 자취를 따라 육신지궁까지 들어가 생각지도 못했던 난관을 넘었잖은가.
술이든 물이든 대나무 통은 거의 비웠으며, 건량으로 끼니를 때우고 싶지도 않았다.
사람이 모여 사는 곳에서 식은 몸을 조금이라도 덥혔으면.
어디든 먼저 문을 여는 곳을 찾는다.
국수와 만두를 파는, 소위 면관(麵館)이라고 불리는 작은 반점이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 혼자서 운영하는 듯, 나이가 꽤 많아 보이는 데도 기력은 정정한지 다른 데보다 일찍 쓸고 닦고.
커다란 찻주전자를 내고는 얼른 주문을 받아 주방으로 들어가는 움직임이 기민하다.
“후아, 좋다, 좋아.”
속이 확 풀리는 건 정록만이 아니어서,
해원기도 따뜻한 찻사발을 두 손으로 쥐며 눈을 감는데.
오소민이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일행천리표 이 대협과는 화산에서 처음 만난 거 아니었어? 형대 근처에 몇 번 왔다면서 어째 들르지 않고.”
화산에서 장안의 화청궁까지. 싸움이 급박했기에 서로 제대로 회포를 나눌 여유가 없었다. 그나마 잠시 인사라도 나눈 이는 일행천리표 이소천. 월영객 전천도는 화청궁에서 구하느라 바빠 서로 아는 척도 못 했으니.
오소민 또한 중독되는 바람에 이후의 사정을 챙길 수 없었다.
오랜만의 온기를 느끼려던 해원기가 감았던 눈을 뜨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전에 만난 적은 없지. 딱히 형대 쪽으로 쾌체 일도 없었을 뿐더러, 에, 표행을 부탁하는 것도 이상해서. 예전에 탁 소숙이 얘기한 걸 기억했을 뿐이야. 북쪽은 형대의 용위표국, 남쪽은 회하(淮河)의 귀래반점(歸來飯店)이 일월표국의 접수처라는.”
“흐응.”
쾌체 일이 없는데 일부러 찾아갈 리 없고. 쾌체 주제에 표국에 일을 맡기는 건 더 어울리지 않는다.
당연한 대답에 오소민이 맥 빠진 표정이 되었다.
하긴. 이 고구마 대장이 옛 인연이라고 잘난 척 얼굴을 들이밀었을 리 있나.
정록은 다른 데 더 관심이 가는지.
“호오, 강북과 강남에 다 접수처를 두었군. 단 두 명밖에 없는 표국이. 역시 대단해!”
오소민의 눈매가 확 올라붙는다. 아까부터 이 꽃무늬 담비는 뭐가 그리 감탄스러운 건가.
“그놈의 호들갑. 주인장한테 용위표국 위치부터 물어야 하잖아. 계속 찻잔만 모시고 있을 거야?”
이유를 알기 어려운 심통이지만,
정록은 아무렇지 않게 차를 홀짝거렸다.
“상당히 오래된 표국이니 금방 알 수 있겠지. 가벼운 국수 시켰으니까 먹고서 바로 가면 돼. 해 형 덕분에 나도 탁 대협 말씀이 떠올랐거든. 에헴.”
해원기의 탁 소숙은 정록의 사부인 방온화의 남편.
존경심이 감탄으로, 감탄이 이제는 자랑으로 바뀌었는지.
헛기침까지 하면서 의젓하게 말을 잇는다.
“속이 비면 잡념이 많고, 잡념이 많으면 일을 그르치기 쉽다. 에, 그런 고로 먼저 든든히 식사를 마치고 순서대로…….”
“으휴, 그래. 잘도 기억하셨네요오. 근데 탁 대협? 사장(師丈)이라고 해야 하는 거 아냐?”
사부가 여성이면 그 남편을 사장, 혹은 사공(師公)이라고 부르는 게 일반적.
말이 끊긴 정록이 콧등에 주름을 잡았다.
“그게, 그렇게 부르면 너무 늙은 것 같다고. 싫어하시더라고.”
“풋.”
막 찻잔을 기울이던 해원기가 웃음이 터져 당황하고,
처음 보는 그 모습에 오소민도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이 고구마 대장에게 이런 모습도 있었나.
아직 아궁이에 불도 제대로 들이지 않은 시각이니 기껏해야 맑은 탕에 면발을 푼 청탕면(淸湯麵) 정도밖에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실처럼 얇게 썰어 볶은 고기를 고명으로 올린 육사면(肉絲麵)에 바짝 눌러 구운 대총병(大葱餠)까지 금방 내오는 통에.
대화를 잊고 식사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용위표국? 거기 문 닫은 게 한 오 년쯤 된 거 같은데. 거긴 뭐하러 찾으슈? 아, 옛날 표물 관계인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고 하더니만. 여기서 큰길을 따라 조금 걸으면 중심가가 나오고, 동쪽으로 돌아가는 어귀에 오 층짜리 주루가 하나 보일게요. 웅풍대주루(雄風大酒樓)라고. 예전 용위표국의 주인이었던 이가 하는 곳이라오. 그쪽으로 가시면.”
“풍운무관은 들어본 적이 없는걸. 근 십여 년 동안 여기저기 무관이랍시고 차렸다가 망한 사람은 여럿 봤소만. 여기서 무관이라도 열려면 상당한 실력 아니면 곤란하지. 손님들도 차림새로 보니 무림인인 듯한데, 흐, 날이 저물면 시비 거는 녀석들을 만나게 될 거외다.”
“조가보라, 조가보. 어디 보자, 한두 해 되었던가. 북쪽 삼림 근처가 큰 토목 공사로 시끄러웠으니까. 그쪽일 수도 있겠구먼. 모르겠소. 북쪽 삼림은 길도 없고 흉한 짐승이 살아서 웬만해선 그쪽으로 가지 않으니까.”
기민한 주인장이 나름 자세하게 알려준 내용에.
흡족한 식사를 마친 세 사람이 선뜻 자리에서 일어서질 못했다.
용위표국을 찾은 후에, 일월표객을 만나고, 풍운무관과 조가보의 위치를 파악해서 어떤 곳인지 살핀다.
그렇게 일사천리로 나아갈 줄 알았더니.
용위표국에서부터 막혔다. 혹시나 하고 물었던 풍운무관과 조가보도 영 모호한 답변뿐.
정록이 소리 내어 입맛을 다셨고,
“쩝, 영 쉽지 않네. 이곳 토박이들도 잘 모른다라.”
오소민이 뺨을 긁으며 해원기를 보았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럴 법도 해. 일월표객이 여러 번 무고한 관원들을 보호해서 피신시켰다고 했으니. 접수처라고 떡하니 표국 간판을 내걸 수는 없겠지.”
동창의 눈엣가시. 아마 동창도 설마 경사에서 멀지 않은 이 형대에 일월표객의 근거지가 있으리라곤 여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도리어 지리적으로 이로운 이곳을 포기하진 않았을 거야. 다행히 웅풍대주루란 실마리를 남겨두었네. 가볼까?”
형대는 하북의 남쪽 끝. 산동, 하남, 산서의 어느 곳으로도 빠지기 편하다.
조정의 대관을 빼돌리기엔 적합한 곳.
해원기가 머리를 긁었다.
육 년의 쾌체 생활 동안 들를 기회가 없지 않았다. 단지 스스로 피했을 뿐.
예전에 들었던 얘기만으로 쉬 찾을 것이라고 안일하게 생각했었구나.
사람이 세상에 관심을 끊으면, 세상도 역시 사람에게 관심을 끊는 법.
“아, 그러지.”
두 친구에게 미안하다.
면관 주인 말대로 그리 멀지 않아서. 반 각 정도 걸었을까, 사방으로 뻗은 중심가가 멀리 눈에 들어오고.
겨울로 접어들어 아침이 많이 늦어진 듯, 문을 연 곳이 거의 없는데.
해원기가 우뚝 멈추어서는 바람에,
“형대 사람들, 은근히 게으른 모양이네. 우리가 먹은 곳 빼곤 이른 조반을 준비하는 가게도 보이지 않아, 응?”
좌우를 둘러보며 걷던 정록도 걸음을 멈추었다.
미간을 좁힌 해원기, 그 옆에서 전면을 유심히 살피는 오소민. 정록이 따라서 앞으로 눈길을 돌리더니.
“관병이. 음, 장원 행차?”
보이는 광경에 말끝이 조금 올라붙었다.
두 줄로 늘어선 열두 명의 관병. 칼을 차고 뻣뻣하게 서서 눈을 부라리지만, 맨 앞의 두 명은 장창과 깃발 대신에 높다란 공영패(恭迎牌)를 들었고. 주위에는 문사 차림이 서른 명이나 늘어섰다.
피리를 불고 북을 치는 소리패가 끼었다면 아마 장원급제의 행차라고 여겼을 터.
그러나 때가 맞지 않고, 분위기도 전혀 다르다.
건(巾)을 쓰고 심의(深衣)를 걸친 문사들은 관병보다 더 섬뜩한 기세를 풍기면서 건물 하나를 빠르게 둘러싸는 중.
공영패를 앞세운 관병들 사이로 한 사람이 침착하게 앞으로 나서서.
손에 든 작은 족자를 펴들고,
“웅풍대주루 주인 오건민(吳建民), 동(同) 장방(帳房) 하일웅(河一雄). 위 두 사람은 조정의 명을 거스른 혐의가 있다. 아울러 이무범금(以武犯禁)의 우려가 있는 바, 삼가 칙명전권(勅命全權)에 의해 집포(緝捕)하노라. 순순히 따르면 험한 꼴은 보지 않을 것이다.”
외치는 음성이 쨍하게 울린다.
머리엔 평정건(平頂巾), 몸에는 주름을 많이 잡은 심의. 이마에 홍책(洪幘)이라는 넓은 띠를 두른 것만이 다른 문사들과 구별되는 젊은 유생이다.
소위 집포령(緝捕令). 정식으로 죄인을 잡아들이는 절차인데.
이건 또 형부나 대리시, 또는 도찰원의 어사들이나 행하는 일.
이것도 어울리지 않는다.
얼핏 보기엔 장원 행차, 하는 짓은 집포령이라니.
집포령을 외친 젊은 유생이 기다리지도 않고 펼쳤던 족자를 둘둘 말면서 냉소를 터뜨렸다.
“흥, 잡아들여라!”
처음부터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버럭 소리를 지르자 서른 명의 문사들이 동시에 몸을 날리고,
와장창.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곧장 대로에 울려 퍼진다.
오소민이 대뜸 해원기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뒤로 돌자고. 화호초!”
우연히 엉뚱한 일을 목격한 셈이지만, 벌어지는 장소가 바로 목표했던 웅풍대주루. 사정을 알지 못하면서 대뜸 뛰어들 수도, 그렇다고 멀거니 구경만 할 수도 없다.
오소민이 길옆으로 몸을 붙이자, 정록이 빠르게 주변을 훑으며 고갯짓을 했다.
“저기 골목으로. 중심가가 조용한 이유가 있었구먼.”
개방의 순행장로와 녹림의 대탐자는 기민하기 짝이 없다.
순간적인 임기응변에 해원기가 얼른 오소민과 정록의 소매를 잡았다.
“몸의 힘을 빼게.”
단숨에 공중을 뛰어넘어 웅풍대주루의 뒤쪽으로 갈 셈.
그런데.
오소민이 나직하게 건네는 말에 해원기가 멈칫거렸다.
“복색은 조금 바뀌었지만, 저들, 어째 조양신문 같은걸. 하는 짓은 꼭 그 골샌님…….”
바짝 붙는 정록이 바로 끼어들고,
“누구? 아, 노문기라고 하던.”
장원 행차 같은 집포령의 집행. 이 엉뚱한 일이 조규헌과 기묘하게 이어진다는 예감이 든다.
절령제이십(節令第二十) 소설(小雪)
눈(雪)은 본디 수기(水氣). 한랭(寒冷)과 강수(降水)를 함께 만나면 물은 눈으로 변해 내린다.
소설이 되면 내리쬐는 빛의 양과 기온의 변화가 빈번해지면서 날씨가 점점 추워지지만, 아직 한기가 그리 깊지 않고, 강수량도 그리 많지 않은 때.
그러나 천지에 쌓인 음기(陰氣)는 따뜻하면 비(雨)요, 추우면 눈(雪)이려니.
모든 절령에서 처음 설(雪)이란 글자가 나타난다.
즉, 소설의 소는 유소취대(由小就大). 이후로 점점 커진다는 의미여서.
앞으로 날씨는 갈수록 더 추워질 것이고, 하늘에서 내리는 수기의 양도 갈수록 더 커질 것이라는 비유.
결코, 소설에 눈이 적게 내린다는 의미는 아니다.
옛사람은 소설을 셋으로 나누었으니,
첫째는 홍장불견(虹藏不見)이라 무지개가 숨어 보이지 않고,
둘째는 천기상승(天氣上昇), 지기하강(地氣下降)이라 양기는 위로 음기는 아래로 멀어지며,
셋째는 폐색성동(閉塞成冬)이라 천지가 통하지 않고 음양이 어우러지지 않아 만물이 생기를 잃어서,
마침내 진짜 겨울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