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314화 (314/410)

제79장 초선향신(超仙向神) (2)

신체를 마비시키는 마목향, 정신을 잃게 만드는 실혼산.

두 가지가 섞인 독연이면 절정의 고수라도 멈칫거리게 할 수 있고, 그 틈에 호교십시와 사교부가 발목을 잡고 늘어질 수 있을 터.

그렇게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제탁지검과 풍뢰지력. 근처에도 이르지 못하는 독연 따위 신경도 쓰지 않고서 해원기의 검이 공간을 갈랐다.

시야가 분명하진 않지만, 굳이 동시안을 쓰지 않아도 탁청대인의 기식을 분간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

펑.

“허억.”

충격에 놀란 숨을 삼키며 정신없이 물러나는 인영.

이미 이십사아문의 우두머리들과 손을 섞어봤던 해원기다. 병장감이나 침공감 같은 팔국의 국감들은 십이감의 태감에 비해 좀 약한 느낌이었고,

그건 완의국의 국감인 탁청대인도 마찬가지. 풍뢰지력이 담긴 섬전추풍의 쾌검을 제대로 버티지 못한다.

놀란 소리에 위치가 뚜렷해졌다.

해원기가 유령처럼 독연 사이를 미끄러져 나가며 검을 뒤집었다.

다른 자들을 무시하고 먼저 탁청대인을 제압할 생각인데.

그때,

삐익, 삑!

불현듯 울린 예의 그 호각 소리.

그리고 사방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쾅, 콰쾅, 쾅.

의도치 않았던 금광섬삭에 의해 사방으로 나가떨어졌던 좌우도수와 후위창수 마흔 명의 육신이,

전부 화약으로 바뀐 것처럼 연달아 터져나가고.

그뿐이 아니라,

‘음?’

해원기에게 와락 덤벼드는 기척. 멧돼지가 들이받듯이 몸을 던진 사교부의 하나가,

펑!

풍선 터지듯 갈가리 찢긴 육신이 왈칵 쏟아졌다.

갑작스러운 변고에 순간적으로 흐트러진 이목. 상황이 어찌 된 건지 파악하기도 어려운 판에,

몸을 던진 사교부는 혼자가 아니었다.

시뻘겋게 부풀어 오른 얼굴에 흰자위만 남은 두 눈을 홉뜨고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나머지 셋도 뒤따라 폭발했다.

퍼퍼펑!

품 안에 화약을 품었다고 해도 이렇게 가루가 될 수 있을까.

뼛조각과 살점을 품은 핏물이 눈보라처럼 휘몰아친다.

해원기가 뒤집었던 검으로 급하게 원을 그리며 허리를 퉁겼다.

본래 탁청대인을 제압하고자 준비했던 흑백연주오절검의 오호단문이 방어로 쓰이고,

검세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누가 잡아당긴 것처럼 신형이 퍽, 하고 꺼진다.

눈 깜짝할 새.

부서진 회랑의 오른쪽 끝에 나타난 해원기가 이를 악물었다.

눈에 들어오는 전부가 불길과 연기로 뒤덮였다.

탁 소숙에게 배운 위타과질에 풍운결의 전궁유향까지 더하고서야 간신히 빠져나온 현장은 마치 전쟁이라도 치른 듯.

“어?”

“해 형!”

정록과 오소민이 그제야 해원기를 알아보았다.

두 사람도 눈앞에서 벌어지는 격변에 놀라서 잔뜩 경계한 상태였는데, 해원기가 갑자기 땅에서 솟아난 것처럼 나타났으니.

당황해하며 다가오는데도 해원기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지면을 향한 검극은 당장이라도 발동할 것 같고, 전신에는 여전히 삼엄한 기세가 어렸으며, 악다문 입가에는 힘줄까지 보인다.

섣불리 다가가기 어려운 분위기.

정록이 쭈뼛거리다가 머리를 거칠게 흔들었다.

“이게 대체. 늪지에 불길이 저렇게 일어나면, 평범한 화약이 아니야.”

연못물이 다 말랐다고 해도 여기는 계택. 커다란 화포(火砲)를 쏟아부어도 불을 붙이기 어렵다.

그런데 회랑 안이 죄 불바다, 시커먼 연기가 뭉클거리며 일어난다. 어느 게 독연인지 분간할 수도 없게.

기관 중추에 처박힌 신세였긴 해도 여 대부로 변신했던 정록은 육신지궁에 화약이 없었던 걸 알고 있었고.

회랑이 가둔 범위 안에만 태우는 불길을 수상하게 여겼다.

오소민에겐 그런 것은 보이지도 않아서,

“괜찮, 어, 방립과 피풍이……?”

해원기를 두루 살피다가 눈이 동그래져서 말을 잇지 못한다.

배회촌을 떠나면서 걸쳤던 방립과 피풍에 좁쌀만 한 구멍이 무수히 뚫렸다. 검왕법신이 뭔지는 몰라도 해원기가 이룬 경지면 호신강기가 저절로 외부의 침입을 막을 텐데.

절세검왕의 호신강기를 뚫을 정도라니.

악다물었던 해원기의 입이 비로소 열렸으나,

“놓쳤어. 지독한. 으득.”

이가 갈리면서.

손에 쥔 고검이 거칠게 지면을 꿰뚫었다.

콰콰콰콰.

검왕오형의 검림소연. 숲처럼 일어나는 검기가 아예 땅거죽을 차례로 뒤집고,

물결처럼 퍼져 차례로 불길을 꺼버린다. 독이 섞인 시커먼 연기까지 흩날리지만, 회복되는 시야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정록도 오소민도 입을 열지 못했다.

검을 뽑지도 않고 전면을 노려보는 해원기의 무서운 시선.

이를 갈고, 검을 땅에다 꽂고, 그리고 노려보는 이렇게 살벌한 모습은 처음이라 어찌 대해야 할지.

그저 해원기를 따라 불길이 꺼진 곳을 훑어보는데.

검기로 뒤집힌 흙이 숯처럼 까맣고, 불이 꺼졌음에도 곳곳이 갈라진 땅바닥에서 가느다란 연기가 뿜어져.

그야말로 끔찍한 광경.

화산이 터지고 지진이 났던 흔적으로 보일 정도니. 여기가 진정 조금 전까지 풀밭과 연못이 있었던 곳이란 말인가.

해원기를 공격하던 탁청대인의 수하들, 마른 연못 바닥에서 떠올랐던 실혼인들. 그 흔적조차 보이질 않는다.

정록이 오만상을 쓰고서 중얼거렸다.

“군문(軍門)의 화기(火器)로는 불가능하지. 사라진 산서 벽력당(霹靂堂)의 벽력탄이나, 사천당문의 뇌화탄(雷火彈) 정도는 되어야.”

말하다 만 화제를 계속 궁리한 듯.

그래도 그렇게 정록의 목소리가 들리자 해원기가 비로소 길게 숨을 내쉬었다.

“후우.”

어깨에서 힘이 빠지고, 삼엄한 기세가 가라앉으며 천천히 돌아서지만.

지면에서 빼 든 고검을 검집으로 돌리지도 않는다.

“벽력탄은 벽력당에도 열 개밖에는 없었다고 들었네. 뇌화탄은 지금 있을지 모르겠고. 그런 물건을 오십 개씩이나, 그리고 호각 한 번으로 전부 폭사하게 만드는. 사람이 어찌 이럴 수가 있는지.”

목소리가 바윗덩이를 매단 것처럼 무겁고,

정록과 오소민을 번갈아 보는 눈동자에는 일렁거리는 노여움.

탁청대인의 수하 오십 명이 폭발하면서 실혼인들도 전부 재가 되어버렸다. 어떻게든 지키려고 했었건만.

오소민이 얼른 뒤를 가리켰다.

“당 소가주와 세 명의 실혼인은 저쪽에 눕혔어. 다 혼절했지만 별다른 이상은 없는 것 같아.”

그나마 위안이 될 소식에 해원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으로 옮기지. 괜찮은지 살펴보세.”

아무것도 남지 않은, 끔찍한 광경과 매캐한 연기만 흐르는 곳에 더 머물 이유는 없다.

걸음을 옮기면서,

해원기가 맥없이 내렸던 고검을 검집으로 돌렸다.

어쩐지 힘겹게.

촉박한 상황에서도 동산 기슭의 큰 바위 뒤를 용케 찾아서 옮겨놓았다.

바위에 기대어둔 당규를 포함한 넷을 하나씩 살피고 나서야 해원기가 몸을 일으켰다.

“맥이 너무 약하군. 지금은 약을 쓰기도 불안하네.”

백초환을 먹일 수도, 제탁지검이나 보명오석을 쓸 수도 없다. 미망산에 중독된 데다가 계속해서 정기를 빼앗겼으니 이렇게 숨을 쉬는 것만도 다행.

“흠, 일단 가까운 마을을 찾아 옮기고. 한단 쪽으로 연락을 취해볼게. 당장 의생과 약포가 필요하니까.”

개방 순행장로인 오소민이 기민하게 방법을 찾고,

“동쪽으로 조금만 가면 꽤 큰 마을이 있어. 반 시진도 걸리지 않지.”

주변을 아는 정록이 방향까지 정해준다.

해원기가 왜 살벌했는지 이제는 다 알기에. 어떻게든 그 심정을 위로해주고 싶은 벗들이다.

정록이 실혼인들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육신지궁에서 충격을 받고 튀어나온 셈이라. 기혈이 조금 풀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업자고. 음, 지하의 변화, 뭔가 결함이 있는데 억지로 발동했던 게 틀림없어.”

사각 중의 뿔 한 곳에서 먼저 튀어나왔기에 당규와 실혼인 셋은 목숨을 건졌다.

그 이유는 육신지궁이 완전치 않은 술법을 갑자기 발동했기 때문.

“수사가 빠졌던 게 원인이었을까? 연독관의 노독물, 오독존이라 자칭한 인물도 제정신은 아닌 것 같았네.”

실혼인들이 기혈이 풀릴 때까지는 움직이지 못한다.

육신지궁의 괴변을 다시 짚어보려고 하니, 오소민이 바로 얼굴을 들었다.

“그 얘기 좀 자세히 해 봐. 화호초가 잠깐 떠들긴 했는데 뭔 소린지 모르겠더라고.”

“어이, 제대로 얘기할 틈도 없었잖아. 독기 때문에 연독관에서 떨어져 있어야 했는데. 그리고 언제까지 별명으로 부를 거야? 소구…….”

정록이 당장 소구인이라는 별명으로 갚아주려다가 오소민의 도끼눈에 입을 주억거리자,

해원기가 가만히 고소를 지었다.

둘이 일부러 티격태격하는 걸 알아차렸기에.

하긴, 화제를 바꾸어 육신지궁의 의도를 파악하는 게 중요하구나.

해원기는 팔짱을 끼고, 정록은 한쪽 팔로 바위를 짚고서 쪼그려 앉은 오소민을 보았다.

작은 나뭇가지 하나를 들고 바닥에 이리저리 그림을 그리는 오소민.

“언제 만들어졌는지 모르는 육신지궁. 육악을 기르기 위한 장소니까 구양금오에서 육악지력을 얻은 다음에 세웠을 거야. 규모로 봐선 십여 년은 훨씬 넘었겠고, 평범한 건축이 아니니 토목건축에 뛰어난 자가 있었겠지. 그리고선 주초면국이 관리를 맡았다. 그런데 그 우두머리가 영 신통치 않은 주정뱅이. 갑자기 육신지궁을 이탈하는 바람에 완의국의 탁청대인이란 자가 급파된 건데. 흥, 이건 해 형 탓이구먼.”

나뭇가지가 옆으로 쭉 빠지면서,

“은허 이전에 겪었던 일 기억하지? 조화부인이 차려놓은 야점과 또 다른 야점. 똑같이 항아리를 늘어놓았던 것도 그 음정수백인가 하는 요물을 모으려던 목적이었을 거야. 동창이 둘로 갈라진 형국이라고 했으니까. 그럼 도지감, 상의감, 상선감, 직전감, 어마감에 병장국, 침공국, 사원국, 주초면국, 완의국. 이렇게 열인가. 더 있을지 모르겠으나 이십사아문의 절반은 은허보다 이 육신지궁이 중점이었을 텐데. 계획했던 일이 전부 틀어지고, 자기들도 왕창 깨지는 바람에 일이 엉망으로 꼬였던 모양이네. 흐음.”

조화부인의 야점에 있었던 음정수백은 본래 도지태사와 상의신모가 운반해야 했던 물건이다.

그 음정수백을 기다렸던 자들이 또 하나의 야점을 차려놓았던 사마대가, 직전고사, 상선태군. 야점을 차린 것도 주초면국과 완의국의 솜씨였었다.

이 모든 것이 해원기의 등장으로 완전히 깨져버린 셈.

오소민은 지금까지 벌어진 사건을 엮어 그 실체를 추리할 생각이다.

“주초면국의 주정뱅이는 땅속에서 기어 나올 기회라고 냅다 튀었고, 육신지궁에 별일이 없으리라 여겼겠지. 밀각에서 감시로 보낸 여 대부도 기관 중추에 처박아두었겠다, 이 계택을 찾을 사람도 없을 테니.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연달아 벌어졌단 말이야. 음정수백을 가지고 행차하셔야 할 분들은 전부 꽁무니를 뺐고, 황망한 중에 탁청대인을 대신 보내긴 했는데, 그 전에 육악 중의 한 마리, 수사를 몰래 탈출시켰잖아.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을 터. 그런데 여기서 탁청대인에 주목을 해야겠어. 이 상황에 주초면국 대신에 왔다는 건 그만한 힘이 있다는 뜻이거든.”

주정뱅이라는 주초면국의 우두머리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본래 육신지궁을 관리하던 자 대신에 탁청대인을 보낸 까닭.

“호각 소리에 육신지궁의 괴변이 시작되었고, 또 호각 소리에 수하들이 폭사하면서 불바다가 되었잖아. 그리고 화호초, 아니, 우리 정록 대협께서 놓치지 않았던 부분. 괴변 속에 나온 청개구리와 고력사의 지하무덤에 있었다는 보병. 탁청대인은 처음부터 육신지궁의 결과물을 챙기러 온 게 아닐까?”

별명을 부르지 않는다고 정록 대협은 또 뭔가.

정록이 코를 벌름거렸지만, 해원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청개구리. 색깔과 크기는 개구리지만 그 등에 작은 돌기가 무수히 돋아있었네. 정확하지는 않지만, 탁청대인은 그 보병으로 잡은 듯해.”

수하 사십 명을 버리는 돌로 쓰면서 호교십시에게는 청개구리를 잡게 했고, 호교십시와 사교부로 해원기를 막으라면서 탁청대인은 보병을 꺼내 들었다.

“돌기? 그럼 개구리가 아니라 두꺼빈가? 보병으로 잡아야 할 이유가.”

정록이 머리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리는데,

오소민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러려고 보병을 챙겨왔겠어. 개구린지 두꺼빈지. 하여간 상당히 작은 크기가 태어난다고 예측했기에. 자, 그럼 그게 도대체 뭔지 따져보자고. 사술과 진도로 감춘 지하건축에서 해괴한 방법으로 키우는 여섯 마리 괴수. 그리고 그것들을 교배시킨다는 연독관의 노독물, 오독존. 칫, 뭔 독(毒)이 이리 많이 들어가?”

독 때문에 곤욕을 치러서인지 아주 신물이 난다는 말투인데.

해원기가 한숨을 내쉬며 한 마디를 덧붙이자,

“후, 음양유명독강에, 홍황독전(洪荒毒典)의 괴공까지 나왔었네.”

정록과 오소민이 눈을 껌뻑이며 자신도 모르게 마주 보았다. 들어본 적 없는 무공과 비급의 이름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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