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317화 (317/410)

제80장 천자단정(擅自斷定) (1)

“어? 누구…….”

“내 허리띠의 신패를 보고도 모른단 말이냐? 젠장, 내가 이런 심부름이나 해야 하다니. 그러는 너는 어디에 속한 누구기에?”

“허리띠의 신패라면, 으음, 호, 혹시 밀각…….”

“예끼! 어디서 함부로 주둥이를 놀리는 게야.”

“예, 예입! 소, 소인은 산동 쪽에서, 조양신문의 장자 직위에 있는 조규헌(曹圭軒)이라고.”

“이름이야 어떻든. 이게 단가? 자네 혼자서?”

“네, 넷. 사정이 저 혼자 올 수밖에 없어서. 아, 아시지 않습니까, 저희 조양신문은 지금 새로운 문주(門主)가 막 폐관을 끝내고 나온 참이라.”

“허, 그런 것까지 알아야 하나? 지궁의 일을 돕는 것만으로도 내가 얼마나. 에휴, 됐다. 가져온 물건들이 어떤지부터 봐야겠구나.”

“아, 네. 그게.”

확실히 정록의 변신은 대단하다고 감탄이 나올 수준.

그저 외모만 바꾸는 역형대법이 전부가 아니다. 상황을 주도해서 감히 의심을 품을 틈조차 주지 않는 화술까지.

밀각에서 파견 나와 이런 시각에 하찮은 일을 맡게 된 대부의 짜증 난 심정을 적절히 드러내서 상대를 꼼짝 못 하게 밀어붙이는 바람에,

딱딱이를 든 도사 차림의 인물이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게 되었다.

본 적 없는 얼굴. 허리띠에 매달린 신패로 밀각에서 나왔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미리 밖으로 나와 기다린 적이 없었고, 끌고 온 실혼인들을 먼저 점검하는 경우도 처음이다.

조규헌이란 자가 군소리 없이 품에서 작은 책자를 꺼냈고,

그 책자를 정록이 귀찮은 티를 내면서 둘둘 말아 쥐었다.

“나더러 여기서 이걸 보라는 건가? 쯧, 그냥 간단히 떠들어 봐.”

달도 뜨지 않은 밤중이다.

공력을 운용해 보려면 볼 수야 있지만, 정록은 혀를 차면서 몸을 옆으로 돌렸다.

조규헌의 딱딱이 소리가 멈추자 자연히 제자리에 선 열다섯 명.

허옇게 칠한 얼굴에 남루한 백포를 입혀서 진짜 관짝에서 막 나온 시체 같은 모습이다.

정록이 물건(?) 감정하듯 하나씩 살피기 시작하는데.

이건 해원기의 전음이 들렸기 때문이었다.

[내가 본 적이 있는 자야. 조양신문의 조양선사는 현신장, 내가 얼마 전에 꺾었는데.]

수사를 죽였다더니 이번에는 조양선사라는 현신장을 꺾었단다.

그런데 현신장이 우두머리가 아닌가? 새로운 문주는 또 뭔지.

해원기가 태산 아래에서 만난 적이 있던 조규헌.

태안현에서 계택까지 혼자서 왔다는 것도 특이하고, 새로운 문주가 폐관을 끝냈다는 말은 더욱 이상해서.

정록은 조금 더 파고들기로 작정했다.

“모두 엄선한 재료들입니다. 그런데, 저, 이전엔 몽롱향주께 명부를 건네 드리면 그걸로…….”

이제야 낯선 상황에 어색함을 느꼈나.

조규헌이 조심스럽게 건네는 말에 정록이 대뜸 코웃음을 쳤다.

“흥, 산정뢰주고 몽롱향주고 지금 정신이 없는 판이야.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직접 나왔겠느냐? 시간은 촉박한데, 재료는 갈수록 부족하고. 육신지궁을 관리하는 명정한사, 아, 괜한 소리를 했군. 어흠.”

짜증이 심해지면 말에 실수가 있는 법. 정록이 헛기침으로 얼버무리는 건 고도의 심리전이어서.

산정뢰주와 명정한사를 들먹이자마자 조규헌의 허리가 급히 꺾인다.

“소인이 외람되었습니다. 부디 용서를. 저, 이번에는 전부 황산(黃山)에서 조달했다고 들었습니다. 근래 황하문과 흥륭상단이 거추장스럽게 구는 터라. 또 비축해놓았던 반룡령도 영 관리가 되질 않아서. 파양호(鄱陽湖)와 전당강(錢塘江)에서 건진 것들도 있지요.”

육신지궁을 책임진 명정한사를 그냥 부를 정도니 밀각에서도 상당한 지위라고 여겼는지.

겁먹은 조규헌의 혀가 평소보다 더 매끄럽게 돌아간다.

실혼인을 하나씩 훑어보는 정록의 눈매가 살짝 올라갔다.

조규헌이 비위를 맞추려고 쓸데없이 말이 많아진 덕에 알아야 할 것이 늘었다.

“그것들이? 왜?”

딱히 지칭하지 않고 심드렁하게 되묻는 말.

“에, 그게. 산동은 아무래도 눈치가 보이고, 염상단은 여전히 껄끄러운 상대니까요. 반룡령이야 하도 여기저기 불려 다니는. 헤헤, 더 잘 아시잖습니까. 결국, 지금으로선 황산의 남궁세가 밖에. 아 참, 그 소식도 올라갔습니까?”

그럴수록 조규헌은 더 열심히 입을 놀려댈 수밖에 없다.

정록이 눈길도 돌리지 않고서 말을 받으니,

“무슨 소식?”

홀대하면 홀대할수록 더 관심을 끌려고 애쓰기 마련이다.

조규헌이 손바닥을 비비면서 은근히 목소리를 낮추었다.

“파양호와 전당강 아래로는 함부로 나서지 못하게 되었다던데요. 호화방의 정예가 형산(衡山)에서 한번 크게 당했고, 반룡령주가 무이산(武夷山)에서 혼이 났다고. 남궁세가도 섣불리 끼어들지 못할.”

조규헌 정도의 직위로선 진위도 분간할 수 없는 소문일 터.

어떻게든 밀각의 요인 눈에 잘 보이고 싶어서 마구 떠드는 건데.

정록이 그제야 머리를 조금 돌려준다.

“허, 조양신문의 장자 직위라더니 어떻게 그런 소식을. 흐음, 어쩐지 혼자서 이 물건들을 끌고 왔다 했더니만. 대단히 영민한 친구로구먼.”

“아아, 역시 아시는. 아이구, 제가 무슨. 헤헤.”

겨우 원했던 관심을 받게 되었구나.

밀각의 요인이 높은 평가를 해주니 조규헌의 입가에 웃음이 절로 맺힌다.

[소숙모, 음, 낭랑께서는 반룡령, 남궁세가, 호화방, 정수회 등을 동창의 우익(羽翼)이라 여기셨네.]

여의낭랑 방온화를 해원기는 소숙모라고 부른다.

정록으로선 정신이 번쩍 날 수밖에.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조규헌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야, 조양신문에 있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드네. 인재란 맞는 장소에 있어야 빛을 발하지. 적재적소(適材適所)야말로 우리 밀각에서 소중히 여기는 바라. 천하의 정세를 두루 살피는 밀각의 기무당(機務堂)이라도 자네처럼 시야를 크게 가지기 어렵거든. 흠, 조금 더 자네의 생각을 듣고 싶은데. 하아, 이거 서로 공무에 매인 몸이. 쯧쯧.”

과한 칭찬, 아쉬운 탄식.

어린아이도 속이기 어려운 허튼수작이지만, 이미 몸이 단 조규헌에게는 적절한 미끼였고.

“이렇게 고마운 말씀을. 저야 뭐, 다시 한단(邯鄲)으로 갈 필요 없이 형대(邢臺)에 복명하면 됩니다. 그럼, 바로 대인을 모시고 지궁에 들러서…….”

일생의 기회가 왔답시고 설치는 조규헌을 정록이 말렸다.

“아니야, 다른 아문에 뺏길 수야 없지. 음, 저쪽의 헛간으로 가세. 그곳에 내 호위를 두었으니까.”

“네? 호위라면. 과연! 이렇게 친히 납신 게 다 이유가 있었군요. 그러면 제가 얼른.”

호위를 숨겨두고 혼자 나온 척.

주도면밀하고, 또 그럴 위치가 되는. 진짜 밀각의 요인이라는 확신이 든 조규헌이 황망히 딱딱이를 들고 앞장섰다.

기껏해야 학생이라고 불리는 졸개 십여 명을 거느렸던 인생,

드디어 앞길이 열린다는 부푼 희망을 품고서.

해원기는 감탄을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려서 고사사예(古士四藝)가 어떤 것인지 대강 배우긴 했지만, 정록이 조규헌을 다루는 광경이야말로 고화문(古畵門)의 역형대법이 얼마나 무서운 절학인지 실감하는 순간이랄까.

‘기미(機微)를 선점하고 변화를 통어(統御)한다.’

만약 검을 들었다면 그 기세만으로 상대를 꼼짝 못 하게 할 도리.

정록의 언행 하나하나가 마치 의미심장한 남종화(南宗畵)의 필치 같다.

무공이든 기예든 필경 극경은 심도(心道)에 들어서는 것이요, 그 마음을 공략함이 어찌 쉬 이루어지겠는가.

실혼인 열다섯을 먼저 헛간에 들이고,

땅에 눕힌 당규 등과 해원기를 발견하고서 어리둥절한 조규헌을,

정록이 단숨에 제압할 때까지 해원기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집중했다. 진귀한 명화 한 폭을 감상하듯이.

비로소 탄성을 토하며 손뼉을 칠 참인데,

정록의 눈짓에 행동을 멈춰야 했다.

조규헌은 한단에서 출발해 형대에 복명한다고 했었다. 육신지궁이 무너진 것과 상관없이 조규헌 하나쯤 실종되어도 바로 티가 나지 않는다는 의미.

그래서 헛간에 끌고 와 쓰러뜨린 줄 알았더니.

정록이 무서운 표정으로 호통을 친다.

“네 이놈! 네놈은 어느 아문의 간자(間者)인고?”

“네에?”

마혈이 짚여서 뻣뻣하게 굳어진 조규헌이 황당해서 눈을 둥그렇게 뜬다.

해원기도 당황하긴 마찬가지.

아직 정록의 연극은 끝나지 않았다.

“여기 내 호위가 예전에 밀각의 감찰대(監察隊)로 산동을 돌았을 때 네놈을 본 적이 있다고 했지. 지금 본관도 육신지궁을 감찰하기 위해 온 터, 너희가 밀각의 눈을 속이고 음모를 꾸민다는 단서가 있기 때문이다. 몇몇 아문이 감히 동집사창을 거역하려는 기미는 진즉 알고 있었다만, 설마 현신장을 보낸 조양신문까지.”

“어, 억울합니다. 제가 어찌…….”

“어허, 똑바로 고하지 못할까? 밀각이 왜 밀각인지 모르느냐? 조양신문에서 한 지역의 장자라면 일반 강호 문파의 향주(香主)에 해당하는데, 그런 네가 혼자 한단까지 와서 실혼인을 끌고 육신지궁으로 간다? 게다가 산동의 한구석 사정이나 알까 말까 한 주제에 황산, 형산, 무이산을 언급하고, 강남의 어디까지 밀려났다는 소식을 알아?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무섭게 몰아치는 문초.

조규헌의 얼굴이 퍼렇게 질리고, 입술이 바르르 떨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마혈이 짚이지 않았다면 당장 머리를 땅에 처박고 애걸복걸했을 듯.

나름 조양신문의 장자라고 혼원관에 도복까지 걸친 의젓한 차림새지만, 지금은 완전히 고양이 앞의 쥐.

밀각의 요인에게 잘 보여 출세해보려던 부푼 꿈이, 그래서 조금이라도 귀에 들어온 건 모조리 떠들어댔던 열성이 도리어 이런 횡액을 불러올 줄이야.

“사, 살려주십시오! 제발 살려…….”

항변은커녕 빌기도 바쁘다.

그제야 정록이 해원기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지금부터 하나씩 확인해서 물어볼 것이야. 조금이라도 거짓을 붙이면 당장 내 호위가. 흠, 그다음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마혈로 굳은 목이 돌아갈 리 있나.

해원기가 그저 멍하니 관람(!)하는 자세란 걸 알지 못한 채 조규헌이 눈만 끔뻑거린다.

“네, 넷.”

급하게 나오는 대답에 한결 부드러워진 정록의 음성.

“제대로만 고하면 큰 공을 세운 셈이라. 네 목숨을 구할뿐더러, 본관이 장차 네 뒤를 보살펴주도록 하겠다.”

어르고 뺨치고.

그림이란 원래 예술이다.

“본래 교주(膠州)와 소항(蘇杭)에서 재료를 구하다가 황하문과 흥륭의 염상단 때문에 수급이 어려워졌고. 그래서 황산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저희는 그저 중간에서 물건을 옮기는 역할만.”

“각지의 상황을 연결하고 시장을 확보하는 건 구란와자의 일입지요. 장거리 운송도 하오문의 차행(車行)을 이용하면 되고. 그렇게 모인 재료를 마지막에 선별해서 조금씩 육신지궁으로, 네, 이전엔 저와 같은 장자 두셋에 수재(秀才)가 한 명 붙었는데. 어쩐 일인지 근래에는 손이 부족해졌습니다.”

“그게, 아마 봄에서 여름 넘어갈 때쯤인 것 같은데. 신문(神門)이 발칵 뒤집혔거든요. 문주인 선사(善士)께서 조사(祖師)의 후손을 찾았다고, 일반 제자들을 전부 파문해서 귀가하도록 명하셨으니까. 장자의 직위 이상만 따로 지시를 받도록 하신 후부터. 일만 많아져서 아주 힘이 들었, 아, 죄송합니다.”

“그 때문에 황산에도 직접 다녀와야 했고, 또 신문의 지시를 받으려면 산동 내주(萊州)로, 거기서 다시 한단으로 왔다가. 에, 복명은 또 형대로 가야. 하여간 쉴 틈이 없었습니다요. 저뿐 아니라 장자와 수재가 전부 동원되다시피. 신패(信牌)로 명을 받고 그랬으니까. 에휴.”

“강남의 소문은 죄다 황산에서 들었습지요. 호화방, 반룡령, 정수회…… 남궁세가는 제가 자주 가는 편이라 아는 얼굴도 생겼지만, 나머지는 그저 이름만 알 뿐, 따로 만난 적은 없습니다. 워낙 거치는 곳이 많은지라 아문의 대인들을 멀리서나마 뵌 적이 있고, 이것저것 귀동냥도 많았습니다만, 저 같은 졸개가 무슨 간자를 하겠습니까? 당최 무슨 말씀이신지.”

정록이 하나씩 묻는 말에 고분고분 대답하면서 마음이 많이 안정되었는지.

조규헌이 애처롭게 하소연을 덧붙였으나.

정록의 시선은 그 뒤의 해원기만을 보고 있었고, 팔짱을 낀 채 심각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해원기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새 문주가 폐관을 마치고 나왔다는 소식을 아문의 대인들도 아는가?”

갑자기 들린 해원기의 낮은 목소리에 놀란 조규헌.

목이 돌아가지 않으니 눈동자가 억지로 몰리고,

“넷. 전부 다 아시는 듯해서, 에, 한림(翰林)이 떴다고 웃으시던 분도 있었.”

“한림? 새 문주가 누구기에?”

“그건 저도 잘.”

애매한 대답에 정록이 코웃음을 치자,

“흥, 소위 조양신문의 장자가 자기 문파의 문주가 누군지 모른다? 조사의 후손이라며?”

역시 정록이 무서운지 조규헌의 말이 급해졌다.

“그, 그거야 선사께서 그렇게 공표하셔서. 조사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아, 압니다, 새 문주의 이름은 알아요!”

한 마디라도 어긋나면 등 뒤에 선 호위에게 칼을 맞을 것 아닌가. 머릿속을 박박 긁어서라도 원하는 답을 찾아야 하는 조규헌이 목청을 높인다.

“노문기. 네, 그런 이름이었습니다.”

피식, 웃음이 터지는 정록. 그러나 반면에 해원기는 미간을 찡그렸다.

뜻밖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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