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장 초선향신(超仙向神) (1)
정록이 들은 것과 오독존이 정신없이 내뱉었던 말이 사실이라면 이 회랑의 변화는 세상에 드문 술법의 실행일 것이다.
그것도 뭔가 알 수 없는 생명을 배태(胚胎)하려는.
실혼인의 정기를 먹여 키운 육악을 기초로 삼았으니 절대 올바른 결과가 나올 리 없다.
그래서 사각과 사릉을 단번에 무너뜨리는 무작스러운 방법을 택해야만 했는데,
네 개의 뿔과 회랑이 박살나고 마름모꼴의 물이 전부 흩어지는 가운데 한가롭게 튀어나온 개구리라니.
개구리도 갓 난 청개구리(靑蛙). 기껏해야 새끼손가락 한 마디가 될까 말까 한 크기라, 전신이 반지르르한 녹청색으로 뒤덮이지 않았다면 잘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
곰이나 멧돼지 같은 맹수라도 견디지 못할 힘이 쓰였거늘 어찌 갓 난 청개구리 따위가 멀쩡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해원기가 의아함을 느끼기 전에,
“쳐랏!”
비단 폭을 찢듯 날카로운 여인의 호통이 울리고 수십 명이 뛰어올랐다.
오소민과 정록이 남은 곳의 반대쪽, 해원기가 공중으로 솟구쳤을 때부터 주의를 기울였던지.
탁청대인을 위시해서 오십 명의 호위들이 전력을 다해 몸을 날리고 있었다.
사람이 새가 아닌 이상 아무리 경공이 뛰어나도 공중에 머무는 건 한계가 있고,
강대한 힘을 떨친 후에는 잠깐이나마 진력을 회복해야 할 터.
그 틈을 노렸다.
부서진 아래쪽 회랑을 따라 무수한 병기가 번뜩인다.
오독존이 갑작스레 광태를 보인 원인은 아마도 그 호각 소리.
육신지궁에 와서 상황을 파악하려던 탁청대인이 해원기와 정록을 발견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별안간 육신지궁에 설치된 술법을 발동시키곤 그냥 떠났을 리 없고,
침입자의 생사와 술법의 결과를 남아서 지켜보는 게 당연하다.
해원기도 유의했었기에 펼쳤던 사지를 당기면서 몸을 틀었다.
건곤차륜세가 멈추면서 신령검역이 순식간에 거두어진다.
이미 떨친 힘을 다시 거두기는 어렵다. 그 힘이 쓰이곤 난 후에는 더욱.
그러나 힘을 낭비하지 않는 법은 처음부터 사부에게 배웠고, 탁 소숙에게는 쓰이고 난 여력을 회수하는 지장진결의 묘리도 들었었다.
더구나 지금은 그냥 힘을 발산한 게 아니라 신령검역으로 공간을 고정한 후였지 않나.
상승의 심병지권(心兵之圈)은 그 자체가 진력의 운용이다.
하물며 감로보병이 물처럼 흐르거늘.
슈우우.
해원기를 중심으로 공간이 확 오므라드는 듯.
심지어 흩날렸던 연못 물까지 물방울로 끌려온다.
채채채챙.
먼저 달려들던 도수들의 칼이 제멋대로 부딪쳐 불꽃, 아니 물꽃(?)을 튕기고.
그 뒤로 연이어 뛰어오르던 자들은 중심까지 잃었다.
“으응?”
“어?”
상상도 하지 못했던 상황에 어쩔 줄 모르는 자들. 좌우도수 스물에 후위창수 스물, 마흔이나 되는 인원도 이렇게 허우적대면 하찮은 오합지졸과 다름없다.
해원기가 두 손을 엇갈렸다.
떨쳤던 진력이 돌아오면서 자연스레 이루어진 발검제형의 수발여의. 여기에 재단경위의 변식인 신마공무를 곁들이면 탁청대인과 그 주위의 호교십시까지 전부 날려버릴 수 있다.
그런데,
검왕오형을 펼치려던 해원기의 손이 멈칫거렸다.
물이 거의 말라버린 마름모꼴의 연못. 그 바닥에서 와르르 떠오르는 무수한 몸뚱이.
마름모꼴을 거의 메운 실혼인들이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진흙뻘을 메우고 뒹구는 몸뚱이들.
해원기가 순간적으로 검왕오형을 대우신장으로 바꾸었다.
우웅.
일단 좌우도수와 후위창수를 전부 밀어내는 게 먼저다. 무거운 장력이 공간에 벽처럼 서는데.
‘음?’
막 쌍장으로 공간을 뒤집어 던지려던 해원기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공간의 벽이 갑자기 사라지고,
내던지려던 공간으로 되레 해원기가 쑥 빨려 나간다.
이게 무슨 일인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기도 전에 좌우도수와 후위창수 사이에 끼어든 꼴이 되어버렸다.
설사 오합지졸이라도 상대가 잡아먹으라고 들이미는 걸 가만 보고 있겠나.
정신이 번쩍 든 것처럼 칼과 창이 연달아 날아든다.
대우신장을 펼치려던 쌍장을 거둘 새가 없다.
해원기가 본능적으로 두 팔과 두 다리를 어지럽게 흔들며 허리를 꺾었다.
따다다다다.
검왕법신이 갑옷처럼 지키는 전신에서 무서운 쇳소리가 쉬지 않고 터지고,
사각.
머리칼이 한 움큼 날아가는데.
해원기가 자세를 갖추기 전에 번갯불처럼 쏟아지는 스무 자루의 창. 자르고 베고 끊는 칼보다 창은 훨씬 다양한 묘용을 지닌다.
화살처럼 꽂히는 창끝, 송곳처럼 후비는 창날, 곤봉처럼 두들기는 창대, 갈퀴처럼 긁는 첨자.
좌우도수의 뒤를 이어 공격하는 후위창수의 창은 전부 나선형 회전을 실어서 어떻게 변화할지 짐작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들은 서두르느라 해원기의 검을 깜빡 잊었다.
꺾었던 허리를 튕겨 공중에서 뒤로 한 바퀴 도는 해원기의 손이 검결을 짚자,
쩌저정!
해원기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는 무시무시한 빛.
“크윽.”
“아악!”
어검대법의 금광섬삭에 칼과 창이 수수깡처럼 부서지며 좌우도수와 후위창수가 우르르 나가떨어졌다.
손에 든 병기가 파괴되면서 심한 충격을 받은 자가 절반, 나머지는 병기만이 아니라 팔과 어깨까지 끊겨서 핏물이 어지럽게 흩날린다.
비로소 아래쪽 회랑의 파편 위에 내려선 해원기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좌우도수와 후위창수의 실력은 동창의 번역보다 조금 나은 정도. 기예는 어쩐지 구란와자에서 배우 분장을 하던 자들과 비슷하다.
지금의 해원기에겐 충분히 여유를 가지고 상대할 수 있는 자들인데,
대우신장이 사라지고 오히려 신형이 빨려 나가는 바람에 급하게 손을 써버릴 수밖에 없었다.
신왕검이 언제 군림검으로 바뀌었는지 의식할 틈도 없이.
아니, 군림검을 꺼낼 생각은 없었다.
양손의 검왕수만으로도 어검대법을 흉내 내기엔 족하니까. 강기를 이루지 못한 창칼 따위로는 검왕법신을 상할 수 없으니, 머리 위에 띄운 고검으로 충격을 주어 멀리 날려버리면 그만.
마름모꼴에 떠오른 실혼인들을 구하려고 간격을 넓힐 셈이었는데.
전혀 뜻하지 않았던 결과.
살생을 싫어하는 성격이라고 해도 검을 익힌 이상, 스스로 베고자 마음먹은 걸 베지 못한 적이 없었고, 거두고자 하는 의지를 이루지 못한 적도 없었다.
경중강약을 다스릴 줄 모르면서 어찌 무인이라 할 수 있나.
이런 일은 생전 처음이다.
해원기가 검을 눕히고 왼손을 가지런히 펴 검신을 훑었다.
엄지를 접고 나머지 네 손가락을 붙인 왼손. 사대개공(四大皆空)의 뜻을 지닌 이 검결은 그저 사부에게 들었을 뿐. 스스로 쓰게 될 줄 몰랐다.
왜냐하면, 고검이 기이하게 떨기 때문.
금광섬삭이 시전되었으니 군림검이어야 할 고검의 검상은 여전히 신왕검. 그런데 추상검과 사신검, 그리고 단 한 번도 구현한 적 없는 천살검(天殺劍)까지 언뜻언뜻 비친다.
사부에게 전해 받은 십대검상(十大劍相)은 오직 주인인 해원기의 뜻을 따라 구현되건만.
뭐가 잘못되었기에 이리도 혼란스러운가.
더구나 검상이 섞이면서 얼핏 얼핏 불길한 느낌까지 드니,
사대결(四大訣)로 닦아 안정시킬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해원기의 시선이 주위를 무섭게 훑었다.
대우신장의 실효(失效), 그 반동으로 뜻하지 않게 험한 결과를 낳아야 했고.
심지어 고검의 검상까지 문란하게 한 원인을 찾아야 한다.
나가떨어진 마흔 명. 핏물이 낭자한 광경이 거슬리지만 좌우도수와 후위창수를 하나하나 꼼꼼히 살피고서,
그 뒤에서 부산을 떠는 탁청대인의 무리에게.
호교십시라는 열 명은 검을 뽑지도 않고서 왠지 허둥대는 모습들. 그들을 재촉하면서 해원기를 흘낏거리는 탁청대인 앞에는 덩치 큰 자들 넷이 그녀를 가리듯 어깨를 나란히 했고,
탁청대인 뒤에는 어설픈 자세의 중노인 둘이 옹송그린다.
좌우도수나 후위창수보다는 검을 찬 호교십시가 조금 더 뛰어나 보이건만, 마흔 명이 단번에 나가떨어졌는데도 딴짓만 한다.
달려들든지 물러서든지. 어느 것도 아닌 풀밭을 이리저리 뛰어다니기만.
가마꾼일 넷을 앞에 세운 탁청대인도 공격하라는 호통을 친 주제에 싸움보다 딴 데 정신이 팔렸다.
‘이들 중에는. 탁청대인, 산정뢰주, 몽롱향주 그 누구도 이상한 짓을 한 자가 없다.’
기공(奇功)이든 방술(方術)이든 대우신장을 무효로 만들고 검상을 문란하게 했다면 반드시 그에 어울리는 흔적이 남았을 텐데.
흔적은커녕 가장 강한 능력을 지녔을 탁청대인에게서조차 아무런 기미를 감지할 수 없다.
의도치 않았던 어정쩡한 교착상태.
이때, 정록이 외치는 소리에 해원기가 번쩍 정신을 차렸다.
“개구리! 청개구릴 잡고 있어!”
당규와 몇 명의 실혼인을 급하게 피신시키던 두 사람. 오소민은 해원기에게 집중하느라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으나,
정록은 계속 탁청대인의 동정에 주의했었기에 곧장 해원기에게 엉뚱한 짓의 실상을 알릴 수 있었다.
마름모꼴을 채운 무수한 실혼인들과 창칼을 휘두르며 달려든 자들 때문에 하마터면 소홀할 뻔했다.
당장 탁청대인의 눈이 정록 쪽을 잡아먹을 듯이 흘기고,
“호교십시, 사교부(四轎夫), 막아! 너희 둘도 뭐든 해보라고!”
호교십시와 가마꾼 넷에게 명을 내리면서 자기 등 뒤에 붙은 산정뢰주와 몽롱향주를 짐짝처럼 내던졌다.
속내가 드러난 당혹과 어떻게든 시간을 벌려는 다급함이 거친 음성과 손길에 확연히 드러난다.
청개구리를 잡으려고 마흔 명을 내팽개친, 아니, 마흔 명을 단지 청개구리 때문에 버리는 돌로 삼았단 건가.
차창.
호교십시가 한꺼번에 뽑아 드는 검에서 새파란 기운이 뻗치고, 사교부가 서로 팔을 엮으면서 여덟 개의 팔을 힘차게 내질렀다.
과연 호교십시는 성형검기를 완성한 검객들. 그리고 사교부가 함께 내지른 팔에서는 막강한 힘줄기가 폭사한다.
게다가 불시에 내던져진 산정뢰주와 몽롱향주도 바닥에 착 엎드려 뭔가를 내던지니.
펑, 퍼펑.
해원기가 고검을 닦던 자세 그대로, 양손으로 움켜쥔 고검을 번쩍 들었다가 힘차게 내리쳤다. 무거운 통나무 빗장을 혼자 채우듯.
아직 완전히 가라앉지 않은 고검의 떨림.
사대결을 뗄 수 없다면, 검을 검으로 쓰지 않으면 된다.
탁 소숙에게 배운 온후극법(溫侯戟法)의 일식, 방천붕탑(方天崩塌). 고검이 극이 되어 하늘이 무너지듯 전면을 끊는다.
성형검기든 막강한 힘줄기든 가공할 압력에 전부 부서지지만,
산정뢰주와 몽롱향주가 내던진 건 연무탄이었던지 붉고 푸른 연기가 단숨에 시야를 가리고 퍼지고.
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나는 연기. 그리고 코끝을 스치는 매캐한 냄새.
육신지궁에서 맡았던 향연과는 다른데. 해원기의 눈썹이 불끈 일어섰다.
맡아본 적이 있다. 당령 덕분에 무슨 독인지도 들었으니.
‘마목향과 실혼산이라고 했었지. 이자들이 바로.’
구란와자에서 뿜어냈던 독연의 출처가 바로 여기였구나.
신왕공의 제탁지기가 반사적으로 일어나는데, 그보다 먼저 귀를 울리는 정록의 전음에 해원기가 급히 고검을 바로 쥐었다.
사대결로 완전히 닦였는지 확인할 새가 없다.
[해 형, 저건, 탁청대인이 보병, 그 보병을 들고 있어!]
고력사의 지하 무덤. 신기역 보병요의 마지막 유적에서 정록도 분명히 보병을 목격했었다.
그 안의 황하지정은 해원기에게 전해졌으나 정록을 구하느라 챙기지 못했었던 빈 병.
밀각 대부들이 취했을 그 보병이 지금 탁청대인의 손에 있을 줄이야.
휘이이이, 우르릉.
제탁지검에 풍뢰의 힘이 모조리 집중되었다.
독연과 앞을 막아서는 자들을 한꺼번에 날려버리고, 곧장 탁청대인을 찾을 셈.
벼락같이 앞으로 튀어나가는 해원기의 전신에 가공할 기운이 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