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312화 (312/410)

제78장 음식양쇠(陰蝕陽衰) (4)

수사가 빠져나갔을 정도의 통로다. 공간이 갑자기 넓어지면서 위쪽으로 경사가 급해지고,

정록이 여 대부의 병기인 철필을 아예 내던지면서 양손을 힘껏 내뻗었다.

우웅.

공력을 전부 끌어올렸는지 엄청난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어깨.

그 어깨를 해원기의 손이 가볍게 짚는다.

“내가 하지.”

번쩍.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부신 섬광이 전면을 채우더니,

퍼펑.

흙과 바위가 박살이 나서 날아가 버리는 광경에 정록의 어깨에서 절로 힘이 빠졌다.

수사가 탈출한 후에 급한 대로 대충 막긴 했어도 어지간한 두께의 바위를 잔뜩 쌓아둔 것인데.

한순간에 전보다 더 반듯하게 곧장 외부로 통하는 길이 생겼으니.

역시 기가 막힌 검왕의 능력이지만,

“뭐야? 날 못 믿나?”

정록이 인상을 쓰며 해원기를 돌아봤다. 기껏 끌어올린 공력을 쓰지도 못했잖나.

아무리 친구라도 은근히 자존심이 상하는데,

해원기는 그런 정록을 제대로 볼 틈이 없었다.

발검제형으로 길을 뚫으면서 동시에 뒤에서 밀어닥치는 물줄기를 막아야 했으니까.

“이게 구전화합? 정 형, 어서…….”

음양쌍반진도가 아닌 구전화합술이라고 추측은 했으나, 이 거창한 물줄기는 분명히 지상의 회랑 가운데 있던 커다란 연못일 터.

육신지궁이 모조리 침수되어 무너지는 바에야 진도건 화합술이건 무슨 소용이 있나.

의혹이 들지만, 지금은 정록부터 먼저 내보내야 한다는 생각뿐.

오독존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고,

독종지인의 체내에 쌓인 모든 독기가 물에도 스며들었다면 아직 마음을 놓긴 이르다.

그때,

“해 형! 에? 화호초?”

밖에서 불쑥 들리는 목소리에 해원기와 정록 모두 놀랐다.

화호초. 꽃무늬 담비라는 영악한 짐승을 일컫는 이름을 해원기는 전에도 들어봤었다.

처음 정록을 만났을 때 개방의 장안분타주인 포만개 유항이 그런 별명으로 불렀었고,

지금도 오소민이 정록을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렇게 부른다.

“얼씨구, 화호초라고 땅굴로 파고들어 갔냐? 네가 왜 여기.”

알밤이라도 먹일 것처럼 주먹을 쥐고 흔들어대니,

“그러는 너는. 소구인(小蚯蚓) 아니랄까 봐 기어 다녔구먼. 부끄러운 꼴인 건 아냐?”

정록도 들이받을 듯이 머리를 까딱거렸다.

신통한 역용술을 풀어낸 정록은 무너지는 통로를 달리느라 온통 흙투성이, 땅바닥에 엎드려 있었던 오소민의 가슴은 함빡 젖은 채.

오소민의 별명은 소구인, 작은 지렁인가.

어지간히 유치한 상봉이지만, 그만큼 안전한 곳까지 물러났기 때문이다.

처음에 해원기와 오소민이 넘었던 작은 동산의 기슭. 그야말로 수사가 육신지궁을 탈출해 자산까지 왔던 길을 고스란히 되짚은 셈이다.

이미 옥침몽롱대법이 사라져 지상의 변화가 또렷이 보인다.

삼각형 두 개를 거꾸로 겹쳐 여섯 개의 꼭짓점을 이루었던 회랑이 누가 손으로 옮기듯이 모양을 바꾸고 있었다.

꼭짓점에 만든 망루가 전부 수수깡처럼 무너졌고,

망루 뒤마다 만들어둔 입구가 죄다 열려 물줄기가 분수처럼 치솟으면서.

해원기가 오소민과 정록을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자, 회포는 그쯤하고. 어떻게 딱 거기에 있었나, 소구인?”

“큭.”

정록이 짓궂게 웃고, 오소민의 눈초리는 무섭게 흘기고.

예전에 정록이 오소민을 여동생인 것처럼 말했으나, 대화를 들으면 둘 사이가 어떤지 해원기도 알 수 있었다.

둘 다 부드러운 성격은 아니니 어려서 같이 역용술을 배울 때도 티격태격했었겠지. 멀쩡한 사내에게 꽃무늬 담비라고, 귀여운 여자애를 작은 지렁이라고 부르면서.

소꿉친구였겠구나.

오소민이 기어이 정록의 어깨를 쥐어박으면서 코웃음을 쳤다.

“흥, 지금이 이럴 때냐? 집중하라고. 해 형, 저쪽으로 빠져나오는 자들 보이지? 회랑 주위로 흩어졌다가 모여드는 자들까지 전부 오십 명의 졸개를 거느리고 행차하신 탁청대인이라더군. 이곳은 육신지궁이란 이름, 주초면국이 관리하다가 갑자기 떠나는 바람에 탁청대인, 완의국이 대신 왔나 봐. 산정뢰주란 자와 실혼몽롱을 담당하는 자들이 수사가 탈주한 걸 보고하더니…….”

“맞아, 육신지궁은 원래 주초면국의 명정한사(酩酊閑士) 담당이었지. 그 밑에 육악을 배양하는 산정뢰주와 실혼인을 관리하는 몽롱향주(朦朧香主), 그리고 연독관의 노독물. 산정뢰주와 몽롱향주는 무공보다 방술에 뛰어난 자들이고. 명정한사란 녀석은 아주 게을렀는데, 갑자기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자기 졸개를 전부 거느리고 뛰어나가서, 뭐, 그 덕에 수사를 수월히 내보낼 수 있었으니까.”

“엥? 그 괴물 뱀을 화호초, 네가 내보낸 거라고? 우린 하마터면.”

“저길 보게.”

기민하고 영특한 두 사람이 빠르게 입을 놀리니 금세 상황을 파악할 수 있지만,

해원기가 먼저 주의를 돌렸다.

회랑의 변화가 점점 빨라지고, 망루 뒤의 입구에서 솟구치던 물줄기도 잦아들기 시작했다.

본래 큰 연못을 낀 늪지라서 그런가.

별다른 소음도 없이 회랑이 지면을 미끄러지듯 움직여 거꾸로 겹친 삼각형 두 개가 딱 맞아떨어지자,

가운데 있었던 연못이 완벽한 마름모꼴로 바뀌었고,

절반이나 줄어든 연못물이 끓는 것처럼 부글거린다.

여섯 개였던 꼭짓점은 양쪽 위아래로 나란히 뻗친 네 개의 뾰족한 뿔이 된 형태.

정록이 머리를 흔들었다.

“저게 무슨 음양쌍반진도야. 저런 건 처음 보는걸? 하지만, 기관 중추의 배치는 분명히 음양쌍반진도를 따랐고. 음, 구전화합술이 쓰였다고 보기에도.”

자신 없는 말투.

아는 부분과 추측했던 내용을 전부 대입해도 맞지 않는다.

음양쌍반진도라면 겹쳐진 게 풀리면서 삼각형 두 개가 거꾸로 마주 선 모양이 되어야 하고,

삼음과 육양의 구전화합술이라면 회랑이 전부 풀려 복잡하더라도 하나의 원형을 이루어야 하거늘.

회랑이 움직이고 연못물이 빠지는 건 분명히 토목기관에 의한 변화다. 해제된 옥침몽롱대법은 그저 눈가리개 역할에 불과할 뿐.

진법을 잘 알지 못하는 오소민도 열심히 살펴보다가,

“어? 사람도 몇 튀어나오네. 실혼인 중의 일부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은 네 개의 뾰족한 뿔 중 하나.

잦아들던 물줄기가 기침하는 것처럼 서너 개의 인영을 지상으로 내뱉는다. 그 뿔은 바로 해원기와 정록이 뚫고 나온 구멍 근처.

해원기의 동시안이 초점을 맞추다가 얼른 반대쪽의 탁청대인 무리를 훑었다.

물줄기가 분수처럼 솟구칠 때도 꼼짝 않고서, 자신이 들어갔던 입구가 변한 뿔 근처를 지키는 자들.

“가까이 가세.”

“응?”

“왜, 좀 더 지켜보고.”

미리 움직일 필요가 없다. 육신지궁의 변화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 수사와 같이 육악에 꼽히는 괴물을 품은 지하가 어떻게 되었을지.

평소와 다르게 서두르는 해원기를 말리려는데,

“사천당가의 소가주야. 구해야 해.”

오른쪽 아래의 뿔에서 뱉어낸 서너 개의 인영 중에,

연독관에서 독종지인과 맞붙다가 돌연히 벌어진 변화 때문에 미처 구하지 못했던,

당규가 보였다.

오소민은 당규에 관해 들은 적이 있지만, 정록은 처음 듣는 얘기.

그러나 사연을 들으려 하기보다는 서슴없이 해원기를 뒤따른다.

오소민을 지렁이라고 놀려대던 건 까맣게 잊은 양, 바닥에 바짝 몸을 붙이고 조심스럽게 나아가면서,

“그래, 연독관이 남북 산정뢰의 끝에 붙어있었지. 구영과 수사의 산정뢰랑. 환기와 수로를 모아놓은 이유가 두 군데를 끌어당겨서 산정뢰를 모으는 것이었어. 음양쌍반진도의 기관 중추는 단지 옥침몽롱대법 아래에서 육악을 배양하기 위한 바탕에 불과하고. 그럼 삼각(三角) 두 개가 사릉(四菱) 하나를, 낳는다…….”

계속 중얼중얼.

자신이 따져나가는 이치를 해원기에게 들려주려는 의도다.

사물의 이치라면 오소민의 영민한 지혜도 남에게 뒤지지 않는다.

“음양이 삼재로 바뀌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지. 연진번연(演進蕃衍)에는 반드시 생기(生機)가 더해져 동인(動因)이 되어야 하니까. 삼재가 둘 겹쳤다고 바로 육합이 되진 않잖아. 더구나 삼재가 음양으로 합해져 사상(四象)으로 뿌려지려면, 흠, 사각(四角)이 아니라 사릉이라. 그건 거의 생육(生育)을 의미하는데?”

음양쌍반진도, 육악의 산정뢰, 사각이 아니라 사릉은 사상으로의 생육.

마치 주를 달 듯이 정록의 말을 정리해주자,

앞서가던 해원기의 어깨가 움찔했다.

“연못이 양수라고. 읊었던 구결 중에 포란도 있었어. 저 사릉, 자궁(子宮)일지도.”

해원기답지 않게 빠른 말투.

연독관 안에서 오독존이 쉬지 않고 떠들던 소리를 전부 다 들은 이는 해원기 혼자다.

그러나 영민한 오소민과 기민한 정록은 단번에 해원기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음양쌍반진도로 꾸민 구전화합술로 예측할 수밖에 없었던 육신지궁의 정체.

서로 잡아먹게 해서 가장 강한 한 마리를 남기는 고술이 아니라,

아예 여섯 마리를 전부 섞어서 새로운 하나를 낳으려는 시도였다.

오소민이 급히 해원기의 허리춤을 쥐고 흔들었다.

“당규와 실혼인들은 우리가 맡을게. 해 형은 저 작자들을.”

탁청대인의 무리에 주의를 기울였던 건 해원기만이 아니다.

새끼를 낳는다면 그 새끼를 받으려는 자가 있을 터. 탁청대인이 치솟는 물줄기를 피하지 않고 딱 붙어서 기다리는 것.

그게 무엇이든 이 육신지궁을 그대로 놔둘 수는 없다.

정록도 뒤질세라 바로 입을 열어서,

“수사가 빠졌고, 우리가 구멍을 뚫었지. 실혼인들이 튀어나온 저곳, 뜻대로 되지 않을 거야.”

육신지궁의 변화가 온전하지 않다는 걸 깨우쳐준다.

당규가 튀어나온 뿔과 탁청대인이 기다리고 선 뿔은 끝과 끝. 가장 먼 거리다.

당규를 구하려다 자칫 더 중요한 일을 놓쳐서는 안 된다.

지하에 있는 것은 수사와 같은 괴물 다섯 마리. 하나라도 빠져나가면 엄청난 해악을 끼칠 괴물들이다. 정록이 오죽하면 실혼인들을 돌보지 않고 무너뜨릴 궁리를 했겠는가.

해원기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끄덕였다.

이미 발동한 육신지궁의 술법이 금방 끝날지도 모른다.

성공해서 진짜 육악을 하나로 뭉친 괴물이 나와도, 실패해서 수사를 제외한 다섯 괴물이 난리를 쳐도 문제.

더구나 이 술법의 발동이 오독존에 의한 것임을 목격하지 않았나.

제탁지검을 버티던 지독한 독기와 괴이하기 이를 데 없던 능력.

조금도 지체할 수 없다.

쉬익.

부신수영을 풀고 그대로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치잉.

언제 뽑았는지 고검의 검명(劍鳴)이 어두운 밤하늘에 차게 울린다.

진법이든 술법이든 깨는 방법은 두 가지뿐이다.

진법이면 진안(陣眼), 술법이면 술점(術點). 이치를 밝혀 축이 되는 약점을 찾아서 깨뜨리는 것이 그 하나요,

또 하나는 오로지 힘에 의지해 펼쳐진 범위 전체를 일거에 부수는 무식한 방법.

전자는 이치를 짐작할 시간과 단서가 있을 때 가능하니,

해원기는 두 번째 방법을 택해야만 했다.

곧장 공중으로 솟구치자 바뀐 지형이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여섯 개의 꼭짓점이 있을 때보다는 작아졌으나 좌우로 평행을 이루는 회랑의 길이는 백 장이 넘고,

가운데의 마름모꼴도 폭이 삼십 장은 될 듯. 더구나 졸아든 연못물이 뜨거운 죽처럼 부글거리며 허연 김까지 뿜는다.

‘안점(眼點)을 모를 때 섣불리 안으로 뛰어들어서는 안 된다. 자궁을 이루는 틀을 깨는 것부터.’

사릉을 품으면서 좌우로 뻗은 사각. 양쪽으로 두 개씩 뻗은 뿔을 동시에 꺾어버리면 평행을 이룬 회랑의 가운데가 뚝 분질러질 터.

신왕검이 환상처럼 흔들리며 해원기의 주위로 열 폭의 병풍이 맴돌았고,

솨아아아, 우르릉.

바람이 땅을 휩쓸면서 우레가 하늘까지 뻗는다.

천손검법의 장생십경이 전신에 깃드는 검왕법신, 신령검역이 사릉과 사각을 전부 뒤덮자마자 해원기가 사지를 힘차게 떨쳤다.

“질!”

단호한 기합.

해원기의 신형이 수레바퀴처럼 돌았다. 마치 탁 소숙의 건곤차륜세(乾坤車輪勢)처럼.

고오오오오.

공간이 금방이라도 뒤집힐 것처럼 전율하고,

네 개의 뿔 위로 거대한 검강이 동시에 내리꽂혔다.

꽝!

축축한 늪지 전체가 흔들리는 엄청난 충격. 과연 네 개의 뿔과 평행을 이룬 회랑이 전부 박살 나고,

마름모꼴이 깨지면서 부글거리던 연못물이 사방으로 흩날리는데.

핏.

마름모꼴 가운데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조그만 그림자. 아래쪽으로 개구리처럼 팔짝팔짝 뛴다. 거대한 검강의 여파가 회오리치는 신령검역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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