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장 초선향신(超仙向神) (4)
함께 나누었던 얘기들. 상대는 이제 동창에서 이십사아문으로 확대되었고, 자칫 대내 전체가 될지도 모른다.
과거의 난세가 되돌아온 듯 잊혔던 무공들이 도로 출현했으나 이번에는 전부 한곳에 모인 셈.
규모가 얼마나 큰지, 어떤 의도로 여러 가지 사건을 벌이는지 명확하게 밝혀진 건 없고.
당장 당규와 실혼인들을 안전하게 보호할 방도도 마련하지 못했다.
생각할 일은 많다.
하지만, 스스로 돌아보아 바른길을 찾는 것이야말로 무인의 본령(本領).
무공이 뜻대로 구현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잠심침령에서 그 답을 구하려고 했건만,
어째서인지 자꾸 육신지궁 안에서의 일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특히 당규와 처음 마주쳤을 때와,
‘천시, 지리, 인화에 맞추어 이름 붙인 삼재금독의 층차(層次)를 간결하게 설명하는 것 같았지. 특히 그 재변과 앙화의 구분이.’
재변은 천재지변이니 천시독과 지리독. 앙화가 인화독일 텐데.
정화소재와 갈급오탁이란 전혀 상반된 글귀를 읊었었다. 천시독과 지리독을 바탕으로 해야 인화독에 이른다면서 앞에는 정화가 존재하는 곳이라더니 뒤에는 더러움을 허둥지둥 찾는다고.
아귀가 맞지 않는다.
그러면서 불쑥 떠오르는 또 한 가지 기억.
바로 오독존이 지껄이던 구결들이다.
‘정 형을 만나고서 산정취탁을 이용한 교배 실험, 즉 육신지궁은 고를 낳기 위한 장소란 걸 알았으나.’
대우신장과 십대검상을 점검하려던 애초의 목적은 잊고,
육신지궁에서 겪었던 사건을 차례차례 따져본다.
끊어내지 못할 잡념이라면 차라리 집중하는 게 낫다. 스스로 깊이 가라앉는 잠심침령에 잡념이 끼어든 이유가 있을 테니까.
환기와 수로의 공간이 함께 지나가는 연독관. 그 연독관에 들자마자 오독존이 떠들기 시작했었다.
‘삼음을 도울 양수라고. 재현한 육악을 교배하려 했다는 증거다. 그러나 어떻게 교배, 그것도 수사가 하나 빠진 채로. 그리고 교배를 통해 무엇을 배태하려는. 흐음, 그때…….’
뭐라고 했더라.
절로 이마에 주름이 잡히려는데, 홀연히 머릿속이 환해지면서 오독존의 말이 한 글자 한 글자 떠오른다.
본래 기억력이 뛰어난 해원기지만, 지금은 마치 당시의 장면을 고스란히 되살린 듯.
상상지(上上智)가 마침내 풍뢰지력으로 완연히 깨어났다.
‘음태(陰胎)를 온전히 배게 하는 것이 양수니 양수는 또한 양수(陽水)다. 위에 연못을 인 지하건축, 자연히 삼음뢰가 주축이 되고, 삼양뢰를 환기와 수로에 붙여야 음태양수가 이루어지는데. 햇볕을 받는 대신 물을 뿌리고, 숨을 쉬는 대신에 좀을 먹는다고 해서. 흡수화운이라고 했었어.’
햇볕에 쬐어 말린다는 쇄(曬)를 물을 끼얹는다는 쇄(灑)로, 게다가 식(息)을 식(蝕)으로 바꾸어서 이루어질(成) 것을 사라지게(衰) 한다던가.
고독이든 아니든 교배를 통해 뭔가를 배태하는 건 성(成)이어야 하거늘.
들이마셔(吸) 거두어들이고(收), 바꾸어서(化) 움직인다(運).
갈수록 괴이한 이치로 나아갔었다.
그럴 수도 있겠지. 도리에 어긋나는 독종지인이요, 아울러 사황령을 통해 지각을 얻기까지 한 오독존이었으니.
‘나를 정확히 파악할 정도의 이성을 지녔는데도, 마지막 시험이니 하면서 상황을 파악하진 못했었다.’
해원기를 순양지체로 여기기는 쉬워도,
바탕이 굳건하여 흔들리지 않는다는 고본정원(固本定元)으로 간파하는 건 예사 안목으로 불가능하다.
실체를 꿰뚫어 보는 눈은 상승의 경지에 이른 고수만이 지니고, 그런 고수는 여간해선 외물에 현혹되지 않는다.
아무리 사황령이라고 해도 사람을 바보로 만들고서야 무슨 소용이 있나.
독황령이라고 바꾸어 부르며 한 갑자 넘게 고생했던 오독합일을 이루었다고 독황을 자칭하던 오독존.
오독동을 언급하자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지 않았던가.
그러면서도 굳이 독황을 강조하며 막무가내로 덤벼들었다.
‘그래, 음양유명독강. 유명(幽冥)인줄 알았지만, 유명(幽明)이 맞겠구나. 그때도 발검제형이 이상한 반응을 보였고, 오독존이 놀란 건 단지 제탁지검 때문이었다.’
흐릿한 달무리가 어울린 쟁반만 한 검은 빛 덩어리. 음양유명독강이란 걸 깨뜨리려고 발검제형에 판분천지까지 곁들였거늘 효과를 본 건 오직 제탁지검뿐.
심지어 어검대법의 폭령진화와 대괴무극으로도 상처 하나 입히지 못했다.
‘그 유광명멸이란 구결이 핵심.’
저승을 말하는 유명이 아니라 저승과 이승을 함께 말하는 유명(幽明)이고,
어두운 빛이 깜빡거린다는 유광명멸이 아니라 어두움은 빛나고 빛은 꺼진다는 의미였구나.
그래야 검강이든 어검이든 소용없다고 떠들던 산정취탁과 연결된다.
적멸검의 무량대적으로 내부를 직접 찌르지 않았다면,
끝내 음양유명독강의 허실을 헤아리지 못하고 희롱당했을 터.
당시의 상황이 그림처럼 눈앞을 스쳐 간다.
바둑에 뛰어난 국수(國手)는 자신이 두었던 기국(棋局)을 언제든지 다시 되살려 둘 수 있단다.
그럼으로써 정진을 도모하는 복기(復棋).
지금 해원기는 마치 그 복기처럼 오독존과의 싸움을 되새기고 있었다.
삶의 목표로 세운 박대정심.
무학의 이치를 따지면서 차츰 그 범위를 넘어간다.
‘양팔이 없이 독강을 발휘했고, 다리를 포함한 신체에 성한 곳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호각 소리가 나자 스스로 신체를 찢어…… 특히 그 양팔은.’
해원기의 반개한 눈에서 신광이 뿜어져 나왔다.
저승과 이승이 경계를 겹친다는 유명교계란 소리를 부르짖으면서 오독존이 양쪽으로 쏟아낸 음양유명독강은,
하나는 불처럼 타오르고, 또 하나는 광풍이 휘몰아치는 핏줄기였었다.
육신지궁이 진동하면서 순간적으로 그 광경을 놓쳤으나,
상상지에 의해 재현된 기억에서 그게 무엇인지 모를 수가 없다.
하나는 폭령진화의 불, 또 하나는 대괴무극의 바람.
허탕 쳤던 해원기의 어검대법을 오독존이 어떻게 체내에 간직했을까.
음양유명독강은 그냥 독공을 가장 높은 경지로 끌어 올린 형태가 아닐 수도.
무너지는 연독관을 뒤로하고 빠져나오기에 급급했을 때 들렸던 오독존의 목소리.
굉음에 파묻히면서도 미친 듯이 소리치던 그 구결을 기억해내려는데.
반개했던 해원기의 눈이 뜨이고,
가슴 앞에 모았던 두 손도 풀어졌다.
곁에서 잠이 든 줄 알았던 정록이 살금살금 일어나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밖의 기척을 살피게 되어.
“정 형.”
목소리를 낮추어 불렀는데도 정록이 기겁해서 펄쩍 뛴다.
“으헉, 해 형, 어떻게……?”
운공에 들었던 해원기가 멀쩡하게 눈을 떠서 엄청 놀란 듯.
일부러 해원기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꼼짝도 하지 않으면서,
또 운공 중의 해원기를 지키려는 마음에 사방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던 정록이었다.
“체, 운기조식(運氣調息) 아니었어? 그게 그렇게 금방 끝날 수 있나?”
정록이 헛간 문틈에 얼굴을 갖다 대면서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체력이 떨어지면 음식을 섭취하고 잘 쉬어야 회복하듯이, 내공을 소모하면 호흡을 가다듬어 기운을 북돋아야만 한다.
각자 익힌 무공에 따라 그 운용법이 다르긴 해도 기본은 운기조식.
일정한 호흡으로 내관(內觀)을 이루는 과정은 대동소이하고, 일단 소주천(小週天)으로 체내의 기를 한 바퀴 순환하지 않고서는 소기의 성과를 이룰 수 없다.
아무리 짧아도 짧은 향이 하나 탈 시간은 걸리는데.
마치 선잠을 잔 것처럼 금방 눈을 뜬 해원기. 그러고 보니 실혼인을 들고 이 헛간으로 올 때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절세검왕이라는 어마어마한 명호가 그냥 붙은 게 아니란 것쯤은 알지만,
천하의 모든 무공과 궤를 달리하는 신왕공을 모르는 이상,
정록에게는 해원기가 슬슬 괴물로 보이기 시작한다.
“운기조식 맞아. 그 바람에 주위의 기척에 둔했군. 자네가 먼저 깨어나지 않았다면.”
해원기의 차분한 대답이,
정록을 더 낯간지럽게 만들었다. 자는 척하면서 호법을 서느라 신경을 곤두세웠다고 말하기는 어색하잖나.
정록이 괜스레 입맛을 다시곤 눈에 힘을 주었다.
띠릭, 띠릭.
아련하게 귀를 간지럽혔던 소리와 함께 스멀스멀 보이기 시작하는 그림자들.
마을에서도 외진 헛간에서 꽤 떨어진 곳, 늪지와 수풀이 엉겨 우묵한 곳을 따라 일렬을 이룬 자들이 움직이는데,
그게 영 이상하다.
시각은 축시에서 인시로 막 넘어갔으니 아직 한밤중. 이 시각에 마을 바깥의 늪지를 따라 걸을 사람이 있을까.
더구나 한 줄로 늘어서 움직이는 열댓 명이 전부 보조를 맞추어서 오른발 왼발, 앞뒤로 흔드는 팔까지 똑같고.
더구나 술에 취했는지 잠이 덜 깼는지 비틀거리는 걸음새가 마치 한 사람 같다.
행렬의 맨 앞에 선 자만이 가끔 뒤를 돌아보며 손을 털고,
그럴 때마다 띠릭거리는 소리가 나는 걸 보면 둔탁한 딱딱이라도 손에 쥔 듯.
그야말로 오밤중에 귀신 떼거리가 소풍이라도 나온 정경이지만,
보는 순간 정록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실혼인이야.”
모를 수가 없다. 짧은 시간이나마 육신지궁에서 정기를 뺏긴 채 꼭두각시 노릇을 하던 많은 실혼인을 보았잖나.
해원기의 표정도 조금 굳어진다.
“이런 식으로.”
사람은 정기를 다 뺏기면 죽는다. 육악을 재현한답시고 흉악한 금수를 기르는데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을지.
수가 부족해지면 이렇게 보충했다는 거다.
정록이 당장 뛰쳐나가려는 해원기를 붙잡았다.
“해 형, 저들은 아직 육신지궁이 무너진 걸 모르지. 또 백여 명이 넘는 실혼인을 전부 저런 식으로 끌고 왔을지도 확실하지 않아. 당장 우리가 구한 자들 중에 당가의 소가주가 있다는 걸 고려하면.”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해원기가 굳은 얼굴로 보자 정록의 말이 빨라진다.
“저건 일종의 구시술(驅屍術)로 보이잖아. 밤에만 움직여야 하지. 그럼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출발했을 테고, 혹시 눈에 뜨여도 시체로 보이게 미리 수작을 부렸을 거야. 그렇다고 미망산을 미리 썼다간.”
구시술이란 객지에서 죽은 시신을 얼어붙게 만들어 음기가 충만한 밤에 스스로 걷게 만드는 술법.
그런 강시(殭屍)를 사악한 목적으로 연제하는 사술이 따로 있긴 하지만,
실혼인은 강시가 아니다. 죽은 시체에서 정기를 빼앗을 수는 없으니까. 더구나 당규의 예를 보아도 평범한 백성보다는 무림인이 더 많을 터.
정록이 손가락을 하나씩 꼽더니,
“가까운 곳, 무림인을 홀리는 자들, 아직 미망산을 쓰지 않았고, 또 육신지궁이 어떻게 됐는지 모른다…… 흐흥.”
슬쩍 코웃음을 붙이곤 자기 가슴을 툭 친다.
“나, 아직 여 대부잖아. 신분도 증명할 수 있고.”
말하면서 전신을 가볍게 흔들자,
과연.
고화문의 역형대법은 놀라운 기예. 해원기가 빤히 보는 앞에서 정록은 순식간에 여 대부로 바뀌었다.
비로소 정록의 의도를 알게 된 해원기가 미간을 찡그렸다.
“괜찮겠나?”
“음, 탁청대인인가 뭔가 냅다 튀는 바람에 끊긴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잖아. 여차하면 그냥 두들겨 패면. 그리고.”
여 대부의 얼굴이 장난스레 눈을 껌뻑이면서,
“자네가 지켜볼 텐데 뭐.”
해원기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지도 않고 그대로 헛간 문 사이로 몸을 뺀다.
그 영교한 신법 또한 정록이 계승한 주장선의 절학.
해원기가 말릴 새도 없다. 이전에 고력사의 지하무덤에서도 그러더니.
정록은 곧장 그 일행 앞으로 나아갔는지,
“지궁에 도착할 때가 한참이나 지났거늘. 어디서 무얼 하다가 이제야 나타나느냐? 허 참.”
짜증이 실린 여 대부의 나지막한 꾸지람이 바로 들려서,
해원기가 맥없이 쓴웃음을 머금어야 했다.
하여간 대담한 친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