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318화 (318/410)

제80장 천자단정(擅自斷定) (2)

시키는 대로 뛰어다니고, 이곳저곳에 연락을 취하는 그런 말단 졸개.

구시술로 위장한 실혼인들을 육신지궁에 운반(?)하는 조규헌은 기껏해야 그런 위치였지만,

그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이제까지 어디서도 구하지 못했던 정보였다.

해원기가 처음 무림에 나올 결심을 한 후, 오소민과 겁표의 현장을 살피려고 들렀던 안덕.

그곳에서 하오문의 일부인 안덕차행이 동창의 주구가 되었다는 걸 목격했고.

개봉을 떠나 약왕당으로 남하할 때, 증명단과 함께 우연히 사람들을 따라 들렀던 벌판.

그곳에서는 해괴한 비무로 돈벌이하던 극단인 구란와자와 마주쳤었지.

동창에서 차행과 구란와자를 어떤 용도로 썼는지 비로소 알았다.

방온화가 추정했던 대로 새로이 모습을 보인 방회문파의 대부분은 동창과 연관이 있고,

그런 조직들을 서로 긴밀하게 연결하는 역할.

이른바 궁성의 경비를 돌아보는 순라조(巡邏組)라고 해야 할까.

단지 실혼인의 재료를 구하고 운반하는 데에만 쓰이진 않았을 것이다.

각 조직 간의 긴장을 유지하면서,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배치할 때도 아주 유용할 테니까.

태산 아래에서 장자 노릇이나 하던 조규헌이 산동, 강소, 휘주를 넘어 파양호와 전당강을, 심지어 형산과 무이산의 일까지 알고 있잖나.

귀동냥이라도 들은 소문은 바로 천하의 정세.

동창이든 이십사아문이든, 태상이든 국사든. 해원기가 상대하는 자들이 세력을 얼마나 넓혔고, 그 배후가 얼마나 큰 그림을 그렸는지 엿볼 수 있는 귀한 정보들이다.

물론 조규헌의 소속이 조양신문이기에 한계가 있긴 하지만.

해원기의 찡그린 시선이 정록과 마주쳤다.

[용문에서 조양사수라는 자들이 등장했었고, 또 조양선사가 암야무명과 함께 은허에 달려왔으니까…….]

전음이 끝나기도 전에 정록이 고개를 끄덕였다.

용문에서 벌어진 일은 정록도 여 대부로서 들은 적이 있다.

조양사수란 자들이 아마 조규헌이 언급한 수재일 터. 장자가 향주면 수재는 당주(堂主) 급이다.

한 문파의 기둥인 당주 급이 네 명이나 낙양에, 또 문파의 우두머리인 조양선사는 은허로 불려왔다니.

새 문주가 폐관을 끝내고 나올 동안에 전부 집안을 비웠다는 소리가 된다. 상식적으로 이치에 맞지 않는다.

딱히 누굴 받들었는지 모를 신흥 문파지만, 조사의 후손이 나타나셨다고 기존의 일반 제자들은 모조리 파문했다고 했었다.

그러면 새 문주에게 전권을 건넸다는 의미, 또 폐관이란 그냥 혼자서 문 닫아건다고 되는 게 아니다. 적어도 옆에서 지키며 불의의 사태를 대비할 자를 두어야 하거늘.

전 문주와 당주들이 옳다구나 하면서 밖으로 나도는 게.

“그러니까 간자로 의심하잖아. 조양선사와 조양사수가 자리를 비운 틈에 잘됐다 싶어 양다리를 걸친 게 아니냐? 허, 이거 어째 서방님 바람피우는 증거를 잡는 것 같구먼. 쩝.”

해원기의 뜻을 알아챈 정록이 한심스럽다는 듯 입맛을 다신다.

조금 더 파 볼 여지가 있다.

육악지력을 하나씩 터득한 자들을 현신장이라고 했다.

공동의 요술사, 아미의 오온존자와 진여신승. 그리고 조양신문의 조양선사와 무명천의 암야무명.

공동파나 아미파처럼 계승할 전통을 지닌 건 아니었지만, 조양선사나 암야무명 모두 실전된 절학을 익혔었다.

도가에서 이름만 전해지던 대라금선장과 은현수를 익힌 조양선사다. 그런 자가 아무리 신흥 문파라고 해도 자기가 맡았던 문주의 지위를 거저 양보했을 리 없다.

마치 문호(門戶)를 새롭게 정비하라는 식으로 물러났지만, 실체는 조양신문의 인원을 조규헌처럼 순라조와 연락책으로 활용하려는 수단.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수작인데, 그렇게 넘겨줘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확신이 있었을까.

신유문의 후예인 노문기.

조양신문이 신유문을 더럽힌다고 거침없이 손을 써대던 그가 어떻게 조양신문의 새 문주가 되었을지.

조규헌이 눈을 껌뻑거리며 다급히 말을 받았다.

“아, 아닙니다. 양다리라니, 무슨 말씀을. 저희가 받은 명은 전부 선사께서 내리신, 에, 대인께서도 비슷한 신패를 지니고 계시잖습니까.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다간…….”

“이거? 흐음, 너희랑 같을 리가 없잖으냐.”

조규헌에게 내보였던 허리띠에 매단 작은 철패. 여 대부로 변신한 정록이 첨유진에게 다시 받은 밀각 대부의 증명인데.

신원을 나타내는 것 외에 다른 기능을 모르는 정록이 대강 넘어가자,

“다, 당연히 다르겠죠. 그렇지만, 어차피 술법이 담겼으니 소재(所在)야 언제든지 알 수 있잖습니까요. 소인 따위는 딴짓하고 엉뚱한 곳에 머물렀다간. 에효효.”

앓는 소리를 내는 조규헌.

몸이 마비되지 않았다면 목을 옴츠리며 죽는시늉을 했을 것이다.

죽는시늉이라.

정록의 시선이 흘낏 해원기를 향하고,

“그렇지. 그러고 보니 네놈의 신패를 확인하지 않았구나. 뭐, 간자 노릇을 하려면 신패 정도야 얼마든지 훔쳐서 술법을 바꿀 수 있다고 여긴다만. 그럼 네 신패는 지금 어디로 연결되는지 말해 보아라.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으니까.”

신패에 담긴 술법. 그것만으로도 심상치 않다는 걸 느끼곤.

일단 임기응변으로 추궁하는데.

조규헌의 눈이 조금 비틀린다.

“네? 연결이라고 하시면.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한단에서 출발해 지궁을 거쳐 형대로 가니까…….”

당연히 지궁에서 신패를 바꾸어야 형대로 갈 수 있다.

뻔한 걸 왜 물을까. 그러고 보면 지궁이 아니라 가는 길목에서 이렇게 밀각의 높은 분이 마중한 것도 평소에는 없었던 일.

얼핏 의심이 생긴 표정.

실수했다는 걸 단박에 깨달은 정록이 도리어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고분고분해졌다 싶더니 잔머리가 또 돌아가느냐? 꼴에 용케 잘 넘어간다만, 이번에 허튼소리가 나왔다면. 흐흐.”

마지막의 음산한 웃음과 해원기를 슬쩍 가리키는 턱짓.

함정이 깔린 질문으로 떠봤고, 답이 틀렸다면 목을 쳤을 것이라는 암시라서 조규헌의 얼굴이 또 새파랗게 질렸다.

더구나 턱짓을 받은 해원기가 대뜸 조규헌의 품에 손을 넣어 신패가 담긴 꾸러미를 꺼내는 통에.

그야말로 목이 날아가는 줄 알아서 이마에 진땀까지 맺혔다.

[소재를 파악한다는 술법은 맞아. 다른 용도는 아직 밝히지 못했지만, 우선 이자의 신패에 담긴 술법을 막겠네.]

정록이 떨떠름한 눈으로 자신의 허리띠를 살피다가 표정을 고쳤다.

신패에 이런 술법이 담긴 걸 몰랐다니. 만약 여기에 오소민이 있었다면 또 한바탕 놀림감이 될 뻔했다.

이쯤에서 화제를 바꿀 필요가 있다.

“어차피 한단이든 형대든 다 연락을 취하면 금방 밝혀진다. 먼저 네가 접촉할 장소와 담당 인원을 읊어봐. 하자가 있다면 신패도 거짓이겠지.”

일부러 그다지 기대하지 않는다는 투.

마혈이 짚였는데도 해원기가 품을 뒤진 후로는 전신에 오한이 돋는 것 같은 조규헌으로선 의심이고 나발이고 할 여유가 없었다.

“네, 넷. 한단은 고성부(古城府)였고, 형대는 조가보(趙家堡)와 풍운무관(風雲武館) 중의 한 곳입니다만. 소인은 언제나 풍운무관으로 갔습지요. 풍운무관의 교두가 영접을 맡아서.”

“이번에 조가보로 명령이 떨어졌다면?”

“아, 조가보는 엄청 크다는 얘기만 들었지, 가본 적은 없습니다. 풍운무관을 관리하는 반룡령도 함부로 가지 못한다고, 에, 물론 누구를 만나야 할지는 기억하고 있지요. 조가보의 두(杜) 총관을 만나 신패를 보이면 된다고.”

육신지궁에서 신패를 바꿀 때 다음 명령을 받는다는 걸 기민하게 알아챈 정록의 질문이라.

조규헌은 지시받은 내용을 전부 실토해야 했다.

한단과 형대.

육신지궁이 무너졌고, 명정한사 대신에 왔던 탁청대인은 도주했다.

해원기와 오소민에게 짧게 들은 얘기로는 은허에서 큰 싸움이 벌어졌고, 동창과 아문의 주요 인물들이 대패한 상태.

정록은 패배하고 도주한 자들이 모이는 곳을 획정하려고 시도했다. 남쪽이면 한단이고, 서쪽이면 형대.

해원기는 은허에서 자산을 거쳐 여기 계택으로 왔으며, 또 탁청대인은 서쪽에서 육신지궁으로 왔었으니까.

아무래도 형대가 더 심증이 가는 곳. 그리 크지 않은 지역에 두 군데나 소굴을 만든 것도 평범해 보이진 않는다.

이 정도면 조규헌에게 더 들을 내용은 없을 듯.

정록이 해원기를 보면서 손을 쳐들었다.

문초의 연극을 끝내겠다는 표시.

그런데 조규헌의 신패를 꺼냈던 해원기가 묘한 표정을 짓는다.

신패가 담겼던 꾸러미 안에서 또 뭔가를 집어 들고.

“이건 뭐지?”

손가락 한 마디 길이의 나뭇조각 네 개. 끝에다 구멍을 뚫어 붉은 끈으로 엮었는데, 그 나뭇조각을 보는 해원기의 시선이 날카롭다.

아무런 표시도 없는 나뭇조각들. 장식품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눈앞에 흔들자 조규헌도 멀뚱멀뚱 보더니,

“모르겠습니다. 그냥…….”

수상한 대답에 정록이 얼른 얼굴을 들이민다.

“그냥?”

“그건 그냥 남궁세가에서 받아서 온 건데. 회람(回覽)이라나요? 제가 마침 한단을 거쳐 북상한다고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문주께, 아, 예전 선사님과 새 문주 두 분에게 보여드리라고, 또 혹여 알아보는 높은 분이 계시면 처분을 맡기라고 해서. 이전에 올린 중요한 보고의 보충이라고 하던데. 아아, 대인께서 맡아주시면 어떻습니까? 이거면 제가 남궁세가에서 온 걸 확실히 증명하고, 저는 진짜 간자가 아닙니다.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하는 주제에 불과해서. 제발 살려주십시오.”

주절주절.

어떻게든 누명을 벗으려는 조규헌이라 뭔지도 모를 물건에 대해 아는 걸 전부 늘어놓는다.

정록이 찌푸린 표정을 해원기에게 돌렸다.

들어도 무슨 소린지. 나뭇조각 네 개를 엮은 물건을 돌려본다니.

남궁세가의 누가, 무슨 목적으로, 조양선사와 새 문주에게 보여준다는 건지. 게다가 알아보는 고수가 있으면 맡기란다.

조규헌도 제대로 아는 게 없다는 걸 금방 알아챘지만, 이렇게 엉터리 같은 지시가 있나. 오죽하면 밀각의 고위직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정록에게 맡아달라고 할 정도.

정록이 뭐라고 답하기 전에 해원기의 질문이 먼저 나왔다.

“이게 뭔지는 들었나?”

이전에 올린 중요한 보고의 보충이라고 했었다.

조규헌의 눈이 껌뻑껌뻑.

“아무것도 못 들었습니다. 그저, 에, 하북팽가가 북쪽을 맡은 것처럼 남궁세가는 남쪽을 담당하니까…… 뭐, 그런 추측을. 헤헤.”

모른다는 소리. 해원기의 입이 굳게 다물리자 정록이 손을 가볍게 떨쳤다.

털썩.

수혈(睡穴)까지 짚인 조규헌이 제자리에서 혼절해 쓰러진다.

조규헌까지 헛간 한쪽에 옮겨놓고 정록이 손을 탁탁 털었다.

“의외의 소득이 적지 않지만, 워낙 졸개라서 깊은 내용까지는 모르네. 일단 육신지궁에서 도주한 탁청대인은 형대로 간 거로 봐야. 흠, 그게 뭔데?”

여전히 나뭇조각을 응시하는 해원기의 모습에,

정록이 하던 말을 멈추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조양신문의 새 문주가 된 노문기라는 자도 궁금하고, 조규헌에게 들은 얘기들을 논의할 필요도 있건만.

오직 나뭇조각에만 집중하던 해원기가 그제야 눈길을 돌린다.

“묘하군. 이거 검흔(劍痕)일세.”

검흔. 검을 쓴 자취.

“검흔? 네 개가 다?”

“음, 각각 다른 이가 쓴 검흔이지. 남쪽 지방에서 온 나뭇조각은 맞아, 각각 편차가 있지만. 이걸 뭣 때문에 회람한다는 걸까.”

“글쎄. 이놈 말에 따르면 남궁세가가 남쪽 세력을 관리하는 것 같던데. 조양신문은 본래 산동이었고, 하북팽가는 말 그대로 하북. 육신지궁으로 북상하는 조양신문의 졸개 편에 들려서 북쪽으로 회람을 시킨다라. 어디 보세. 어?”

말을 받으며 가까이서 살피던 정록의 눈도 커진다.

해원기처럼 단박에 검흔을 알아내지 못했어도, 일단 검흔이라는 걸 알고 주시하자 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남쪽은 아직도 수목에 물기가 완전히 마르지 않았을 때, 그래도 이렇게 조그만 나뭇조각에 그런 특징이 나타날 리 없건만.

네 개 중의 단 하나는 당장이라도 새순을 틔울 것처럼 싱싱하다. 나머지는 전부 죽은 것, 그나마 셋 중 하나가 상당히 매끄러운 단면이긴 해도.

해원기의 무거운 탄성이 귀를 울린다.

“대단한 검! 누가 이런 경지에 이르렀을지.”

새순을 틔울 것처럼 싱싱한 나뭇가지. 절세검왕조차 감탄을 금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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