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315화 (315/410)

제79장 초선향신(超仙向神) (3)

오소민은 오독존이 누구인지 모르고, 정록은 당규의 일을 알지 못한다.

육신지궁의 비밀을 추리하기 위해선 상관된 과거의 사연을 인지해야 하기에, 할 수 없이 해원기가 없는 말재주를 동원해야만 했고.

어렵사리 이야기를 끝내자 정록도 오소민처럼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독경약전이라.”

“멸마지계. 흐음.”

백여 년 전의 일과 이어진다는 게 황당하지만,

오소민이 불만스럽게 여겼던 독(毒)이라는 글자가 전부 얽힌 내용.

정록이 혼절한 당규를 힐끔 보았다.

“놀기 좋아하는 이 소가주께서 깨어나야 제대로 알 것 같은데. 소위 독문(毒門)의 양대산맥이 전부 육신지궁에 있었다는 거잖아.”

멸마지계를 주장했던 오독동의 주인과 이를 반대했던 사천당문의 소가주.

하나는 연독관의 노독물로, 또 하나는 실혼인으로 있었어도 이 둘이 같은 장소에 있었던 건 절대 우연일 리 없다.

더구나 당규가 읊조리던 글귀와 오독존이 외치던 구결들.

제정신이 아닌 자들이 본능적으로 떠들었던 말들이 중요한 의미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오소민이 나뭇가지로 바닥을 긁으며 해원기를 보았다.

“당규와 오독존을 전부 만나본 건 해 형뿐이야. 육신지궁의 비밀이든, 개구린지 두꺼빈지의 정체든, 단서가 될 만한 걸 놓치지 말라고. 우선 괴상하다는 독공부터 설명해줘.”

분석과 추리를 하려면 정보가 충분해야 한다.

당규가 제정신을 차리고 육신지궁에 관해 아는 걸 다 털어놓으면 좋겠지만, 당장은 불가능한 상황.

해원기가 입맛을 다시며 팔짱을 풀고,

천천히 바닥에 정좌했다.

계속 두 친구를 내려다보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너무 무겁다고.”

양쪽 팔에 실혼인을 하나씩 낀 정록이 투덜거리자 오소민이 눈을 부라렸다.

“사내대장부가 왜 죽는소리야? 그럼 내가 낯모르는 남정네를 업어야겠어? 쓸데없는 소리 하면 해 형은 화제에 집중을 못 한다고.”

“쳇.”

앞장선 정록이 혀를 차면서 양팔을 추슬렀다.

반 시진도 걸리지 않는다는 옆 마을의 위치를 혼자 알기에 안내를 맡을 수밖에 없고,

그러면서 해원기와 오소민의 대화를 듣기만 하는 처지가 영 마음에 들지 않지만.

확실히 해원기는 대화에 소질이 없다.

아는 게 많은 건 좋아도 툭하면 화제에서 벗어나 긴 이야기가 돼버리니.

지금은 그저 오소민에게 맡겨둬야 한다.

“흐음, 그럼 홍황독전의 독은 이른바 심독(心毒), 어쩌면 독심(毒心)이 더 맞겠구먼. 탁청대인의 가마꾼은 화약이나 화탄이 아니라 홍황독전의 괴공에 의해 폭발했단 거지. 전에도 그랬지만, 무공 면에서 대내는 과거의 잔재를 많이 습득한 것 같아. 신주, 벽세, 지부. 후, 그 출처도 궁금하군.”

다시 말머리를 찾는 오소민.

당규와 실혼인 한 명을 맡은 해원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독존의 음양유명독강은 비록 들어본 적은 없어도 순수한 독공의 경지. 그러나 탁청대인의 수하들이 폭발한 것은 사부에게 들었던 광혈단(狂血丹)을 연상케 했고, 특히 사교부의 사신구멸(捨身俱滅)은 대홍귀천결(大洪歸天訣)이라는 동귀어진(同歸於盡)의 수법이었다.

검왕법신을 뚫고 방립과 피풍에 구멍을 낸 위력.

일체 단절되었을 끔찍한 수법이 어떻게 대내에 이어졌을까.

신주영웅회에서 복원한 유불도속(儒佛道俗)의 사가신공(四家神功), 지부 마공의 뿌리인 오대마도.

마치 이십여 년 전에 끝난 난세를 고스란히 재현하는 것 같다.

오소민이 뺨을 긁으며 말을 이었다.

“가장 의심스러운 곳은 역시 벽세. 예전에도 신주영웅회를 내부에서 파먹고 지부의 마공도 틈틈이 훔치려고 애를 썼다고 했으니까. 동창성조의 태상과 사부대중의 국사, 둘 중의 하나, 혹은 둘 다일 수도 있겠네. 분명히 벽세의 끄트머리와 닿았을 거야. 골치 아프군, 좀 더 대내의 깊숙한 곳을 알아야…… 흥, 밀각의 대부 따위는 그냥 심부름꾼에 불과해서 쓸모가 없어.”

앞에서 달리는 정록을 흘겨보는 눈매에,

해원기가 고소를 지었다.

밀각의 여 대부로 변장했어도 정록이 얻은 정보는 거의 없어서, 태상이나 국사라는 명칭도 몰랐으니.

“뭐, 그래도 이십사아문의 구성은 알아왔잖아. 금의위 대영반이 황제가 직접 임명한 대내제일고수란 사실도.”

정록의 변명하는 말투에도 오소민의 코웃음은 멈추지 않는다.

“흥, 잘 하셨어요오. 아주 큰 일 하셨네요오.”

비웃는 소리가 더 심해질까 봐 해원기가 얼른 끼어들었다.

“칠성검 서문창, 특이한 인물이더군. 동창이나 이십사아문과는 가깝지 않은 듯했어. 또 그의 검법이…….”

“얼씨구. 이렇다니까. 그 얘긴 나중에.”

이렇다니까.

오소민의 흘겨보던 눈매가 이번에는 해원기를 향했다.

화제를 벗어나는 나쁜 버릇이 또 나오잖나.

꽤 큰 마을. 외곽에서부터 닭과 오리를 기르는 축사가 줄줄이 늘어서서 비로소 계택이라는 지명을 실감했고.

굳이 마을 안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기에 외진 곳의 헛간 하나를 골랐다.

오소민이 주위를 둘러보곤 바로 몸을 돌린다.

“그럼 나는 거지들을 찾아보고 올게. 둘은 좀 쉬어.”

개방이 내실을 기하려고 분타를 많이 줄이긴 했어도 이렇게 큰 마을이면 거지가 한둘은 있을 법하고,

설사 근처에 거지가 없어도 개방 고유의 연락 방법은 다양한 편. 상당히 서두르며 떠나는 모습에 정록이 히죽 웃었다.

“흐, 완전 두목이구먼, 두목. 그래도…….”

해원기를 보는 시선이 묘하고,

“해 형에겐 엄청 신경 쓰는걸. 은근히 염세적이던 예전과 달리. 흐흐흐.”

웃음까지 짓궂게 붙어서 해원기가 그 시선을 슬쩍 피했다. 왠지 괜스레 찔리는 느낌이 든다.

“염세적이었다고?”

그래도 궁금해지는 건 어쩔 수 없나.

“음, 대강 짐작하는 거지만, 소구인, 오 소매가 그 어린 나이에 역용을 배우려고 왔었으니까. 평범한 배경은 아니겠지. 개방에서 순행장로를 맡겼는데도 거의 돌아다니질 않았거든. 난 저렇게 열정적인 모습을 처음 봐. 아, 자네 피곤하지?”

정록이 묘한 웃음을 거두고 마른풀을 그러모았다.

오는 내내 얘기도 많이 하고, 놀릴 꼬투리도 있었지만.

실로 격전을 치르고 조금도 쉬지 못한 해원기다.

육악의 하나인 수사를 자산에서 처치하고 육신지궁의 괴변을 뚫고 나온 친구.

절세검왕이라고 해도 쇠로 만든 사람은 아니다.

해원기가 당규와 실혼인들을 다시 한번 훑어보고 정록의 곁에 앉다가,

“이런.”

요대자를 더듬던 손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쳤다.

“왜?”

“오 형에게 술이 있는데. 놔두고 가라고 할 걸 그랬어.”

안타까운 말투. 정록이 키득거리며 품을 뒤졌고,

“그게 아쉬웠나? 괜찮네, 기관 중추에 처박힐 때부터 요걸 챙겨놨거든. 거기 원래 주초면국이 관리했잖아. 먹고 마실 건 충분해서 좋더구먼. 흐흐.”

작은 술병 몇 개와 마른 육포 같은 것이 한 꾸러미나 나온다.

쉴 자리를 찾고 나자 허기와 갈증이 한꺼번에 느껴진다.

오소민이 쉬 돌아올 것 같지 않아서,

먹고 마시던 해원기와 정록이 자연스레 대화를 이어갔다.

“흠, 생각 외로 일이 커졌어. 낭랑뿐 아니라 노조께서도 직접 나오셨으니. 처음 ‘위초산채’의 소식을 전할 때부터 심상치 않았지. 녹건의 망나니들까지, 에휴.”

정록의 짧은 한숨.

“그들은 누군가?”

방온화가 워낙 이야기를 주도하는 바람에 함부로 질문도 하지 못했던 해원기다.

정록이 씁쓸하게 입맛을 다신다.

“녹림이란 게 본디 도적 떼 아닌가. 산적, 수적, 비적…… 전부 녹림이지. 세상이 어지러워 어쩔 수 없이 도적이 되었다고 하지만, 솔직히 관의 입장에서는 전부 잡아들여 목을 쳐야 할 대상이란 말이야. 개중에 태반은 진짜 나쁜 놈들이기도 했고. 이를 바로잡으려고 노조께서 오랫동안 노력한 건 자네도 알지? 그렇게 악행이 자자한 산채를 무너뜨리고 그 우두머리를 잡아다가 아주 진이 빠지게 두들겨 패셨다네. 그러다가 재미가 붙으셨는지, 아예 새사람 만들기로 작정하시곤. 뭐, 현재 녹림장관의 주력이라고 할까. 그게 바로 녹건호한이란 것들이지.”

설명을 듣고 나니 문득 호중객잔이 떠올랐다.

“그럼 원래는 산적? 통집범(通緝犯)이란 거군.”

“맞아. 관에서 공식적으로 수배한 작자들. 그래서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어. 동창이든 이십사아문이든 근본적으로 강호 무림과는 다르잖아. 어처구니없는 짓을 벌일 수 있는.”

정록이 은밀하게 전한 ‘위초산채’가 바로 그 증거.

산적을 소탕한다는 명분에 관군이 우르르 몰려들면 상대하기 난감해진다.

이전에 소림사에도 관군들이 동원되지 않았던가.

해원기가 무겁게 혀를 찼다.

“쯧, 정하불상범의 묵계가 성립된 이유를 다 잊었군.”

“어쩔 수 없지. 과거의 난세가 끝나고서 강호는 다시 생기를 되찾기에 바빴고, 조정은 숙부가 조카를 내쫓고 황제가 되었으니까. 과거의 묵계 따위 기억하는 이가 얼마나 되겠어. 게다가 그 틈을 노렸던 것처럼 작금의 사태가 일어났으니.”

“그 틈을 노렸다라.”

“음, 표현이 좀 그렇긴 한데. 내가 밀각에서 알아낸 게 별로 없지만, 그런 방대한 조직을 짧은 시간 내에 구축한 걸 보면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했을 거야. 동창 내부에 따로 고수를 육성하는 집단이 밀각, 각주는 그저 총관(總管)의 역할일 뿐, 실권은 육학사가 쥐고 있고. 따로 육부대신을 제멋대로 세워두었더라고. 내가 잠시 머물렀던 경사의 밀각 건물은 고관대작의 저택이었는데, 내시는 한 명도 보지 못했네. 금의위를 수족으로, 반룡령 같은 무리를 주구로 부린다고 하더니만. 그건 전부 외부에 보인 일면이었단 말이지.”

세상에 알려진 것과 전혀 다른 동창의 진면모.

설명을 덧붙이는 정록의 얼굴이 심각하다.

“장안에서 첨유진을 도왔다고 아픈 척해도 봐주더구먼. 그 덕에 슬금슬금 돌아다니며 눈과 귀를 활짝 열어두었고. 아까 오 소매가 동창과 이십사아문을 구분하고, 태상이니 국사니 했지만, 밀각에서는 그런 기미가 전혀 없었어. 하여간 천 단위는 될 것 같은 엄청난 인원이 오로지 무공만 익히는데, 하나같이 상승의 심법과 초식이요, 전부가 이십 년 내공은 돼 보였으니 기가 막힐 노릇. 이런 가공할 세력을 소리소문없이 언제 키워냈대? 이십사아문 하나하나가 이미 강호의 문파나 다름없다는 생각까지 들더군.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라 각지에서 보물찾기에 나서고, 또 육신지궁 같은 것도 만들어놨잖아.”

일조일석에 이루어질 규모가 아니다.

해원기가 묵묵히 듣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방온화의 추론을 들은 후에 정록을 만났다. 뭔가 순서가 뒤바뀐 듯한 느낌. 방온화의 추론을 들을 때도 그런 느낌이 들었었다.

동창성조랍시고 역적질을 도모하는 태상의 신분이 상보감의 태감, 연왕이 조카 건문제를 치고 황제에 등극할 때부터 강호를 구대문파로 재편하려는 초안을 세웠다는 경수사의 주지.

이 모든 맥락을 하나로 연결할 핵심이 아직 불분명하다.

“후, 참으로 복잡하군.”

진정한 배후를 밝히고, 그 의도를 찾아내는 건 역시 지혜가 출중한 사람이 해야 한다.

단목정과 방온화가 함께 있었으면 좋았을걸.

정록이 머리를 긁으면서 몸을 눕혔다.

“머리만 아프지 뭐. 그만 쉬자고. 오 소매가 돌아올 때까지.”

해원기에게 휴식을 줘야 한다는 걸 깜빡 잊었었다.

이러다 또 말문이 열리면 곤란하단 생각에 일부러 눈까지 감고 돌아눕자,

해원기가 머리를 흔들곤 정좌했다.

얘기에 팔려 자신도 해야 할 일을 미루었다는 걸 깨달아서.

반개한 두 눈, 고요한 호흡. 신왕공의 잠심침령에 접어들면서 두 손을 깍지껴 가슴 앞에 붙였다.

검왕오형의 오의를 전부 깨닫고, 은허에서 천응령의 유적을 거치며 마침내 신왕공이 삼전태라고 일컬을 경지에 이르렀으나.

육신지궁에서 의외의 현상이 일어났었다.

대우신장의 실효와 반동, 십대검상의 문란.

뜻과 형이 어긋난 원인을 찾아야 한다.

스스로 지금까지 얻은 힘을 다시 확인하고, 구결과 법식을 차분하게 되새기는데.

해원기의 미간이 살짝 주름을 잡았다.

웬일인지 잡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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