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319화 (319/410)

제80장 천자단정(擅自斷定) (3)

“뭘 그리 보고, 어라? 숫자가 늘었잖아.”

헛간 문으로 들어오던 오소민이 눈살을 찌푸렸다.

떠날 때 넷이던 실혼인, 그 옆에 줄지어 누운 강시 같은 게 열다섯. 문가까지 밀려난 해원기와 정록은 머리를 맞대고 뭔가를 유심히 살피고 있으니.

“왔나, 오 형.”

“에, 그게 말이지…….”

이미 오소민의 기척을 알아채고 평범하게 맞이하는 해원기나, 머쓱한 표정으로 벌어졌던 일을 설명하는 정록이나.

못된 장난을 벌이려다 뻔뻔하게 둘러대는 개구쟁이들 같다.

오소민이 한 귀로 정록의 설명을 들으면서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 어째 잠깐만 눈을 떼면. 아, 됐어, 됐어. 조금 있으면 거지 떼가 몰려들 테니까 슬슬 움직이자고. 해 형, 그 신패는 부쉈나?”

“음.”

해원기가 쳐다보는 바닥엔 우그러진 조규헌의 신패. 품에서 꾸러미를 꺼내자마자 망가뜨렸었다.

“상관없겠지. 육신지궁이 무너진 판이라. 저들이 혼란스러울 때 우리는 재빨리 이동하는 게…….”

“허 참, 빨리도 왔네. 어디로 연락했대?”

정록이 심통 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조양신문의 졸개 놈을 멋지게 골탕 먹인 장면으로 막 넘어가려는데 오소민이 말을 끊었었다.

유치한 보복인데,

“본 방의 사정을 알려줄 이유는 없다만. 마침 근방에 돌아다니는 애들이 있어서 바로 연락이 되었어. 방주님과 단목 당주가 양곡현으로 이동하는 중이라더군. 아마,”

오소민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답하다가,

“아마?”

“자산의 방 낭랑과도 연결되었을걸.”

“헉.”

흐뭇하게 덧붙이는 말에 정록이 가슴이라도 찔린 듯 숨 막히는 소리를 토했다.

조규헌을 갖고 놀던 정록이었으나, 오소민에게는 열세를 면치 못한다.

그러는 중에 해원기는 나뭇조각 묶음을 요대자에 넣으면서,

무거워진 미간을 쉬 펴지 못했다.

산동의 서북쪽 끄트머리에 있는 양곡현. 낙양에서 헤어진 개방의 주력과 단목정 등이 양곡현으로 이동하는 건 해원기의 뒤를 받치려는 의도일 것이다.

오소민과 함께 출발했을 때는 그저 동창의 이목을 피해 경사로 직행하려는 계획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일을 겪으면서 일정은 예상보다 훨씬 늦어졌고,

해원기의 힘으로 뚫고 나오긴 했어도 적의 세력은 점점 커진다.

양곡현이 있는 산동도 마음 놓을 수 없는 상황. 조양신문의 주인이 새로 바뀌었다는 소식도 막 듣지 않았던가.

“노문기? 그 꽉 막힌 골샌님? 희한하군.”

“알아? 어떤 녀석이길래, 해 형도 이상한 표정을 짓고.”

“해 형이 보기엔 신유문의 후예라던데. 내력이야 어쨌든 어지간히 답답한, 같이 있으면 짜증이 확 치솟는 자야. 그래도 조양신문을 박살 낼 것처럼 굴더니만, 흐음.”

“신유문이라. 유문대종사(儒門大宗師)를 낸 명문이긴 해도 지나치게 딱딱하다고 들었지. 그 독선이 남을 해치고 끝내는 스스로 해치는 결과를 낼 수도 있다고, 예전에 종 사백에게 얼핏 들었던 기억이 나네. 그럼 동창에 넘어간 걸까?”

“흥, 그것도 말이 안 돼. 엄숙하고 우아하신 유문의 선비께서 한낱 내시 따위에 가담할 리가 없잖아.”

“아니지. 자고로 그 엄숙하고 우아하신 선비들께서 항상 내시한테 당하던데 뭘.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잖아.”

티격태격하면서도 오소민과 정록은 말이 잘 통하는 편.

둘의 얘기를 묵묵히 듣던 해원기가 머리를 흔들며 한숨을 내쉰다.

“후우.”

오소민이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래?”

“아니, 오늘 밤은 정말 어둡군.”

해원기가 하늘을 보며 엉뚱한 대답을 하는 걸 알지만,

오소민이 가만히 쳐다보다가 그냥 시선을 돌렸다.

새벽이 그리 멀지 않았는데도 이 밤은 해원기의 말처럼 참 어둡다.

개방 제자가 이를 때에 맞춰 헛간을 떠난 세 사람. 마을에 들지 않고 서북쪽으로 향하려고 왔던 길을 도로 가게 되었는데.

헛간을 떠날 때부터 해원기는 영 말이 없다.

아무 소리 없이 길을 재촉하는 오소민과 무거운 표정의 해원기. 정록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 본다.

해원기가 뭣 때문에 말문을 닫았는지도 궁금하지만, 어떻게든 속내를 들춰야 직성이 풀리는 오소민이 웬일로 이렇게 조용한가 해서.

백여 년 전의 신주영웅회를 이끌었던 유불선속의 사가지수(四家之首) 중 한 사람.

유수(儒帥)로 일컬어졌던 천지일사 제대광은 이사모(二師母)의 의조부(義祖父)다.

나이와 배분을 넘어 맺어진 인연이었으나, 이사모는 나중에 그 인연을 끊다시피 했었다.

물론 이사모가 아이를 잃은 슬픔에 겨워, 또 오로지 사부를 위해 모든 걸 잊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이해하긴 했지만.

드러내 따지기 어려운 문제도 있었다.

어린 해원기가 눈치챌 정도로.

그래서 사부가 따로 은밀하게 일러주었던 얘기.

“그분은 중화(中華)라는 관념이 똘똘 뭉친 것 같았지. 정파의 훌륭한 모범임은 틀림없으나, 판단의 기준이 지나치게 편벽하달까. 신주영웅회가 벽세의 농간에 속수무책으로 놀아난 원인 중의 하나가 그분이라고, 흠, 너무 박한 평가일 수도 있겠구나. 네 이사모가 한때 착용했던 오행명공권이라는 굴레도 그분의 일면을 보여주지. 소위 존왕양이(尊王攘夷)라는 사상에 깊이 물든. 그런 분이 또 모르는 게 거의 없었으니 이 사부의 내력을 알아갈수록, 허허허.”

이사모의 의조부. 윗사람을 제자에게 평가해주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말끝을 헛웃음으로 얼버무리셨지만,

해원기는 그제야 천지일사 제대광이 왜 단 한 번도 환정곡에 찾아오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중화, 존왕양이.

오직 중원을 받들어 신주(神州)라 부르고, 신주의 왕도만 높여서 사방의 오랑캐를 내쳐야 한다는 사상.

동이, 남만, 서융, 북적은 어차피 똑같은 오랑캐를 달리 부르는 이름일 뿐이다.

요동 벌에서 일족과 함께 유랑하던 어린 시절, 해원기는 이미 마음속 깊이 깨달았었다.

갑갑했던지 정록이 또 입을 열었다.

“이렇게 형대로 가는 게 나을까?”

해원기를 흘낏거리면서 묻지만, 어차피 대답은 오소민의 몫.

“그럼 양곡으로 갈래? 어차피 하북을 통해 경사로 가는 길이니까 형대로 가자고 한 건 너잖아. 흐흥, 낭랑에게 걸릴 바에야 철금장으로 노조를 뵈러 가는 게 뒤탈이 없을 거라는 심산이면서.”

“어이, 어이. 그건 오해라고. 양곡현으로 가면 경사는 훨씬 멀어지지. 그리고 육신지궁에서 도주한 탁청대인의 행방을 찾을 실마리니까. 에, 그래도…….”

“은허에서 물러난 것들까지 몰려 있을 공산이 크지. 음, 그건 나도 좀 걱정하는 부분이야. 해 형?”

중간에 통역하는 것도 아니면서.

오소민이 심각한 표정으로 부르는 소리에 해원기가 머리를 긁었다.

말없이 듣기만 했어도 오소민과 마찬가지로 걱정하고 있었다.

형대가 만약 적의 주요 거점이라면, 탁청대인이 육신지궁으로 출발했던 곳이 형대라면.

은허에서 싸웠던 자들 외에 다른 아문의 병력까지 모여있을 터.

밀각육학사, 현신장, 동창과 따로 노는 듯한 이십사아문, 그리고 정체가 모호한 조화부인 쪽.

게다가 금의위 대영반이라는 칠성검 서문창까지.

이들이 한곳에 모여 힘을 집중하면 해원기도 감당하기 쉽지 않다.

오소민과 정록의 대화에 선뜻 끼어들지 못했다.

“정 형 말대로 가는 길이니. 조심스럽게 살피기만 하세.”

두 친구의 도움이라면 무난히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오소민이 묘한 눈빛으로 보다가 히죽 웃었다.

놔두고 혼자 간다는 소리는 안 나오네.

“그래, 조심스럽게 더듬어만 보자고. 여차하면 이 화호초를 냅다 미끼로 내던지면 돼.”

“엑? 미끼? 무슨 사냥감이냐.”

“얼씨구, 밀각의 대인 노릇으로 멍텅구리 하나 홀렸다고 자랑하더니만. 해 형을 위해서 희생할 각오도 없나?”

“그, 뭐냐. 얘기가 영 이상하게 돌아가는데.”

“허,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벗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을지니! 어험.”

“맙소사.”

어렸을 적 친구란 말을 막 하게 되나 보다.

약간 서쪽으로 돌긴 했어도 방향은 북쪽.

혹시 육신지궁의 붕괴로 인한 좋지 않은 영향이나, 동창에서 살피러 나온 자가 있을까 해서 주위를 두루 살피며 이동했지만.

딱히 눈에 뜨이는 기척이 없어서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캄캄하게 어두웠던 밤도 결국 새벽에 자리를 내어주어야만 한다. 어둠이 짙어서일까, 불쑥 찾아온 새벽은 평소보다 더 밝은 느낌.

서둘렀던 걸음이 저절로 멈춘다.

오소민이 아스라이 퍼지는 여명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형대에 가본 적 있어?”

누구에게 묻는 건지. 해원기와 정록이 서로 마주 보다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외곽으로 몇 번 지나갔었는데.”

“한 번도 들른 적 없지.”

그러리라 짐작했던 오소민이지만, 두 사람을 번갈아 흘기곤 입맛을 다셨다.

“쯧, 조가보와 풍운무관이란 이름을 들어봤자 뭔 소용이 있어. 일단 어떻게 찾을 건지부터 궁리해야겠네.”

강호에서의 여행은 특별한 목적이 없는 한, 주로 큰 고을을 거치게 마련이다. 사람이 어울려 사는 곳이 곧 강호이니, 산과 들만 이어진 곳에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형대는 오래된 고을이긴 해도 한단의 바로 북쪽. 그다지 무림인의 흥미를 끌지 못하는 곳이다.

그런데 해원기가 끊었던 말을 이어간다.

“동행했던 쾌체로부터 들은 얘기는 꽤 있네. 형대는 하북에서 가장 오래된 고성(古城) 중 하나고, 곳곳에 상무(尙武)의 전통이 많이 남았다고 하더군. 그래도 무관은 찾아보기 어렵고.”

“상무의 전통이라면서 무관은 없다?”

오소민이 의아하게 되새기자, 정록이 픽, 하고 웃었다.

“훗, 그럼 전부 건달패란 건데.”

말재주가 부족한 해원기에게 맡겨놓으면 곤란하다. 이렇게 옆에서 재빨리 추임새를 넣어줘야.

“음, 그런 셈이지. 기질이 상당히 거칠다네. 그래도 소위 연조고풍(燕趙古風)이랄까, 하찮은 건달패가 아니라 의기를 중히 여겨서.”

“의기용사(義氣用事)란 듣기 좋은 말일 뿐. 제멋대로 날뛴다는 뜻이잖아.”

“어이, 오 소매, 표현이 심하잖아. 흑도(黑道)에도 협의는 있는 법이라.”

오소매가 입을 삐죽 내민다.

“피, 흑도라서 그러는 게 아니야. 나는 거지, 화호초는 녹림. 백도(白道) 축에 끼워주는 게 어디야? 그게 아니라, 동창이 소굴을 만들기엔 어울리지 않는다는 거지.”

정록이 몰라서 흑도를 언급한 게 아니다.

이런 식으로 화제에 집중해야 하니까.

과연 해원기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도 아까 들으면서 의아했었네. 규모가 엄청 크다는 조가보가 어디에 있을지, 그보다 풍운무관은 언제 생겼기에? 이것부터 좀 물어봐야 할 것 같아.”

거친 기질의 토박이가 설치는 동네란다. 함부로 무관을 세우기도, 엄청난 규모의 무력집단이 모이기도 그리 쉽지 않을 터.

오소매가 눈을 삐딱하게 올렸다.

“물어봐? 어디에?”

뭘 좀 아는 척해도 결국 원점. 이제부터 형대에 들어가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자는 건가. 그러나 바로 나온 해원기의 대답에 맹하니 쳐다봐야 했다.

“알만한 곳이 한 군데 있네. 그러지 않아도 화청궁에서 헤어진 후 소식이 궁금하던 판이었는데. 오 형도 알잖나.”

뭘 안다고?

“일월표국.”

“으응?”

정록이 먼저 눈을 껌뻑거렸다. 일월표국이 형대에 있다는 소린 처음 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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